내가 북유럽 신화와 관심을 갖게 된 건
2000년대 중반 쯤이었다. 한동안 바그너 음악에 깊이 빠져 있었던지라(그 즈음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심취되어 있었다) 바그너 관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다가 안인희 씨의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라는 책을 발견하게 됐다. 안인희
씨는 이전에『문학 속의 에로스』로 접한 적이 있어서 그녀가 독일어권의 대표 번역가이자 인문학자라는 걸 알고 있던 터라 고민 없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제목이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고 있는데, 한 마디로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의
관계를 탐구한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1) 게르만 신화의 호소력과 보편성과 2) 그 신화적 요소를 장엄하고 비극적으로 그려낸 바그너, 3) 바그너가
구현한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무대를 정치적으로 현실화한 히틀러를 통해 서로의 상관성과 연관관계를 주목하고 분석한 인문서이다. 이 책을 읽고 나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북유럽신화로 옮겨갔고 (게르만신화가 북유럽신화이다.), 그래서 찾아 읽게 됐던 책이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다.
닐 게이먼도 지적하고 있듯이 북유럽(게르만) 신화는 옛 게르만 민족들의 신화로서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비롯해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 등 알프스 산맥 이북 지역에 광범위하게 전해 내려왔다. 구전으로
전승되던 북유럽신화가 문자로 기록된 것은 운문체인 『옛 에다』에 이르러서이고(약 9백여 년 전에 고대 언어로 작성됐다) 그 이후 13세기에 들어 아이슬란드의 시인 스노리 스투를루손이 산문체 『스노리 에다』를 썼다. 따라서 안인희 씨의 저작이건 닐 게이먼의 저작이건 그 밖의 여타 ‘북유럽
신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책들은 모두 이 책들을 주요 출전으로 하고 있다. 안인희가 인문학자이기에 그녀의 저작이 훨씬 학술적이고 치밀하다면,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탁월한 글쟁이인 닐 게이먼이 재구성한 이 책은 신화의 즐거움이랄지 재미에 초점을 맞췄다. 작가의
말에서 닐 게이먼은 이 점을 분명히 밝힌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최대한 정확하고 흥미롭게 재구성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로마를 중심으로 기독교가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면서, 유럽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던 북유럽의 신화들은 세력을 점점 잃다가 마침내 소멸된다. 대부분 구전으로 전승되던 북유럽 신화는 라틴 문자로 기록되어 보급되던 성경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독교의 개종이 주로 지배 계급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북유럽 신화는 이단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사멸되는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완전히 사장되다시피 한 북유럽 신화를 다시 수면 위로 올린 것은 이를
학문적으로 탐구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다시 재조명되고 개작되기 시작한 것이 북유럽 신화다. 그러니깐 북유럽 신화를 한 문장으로 정의내리자면 ‘기독교가 유럽에서
보편화되기 전 노르만 민족에게 전승되어 내려온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다.
닐 게이먼은 북유럽신화의 다양한 내용들을 오딘과 토르, 로키를 중심으로 재구성해서 세상의 시작에서부터 라그나로크, 즉 신들에게
닥친 최후까지를 일관성을 가지고 엮었다. 300쪽 정도의 분량이다 보니 빠진 부분들도 많지만, 핵심적인 내용들은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북유럽 신화의 큰 줄기를 이해하고, 북유럽
신화가 가진 매력이나 재미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확실히 닐 게이먼은 탁월한 이야기꾼이다(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번역은 좀 아쉽다).
최근 들어 유행한 마블의 영화를 통해 북유럽신화를 접했거나, 북유럽신화를 모티브로 한 게임들(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신화에 비해
매우 다채로운 전투와 용맹한 영웅들, 놀라운 무기들에 대한 내용이 많아 상대적으로 매우 호전적이라서
스펙터클이 강조되는 영화나 게임 등의 소재로 즐겨 쓰인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북유럽신화가 궁금해진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그러나 앞에서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에 대해 말하면서 지적했듯이
북유럽신화는 바그너나 히틀러 등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히틀러에게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현재처럼
게임이나 영화 등 엔터테민먼트적 요소만 강조하는 것이 다소 조심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런 측면을 포함하여
북유럽 신화를 좀더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분들이라면, 북유럽신화를 좀더 역사적이고 인문학적으로 접근해보고
싶은 욕구가 있는 독자라면 앞에서 언급한 안인희 씨의 『북유럽 신화』(총 세 권)을 권한다.
닐 게이먼의 『북유럽 신화』는 술술 잘 읽히고 재미있기도 하지만, 신화가 가진 아름다움도 잘 살려냈다. 그건 작가가 소재로서의 ‘신화’를 다루는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데, 닐 게이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북유럽 신화를 다시 정리하면서, 아주
오랜 옛날 이 이야기가 처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그 장소에 내가 있다고 상상해봤다. 긴 겨울밤에
은은한 북극광을 바라보면서 혹은 한여름의 지지 않는 태양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오밤중에 야외에 앉아서, 토르가
어떤 일을 했고 무지개다리는 어떠했으며 그들은 어떤 식으로 살아갔고 엉터리 시는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상상해보았다.
글을 다 쓴 다음에 죽 연결해서 읽어보니, 마치 우주가 시작된 얼음과 불에서 세상에 끝난 불과 얼음까지 이어지는 여행처럼 느껴져서 경이로웠다.
흔히 닐 게이먼의 『북유럽 신화』를 “북유럽 신화의 다양한 판본 가운데 가장 쉽고, 재미있고, 매혹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하는데, 이 평가에 크게 이의를 달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이 재밌기만 했다면 다소 아쉬울 뿐 했는데, 재미와 더불어 아름다움도 겸비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다 읽은
후, 스노리 스툴루손의 『산문 에다』의 다양한 번역본들 중 몇 권을 직접 읽어보고 싶어졌다. (9백여 년 전에 고대 언어로 작성된 『운문 에다』에 실린 시들을 직접 읽을 재주는 없으니, 그것까지 욕심을 내어보진 않는다.) 그러면서 추려낸 이야기들을 엮어서
나도 나만의 북유럽 신화를 만들어보는 거다. 등장인물이나 그들간의 상관관계, 사건에 대한 해석이 미묘하게 다르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말이다. 잠이
안 오는 긴긴 밤에 하나씩, 하나씩 상상력을 가미해서 이야기들을 엮어 보는 것이다. 거미가 거미줄을 만들듯이. 그 거미줄에 맺힌 이슬이 진주처럼 영롱하게
보일 정도로 밤을 꼴딱 새고 새벽을 맺더라도 이야기가 있으므로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잠
못 드는 노년이 오는 것도 두렵지 않게 될 것 같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여름밤에도’ 이 이야기들과 함께라면 외롭지 않을
듯하다. 참고로 말하자면 닐 게이먼은 이 책을 저술하는 동안 루돌프 지메크가 쓰고 엔젤라 홀이 영역한
『북유럽 신화 사전』을 옆에 끼고 살았다는데, 가능하다면 이 사전도 옆에 두고 틈틈이 읽어보고 싶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