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도덕에 대해 궁금해 할 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What is …….)” 이때 ‘무엇(What)’이란 이미 정의된, 보편적인 본질을 의미한다. 반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묻는다. “진리란 어떠한 것인가?(Which one …….)” 혹은 “어떠한 것이 그것을 진리로 만들었는가?”
특정한 조건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생겨났음을 말하는 맑스의 성과나, 우
리뷰제목
오늘날 우리는 도덕에 대해 궁금해 할 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What is …….)” 이때 ‘무엇(What)’이란 이미 정의된, 보편적인 본질을 의미한다. 반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묻는다. “진리란 어떠한 것인가?(Which one …….)” 혹은 “어떠한 것이 그것을 진리로 만들었는가?”
특정한 조건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생겨났음을 말하는 맑스의 성과나, 우리가 별다른 의심 없이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이성’이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며 폭력적인 억압과 배제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밝히는 푸코의 시도는, 발생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맑스의 말을 빌리자면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임금 노동과 자본』” 이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광기가 억압되고 배제될 때 비로소 이성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것을 안다는 것 그것은 어떻게 발생하는지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 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 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p.340)”
니체는 ‘좋음/나쁨’의 기원이 ‘선/악’의 대립과 다르다고 말한다. ‘좋음’은 ‘귀족의’, ‘고귀함’을 기본 개념으로 하여, 여기서 ‘귀족적인’, ‘정신적으로 고귀한 기질’등이 연유한다. 그것과 대비해 ‘나쁨’이라는 의미는 ‘비속한’, ‘천민의’, ‘저급한’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나 이때 ‘나쁨’에는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들어있지 않다. 다만 ‘좋음’에 비해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단순함’, ‘평범함’, ‘소박함’을 의미할 뿐이다.
이때 ‘좋음’의 개념에는 귀족적이고 고귀한 자기 긍정이 들어있다. “고귀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를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느낀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p.276)” 자신을 긍정하는, 영혼이 고양되고 자부심 있는 사람들의 삶은 항상 기쁨으로 충만해있다. 이들에게는 행복과 행위가 항상 합치되어 있으며 스스로를 기만할 필요도 없고, “충만한 감정과 넘쳐흐르고자 하는 힘의 느낌, 고도로 긴장된 행복과 베풀어주고 싶어 하는 부유함의 의식으로 충만해있다.(p.276)” 결국 ‘좋음’을 추구하는 그들의 욕망은, 타자의 시선이나 비교가 아닌 ‘좋은 인간들(귀족적, 고귀한 인간)’ 스스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귀족적인 도덕이 자신을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스스로 ‘좋음’을 추구하였다면, 노예의 도덕은 이와 상이하게 출발한다. 노예도덕은 “처음부터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한다.(p.367)” 그들은 생존의 압박, 강자(주인)에 대한 공포 속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강한 자(귀족적)에 대한 증오를 품는다. 이들의 원한은 결국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 자신과 대립되는 사람들을 통해, “‘악’을 생각해내고, 그것의 대립물로 다시 한번 ‘선’을 생각해낸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p.371)” 이제는 ‘좋은 것/나쁜 것’이라는 가치 판단이 “선한 것/악한 것‘의 도덕적 의미로 바뀌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가 양상의 변화이다. 귀족의 도덕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긍정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하며 삶의 에너지로 충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예의 도덕이 지배하게 됨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부정하고 수동적이며, 현실이 아닌 죽은 뒤 낙원을 꿈꾸는 결핍된 생을 살게 된 것이다. 자율적인 것에서 무리 짓는 것으로, 창조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생의 과잉에서 생의 결핍으로. 가장 작고 약한 자의 도덕이 승리한 것이다.
노예도덕의 승리. 이 거대한 사건을 니체는 ‘양을 잡아먹는 독수리’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성장하고 뻗어나가려 하는 ‘힘의 의지(Wille zur Macht)’를 갖고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잡아먹는 독수리에 대한 양들의 비난은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태계에서 독수리가 양을 잡아먹는 것 역시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강한 것에게 강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약한 것에게 강한 것으로 나타나기를 요구하는 것만큼 불합리하다.(p.377)”
대적할 힘이 없는 양들은 ‘정신적인 복수’란 획기적인 방법을 고안해낸다. 모든 것이 ‘주체’에 의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문법적 환상(주어를 쓰고자 하는 유혹)’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번개가 친다.”는 문장에서 주어 ‘번개’가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갖고 ‘치는’ 것처럼 말한다. 이처럼 주어를 통해 사고함으로서 내가 ‘나(주체)’의 의도에 의해 행동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데, 이때 자신이 자신의 활동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통제하는 ‘나’와 통제되는 ‘나’
이제 양을 잡아먹는 독수리의 (본능적인)행동은 본인의 책임 아래 놓여지게 되고, 그것이 통제되지 못할 경우 마땅히 비난받으며 반성해야 할 행동으로 여겨진다. 반면 양들은 마치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독수리처럼 강해질 수 있지만)그들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를 기만한다. 양들의 무력감은 ‘겸허’, ‘순종’, ‘인내’, ‘용서’ 등의 미명아래 오히려 미덕이 되며, 하나의 ‘선(善)’이 된다. 자신들의 불행을 행복한 자의 ‘양심’에 성공적으로 밀어 넣을 때 복수는 막을 내린다. 끈질긴 반동의 힘 앞에서 독수리가 서서히 추락한 것이다. 과거 자신을 긍정하고 스스로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였던 ‘거인’들은, 이제 끊임없이 (양심의)가책에 시달리며 자신을 속이는 ‘난쟁이’로 변했다!
니체는 이 책이 ‘2000년경’에야 읽힐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야말로 ‘창조’하고, ‘명령하는 자’라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러나 21세기, 성공적(?)으로 길들이고 길러진 우리들의 자화상 속에는 오히려 니체의 시대보다 공고해진 ‘우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이 순간 ‘보편성’을 앞세운 수량화, 자본의 논리 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결핍! 결핍! 결핍!
그가 말한 ‘미래의 철학자’는 당분간은 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주어진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가치의 전도를 통해 ‘선악의 저편’을 바라볼 용기를 지닌 짜라투스트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인상깊은구절]
가장 위대한 사건과 사상은 가장 늦게 이해된다. 동시대의 세대는 그러한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다. 가장 멀리 떨어진 별빛이 인간에게 가장 늦게 이른다.그 별빛이 이르기 전에는, 그곳에 별이 있다는 것을 인간은 부정한다.(p.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