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과 유생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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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과 유생의 대결

조선의 성상파괴와 종교개혁

한승훈 | 사우 | 2021년 4월 1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 9.3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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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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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평점10점 | e******s | 2021.06.03 리뷰제목
조선오백년은 길고도 긴 왕국이었지만 마지막에 일본한테 패망하는 바람에 현대 한국인들에게 잊혀졌다. 신라처럼 빛나는 금관이나 석조예술도 만들지 않았고 고려처럼 대장경이나 화려한 불화도 만들지 않았다.  현대인들이 조선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대부분 실록을 바탕으로 한 사극의 소재일 뿐..... 아마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읽으면 좋을, 대부분 정치에 관한 이야기이다.
리뷰제목

조선오백년은 길고도 긴 왕국이었지만 마지막에 일본한테 패망하는 바람에 현대 한국인들에게 잊혀졌다. 신라처럼 빛나는 금관이나 석조예술도 만들지 않았고 고려처럼 대장경이나 화려한 불화도 만들지 않았다.  현대인들이 조선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대부분 실록을 바탕으로 한 사극의 소재일 뿐..... 아마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읽으면 좋을, 대부분 정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오백년 동안 유학자들이 그토록 열심히 일생작으로 써내려간 '한문책'들은 이제 아무도 읽지 못하는 책이 되었다. 현대 한국인 중 그 한문책을 읽어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근대 용어들의 한문을 읽을 수 있는 것과 유학자들이 남긴 책을 읽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한문의 원어민인 중국인들도 대부분 그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에서의 '고전한문'처럼 이렇게 단 시간 내에 잊혀진 글자가 인류사에 또 있을까? 단 백년 안에 몇몇 전공자들들을 제외하고는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학교에서는 사라져 가는 문자를 그나마 유지해보려고 '한문시간'이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한문보다는 컴퓨터 랭귀지가 생존에 더 중요할 수 도 있다. 

한일합방을 목숨걸고 반대하던 유학자들이 백년 후에 자신의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극소수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절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조선을 이해할 때 조선왕조 만을 기억하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영향이다. 오백년 동안 놀랍도록 자세히 기록한 그 기록 때문에 조선을 기억하는 방법은 실록에만 의지하는 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실록'에서 인용한 것도 많지만 실록에 있지 않은 다른 유학자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실록은 기본적으로 왕의 이야기이다. 이 책은 왕 만의 이야기가 아닌 백성들의 종교생활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째로 이 책의 부제인 '조선의 성상파괴와 종교 개혁'이란 단어가 매우 혁신적이다.  우리나라 역사 관련 책에서 나오기 힘든 부제이다. 기독교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저자를 보니 국사학 전공이 아닌 종교학 전공자이다. 역시..... 우리나라 역사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종교 생활에 대한 특성을 전반적으로 보는 식견을 공부한 사람이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너무 우리나라의 역사에만 매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둘째로 내가 너무 단순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동안 나는 콘스탄틴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유럽은 '금방' 다 기독교 지역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럽이 완전히 기독교화되는데 무지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마녀 사냥' 같은 것이 그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조선이 유교국가 임을 표방했지만 그 '유교화'는 조선이 멸망할 때 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새롭다. 나는  중종 이후에는 어느 정도 성리학이 완전 승리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황과 이이가 그 기폭점이 되지 않았을 까 생각했다. 무슨 문화이던지 그 기폭점에는 '스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째로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 향교나 성균관에 갔을 때 느꼈던 '의아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불교의 사찰에 가면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외에는 모든 법당이 공개되어 있다. 그러나 성균관이나 향교, 서원에 가면 문묘, 사당의 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다. 나 같은 일반인 여자가 그 안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그러다가 한번 기회가 있어 과천 향교의 안을 본 적이 있다. 정말 실망스러웠다. 작은 의자들 위에 달랑 '이름표(위패)'만 있었다. 그 많은 계단을 올라오고 문을 통과해서 특별히 특혜를 받아서 보게 된 것이 '위패'. 보통 이런 동선의 사찰이면 맨 마지막 대웅전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부처님이 있기 마련이다.  보고 나서도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아마도 내가 유학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우리나라의 건축의 진정한 '젠스타일'은 향교나 사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 책은 조선의 유학자들이 새 나라를 만들면서 먼저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점점 종교 권력마저 장악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 과정에 조선의 유학자들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국과는 달리 점점 '극단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결과가 '공자의 소상 파괴'와 '위패'이다. 

