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표유진 작가의 새로운 책이 3년만에 나온다기에 과연 어떤 책일까 애타게 궁금하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이의 어휘력'도 아닌 '아이의 문해력'도 아닌 '엄마의 어휘력'이라니. 역시 기대를 단숨에 뛰어넘어 버린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찾던 진정한 육아서다! 아이의 마음을 채우고 아이의 머리를 키우는 가장 중요한 힘은 책탑도 독후활동도 아닌, 바로 '엄마의 말’ 아니던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의 입에서 매일 매순간 흘러나오는 살아있는 이야기와 표현이야말로 아이를 꿈꾸게 하고 건강하게 자라게 하는 것이다. 그 본질을 저자는 꿰뚫고 있고, 자신의 아들과 나누었던 일상적이고도 매우 특별한 대화를 우리에게 들려줌으로써 그 가치를 일깨워준다.
모든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세심히 살피고 아이의 작은 관심사까지 알아차린다. 엄마들은 이미 자신만의 훌륭한 언어로 아이와 소통하고 교감하고 있다. 그렇게 이미 완전하고 훌륭한 엄마들에게 이 책을 건네고 싶다. 새로운 말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전보다 더 풍요로운 말의 세계를 아이에게 열어주게 될 것이다. 뻔한 어른의 말이 아닌 아이가 진짜 ‘듣고 싶은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내 안의 아이를 깨워 자녀와 함께 정신적 체험을 공유하게 될 것이고, 평범한 하루를 마법처럼 신기하고 풍요롭게 만들게 될 것이다. 엄마의 어휘력으로 인하여 아이는 언어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그 작고 어여쁜 입으로 매일 새롭고 놀라운 이야기를 쏟아 낼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엄마의 어휘력’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아! 꽃구름이 활짝 폈다!”라고 하는 것. 아이가 차려준 밥상에 “와, 오늘은 비 오는 날 비자림 맛 수프네요. 비에 먼지가 모두 씻겨 아주 상쾌했었는데 그때 숲 향기가 떠올라요.” 하고 평해주는 것. 엄마는 어디로 여행가고 싶냐는 아이의 간단한 질문에도 “엄마는 구름바다 가고 싶어. 수영도 하고 구름도 먹어 볼거야. 바다 맛처럼 짜려나?” 답해 주는 것. 이렇게 곱고 풍부한 언어로 색과 맛, 그리고 장소를 표현하는 엄마를 보며 아이는 상상이 자란다. 아이는 '딸기우유 색, 솜사탕 색, 홍시색, 연연연연연하양색’과 같은 자기만의 색 이름을 만들어 내고 '꽃비 내리는 맛, 이끼의 푹신푹신한 맛, 오름 위 바람 맛, 솜사탕 구름 맛’과 같은 맛 표현을 만들어 낸다. 엄마와 대화하는 동안 아이는 끊임없이 추억 여행을 하고,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고, 즐거운 상상을 하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눈과 마음에 담는다.
아이가 ‘듣고 싶은 말’이란 어떤 걸 말하는 걸까? 나는 저자가 아이의 두려움을 대하는 방법에서 힌트를 얻었다. 애착인형과 헤어지는 것이 걱정인 아이에게 엄마는 그런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은 누구나 이별을 겪지만 사랑했던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 약국'에 빗대어 이야기해준다.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자리하는 마음 약국에서는 무엇이든 다시 찾을 수 있다고. 기분 좋은 것, 매우 소중한 것, 정말정말 사랑하는 것들이 마음 약국 안에 기억되어 있어서,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필요할때 꺼내 볼 수 있다고.
친구들과의 관계가 걱정인 아이에게 엄마는 주머니 속 구슬에 비유한다. 주머니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을 넣어두면 아무도 그 유리구슬이 얼마나 빛나는지 알 수 없다고. 사람들도 누구나 자기만의 빛나는 마음 보석을 갖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 아들, 마음 주머니가 아직 꽁꽁 묶여 있나 보네. 서두르지 않아도 돼. 하고 싶을 때, 준비가 되면 마음 주머니에 있는 특별한 것들을 친구들한테 하나하나 꺼내서 보여주자. 엄마는 네가 얼마나 멋진지, 얼마나 빛나는지 친구들이 알았으면 좋겠는데.”
밤이 무서운 아이에게 엄마는 밤에 아이들을 지켜주기 위해 하늘에 떠 있는 별 삼총사 이야기를 해준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괴물이 나타나면 위험을 감지하는 붙박이별, 괴물을 단번에 물리치는 늑대별, 그래도 괴물이 도망가지 않으면 괴물을 잡으러 출동하는 별똥별까지. “근데 별이 안 보이는 날엔 어떻게 해?” 아이가 묻자 엄마는 말한다. “그래도 걱정 마. 엄마가 있잖아. 엄마가 꼭 안아 주고, 지켜 줄 거야.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힘세!”
이런 말들이 아닐까? 아이가 진짜로 듣고 싶은 이야기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행복했던 기억에 관한 이야기, 누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우리는 모두 언제나 빛나고 있다는 가치에 관한 이야기, 티라노사우르스도 괴물도 전부 이기는 (실제로 만나지 않을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가장 강한 엄마가 항상 옆에 있다는 이야기.
