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혹시 보셨나요? <돌봄 선언>을 읽어 보니 이 영화가 떠오르더군요.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복지 제도가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모순적인 상황. 과연 이러한 상황을 영화로만, 또는 영국의 상황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나라에도 돌봄 부재 상황이 있었습니다. 서초구 고독사 사건, 용현 화재 사건 등등... 마음이 착잡하기만 합니다. 왜 이런 비극적인 일들이 발생한 걸까요
<돌봄 선언>에서는 이윤과 성장, 국제경쟁을 중요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인해 무관심의 결과 이 상황을 초래하였다고 합니다. 한나 아렌트의 용어를 빌려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무관심이 구조적 수준의 평범함에 젖어 들어 무관심이 지배하는, 즉 돌봄의 부재로 귀결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어요. 그리하여 “한마디로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특히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돌보는 것에 실패했다.”고 평가하고 있어요.
그리고 돌봄의 결여를 바로 잡기 위해 상호의존성을 인지하고 포용하는 보편적 돌봄을 주장합니다. 돌봄이 삶의 모든 수준에서, 가정·친족·공동체·국가·지구 전체 등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되고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어요. 코로나 팬더믹으로 돌봄의 위기가 여실히 드러났는데 돌봄을 중심에 세워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겠어요. 이제는 연대해야 할 때겠죠. 그동안 사회복지사로서 돌봄을 개인적 측면에서 또, 대인 돌봄으로만 생각했는데 <돌봄 선언>으로 거시적인 시각으로 돌봄을 바라볼 수 있었어요. 앞으로는 더 이상 돌봄의 부재 사건 소식이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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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선언(The care Manifesto)-상호의존의 정치학
미증유의 코로나19재난은 그림자처럼 취급돼온 우리 사회의 필수노동자들의 존재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과로로 쓰러진 택배기사, 요양보호사, 코로나와 싸우다 소진돼버린 의사, 간호사 등 돌봄노동자들, 우리 사회의 생명줄을 담당하는 이들이다. 돌봄이란 돌보는이는 물론 돌봄을 받는 이와의 관계다. 이는 공공의 영역이며, 국가와 사회의 책무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확산, 확장 이데올로기 속에 민간서비스 즉, 이익을 위한 사업수단으로 전화, 변했다. 이 책은 이런 현실 상황을 극복해나갈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돌보는 관계들의 초국가적 글로벌 동맹을 제시한다. 세계인이여 일어나라고...
세상에 대한 돌봄은 모든 영역에서 사회인프라와 공유 공간의 재건과 민주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보적 운동과 기관들의 지원과 동맹을 확보하는 것이다(169쪽)
펜데믹은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데 결정적인 필수 기능들을 극적으로 또는 비극적으로 조명했다. 간호사, 의사, 택배기사들과 쓰레기 수거노동자들을 말이다(162쪽).
"돌봄이 이제는 개인적 관심사나 본질적 여성성에 대해 추측하는 도덕주의자들만이 몰두하는 주제가 아니다 돌봄 선언은 친족 구조, 젠더 구분에 따른 노동 분업, 생태적 활동의 변화를 향한 길을 만들고 진보적인 초국가적 기관들을 이끌어갈 상호의존원칙을 확실히 한다," 이 문장은 젠더 퀴어이론가요 철학자인 주디 버틀러의 추천사다. 이 한 문장이 이 책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 책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돌봄의 양면성과 현실과 무관심한 친족들
돌봄 Care는 보살핌, 관심, 걱정, 슬픔, 애통, 곤경을 의미하는 고대 영어 Caru에서 왔다. 단어의 이중적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요구와 취약함을 전적으로 돌본다는 것, 그래서 생명의 연약함과 직면하는 것이 어렵고 지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다(57쪽).