 유생들이 민초들의 종교였던 무당들의 영역을 점점 정령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상대적으로 조선 시대 또 하나의 종교였던 불교와 유학자들과의 갈등 이야기는 적다. 아마도 그 유학자들의 아녀자들이 불교를 믿었기에 적대감이 적었을 수도 있고 스님들이 대부분 남자였고 한문을 이해할 수 있는 집단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무교가 일방적으로 밀린 이유가 글자를 바탕으로하지 않았다는 것, 여성들의 비율이 많았다는 것도 한 몫했을 수도 있겠다. 

 

책을 읽으면서 군데군데 흥미로운 서술이 눈에 띈다.

 16세기 스님 청연이 천왕봉의 신당을 불태우고 성모상을 파괴했지만 그 성모상은 몇 번이나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쳐 현재에도 천왕사에 건재하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나는 취미가 사찰 순례인데 사찰에 갈 때마다 산신각에 들린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을 보존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산신각 순례라고 생각한다. 산신각에 들려 참배를 하는 사람은 감히 산을 해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찰에 갈 때마다 삼성각 또는 산신각에 가는데 대부분 산신은 '남성'이다. 여성인 산신이 정말 드문데 지리산 사찰들에는 산신이 '여성'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천왕봉 성모상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유교적 가부장 사회에서 많은 여성 산신이 사라지고 남성 산신으로 대체되었지만 워낙 유명했던 지리산 산신만 여성으로 남은 모양이다. 

 

 또 한가지는 조선 건국이후 불화는 화려했던 고려 스타일(금으로 그린)을 버리고 채색 불화로 완전히 전향한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스타일이 완전히 바뀔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조선 불화는 고려 불화보다는 오히려 지리적, 연대적으로 떨어진 투르판 베제클리크 천불동의 불화(11세기)와 닮았다. 단순히 조선시대 들어 와 후원금이 떨어져 그보다는 싼 재료로 그리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나라에서 아예 제도로 불교에서의 금 사용을 막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문정왕후가 고려 불화 스타일로 금으로 수 많은 불화를 그렸으니 유생들의 미움을 그렇게 받은 것이 이해가 되었다. 

 

또 공자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재미있다. 지금도 우리나라 유학자들에게는 공자는 예수급이라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기 어려운데 이 책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소개하고 있다. 

112쪽 '아사노 유이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도발적인 주 장을 내놓고 있다. 역사적 공자는 권력욕과 야망을 가지고 활동했던 인물이며, 죽은 후에는 꿈을 이루지 못한 그의 원한을 풀려는 제자들에 의해 “왕관 없는 왕", 즉 소왕으로 숭배되었다는 것이다. 공자에 대한 메시아니즘은 초기 유가 경전에 나타나는 공자에 대 한 신비화와 신격화를 통해서 정교화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왕조에서 공자가 제국의 탄생을 예언한 유씨 왕가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지면서 공자 신앙은 제도화된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공자에 대한 신격화를 강화해 나가면서 마침내 그를 황제에 버금가는 신성한 존 재로 섬기게 되었다. 이런 움직임을 주도한 것은 유교의 정통 신학인 공양)이었다. 아사노는 조선, 일본 등에서 크게 유행한 신유교와 성리학은 그런 정통에서 이탈한 “방계의 신흥종교라고까지 주장한다.'

114쪽 '동아시아 유교 세계에서 천자가 서구 세계의 교황과 같은 종교적 권위를 누렸다면, 선성이자 소왕인 공자는 그리스도와 같은 기능을 했다. 공자 숭배를 둘러싼 이런 종교적 정서를 이해해야만 우리는 공자를 천자의 복색으로 꾸며놓은 사람들의 생각에도, 그리고 그런 소상을 보고 분노했던 김종직의 마음에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을 이해하는데 기독교적 비유를 쓰는 것이 적절한지 잘 모르겠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사실 공자나 조선의 신유학보다는 기독교 이야기가 더 친근하기에 이해하기는 쉽다. 

아사노 유이치의 견해는 유학에 짧은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나의 견해와 비슷한 것 같다.

