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지인에게 이적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그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구입하게 된 책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초판이 1996년에 발행되었고 재판을 거쳐 삼판에다가, 심지어 내가 구입한 책은 사판에 3쇄 까지 발행한 책이다. 그렇다면 내가 초등학생 때 처음 나온 책이란 말인데 이 책을 우리 친정 엄마가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적의 어머니이자 여성학자 '박혜란' 교수는 세 아들을 모두 서울대학교에 보내자 육아기를 써 보라는 제안이 여기저서 들어왔다고 한다. 스스로 육아기를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그녀. 게다가 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신경 쓰는 그 당시의 풍토에 신물났던 그녀. 육아기를 쓰라는 남편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고, 그 당시 만난 젊은 엄마들을 보면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p.19 그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는 게 정답인지 모르겠다면서 내가 보기에 필요 이상으로 괴로워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웬만한 일은 다 뜻대로 되었는데, 아이 키우기만은 정말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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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말이지만, 육아에 너무 열심인 엄마들은 어쩌면 아이가 저절로 크게 놔둘 만큼 참을성이 없는 엄마들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들을 아이들 뜻대로 자라게 하지 않고 부모들이 자신의 뜻대로 키우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p.20 수많은 육아 교과서들이 강조하듯 부모인 우리가 정말 자식을 독립적인 개체로 생각한다면 내 뜻보다는 자식이 뜻을 세우도록 도와주는 게 부모로서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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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이 섣불리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싱싱하게 커 갈 수 있다. 아이들은 믿는 만큼 크는 이상한 존재들이다.
때때로 어른은 자신이 인생을 몇 년 더 산 만큼 아이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여 아이에게 큰소리 치고,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할 때가 많다. (물론 나도 아이에게 그랬지만) 내가 어릴 때를 생각하면 그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지, 시시때때로 야단치는 어른은 반성해야 한다. 잔소리 듣고 자란 아이가 잔소리를 하는 부모가 된다. 결국 엄마의 잔소리는 엄마의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고, 아이의 정서를 불안하게 한다. 하지만 박혜란 교수는 달랐다. 그들 부부가 워낙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어서 아이들도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자랐다고 한다.
p.38 사소한 변화에도 벌벌 떠는 엄마들의 아이들이 오히려 잔병치레를 하게 되고 정서적으로 늘 불안해하는 건 당연지사라는 게 내 소신이다.
p.39 엄마가 하루 종일 붙어서 키운다고 아이들이 모두 문제없이 크는 건 아니다.
엄마가 취업을 했건 안 했건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는 부모들이 먼저 안정되어야 한다.
스스로 노력해서 둔한 성격으로, 다시 말하면 정서적으로 안정된 성격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고 값진 일이다.
아무튼 둔하면 편하다. 특히 아이들 키우는 일에는.
아이를 키우려고 애쓰기보다 그녀처럼 함께 놀아주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듯하다. 하지만 난 아이와 잘 놀아주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다. 내 어릴 적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내가 중학생 쯤이었나, 엄마에게 친근한 말투로 대화를 했을 때, 엄마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가 네 친구니?"
이렇듯 엄격한 우리 엄마와 비교하면 박혜란 교수는 많이 달랐다.
p.50 아이들 키우는 일이 재미가 없었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꽤 달라졌으리라. 아이들과의 만남은 늘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갓난아기와도 주저리주저리 잘 떠들고 놀았다. 아이들은 키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놀아 주는 대상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노는 걸 아주 좋아한다. 지금까지도.
아이들이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일 때도 아이들과 함께 칼 싸움 놀이도 했던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스킨십도 많이 해주라고 조언한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다섯 식구는 서로 엉켜서 텔레비전을 시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힘들 때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대신 안아주었다고 한다.
p.54 아이들이 지쳐 보일 때 나는 "너 무슨 일 있었니?"라고 묻는 대신, 아이들의 머리를 어루만지거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한다.
"사는 게 힘들지?"
이렇게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키우되, 아이에게 예의는 가르쳐야 한다고 쓴소리한다.
p.80 요즘 젊은 부모들이 음식점이나 백화점, 지하철 등의 공공장소에서 마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을 제지하지 않아서 큰일이라는 한탄의 목소리가 큰데, 그게 다 어제오늘 시작된 일이 아닌 만큼 고쳐지는 데도 꽤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아이에게 예의를 가르치는 것은 아이의 기를 죽이는 일이라고 믿는 부모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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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만은 '기죽지 않고' 살게 하려는 염원이 버릇없는 아이들의 양산으로 이어지고, 나아가서는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나도 아이에게 예의만큼은 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잘 커준 아이들에게 박혜란 교수는 아이들에게 지적으로 자극을 준 일을 한다. 첫 번째는 저자 자신이 공부를 시작한 일이고 두 번째는 모르는 건 끝까지 모른다고 하라고 가르친 일이고 세 번째는 아이에게 스스로 사전을 찾도록 버릇을 잡아 준 일이다.
p.143 아이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겠다고 죽어라 하고 공부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사전 찾는 법만 알고 있으면 된다. 더 좋은 방법은 아이들이 엄마에게 사전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기보다는 스스로 사전을 찾도록 버릇을 잡아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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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공부를 잘하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반복하는 엄마보다 아무 말 없이 틈만 나면 책을 펼치는 엄마에게서 아이들은 지적 자극을 받는다.
형제간에도 비교하지 않고 각자의 능력과 적성을 존중해주고,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형편이 되는 대로 뭐든 다 해주지 않고, 또한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가며 사는 법을 아이들에게 깨우친 그녀. 편안한 문체 속에 가끔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이 책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모두 읽어야 할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