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말하는 인간의 삶과 생각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권의 서문에서 사람들의 ‘기교‘를 비판한다. “내가 도덕에 대해 이미 충분히 간파하고 있던 그때에도 나는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쇼펜하우어의 맹목적인 도덕 의지를 묵인했다. 마찬가지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치유할 수 없는 낭만주의에 대해서도 마치 그것이 시작이지 끝이 아닌 것처럼 나 자신을 기만했다. 그리고 그리스인에 대해서도, 독일인과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라고 거침없이 주장하는 그는 ’자유정신‘을 창안하면서 인간이 위대한 해방을 맞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는 그가 생각하는 ’자유정신‘의 개념을 ’사물, 도덕, 종교, 예술과 저술, 문화, 친구, 여성과 아이, 국가, 사람‘이라는 8가지의 꼭지를 통해 풀어낸다.
1장에서 니체는 최초와 최후의 사물을 인식하는 철학자들의 오류를 짚어낸다. 철저한 형이상학설에 대한 비판의 나열이다. 니체가 바라보는 세계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영원한 진리가 있다고 가르치는 철학은 점성술처럼 오만할 뿐이다. 또한 꿈처럼 허망하기도 하다. 그리고 비논리적이고, 불공정한 것은 바로 인간 사유의 특성이기에 이를 인정하고 생각해야 진정한 철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우리의 삶에도 당연히 오류가 있는 것이기에 이성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비판한다. 2장에서는 심도 있게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 논한다. 감사와 복수, 선과 악, 동정과 고통, 정직과 사기 등 우리가 곧잘 반대로 사용하는 단어들이 니체의 인간성 앞에서는 하나가 된다. 예컨대, 사기 행위 속에는 정직함이 내재하는데, 이는 남에게 거짓된 언행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굳게 믿는 정직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매우 모순된 것 같지만 곰곰이 따지자면 니체에게 손을 들어주게 된다. 또한 허영심이 있기에 우리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으며, 금욕자는 덕에서 고난을 만들어내는 사람일 뿐이다. 사람은 굳이 덕으로 판단하지 않아도 때로는 나쁘게 때로는 더 나쁘게 행동하며 서로 돌고 돌면서 살아간다.
3장에서는 예배, 제물, 그리스도교인의 특징(그 특징은 특정 종교를 지닌 사람들이 보면 불쾌할 지도 모르겠다.), 원죄 등 종교가 지닌 오류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이 단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종교는 비학문적인 해석으로 사람을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4장에서는 완전한 인간의 창작은 없다는 명제로 시작한다. 예술가와 저술가의 작품은 사람이 생산했으므로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예술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거짓된 감정과 미화를 통해서 예술계에는 추한 영혼이 판을 친다. 마치 철학자가 진리를 강요하는 것처럼 예술에서는 아름다움을 강요하고, 영감과 천재성을 중시하지만 실상은 대개 그렇지 못하다. 208절의 ‘책은 거의 인간이 되었다’라는 구절은 저술가가 비록 자신이 쓴 책을 잊었을지라도 그가 안에 쏟아낸 그의 삶이 스스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음을 뜻한다. 아마도 사람의 영혼에 더 영향을 끼치는 것은 예술보다는 책과의 대화여서 니체가 너그러운 서술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5장부터는 4장까지의 내용을 종합하여 사람의 일상 삶에 중요한 틀을 생성하는 문화와 국가를 다룬다. 자유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많을 때 우리의 문화는 좀더 높은 문화로 진보할 수 있고, 강한 자유정신도 양성할 수 있다. 비록 고대 그리스의 자유 정신 문화가 남성의 문화로써 여성은 강한 남성을 출산하는 역할을 통해 그러한 문화에 이바지 했다는 서술이나 여성의 사랑은 모성애에서 비롯되는 면이 있다는 등 여성 해방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어서 실망했지만, 그가 19세기의 독일 남성 철학자로써 인종주의자와 결혼한 여동생, 20년 간 자신의 사랑을 끝내 받아주지 않은 젊은 여인 등 개인적인 그의 불우한 사랑을 생각하면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는 여성은 그의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사랑을 결코 받아주지 않는 비인간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한편, 국가는 계층, 가문, 군대, 국민, 자만심, 군주, 전쟁, 종교 등의 요소로 구성된다. 국가는 개인을 삼키고, 선과 악이 공고해 지면 다른 국가와의 전쟁을 통해 부를 창출한다. 종교는 국가 유지의 신념을 제공하는 데 유익하다. 태만한 여론은 사적인 영역일 뿐이다.
2권에서는 1장 혼합된 의견과 잠언들, 2장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를 묶어서 책을 펴냈다. 이리저리 나열되어 있는 구절 중 하나만 살펴보면, 17절 역사가의 행복에서 역사가는 죽어야 할 많은 영혼들이 자신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역사를 전공하는 ‘나’로써는 존경하는 철학자인 니체가 시종일관 역사가와 형이상학자를 동일시하여 생각하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17절의 표현은 과거에 매몰되어 자신을 잃고 허덕이는 바보같은 역사가를 비판한 것이기에 반성이 되면서도 재미있어 웃음이 나왔다. 방랑자와 그림자의 대화의 끝은 방랑자가 ‘너는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자신의 발 밑에 있음을 모르고서. 우리도 우리 자신의 진짜 모습을, 인간의 진짜 모습을 사실은 잘 모른다. 거울이 없었다면, 친구가 없었다면, 니체의 책이 없었다면 위선적인 철학, 도덕, 문학, 예술, 종교, 국가, 남성과 여성의 본질을 우리는 평소에 보면서도 느끼면서도 만지면서도 어리석게도 거짓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니체가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이 책은 지나친 의무의 압박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나 적합한 것입니다. 이 책은 세련되고 자유분방한 감각을 원하며, 여유를 요구합니다. 시간의 여유, 하늘과 마음의 넘치는 명쾌감, 가장 대담한 의미에서의 여유로운 한가함을 요구합니다. - 오늘날 우리 독일인은 오직 좋은 것들뿐인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줄 수도 없습니다.”라는 평에 어느 정도 동감한다. 니체는 1권에서 이런 평을 적으며 침묵하겠다고 하지만, 볼테르 상을 받고나서 용기를 얻어 2권을 펴낸다. 마치 독일인들이 프랑스의 디드로를 철학 동지로 인정한 것과 같이 니체의 철학은 프랑스의 분위기와 유사한 것 같다. 딱딱하고 이성적인 독일 철학도 좋지만, 자유분방하고 위트 넘치며 감성적인 프랑스 철학도 좋아하기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의문이 드는 부분은 몇 번을 곱씹어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종종 있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란 물음이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는 가닥을 잡은 것 같아 기쁘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해야 할 것을 하면 된다. 또 다른 기쁜 점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는 달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책장을 더 많이 넘길수록 이해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옮긴이의 세심한 번역으로 원 뜻을 잘 되살렸기에 그러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