이런 돌봄은 인류공동체 속에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하나의 전통이자 통과의례였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 보면, 이 돌봄의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양면성과 현실의 어려운 짊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었다. 공동체 틀 안에서는 복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고통을 분담했기에 다소 숨 쉴 여유라도 있었지만, 1인 가구, 핵가족 원자화된 사회에서 돌봄이란 여성들에게 아주 버거운 일이 됐다. 긍, 부정적인 감정 모두가 돌봄 실천과 돌봄 역량에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있다. 이는 가까이 있는 사람이든 멀리 있는 사람이든 우리가 다른 이를 돌보는 것을 가능케 하는 인프라를 제공하고 확보해야 하는 어려움 그것이다. 생존의 압박에 맞닥뜨린 부모와 또 다른 돌봄의무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 외부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기는커녕 그들이 돌봄에 의존하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하는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친족 단위에서 전 지구적 수준에 이르기까지말이다. 돌봄에 공공예산이 쓰여야 하는 이유다. 돌봄 관계로 엮여있는 부정적인 정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60쪽)
무늬뿐인 돌봄, 무관심한 국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상적인 시민이란 자율적이고 기업가적이며 실패를 모르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이렇게 정의된다). 그리고 이들의 승승장구는 복지국가의 해체, 민주적 제도와 시민참여의 와해를 정당화한다. "돌봄"이 개인에게 달린 문제라는 생각은 우리의 상호취약성과 상호연결성을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30쪽)
보편적인 돌봄
이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모든 돌봄이 우리의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친족,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 되는 것을 의미한다(41쪽).
돌보는 정치와 친족, 공동체 그리고 국가
누군가를 신체적으로 직접 돌보는 대인돌봄, 누군가의 안위를 염려하며 마음을 쓰는 정신적 돌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이념과 활동에 참여하는 정치적 돌봄(조앤 트론토의 구분), 돌보는 정치는 이런 과정에 더해 넓은 의미에서 페미니즘, 퀴어, 반인종차별주의, 상태사회주의 관점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48쪽). 돌보는 친족과 돌보는 공동체를 어떻게 재생, 구성할 것인가 하는 점을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돌봄에서 친족의 개념을 최대한 확장하는 것은 전장에서 군의관이 돌봄의 의무를 부상당한 적군에게까지 확장하는 것과 같다(77쪽).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이어서 돌봄 공동체는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할 것인가,
우리는 돌보는 공동체를 조성하는 데 네가지 특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상호지원, 공공 공간,공유자원과 지역민주주의다(90쪽). 이들을 어떻게 확장해야 할 것인가, 돌보는 공동체는 민주적 공동체다, 그 예를 참조(104쪽)하라.
이 책은 돌보는 공동체를 이렇게 정의한다. 공동체는 사람들의 시간이 남는 시간을 신자유의자 만들어낸 돌봄의 공백을 메우는데 사용하는 것을 절대 의미하지 않는다(110쪽). 사람들의 돌봄 역령을 확장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끝내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기업의 횡포에 종지부를 찍고 협동조합을 만들고 아웃소싱을 인소싱으로 대체하는 지방자치 돌봄의 유형들을 포함한다(111쪽).
돌보는 국가는 돌봄이 집안일, 그리고 여성의 일이라고 여기는 전통 성별 분업의 개념을 넘어서게 한다. 돌봐야 하는 필요, 또 돌봄을 받아야 할 필요는 모든 이가 공유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122쪽).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세상은 성차별적, 인종차별적착취를 허용하는 오래된 국가적 가부장주의를 없앤다. 또한 뿌리 깊은, 그리고 최근 사람들의 이동을 위해 국가의 경계를 느슨하게 함에 따라 더 극성인 종족민주주의에 맞서고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심화한다. 초국가적 글로벌 동맹으로 돌봄에 나설 것은 선언하고 있다.
이 책은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책이다. 당위성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형해화돼가는 인간성 회복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면서도 과연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할 수도 있어서다. 하지만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 사회의 돌봄은 하잖은 일이 아니며,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서 지역사회가 국가가 세계적 규모에서 뭔가 틀을 다시 짜야 할 때가 왔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그 울림이 더 클 수 밖에 없을 듯하다. 필수노동자들은 기준 외다. 적어도 승승장구하는 우리 사회의 메이저들로부터는...
YES24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돌봄선언을 읽다. 부재는 '상호의존의 정치학' 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도래하면서 개인의문제로 치부되어 왔던 돌봄의 사회성이 급 표면위로 떠올랐다. 누구나 나이 들고, 늙고, 힘이 없어지고, 약해지고, 병든다. 가족주의, 시장에 온전히 기댄 돌봄은 소수 상위 몇퍼센트에게만 보장된다. 과연 해답은 없을까?
돌봄은 주로 여성의 일로써 또한 낮은 임금이 당연한 일로써 여겨져 왔다. 하지만 돌봄에 무임승차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돌봄 노동자들은 코로나의 위험 속에서도 어떠한 방어막 없이 무방비로 놓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 더우기 빈번한 착취, 노출된 성폭력의 위험, 낮은 임금과 그에 못지않은 낮은 사회적 지위까지 더해져 방치되어 온게 사실이다. 돌봄이 보편적으로 확장되고 사회적인 인식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매우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느껴진다.
