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자 '정희진'이 쓴 영화에 대한 책 <혼자서 본 영화>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기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을수록 정희진의 글은 나의 몸을 관통하여 마치 그녀의 심연으로 들어가 함께 영화를 보고 느끼는 일체감을 경험했다. 이 책에서 정희진이 소개하는 다양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고통, 상처, 슬픔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혼자서 본 영화>는 혼자서 영화관에서 자신만의 영화를 마주하는 여성학자 정희진이 본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과 동시에 여성을 바라보는 공감의 눈을 지닌 여성학자의 치열하고 따뜻한 글에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 영화는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인생 문제가 영화에서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타인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외로움을 원한다."
정희진은 영화 <인더컷>을 소개하며, 여성주의에서 성과 사랑이 이론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되는 이유는, 젠더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섹스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 더 컷>은 스릴러를 표방하지만 복잡한 스토리, 복선이나 속임수, 극적인 반전 같은 것이 없다. 정희진은 영화 <인 더 컷>은 스릴러에 여성의 언어를 담은 작업은 필연적으로 남성 스릴러의 비정치성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서는 욕망으로 고통받으며 사랑에 빠질까 봐 고뇌하는 사람이 여성이고, 매력적이나 치명적인 유혹자는 남성으로 배치하여 팜파탈을 통해 남성 문화가 주장하는 스릴러의 공식을 뒤집는다. 행위자로서 여성, 역사의 주체로서 여성, 그리고 여성의 성적인 욕망은 남성 사회를 위협한다는 정희진의 글은 여성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그 사회의 경계와 만나고, 결국 정치적 갈등을 불러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에게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정희진의 이야기를 읽고 평소 여성이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남성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그동안 얼마나 복습해오며 영화를 관람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가부장제 사회가 남성은 성적 주체로, 여성은 성적 대상으로 만든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유사 이래 여성은 언제나 성적 주체였다. '꽃뱀'의 유혹에 넘어간 남성들의 '억울한 호소', '큰 뜻'을 이루려는 남성과 이들을 대변하는 남성 문화는 여성을 '남자 신세 망치는 골칫덩이'로 경멸해 왔는데, 그 혐오의 정점이 '창녀'였다. 이처럼 여성은 성의 피해자로서 또는 주체로서 남성의 편의에 따라 늘 양립해 왔다.
스릴러 영화의 공식인, 남자 주인공을 시험에 들게 하는 팜파탈(femme fatale), 즉 치명적 요부는 남성의 모순을 여성에게 투사한 존재이기에 오랫동안 남자 감독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팜파탈은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가 결코 남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남성 판타지의 산물이다. 남성의 성욕이 무한대라서 어디로 '분출'될지 모르지만, 성욕 폭발의 버튼을 누른 사람은 남자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라는 것이다."
정희진은 영화 <디 아워스>를 통해 '부패하지 않은 사랑은 없다'는 주제로 이야기하여 흥미롭다. 정희진은 영화 <디 아워스>는 '사소한' 여성의 경험과 감정을 의미화하고 정치화 했을 때만 보인다고 말한다. 정희진이 영화 <디 아워스>는 "여성과 시간, 여자/주부의 우울증과 '가출'"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으면 즐길 수 없는 영화라고 말하는 글이 눈길을 끌었다.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영원한 사랑도 안전한 삶도 없다는 정희진의 말은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계속되는 것은 없다는 철학적 의미를 알려준다.
"사랑은 유기체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부패한다. 문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변치 않는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디 아워스>는 이 오래된 질문을 성찰적인 남성의 시선으로 새롭게 던진다."
이 책에서 정희진이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내며 영화와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삶이라는 사적 영역을 통해 공감할 수 있는 지점들이 인상적이다.
"나는 고1 때부터 약 20년 동안 한 달도 '연애' 상태가 아닌 적이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이데올로기든 늘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예외 없이 상처로 남았다. 나는 그 관계를 연애라고 주장하는데, 주변 사람이나 상대방은 그건 연애가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침묵이 두려워 파티를 여는 댈러웨이 부인처럼, 나는 자신과 만나지 않기 위해 연애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나를 도피처 삼아 네 인생은 뒷전이었지." 리처드(에드 해리스)가 클라리사(메릴 스트립)에게 말한 대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선택할 경우 겪어야 할 너무도 많은 공격들이 두려워 '연애 감정 상태'를 도피처로 삼았는지 모른다."
