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책을 우울증을 경험해본적 없는 많은 분들에게 꼭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립니다.
나는 5년차 우울증 환자다. 내가 처음 정신과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사회적으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약점을 숨겨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말과 달리, 나는 내 병력이나 약점을 공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다행히 아직까지는 이런 '약점들'로 인해 편견이나 차별을 경험한 기억이 매우 드물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들이 우울증을 이유로 상처주는 사람이 없다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스럽게도) 나는 나를 아껴주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우울증'이라는 이유로 감정적 상처를 받은 바 있다.
물론 그들이 고의적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일상적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 우울증 환자에게는 '의도치 않게' 큰 타격이 되는 것이다. 그럼 그걸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내가 나쁜 걸까? 훌훌 털어내고 일어나지 못하는 내가 게으르고, 그들의 '조언'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내가 고집불통인 걸까?
안타깝게도,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우울증 환자들에게 '네가 잘못된게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건 '우울'이라는 감정이 모든 현대인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감정이고, 그것은 '우울증 = 우울한 상태'라는 너무나 단편적인 공식으로 귀결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 느끼는 '우울'에 왜 저들만 유난을 떠는지, 실제로 이 질병을 경험하고 각종 병증들의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아이러니에 고통받아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족이니까, 가족이라서...
그리고 많은 경우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겨주는 것은 '가족'이다. 물론 가족이라는 단어가 갖는 환상과 달리, 대부분의 가정이 화목과는 거리가 먼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직접' 선택하지 않은 인간관계, 하지만 혈육이라는 이유로 누구보다 소중한 관계라고 세뇌받아온 관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이란 잠깐 만난 사이라도 내가 아는 사람에게 (이왕이면) 좋은 일이 있길 바란다. 그렇기에 아무리 콩가루 날리는 집안이라도, 결국은 혈육에게로 마음이 쏠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특히 가족에 대해서' 많은 경우, '그들도 결국 타인이고, 타인이란 나와 같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그렇게 너무나 간단하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모두가 피해자이지만 누구도 가해자는 아닌 그런 '폭력'
사람이 아프다고 하니 본능적으로 도우려는 생각이 드는데 우울증 환자는 외관상 다친 곳도 없고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니 심리적인 개선으로 나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최의종, 소중한 사람을 위해 우울증을 공부합니다 08. 우울증 환자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 中
당신은 발목 골절 환자에게 마라톤 완주를 못한다고 질책하시나요?
이 책의 저자도 언급했지만, 나는 '마음의 감기'라는 단어를 증오한다. 아마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들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처음 우울증에 '마음의 감기'라는 단어를 붙인 사람은, 그만큼 이 병이 흔하고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이 단어는 '우울증'이란 '아주 가볍고 쉽게 치료되는 병'으로 오해받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마음의 감기'는 우울증 환자를 더 절망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저자가 우울증을 '마음의 암', '자살병'이라고 비유했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우울증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우울증은 감기가 아니라 마음의 암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설명이 우울증이라는 병의 특성에도 아주 걸맞는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울증은 "우울한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암은 우리 몸의 세포가 변이를 일으켜, 주변 세포들을 하나씩 암세포로 만들어가는 병이다. 암세포가 된 세포는 더이상 정상적인 세포로 기능하지 못하고 우리 몸에 악영향을 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울증의 작용기전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 중 하나가 변이를 일으키고, 그렇게 발생한 변이감정이 주변 감정들을 하나씩 망가트린다. 그 결과 우울증 환자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도달하고 만다.
이 부분은 우울증을 패션으로 사용하는 패션우울러들에게도 확실히 말해주고 싶은데, 실제로 우울증 척도 검사를 하면 '우울증' 환자는 모든 감정에 대해서 '중립'에 점수를 주는 양상을 보인다. (절대로 '우울'이라는 감정이 두드러지게 다른 감정에 비해 높은 점수를 받지 않고, 반대로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두드러지게 낮은 점수를 받지 않는다) 이런 지점에서 나는 '우울증'이라는 병명 자체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규칙적인 생활', '꾸준한 운동'. 그것이 우울증의 치료에 좋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우리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웃픈 현실이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우울증'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는다면 나도 결국은 '운동'이라는 답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증 환자가 운동을 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자 한다.
앞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우울증은 우울한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병원에서는 우울한 감정이 2주 이상 지속되는 경우에 우울증 진단을 내린다. 하지만 실제 환자는 이 '우울 삽화'기간에 '우울'이라는 단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다이나믹한 심리적 신체적 변화를 경험한다. 가장 먼저 따라오는 감정은 '불안'이다. 단순히 큰 발표를 앞두고 떨리는 수준이 아니라, 아무런 이유가 없이 죽을만큼 불안하기 때문에 이것은 병증이다.