돌봄의 좀 더 나은 사회와 세상의 기본이 되려면, 우리는 현재 돌봄의 위계를 급진적 평등주의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79p
저자는 돌보는 공동체 조성을 이야기하며 네 가지 특성을 들었다. 상호지원, 공공 공간, 공유 자원과 지역민주주의. 돌보는 공동체는 복지의 민영화나 아웃소싱이 아닌 지역 내부에서의 확대와 인소싱을 통한 공공부문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탈시장화와 탈물신화 이다. 올바른 방향은 협동조합이다. 바로 돌보는 공동체는 민주적 공동체이다.
돌봄선언은 '보편적 돌봄' 이라는 퀴어-페미니즘-반인종차별주의-생태사회주의의 정치적 비전을 제안한다. 보편적 돌봄은 직접적인 돌봄 노동뿐만 아니라 타인들과 지구의번영에 대해 관여하고 염려하며 공동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177~178
돌봄이란 주제에 생태와 반인종차별주의까지 나오는 걸 보니...보통의 문제는 아닌 듯이 보인다. 확장되는 의미를 어떻게 보편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교육의 문제인가, 각자 개인의 역량의 차이일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는 돌보는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돌볼 수 있고, 누군가의 돌봄에 의해 성장하고 살아왔다는 점이다. 한걸음씩 차근하근 풀어가고 싶다. 돌봄에 대한 많은 연구와 세미나가 열려서 대중들이 관심 갖게 되길. 나도 자그마한 역할을 맡을 수 있기를 바라며 리뷰로써 첫걸음 을 떼었다. 앞으로도 돌봄에 관련한 다양한 책들을 읽고, 리뷰를 써볼 생각이다. 설레고 기대된다. 함께하는 돌봄 - 말만 들어도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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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자유경제가 가져온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무리 모두가 함게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 합니다. 2017년 런던에서 학술 모임으로 시작한 단체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돌봄care'이 마주한 다면적이고 심각한 위기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된 <더 케어 컬렉티브 The Care Collective>에서 펴낸 <돌봄선언 THE CARE MANIFESTO>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펴냄)은 돌봄이 삶의 모든 수준에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되고 중심에 놓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오랬동안 서로를, 특히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돌보는 것에 실패했다고 인정하면서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펜더믹으로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난 후에야 견고한 돌봄 체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꺠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돌봄의 위기는 지난 40년 동안 특히 심각해졌는데, 이는 많은 나라가 수익 창출을 삶의 핵심 원리로 보편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원칙을 받아들여면서라는 것이다. 이는 곧 금융자본의 이익과 흐름을 조직적으로 우선시하는 반면 복지북가와 민주적 절차와 제도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번 펜더믹은 우리 대부분이 제대로 돌봄을 제공하지 못하고 또 받지도 못하는 결과를 낳은 신자유주의 시장에 의해 자행된 폭력을 극적으로 드러냈음을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성장 정책이 너무 많은 나라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면서 본질적으로 돌봄이 없는 경제성장 중심의 정책 실행이 국민의 안녕을 보장하는 것보다 우선시 되었다는 점은 우리 사회 또한 다르지 않음을 인정ㅎ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넘어 보편적 복지정책은 많은 논란을 낳고 특히 이번 펜더믹으로 인한 많은 정책들에 대한 비판은 끓임없이 이어지고 있지 않을가?
이와 같은 사회현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 책에서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모든 돌봄이 우리의 가정에서 뿐 아니라 친족에서부터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보편적 돌봄'을 제시한다. 돌봄은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하며, 비생산적인 일로도 여성의 일로도 치부되어서는 안 되고, 임금노동 영역에서 가난하거나 이민자이거나 유색인종 여성들의 일로 떠맡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사회 전체가 돌봄의 보람과 짐을 함게 나누자고 강조하고 있다.