내 생각으로 유학자들이 나열하는 공자에 대한 묘사는 '용비어천가'식의 미사여구를 빼고 팩트 만을 본다면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와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 즉 본인은 왕이 될 가능성은 없지만 자신의  '좋은 통치' 기술을 왕들에게 제공하고 인정 받기를 바랬다는 것이다. 다만 내용상에서 마키아벨리는 너무 '왕'의 이익에만 충실하였고 공자는 지식기반, 개인적 수양 기반을 바탕으로한 휴머니즘을 넣어 좀더 그 견해가 넓었다는 것이 그 차이이다.  따라서 '군주론'의 실질적인 독자의 수(왕, 군력자들)는 적지만 공자가 제시한 이상향 때문에 유학을 따르는 독자 수가 많았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러나 결국 공자도 근본적으로는 '계급주의자'였기에 공자의 이상향은 권력과 부를 가진 상위층들에게만 이상향이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하위층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착취도구였을 수 있다. 공자의 글을 읽는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공자적 '성인'이 자신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별로 내키지 않을 뿐.... 그러나 조선 시대에 공자적 '성인'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결국 소수였고 나 같은 여자들에게는 아예 기회조차 없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좌절감을 나이가 들면서 더 느끼게 된다. 강릉가서 그들의 사당 앞에서 드는 느낌은 현대에 태어나서 다행이다.....

 이 책에 의하면 그런 계급적 특원을 가진 유자들이 하위 계층이 가진 지위마저 빼앗으려 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누가 그랬다. 아마도 코메디언? 기독교가 인류에게 가르쳐준 가장 큰 가르침은 '인간은 일주일마다 반복해야 잊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복 학습의 효과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나마 유학이 현대 한국인들에 남긴 것은 '배워야 사람대접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 시대에는 그 대상이 양반에 국한되었지만(아무리 한시를 잘 써도 노비는 노비였다.) 그나마 현대에서는 출생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들에게 해당하는 사항이 되었다. 아무리 돈 많은 재벌도 무리를 해서라도 (부정입학) 학력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실상이다. 

 

154 쪽 '유교에 대한 독특한 시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아사노 유이치는 신유교를 기존의 '정통 신학'인 공양학으로부터 이탈한 '방계의 신흥종교'라고까지 주장한다. 중국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전역에 퍼져나간 유교란 바로 이 신유교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떠나서, 한국의 상황만을 본다면 고려 말 조선 초의 유자들이 이전과는 구분되는 독자적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들은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보아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지역의 토착적인 신앙과 의례를 사라지목하며 유교적 제사로 대체하려 했다.
사상적 측면에서의 유교화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다. 이를테면 신진사대부나 사림파라는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은 어떠했는가, 성리학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등의 문제다. 이는 분명 흥미로운 문제이지만 유교화의 종교적 측면을 보려 한다면 조금 다른 주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교에는 사상이나 담론이 라는 요소도 있지만 의례적 실천, 공동체, 제도라는 영역도 있다.' 이것은 학자들의 사상사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요소다. 종교는 무 엇보다 실천(practice)이다. 물질세계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종교적 실천을 우리는 의례(ritual)라고 부른다.'

 

또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 기우제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나온다. 보통 교과서에 '기우제를 지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만 구체적인 묘사는 이 책에서 처음 보았는데 무척 재미있다.

159쪽 조선전기의 기우제

'조선 전기의 문헌인 『용재총화』에 따르면 이 시기 한양에 서 지내는 기우제는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도성의 모든 하수구와 도랑을 청소하고 밭두렁 거리를 깨끗하게 한다. 의례의 필수적인 준비 과정인 '정화'의 절차다. 가장 먼저 제사를 지낼 곳은 왕조와 국가의 수호신들인 종묘와 사직에 대한 제사다. 다음은 도성의 공간적 경계인 사대문에 대한 제사가 이어진다. 여기까지는 일반적 인 유교식 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인류학자 기어츠가 제시한 '극장국가'와 같은 풍경이다.

기우제에는 도성의 모든 주민이 참여했다. 집집마다 병에 물을 담 고 버드나무를 꽂아두고 향을 사른다. 시장이 남쪽 거리로 , 남문은 닫히고 북문이 열린다. 성 곳곳에는 누각이 설치되어 아이들이 모여 비를 불렀다. 어린아이들은 신과 통한다는 오래된 믿음이 반영된 것이다.

동쪽 성문 밖 교외에는 청룡 그림이 걸린다. 마찬가지로 남쪽에는 적룡, 서쪽에는 백룡, 북쪽에는 흑룡, 중앙의 종루 거리에는 황룡을 그린다. 오행의 방위와 색채에 따른 다섯 마리 용이 유교 국가의 이 상을 구현한 한양 도성을 둘러싼다. 비를 불러오는 용들에 대한 제사인 오룡제다. 이 제사는 사흘 동안 이어진다.