그리고 내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무기력이 동반된다. 무기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혹자는, 누구나 아침에는 일어나기 힘들고 몸이 무거운거 아닌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다. 뭐, 저렇게 쏘아붙이면 이해시킬 방법도 없다. 정확한 의학용어로는 '납마비'라고 한다. 단어에서 그 차이가 느껴지는가. 쇳덩어리에 온 몸이 짓눌려 아무리 애를 써도 꼼짝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억울하게도) 지금 이 순간 가장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서 일상생활을 하고 싶은건 '바로 나!!'인데,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나도 진짜 울고 싶을 만큼 미쳐 돌아버리겠다'고. 그런데 여기다가 '힘내', '나가서 운동도 하고', '누워만 있으니까 더 힘이 빠지지' 같은 말을 하면 그야 말로 얼탱이가 없는게 누구일까.
'마음의 암'이라는 단어만큼이나 내가 우울증에 비유하기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마음의 골절'이라는 단어이다. 여기 평생을 마라톤에 바쳐온 마라토너가 있다. 그리고 오늘은 마라토너라면 누구나 중요하게 생각할 대회날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마라토너는 바로 어제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의 뼈가 완전히 박살이 나는 치명적인 골절을 겪었다. 당신은 이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줄 것인가?
적어도 당신이 심신건강한 사람이라면 마라토너에게 '힘내.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어떻게 해. 나가서 조금이라도 달려야지'라는 미친 소리는 하지 않겠지. 그런데 왜 우울증 환자에게는 그런 '응원의 탈을 쓴 폭력'이 너무 당연하게 이뤄지는가 말이다.
주관적이고 형태가 없어서, 그리고 의사도 결국 '장사꾼'이라서...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이런만큼, 역시 평범한 사회인1이었던 우울증 환자 역시 자신의 상태에 대해 가장 많은 의심과 질책을 한다. (많은 경우 자해행위는 이 자책의 결과물이다.) 사진이나 수치 등으로 진단되는 일반적인 병들과 달리, 정신병은 철저하게 환자의 진술과 의사의 판단으로 진단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같은 사람이 같은 날 10군데의 병원을 방문했을 때, 10가지의 다른 진단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정신병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불안하고, 더 예민한 상태인 환자에게 이 사실은 더욱 큰 의심과 불안, 혼란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외부에서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환자도 자신을 질책하고 의심하는 과정을 장기적으로 거친다. 당신이 아무런 말도 하기 전부터 이미 환자들은 스스로의 감정을 너덜너덜할만큼 베고 찌르는 과정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진료 중에 의사가 아내가 먹지도 않은 약을 지금 먹고 있지 않냐고 묻는 일이 있었는데 그 후로도 여러 번 비슷한 일이 반복돼 과연 진료가 정확한지도 의문이었습니다. 혹시나 하며 병원을 바꿔봤는데, 어떤 의사는 환자가 의지박약이라며 쓴소리만 해댔고, 또 다른 의사는 우울증보다는 조울증 같다며 새로운 진단을 하는 등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의종, 소중한 사람을 위해 우울증을 공부합니다 02. 병원을 다녀도 치료가 되지 않는다 中
진료 때 약을 좀 더 천처히 줄이거나 아니면 한 가지씩 줄이는 게 어떨까 이야기해봤지만 의사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환자분도 약을 빨리 끊는 게 좋으시잖아요. 평생 병원 다니면 돈도 돈이고...(중략)"
상태를 봐서 약을 조절하는 게 아니라 빨리 약을 끊어 완치 판정을 내리는 게 먼저인 뉘앙스여서 의외였습니다.
(중략)
약을 끊고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아내 두통이 다시 심해졌는데 얼마 안 가 감정 기복이 커지고 컨디션이 큰 폭으로 오락가락했습니다. 추가로 금단증상 같은 것이 나타났는데 오한을 느끼면서 땀이 나고 손이 떨리는 증상이 심해서 겁이 덜컥 났습니다. 바로 병원에 갔는데 의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많이들 재발해요. 약 먹으면 좋아질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중략)
완치 판정까지 받았던 아내인데 너무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니 정신이 없었습니다. 의사에게 물어보니 원래 재발되면 전보다 우울증이 심하게 온다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위험을 알고 있었다면 왜 단약을 권했을까 원망스러웠지만...
-최의종, 소중한 사람을 위해 우울증을 공부합니다 09. 완치 후 재발로 인한 패닉 中
여기에 더해, 사실 좋은 의료진을 만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라는 것이 정신질환 환자들에겐 고통으로 다가온다. 차라리 눈 한번 안 마주치고 차트만 보면서 기계적으로 답하는 의사를 만나는게 다행으로 느껴질 정도로 '정신과의사'인데도 불구하고 우울증 환자에게 몰상식한 말들을 쏟아내는 의사가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이다.