<엄마의 어휘력>을 읽으며 내가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건, 저자가 아이와 함께 했던 간단하지만 매우 특별한 놀이들이다. 새로운 표현을 찾아내는 말 놀이도 있고, 편견없이 세상을 보게하는 관찰 놀이도 있고, 오로지 함께 웃는 것만이 목적인 그저 웃긴 놀이도 있다. 책의 곳곳에 이런 놀이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하나 하나가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건강한 세계관을 심어주고, 엄마의 사랑이 듬뿍 담겨있어 내게 놀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 주었다. 그 중 탐정놀이와 실 짝꿍 놀이 이 두가지를 소개한다.
탐정놀이는 새로운 기관에 들어가는 아이와 하기 좋은 놀이로, 같은 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열 수 있게 하는 놀이이다. 방법은 아이가 등원 할 때마다 엄마가 제시하는 특정 친구를 찾는 것. 인사를 제일 크게 하는 친구, 밥을 제일 맛있게 먹는 친구,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하는 친구, 머리카락이 제일 긴 친구 등 아이가 친구들의 행동이나 생김새를 유심히 살필 수 있는 문제를 내는 것이 포인트다.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반 아이들 한명 한명이 아이의 마음속에 예쁘게 자리하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 담겨있다.
실 짝꿍 놀이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이 ‘여자 편, 남자 편’ 나눠서 노는 모습을 보며 고안한 놀이로, 차이나 다름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대신 다양한 공통점을 찾아 연결하게 하는 놀이다. 다양한 종류의 동물 피규어와 여러가지 색깔 실을 준비한 후, 먼저 짝꿍을 찾을 동물과 색깔 실을 정한다. 그 동물의 한가지 특징을 말하고 비슷한 특징을 가진 친구를 찾아 실로 연결한다. 예를 들어 호랑이로 시작해 ‘나는 멋진 털을 가지고 있어’ 하며 공작새로 이어지고, ‘나는 날개가 커’ 하며 독수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의 실이 끝나면 또 다른 색깔의 실로 새로운 동물로 시작해 짝꿍짓기를 이어나간다. 그러다보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동물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편 가르기가 너무나 익숙한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분류의 선만이 아니라 연결의 선도 있음을, 하나의 선이 아닌 수백 수천 가닥의 실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갔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이 담긴 놀이이다.
<엄마의 어휘력>의 기반은 아이의 마음과 아이의 눈높이다. 아이의 말에 더 귀기울이고 아이의 성장 속도를 이해하고 아이와 진정으로 공감하는 데에서 ‘엄마의 어휘력’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책에서 이런 일화가 나온다. 다섯살쯤 된 아들이 종이에 무언갈 열심히 그리고 글씨 같이 끄적여 오더니 ‘엄마, 뭐라고 써 있어?’하며 도리어 엄마에게 물었다고. 질문을 받은 엄마는 사건의 증거를 모으는 탐정처럼 아이의 그림에 대해 이것 저것 물으며 아이의 머릿속을 파악해 나갔다. 그런 후 마치 그림책의 한 장면을 읽듯 몇 문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말해 주었다. "이 이야기 맞지?" 엄마가 묻자 “맞아. 내가 그 이야기 쓴 거야.”라며 아이가 만족스러워 했다는 경험.
내 아이도 종종 자기의 이야기를 엄마가 완성해 주기를 바랄때가 있다. 차로 어디로 이동할때면 카시트에 앉아 인형들과 놀던 아이는 “엄마, 동생들한테 앞좌석으로 가면 안된다고 얘기해줘. 길~게 얘기해줘.”하며 내게 이야기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럼 나는 아이가 혼자 인형들과 나누던 수많은 대화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긴 이야기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왜 위험한지에 대해 첫째 둘째 순번을 매겨가며 알려주고, 혹시모를 사고가 났을때의 예상 시나리오를 그려주고,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카시트에 잘 앉아 있는 언니(아이)를 보라며 모범사례도 들어주고, 안전한 손 벨트를 해주고 있는 언니에게 고마워해야 된다고 까지 말해준다. 그럼 아이는 흡족해하며 “다시 한번 말해줘. 길게~” 한다.
내 아이가 지금 있는 곳. 내 아이의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이야기들. 내 아이가 느끼는 감정, 호기심, 욕구를 제일 잘 아는건 엄마이다. 그러기에 이 책을 지금 만났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기쁘고 고맙다. <엄마의 어휘력>을 읽으며 끊임없이 밑줄 긋고, 테이프를 붙이고, 모퉁이를 접었다. 나도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어야지, 아이와 이런 말놀이를 해봐야지, 이런 그림책을 함께 읽어야지 하면서. 내 아이와 나눌 수 있는 대화의 틀을 확장시켜줬고, 유익한 팁을 많이 얻었고, 익혀나가고 싶은 새로운 표현들도 발견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의미있었던 건, 나와 내 아이를 다시 한번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어떤 대화들을 쌓아왔는지, 지금 우리는 어떤 말들을 나누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이야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기억해내고 꿈꿔가는 과정에서 나는 다시 한번 ‘엄마의 언어’가 가진 힘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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