다음으로는 한강의 섬인 저자도에서 용제를 지낸다.   마 이 의례에는 도사(道士)들이 참여해 도교 경전인 용왕경」을 외웠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전진교, 정일교, 천사도 같은 교단 도교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공식종교 영역에서는 도사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침호두를 시도했다. 용이 살고 있다고 믿는 곳(박연폭포,광나루)에 호랑이 머리를 던져 넣는 의식이었다. 이것은 용의 천적인 호랑이 머리를 던져 용을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아무리 봐도 유교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 기우 절차는 계속 이어진다. 다음으로는 '작은 용'인 도마뱀을 괴롭히는 의식이다. 창덕궁 후원, 경회루, 모화관 연못가 세 곳에서 도마뱀을 항아리 속에 띄운다. 그리고 푸른 옷을 입은 동자 수십 명이 버들가지로 항아리를 치고 징을 울리면서 외친다.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여 비를 퍼붓게 하면 너를 놓아주겠다."

이 흥미로운 과정이 국가 제사임을 나타내는 것은 관과 홀을 단정하게 갖춘 채 옆에 서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현관과 감제들이다. 이 관리들의 원래 책무는 신에게 잔을 올리고 의례 절차가 매뉴얼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감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디오니소스적 축제에서 그들의 역할은 그저 동자들이 하는 일을바라보고 있는 것뿐이다.'

162쪽 조선 후기의 기우제

'국가 기우제에서 무당들의 입지는 점차 추락했다. 아쉬울 때 불러 서 기도하게 하고는 막상 비가 내리면 내쳐진 것이다. 권도의 논리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주나라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이라 정당화 되었던 무당의 기우제는 1745년(영조 21)에 이르러 완전히 폐지된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유교의 독자적인 기우제 절차가 거의 완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총 12차에 이르는 기우제 매뉴얼이 완비된다.

1차: 삼각산, 목멱산, 한강
2차: 용산강, 저자도
3차: 풍운뇌우, 산천, 우사
4차: 사직, 북교
5차: 종묘
6차: 삼각산, 목멱산, 한강
7차: 용산강, 저자도
8차: 풍운뇌우. 산천, 우사
9차: 불교, 모화관, 동자기도
10차 사직 경회루동기기도
11차 : 종묘, 춘당대, 동자기도
12차: 오망토용제

새로운 기우제의 상당 부분은 기존의 기우 장소를 답습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무당이나 승리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았다. 호랑이 머리를 물에 던지거나, 도마뱀을 괴롭히는 절차도 사라졌다. 유교식 제사, 즉 정도만으로도 신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명이다. 그러나 고대적 잔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아이 기생들에게 비를 빌게 하는 절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특히 마지막까지 문제가 된 것은 오방토제였다. 이것은 흙으로 용의 모습을 만들어 채찍으로 때리면서 비를 강요하는 의식이다. 비가 오지 않는 것은 용이 게으른 탓이니 맞아서라도 비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1차부터 11차까지 모든 제사 수단을 동원해도 비가 오지 않을 때 사용하는 마지막 수단이었지만, 신에 대한 불손한 행위로 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1753년 영조의 명령으로 이 의례는 금지되지만, 기록을 살펴보면 19세기까지도 이어졌다. 급하면 수단이나 원칙 같은 건 내버릴 수 있는 것이 종교 의례의 세계다.'

기우제 장면을 자세히 넣은 사극이 나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교는 전래 종교인가 토속종교인가? 

190쪽 '근대적 민족 개념은 땅과 혈통의 개념을 중시한다. 그러나 전근대 유교 엘리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적 기원이었다. 만약 무속이 오래된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중국에서 온 것이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무당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상고시대를 다루는중국 문헌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반면 근대 지식인인 이능화는 한국의 무속을 은나라가 아니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와 같 은 비(非) 한족 국가들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지역들이 본래 한국의 옛 영토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속은 외래 종교에서 민족종교로 탈바꿈하게 된다.'

내 생각에는 무속, 샤머니즘은 사피엔스라는 인류의 공통된 문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문명 초기에는 샤머니즘의 종교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무당에 대한 기록'-이것은 한문으로 기록된 것을 의미할 뿐이다. 글자가 발명 된 이후에 쓴 그 전에 대한 기록은 소설과 상상에 대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샤머니즘의 기원은 한문으로 된 기록보다는 고고사학적 검증이 더 현실적일 것 같다. 