먼저 이 책에서는 돌봄의 정책측면에서 저임금 돌봄노동, 여성의 희생적인 가사노동 등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 비판한다. 아울러 '돌봄'이라는 개념자체가 역설과 양면성을 담고 있다고 한다. 가령, 어머니가 아이를 기른다거나 간호사가 환자를 돌본다거나 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면, 살아 있는 생명체의 요구와 취약함을 전적으로 돌본다는 것은 어렵고 지칠 뿐 아니라 혐오스럽고 더러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염려는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변하기 쉽고, 종종 개인적 만족감이나 이넝 욕구 등의 정서적 상태와 부딪치거나 죄책감이나 수치심 같은 감정과 얽히기도 하고 이러한 양면성을 전제로 돌봄은 평등하게 배분되고 목표는 사회 전체가 돌봄의 보람과 짐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돌봄이 필요와 지속가능성에 따라 공평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난잡한 돌봄의 윤리라고 부른다. (중략) 난잡한 돌봄은 가별거나 진정성 없는 돌봄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볍고 진정성 없이 거리를 두고 행하는 돌봄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돌봄이며 그 결과는 끔찍하다.
난잡함이란 더 많은 돌봄을 실천하고 또 현재 기준에서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난잡하다'는 것은 또 '차별하지 않는'것을 의미하고, 우리는 돌보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 본문 중에서 -
이 책에서는 돌보는 공동체를 조성하는 데 네 가지 핵심 특성을 들고 있다. 첫째 공동체는 이웃에서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하는 동안 생겨난 상호원조단체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상호지원을 통해 돌봄을 주고받는 구성원들에 기반을 둔다는 것, 둘째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공재로 유지되고 개인의 이익에 따라 유용되지 않는 공간, 즉 공공 공간이 필요한다는 것, 셋째 돌보는 공동체는 자원이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것을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돌보는 공동체는 지역에 걸맞는 활동과 통치를 진보적인 지방자치와 협동조합을 통해 확장해야 하고 돌봄과 복지 활동의 민영화를 수반하는 아웃소싱이 아니라 지역 내부에서의 화대와 '인소싱'을 통해 공공 부문을 재건해야하는 것과 같이 민주적이라는 것이다.
돌보는 국가측면에서는 돌봄 인프라 또 임금노동 시간의 단축으로 가족내에서나 다른 돌봄이 필요한 환경에서 돌봄 역량을 확장할 수 있도록 시간과 자원을 허용한다는 점이다. 가장 좋은 직점적인 대인 돌봄은 서두르지 않고 관계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동봄을 받는 사람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주체적 능력과 웰빙을 계발하는 데 최대한 사용할 수 있도록 고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경제적인 측면에서 시장화 민영화로 치우쳐 있던 것들이 보건의료, 교육, 주택 같은 분야에서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제 돌봄의 문화는 보편적인 형태로 확장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 초국가적인 차원 즉 세계적인 영역에서 함께 공유되고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삶이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고 근본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함께 실천하는 것 만이 점점 심해지는 불평등과 같은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임을 모두 공유했으면 합니다. 한 개인이나 가족에게 짐을 지우는 것은 그 피혜가 너무 크다는 점에서 이제는 사회 모두가 함께 극복해야 할 분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지굼 우리 주변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복지문제는 더 큰 사회구조에서 살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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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선언
-새로운 패러다임
책은 여러 명의 저자가 공동집필한 책이다. 그런 까닭에 책 속에는 개인을 지칭하는 ‘나는’이라는 표현이 아닌 ‘우리’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이들은 2017년부터 더 케어 컬렉티브라는 조직으로 함께 했다고 한다.(p192) 이번 책은 이들이 함께 돌봄이라는 주제 안에서 전인류가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측면의 문제의식들을 연구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 결과물로 이번 책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책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을 적으려고했는데 그보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어 잠시 숨을 고른다. 책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적어가는 글은 오로지 개인의 주관적인 사견에 의한 것임을 먼저 밝혀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적어도 이번 책에 대해서는 이 부분을 다시한번 적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사유에는 다소의 주관적 편견이 포함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을 향한 배타적 편견이 아닌 나를 향한 개선의 여지가 필요한 편견이어야 할 것이다.
책은 어렵다. 돌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책치고는 무척 어렵다. 그도 그럴것이 이 책은 오로지 돌봄과 돌봄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만 언급하지 않는다. 책은 돌봄에 관련된 다양한 측면에(사회 경제 및 정치와 소외된 계급포함) 대해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그것이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메리트였는지도 모른다.