나 역시 최근 이와 관련하여 병원에 대해 크게 신뢰를 잃는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라면 한번쯤 '장기 복용하면 좋지 않으니 정말 필요할 때만 먹으라'고 주의를 받았다고 답하는 약들이 몇 가지 있다. 처음부터 만성 우울즐으로 진단을 받았던 나는 첫 진단부터 해당 약물을 처방받았다. 그리고 몇 차례 병원을 바꾸며 5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단 한번의 주의사항'도 들은 적이 없으며 꾸준히 그 약을 5년간 상시복용해왔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한 부작용이나 신체적 부담을 느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의사분들이 어련히 위험하지 않을 수준으로 처방을 했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바꾼 병원을 약 2년 정도 다닌 현재, 나는 갑자기 담당의로부터 '치료저항성 우울증'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 의사쌤은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으로 가서 좀더 정밀한 검사를 받아볼 것을 권해주셨다. 집에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럼 내가 가장 오랜 기간 다녔고, 심지어는 내 병에 대해서도, 병원이나 약물, 의사에 대해서도 '가장 많은 의심을 제기'했던 '그 병원의 의사'는 '단 한번도 약물의 종류를 바꾸는 것에 대한 제안'을 하지도 않고 매번 내 의문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이 제대로 진단했고 많이 나아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었던 걸까. 새삼 사기꾼을 하셔도 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어버렸다.
버티다 안될 것 같으면 아내를 차에 태워 응급실로 갔는데 응급실 신세를 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응급실은 기본적으로 외상이 심한 환자를 우선으로 하는 곳이라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아내는 왜 왔냐는 식으로 거절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아무리 자살 충동이 심해서 견디기 힘들어도 실제 자살시도를 하기 전까지는 중환자가 아니었습니다. 응급이 아닌 환자는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기본 대응 방침이니 제 발로 돌아가지 않으면 내보낼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옆에서 울고 있는 아내하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처참한 심경이었습니다. 한번은 보호자가 없으면 모를까 보호자도 있는데 왜 응급실에 왔냐는 말을 듣고 사람이 죽어서 와야 응급실에 들여보내 주는 거냐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아내가 급하니까 참으면서 베드 하나라도 내달라고 빈 적도 있습니다.
-최의종, 소중한 사람을 위해 우울증을 공부합니다 09. 완치 후 재발로 인한 패닉 中
참 씁쓸하게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의사'와 같이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직업조차도 '돈'이 우선되고 있는 것이다. (뭐, 의료 종사자 시위가 매일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더 할말도 없다...ㅎ) 의사의 진료도 처방된 약물도 결국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것이다. 약을 먹고 환자가 완치가 되면 더이상 약을 판매할 수 없다. 과연 그들이 완치가 될 수 있는 약을 제조할까?
이런 다양한 지점들에서 나는 이 책의 저자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고, 환자인 아내분 역시 부럽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피를 나눈 가족조차도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배려해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좋아 못살아 결혼까지 했지만, 이제는 이혼이라는 단어도 더이상 흔하지 않아진 현실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어쩌면 환자보다도 더 우울증 환자가 경험하는 신체적 정신적 변화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대처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쏟았다.
나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서 가장 애써줄 수 있는 것은 '절대로 타인인 의사가 될 수 없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나'겠지만, '나'가 그 역할을 할 수 없는 우울증 환자에게는 '나'를 가장 사랑해 줄 수 있는 가족, 배우자만큼 좋은 의료진이 없는 것이다. 사소한 변화를 눈치채고, 환자가 오직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해줄 수 있다는 것, 객관적인 지표가 없는 우울증에서는 더욱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담긴 시간들이야 말로 진정한 '로맨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말로서 선물로서 다정한 말이나 포근한 포옹으로 표현하는 것, 좋은 날 좋은 곳에서 멋진 이벤트를 해주는 것. 물론 그런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로맨스 작품들보다도 이 책의 저자가 보낸 7년의 시간이 가장 달콤하고, 누구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로맨스' 그 자체였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단순한 수기도 일기도, 에세이도, 후기도 아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말들로 젠채하는 전문서적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전국민 교과서로 지정해두고 모두가 한번씩 정독하길 권하고 싶을 정도로 어떤 한 무리에 대한 다정하면서도 완벽한 이해와 지식이 담겨있다. 지금 우울증을 경험하고 있는 환자분들 보다는 '주변에 우울증 환자가 있거나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없는 비환자분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이 책 한 권을 읽는 정도의 짧은 시간만으로 어쩌면 당신의 애정어린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벼랑끝으로 한 걸음 다가가고 있을지 모를 그 사람의 마지막 구명줄을 다시 잡아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같은 말이라도 미성년자와 성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이 달라지 듯, 딱 그만큼의 이해만 더해진다면 세상은 훨씬 따뜻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던져 우울증을 이해해주신, 그 순간들을 되짚어보는 시간들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지만 또 다른 꺼져가는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이 시간을 고스란히 책으로 남겨주신 최의종 작가님과 이 책을 위해 힘써주신 많은 라디오북 관계자분들, 그리고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펀딩에 참여해주셨던 많은 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