 

삼척의 오금잠제  : 금비녀를 숭배하는 삼척의 토속신앙

   동해안을 여행하다보면 동해안에는 아직도 무교의 영향이 꽤 크다는 것을 느낀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38131


결론 

251쪽 '민속종교의 무대 위에서는 유생도 무당도 의례의 주도권과 영적 권위를 놓고 경쟁하는 각각의 종교 전문인일 뿐이었다. 이 조건 속에서 유자는 사회적 지위와 권위에 있어 우위에 있었고, 무당은 광범위 한 민중의 종교적 심성과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더욱 익숙하고 적합 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국가 의례 체계에 포섭되어 있어 유교의 침투가 용이한 성황, 산신 등의 지역신에 대한 의례에서는 유자의 장악력이 커져갔다. 그러나 망자의 영과 죽음의 세계에 대한 접근권에서는 무당의 우세가 유지되었다. 결국 민속종교 무대에서 조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교화'를 완수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조선이란 왕국은 정말 특이한 나라이다. 강대국 옆에서 500년을 버텼다. 아마도 세계사에서 5백년이 같은 왕실(그리고 중앙집권체제)로 유지된 역사가 드물 것이다. (초창기 부족연맹제 였던 것 같은 신라와 19세기까지 봉건제를 유지하던 일본 왕실 제외하고). 물론 조선도 중간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나라가 망할 뻔한 위기도 있긴 했고 전쟁을 후  왕실은 유지했어도 그 특성은 조금 변한 것 같지만 그래도 역시 중앙집권체제는 건실했다.

 보통 한 왕국의 성립을 보면 완전 초기에는 일단 땅과 인구를 확보하고 국가 시스템을 정비한다. 그리고 그 시스템이 어느 정도 안착이 되면 그 안정성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시 이웃나라를 침공하거나 무역 활동을 넓힌다. 조선은 이  두가지를 할 수 없는 나라였다. 옆에 중국이 있으니 옆으로 국토를 넓힐 수도 없고 상공업을 천하게 대했으니 무역을 일으킬 수도 없었고 공업에 대한 잠재동력이 없었다. 기후에 좌우되는 농업국가여서 땅을 새로 확보하지 않는 한 농업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도 없었다. 나라 땅의 대부분이 산지라 농지를 새로 확보하기도 힘들었다. (물론 간혹 간척 사업도 했지만 미미했다.)

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군사를 일으켜 다른 나라를 침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아마도 군사, 경제력도 문제지만 전쟁시 문관이 무관보다 할 일이 없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을 수도 있다. 물론 효종 때 북벌을 논의 했지만 내 생각에는 그냥 정치적 구호였던 것 같다. 

 결국 건국 후 국가 시스템이 안정화 된 이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내부에서 밥그릇 빼앗기 일 뿐이었다. 정부에 참여할 정도의 상위 유학자들은 당쟁으로 자신들의 쉐어를 높이려 했고 그 마저 정부에 참여할 수준이 안되는 상대적 하위 유자들은 종교의례쪽으로  자신들의 쉐어를 높이려 했다. 

초기에 어느 정도 '불가지론자'의 견해를 가졌던 유학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불교와 무교의 '초월적 영역'로 그 기세를 확장했다. 

결론은 밥그릇 싸움이라는 것. 그리고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종교의 밥그릇 싸움은 계속 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언급되었던 '불교내 성상 파괴'에 대해서는  나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어느  선사가 목조 불상의 태운 이유는 어떤 이념적 행위라기보다는 그냥 '추워서'이다. 종교적 상징과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운동'이란 다수의 사람들이 반복적인 행위를 하는 것인데 불상은 불태운 것은 추워서 죽을 것 같아 불태운 것이고 그 다음에도 이런 행동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또한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같은 과격한 문구도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부처님 마지막 가르침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나 같은 불자는 추워서 불상을 태웠다는 선사의 이야기에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으며 또 대웅전에 가서 정성스럽게 절하는 나 자신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기독교의 성상파괴 운동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83XX25200024

            https://en.wikipedia.org/wiki/Iconoclasm

            https://en.wikipedia.org/wiki/Girolamo_Savonarola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성직자인 '사보나로라'는 카톨릭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르네상스 시대의 카톨릭 미술품을 엄청 불태웠다. 그래서 종교에 상관없이 르네상스 시대 성화를 좋아하는 나는 이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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