책의 전체 내용 중 가장 앞부분에 실린 부분은 이들이 함께 생각을 모아 제창한 ‘서문’이었다. 서문은 전체 책 분량의 대략 1/5가량의 분량을 차지한다. 개인적으로 서문에 대한 느낌은 다소 격양된 분위기와 자극적이며 저돌적이다? 라는 몇 개의 단어적 표현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실제로 책 속에는 부유한 자와 소외된 자(이는 마치 사회주의 계급투쟁에서 유산자와 무산자와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비교를 각인시키는 듯한 표현인 듯했다) 불공정, 불평등, 착취와 폄훼와 같은 표현들이 자주 반복되고 있다.
특히나 착취와 폄훼라는 표현의 잦은 반복이 내게 더 많은 생각을 안겨다 주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서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혁명’이 생각났던 까닭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더욱이 책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우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근저에 깔려 있음을 생각하게 되는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한다. (좌파적 입장에서의 돌봄 정치에 더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딴은 읽는 이의 명징하고 객관적인 사유의 과정이 개입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 신자유주의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 기록을 찾아보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출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쉽지는 않아보인다. 이 글은 아마도 여러번 수정을 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지 않을까 싶은 이유가 바로 이 안에 있다.
어쨌든 책의 서문은 그렇게 날선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뒷부분에 등장하는 내용은 조금은 유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 아니 이들 단체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돌봄의 개념을 개인 혹인 가족 친족과 같은 한계성을 가진 범위로 한정 짓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개념에서 나온 불합리한 개념이고, 이는 퇴출되어야 마땅한 잘못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적 혹은 개인적 돌봄이 의미하는 범주를 확장 시켜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즉 돌봄을 제공하는 이와, 제공받는 이들의 관계는 반드시 수평적이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관계와 과정을 평가절하하지 않아야 할 것, 돌봄의 관계를 금전적인 노동의 금전적 대가로만 판단하는 시장경제 및 신자유주의 개념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새로운 돌봄의 페러다임을 위해 지역공동체와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물론 이 부분에서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입장도 포함되어 있다.
지역공동체와 국가의 돌봄과 관련해서는 서문과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내용으로 ‘난잡한 돌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퀴어와 관련된 의미에서 출발한 이 난잡한 돌봄의 의미는 한 곳에 국한된 돌봄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안전을 확보하면서 케어 가능한 돌봄의 의미로 재해석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여전히 그들이 주장하는 난잡함의 돌봄 개념은 표현 자체만으로 무리수로 다가오기도 하는 부분이다.
---“난잡함이란 더 많은 돌봄을 실천하고 또 현재 기준에서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난잡하다’는 것은 또 ‘차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는 돌봄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p82
각설하고 책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많은 이들의 이론들과 사상 및 각국의 실례를 증거로 싣고 있어 독자들에게 객관적 혹은 일정부분 주관적인 가치판단을 유도한다. 노동의 대가 수단만으로 삼지 않으며 경제적 우위만을 따지지 않은 방법으로 접근해야, 이들이 주장하는 ‘신 유토피아적’ 돌봄 시스템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돌봄의 범주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정치에 한하지 않고 더 나아가 동물과 대자연을 품은 지구환경에 이르기까지 확장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나름 설득력 있어보인다. 이들이 꿈꾸고 주창하는 ‘돌봄의 확장개념’은 말그대로 무한대로 넓으며 그 한계가 없어보인다.
책의 내용과 성격을 잘 대변해줄 것 같은 몇 개의 문장을 함께 싣는다.
“돌봄의 위기는 지난 40년 동안 특히 심각해졌는데, 이는 많은 나라가 수익 창출을 삶의 핵심 원리로 보편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원칙을 받아들이면서다.…(이하생략)” -p13
“보편적 돌봄이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돌봄이 우리의 가정에서뿐 아니라 친족에서부터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p41
“돌보는 경제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또 시장 확장에 대한 신자유주의 의제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경제를 오로지 시장현상 하나로 축소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과도 반대된다”-p135
“…… (앞부분 생략)‘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지 않는 심장’을 생각해야 한다. 즉 우리는 돌봄과 연민의 힘이 시장화된 개인의 이기심보다 항상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보편적 돌봄 모델은 이러한 경제적 모순의 해소를 향한 가장 중요한 단계다.”-p143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전체적으로 번역물이기 때문에 매끄럽지 못한 번역투의 긴 문장들이 눈에 자주 띈다. 잘못된 문장도 있었다.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는 새삼 돌봄과 사회 정치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끌어낼 수 있는 책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