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딸들
이 책은
이 책의 제목은 『세상의 모든 딸들』, 두 권으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그중의 첫 번째 책이다. 소설이다, 장편소설.
저자는 엘리자베스 M. 토마스(Elizabeth Mashall Thomas).
이 책의 내용은
시대 배경은 구석기 시대.
이 소설의 후반부에 주인공 야난의 옷을 만드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용하는 도구가 요즘 같으면 가위, 칼, 바늘 정도일텐데 이 소설에는 돌칼, 긁개, 칼, 바늘, 돌송곳이다. (334,335쪽)
물론 바늘이라는 말로 표현된 도구도 요즘 우리가 보는 바늘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화자인 주인공 야난은 아버지 아히, 어머니 래프윙의 딸로서 동생 메리가 있다.
줄거리는 주인공 야난의 가족이 살아남기 위하여 먹거리 - 하마터면 ‘먹이’라고 쓸 뻔 했다 - 를 찾아 여기저기로 이동하면서 벌어지는 사건, 그 사건들을 통해 여자가 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권에서는 자세한 이야기가 밝혀지지 않지만 화자이기도 한 주인공 야난은 죽어 영혼이 되어, 이야기를 두 가지 시점에서 끌어나간다. 즉 산자의 시선으로, 또한 죽은 자의 시선으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해 보았다.
과연 이 책을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역자와 출판사는 이 책의 관점을 여자, 즉 딸로 강조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도, 원제는 <Reindeer Moon>, 번역하자면 ‘순록의 달’인 것을 『세상의 모든 딸들』로 했고, 앞표지에 이런 문구도 적어 강조하고 있다.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세상의 모든 딸들이 눈물로 맹세하지만,
왜 끝내 엄마처럼 살게 되는 것일까?>
이런 문구로 이 소설의 성격을 규정해 놓았다. 과연 그럴까
주인공 야난은 엄마의 모습, 엄마가 여자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심지어 엄마가 아이를 낳다가 죽는 모습도 보게 된다. 그런데 그 어느 장면에서도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외치는 장면이 없다.
야난은 엄마가 죽고 후에 아빠가 죽어가게 되자, 동생 메리를 데리고 살 길을 찾아 이동을 하는데, 딸로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로서, 또한 동생 - 여동생이다 - 을 책임지고 보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그렇게 살아나간다.
그래서 이 책에서 발견하는 야난의 매력은 인간 자체에서 느끼는 매력이지, 그녀가 여성으로서 뭔가를 주장해서나, 현재 페미니즘의 시점에서 돋보여서 매력이 있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자연과 치열한 싸움을 하면서 생존해야만 하는 시대, 구석기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는 남자는 사냥을 하고, 여자는 자식을 낳고 돌보면서, 살아가는 게 지상목표가 아니었을까? 살아남는다는 것이 남녀 공동의 목표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어서 영혼이 되면 가족들 주변을 맴돌면서, 그 가족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짐승들을 몰아 잡을 수 있도록, 같은 짐승이 되어 유인하기까지 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장면이다.
살아있는 사람 틸이 애원한다.
“순록을 데려와 주시오. 순록에게 강을 건너게 해주시오. 그러면 물에 빠트릴 수 있으니 우리가 쉽게 잡을 수 있답니다. 순록 말고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이런 애원을 듣고 야난 - 영혼이 된 후, 즉 죽은 뒤- 은 <그래서 나는 혼자서 암컷 순록의 모습으로.......> 변하여 순록들을 얕은 강물로 인도 - 유인 - 하려고 시도한다. (296쪽)
그렇게 살아남기 위한 것이 사는 것의 목적이었던 시대를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론 여자의 위치는 아무래도 연약함이라는 약점 때문에, 또한 출산이라는 숙명을 안고 있기에 갖는 또 하나의 짐, 그게 이 작품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화자가 일인칭 시점 - 즉 여성의 관점 - 에서 사건을 기록하고 있음으로 이 책이 여성주의 관점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전부인 것은 아니다.
짐승도 사람도 같은 생명체
나는 오히려 이 작품에서 저자의 경력 - <동물과 인간의 문화를 관찰하고 생각하고 쓰는데 평생을 보냈다. 1950년대 초 문화인류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칼라하리사막으로 이주하여 원시 상태에 머물고 있던 그곳 사람들의 삶을 연구했고> - 이 이 소설에 녹아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자가 동물의 습성을 얼마나 세세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야난이 죽어 영혼이 되어 순록으로 몸을 바꾼 후에 행동하는 모습이다.
<나도 그곳- 소나무-에 코 한쪽을 열심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눈 주위의 살갗을 부드럽게 문질러 간질이자 소나무에 나처럼 하면서 문지르던 다른 순록들의 냄새가 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다시 눈을 뜨기 전, 나는 이마를 위아래로 문질렀다. 그러자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양쪽 귀 뒤를 신경 써서 문지르고, 귀가 접히는 부분을 나무에 대고 정확히 구부러진 부분도 마저 문질렀다. 머리 쪽에 상쾌함을 느끼면서, 나는 목을 강하게 문지를 수 있었다.>(294쪽)
이런 묘사는 저자가 순록이 되어(?) 관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오두막에서 어미 늑대, 새끼 늑대와 같이 지내면서 늑대와 교감하는 야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나는 곧 집에 돌아오면 메리가 새끼 늑대가 껴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어미 늑대도 메리와 자신의 새끼가 함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29쪽)
<늑대가 쫓아가자 곰은 잽싸게 달아났다. 그러자 문득 내가 늑대의 도움을 받고 있다면, 늑대도 나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239쪽)
여기에서 야난과 동생 메리는 늑대 모자와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 그러는 가운데, 서로 서로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인간인 화자의 말을 통해서지만.
저자가 이런 장면을 도처에 배치하고 있는 것은 여자가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지상의 또다른 생명체인 짐승과도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사람은 죽어 영혼이 된다.
이 작품에서 저자는 사람이 죽은 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를 떠나 죽어서 영혼이 되었을 때, 나는 아직 젊은 나이였다.>(8쪽)
<영혼이 되던 해, 나는 밤낮 없이 .....>(194쪽)
<영혼이 된 뒤에 그런 일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266쪽)
사람은 ‘죽어서 영혼이 된다’고 표현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되다, 된다’는 것은 결과적 상태를 의미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 있는 동안은 아직 영혼이 되지 못한 시점이다. 그래서 사람은 육신의 상태에서 벗어나 죽어서 영혼의 상태로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게 저자의 생사관이 아닐까. 영혼의 상태가 인간의 궁극의 지점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다시, 이 책은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특별히 저자의 경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소설 속에는 저자가 온 생애에 걸쳐 얻어낸 ‘생각’이 도처에 들어있다. 이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저자 소개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논픽션과 소설을 넘나들며 동물과 인간의 문화를 관찰하고 생각하고 쓰는 데 평생을 보냈다.
1950년대 초 문화인류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칼라하리사막으로 이주하여 원시 상태에 머물고 있던 그곳 사람들의 삶을 연구했고, 그곳 원주민 인 부시먼을 주인공으로 『무해한 사람들(The Harmless People)』을 발표하여 소수인종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다.
그 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 기초한 여러 권의 논픽션을 출간하다가 부시먼들과 함께 살며 체험한 깨달음을 시베리아 공간에 투영시켜 소설 『세상의 모든 딸들(원제; Reindeer Moon)』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문화인류학, 동물과 인간의 문화, 소수 인종이란 개념에 밑줄 긋고 새기면서 읽으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눈을 선사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