정희진은 '지옥에서 탈출하는 법'이라는 내용으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일본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대해 논한다. 정희진은 당장의 피해가 눈앞에 어른거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상담해 올 때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주인공 소녀의 저항 방식을 알려준다고 이야기한다. 이 소녀는 피해자 역할을 거부했다. 소녀는 상처받지 않음으로써 가해자의 권력에 저항하고 그들을 비웃는다. 우리는 상처받았음을 강조하는 대신에 저들의 폭력을 폭로해야 한다. 정희진은 문제는 '그들'이 사는 메커니즘 자체이고 그들의 잘못이지 '우리의 약함'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성폭행을 당하면 인생을 포기하고 가해자가 원하는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나를 망치기 위해 아무리 발악을 해도, 나는 너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라며 망한 세상의 타자가 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주인공의 소녀는 세상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강렬한 저항을 선택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주체이자 타자이다. 물론 이것은 곡예다. 주체가 되는 방식은, 여성이지만 남성의 규범을 따르는 '주변부 남성'이 됨으로써 가능하다. 타자 되기는 전략적 선택일 수도 있고 낙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성폭력과 성매매라는 제도에 강제당함으로써 성적 타자로 만들어진 상태에서는, '반여성'이 되어야 한다. 남자들이 원하지 않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는 삭발, 즉 자원으로서 외모를 버리는 것이다."
쓸쓸한 영화, 치열한 영화, 깊은 영화, 처절한 영화, 깨달음을 주는 영화의 분류 중에서도 주인공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영화가 바로 정희진이 좋아하는 영화 유형이라고 말한다. 정희진은 영화 <타인의 삶>이 '내 인생의 영화'이 이유는 자신이 더 타락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주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혐인증인 '정희진' 자신에게 '다른 인간'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고, 인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을 관람하며 느꼈던 감동이 또다른 차원으로 내게 다가온다. 이 책은 관람했던 영화를 정희진의 눈을 통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삶을 통찰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동일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엔 적대했으나 지금은 선망하게 된 타인, 나는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경험하기 힘은 인간성이다. 사람은 사상, 사랑, 권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작품은 타인의 삶이 나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으며 나는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인간인가를 질문한다."
정희진은 '착한 여자의 나쁜 남자 순례기'라는 제목으로 일본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소개한다.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착한 여자지 나쁜 여자가 아니며, 불평등과 착쥐는 부정의하다는 정희진에 말에 공감한다. 저항하는 과정에서 사회가 '우리'를 나쁜 여자들이라고 한다면 사회가 잘못이지, 우리가 굳이 나쁜 여자라고 되받을 필요는 없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인생>의 주인공 마츠코는 피해자가 아니므로 피해 의식도 없고 남자들을 원망하지도 않으며 억울해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나쁜 세상과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영향받지 않고, 언제나 자기 본모습대로 살았다. 정희진은 마츠코는 세상에 당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싸웠으며 자기 방식이 옳음을 믿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피해 의식만 가득한 사람은 마츠코처럼 타인을 걱정하지 않으므로 마츠코는 진정한 강인함을 지닌 여성이다. 정희진은 '나쁜 세상'이라는 구조에 서 개인이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량을 믿고 자신을 지켜내는 방법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영화의 감동은 '피해' 개념의 전복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거리가 생긴다. 그것은 마츠코의 선물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크게 손해 보지만 않는다면, 타인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어느 정도의 이타성은 이기성이기도 하다.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선의가 사기와 갈취, 저질 구설 따위로 돌아온다면? 이런 배신이 반복된다면? 이때부터 우리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우울과 분노에 빠진다. 기분 장애 상태에 이르기 쉽다. 사람들마나 대처 방식이 다를 것이다. 우울과 은둔, 심각한 경우 자살, 다시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마음을 닫는다. 어설픈 복수로 더 망가지기도 한다. 비일비재한 일이다.
나는 이 영화를, 이 영화의 마츠코를 사랑한다. 그녀는 여자인 내가 봐도 이해하기 힘을 정도로 '당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당하는데도 그녀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마츠코의 피해와 고통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타인의 잘못이다. 그녀가 타인의 잘못을 피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상대가 나쁜 의도를 품고 마음먹고 속이려 드는데, 그것을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계속 조심하고 경계하고 살아야 할까?"
<혼자서 본 영화>에서 '사랑하기와 말하기 사이에서, 상처가 아무는 시간, 젠더, 텍스트, 컨텍스트'라는 목차들을 통해 여성학자 '정희진'이 바라본 영화들을 만나는 시간은 영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마주하게 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영화들을 찾아서 관람해보고, 정희진의 글이 내 온몸을 지나가는 이유들을 천천히 관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