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박물관 견학은 왜 그리 지루하고 재미없었을까? 아마도 박물관 견학 시 늘 따라다니던 “관람 후 리포트 제출”이란 묵직한 부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랬던 내가 박물관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오래전 TV로 방영되어 큰 화제를 모았던 “꽃보다 할배”란 프로를 통해서였다. 대만여행 중 출연진이 들렀던 대만의 “고궁 박물관”을 보면서 저런 데 꼭 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워낙 편집을 재밌게 한 면도 있고, 출연진의 감탄과 함께 살짝 공개되었던 유물이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었다. 결국, 그 다음해에 뜬금없는 대만 여행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너무 사람이 많이 몰리는 주말에 들른 데다, 사전지식 없이 유물을 감상하다 보니, 사진 몇 장밖엔 남는 게 없었다. 그 후 우리나라의 이런 저런 박물관이나 유물 전시회를 기웃거려 보았으나, 박물관 전시에 대한 지식이 워낙 전무 하다 보니, 들인 시간이나 노력에 비해 남는 것이 별로 없다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그런데, 반갑게 “박물관의 최전선”이란 책을 발견하면서, 박물관 관람의 친절한 안내서를 만나게 되었다.
저자는 현재 “박찬희박물관연구소” 소장이다. 호림박물관의 학예연구원으로 근무하다 퇴직 후 육아에 몰두하기도 하고, 그 후엔 방랑하듯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이 책을 기획했다고 한다. 이 책의 주 무대는 국립중앙 박물관과 호림박물관이다. 전문적인 지식도 있지만, 저자의 이야기와 경험이 많이 들어가 있어, 박물관을 관람하는 일반인으로서 특히 더 가깝게 느껴진다.
책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박물관과 유물을 소개하는 책답게 많은 유물과 박물관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어, 책을 읽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느껴진다.
1장 에서는 독자에게 그동안 그 쓰임새를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 잘못 알고 있던 유물의 다양한 쓰임새를 소개하며, 유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첫 장에 소개된 신라의 금관은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얼굴에 씌운 마스크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학설이 있다고 한다. 물론, 머리에 쓰는 것인지, 죽은 자의 얼굴을 덮었던 것인지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상상의 나래를 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유물을 대하는 또 다른 경험을 하게 해 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대동여지도도 그 실제 크기를 직접 만들어 보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크기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라게 된다고 한다. 지은이가 학생들과 함께 실제 크기의 대동여지도를 만들고, 높은 곳에 올라가 완성된 지도를 보고 탄성을 질렀던 경험담은 무척 흥미로왔다.
백자 항아리 중 탯줄을 보관하는 태항아리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렇게 낯선 유물들은 그 쓰임새를 알게 되면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그려져 새로운 지식을 쌓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 구석기 시대의 주먹도끼를 실제 만들어 보는 체험을 하면서, 인간의 ‘생각하는 힘’에 대해서도 깨닫게 된다.
생각나는 대로 깨뜨린 게 아니라 생각대로 깨뜨려 면을 만들고 날을 세웠다.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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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은 박물관이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호림박물관의 신사분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예를 들어 건축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박물관을 구성하는 땅의 역사와 박물관 건물의 상징, 동선” 세 가지를 들고 있다. 박물관 건축을 제대로 답사하는 방법도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다음으로 전시실과 친해지는 방법을 소개하는데, 전시실에는 전체주제, 중간주제, 소주제로 나뉘어 있고, 그런 주제를 생각하며 감상하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주제는 보통 그 전시실의 이름이 된다. 특별히 중요하거나 부각시켜야 할 유물은 눈길이 집중되도록 배치한다. 또는, 진열대를 높여 전시하거나 다른 유물과 간격을 벌려 홀로 전시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특별히 중요한 유물은 독방을 쓴다. 박물관 전시실을 감상하는 순서는 설명판을 읽고 조명을 살펴보고 진열장 안의 장치들을 눈여겨 보라고 한다.
유물도 사람처럼 움직인다는 사실은 또 다른 흥미로운 주제다. 유물이 움직일 때 안전을 위해 펼치는 작전은 흡사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다. 보험을 들고, 포장부터 운송, 그리고 다시 포장을 벗고 새로운 장소에 전시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숨죽여 애를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그 크기가 커서 이동에 제약이 많았던 “철조 서가여래 좌상”이나, 유랑의 역사를 마침내 거의 100년만에 끝낸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숨겨진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우면서 짠하기도 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기획전시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온양민속박물관, 국립기상박물관은 저자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전시실과 공간들로 소개하는 곳들이다.
박물관에도 슈퍼스타가 있다고 한다. 그 중 최고는 조선 초기 화가 안견의 작품 ‘몽유도원도’라고 한다. 일본 덴리대학을 설득해 딱 9일만 전시되었다고 하는데, 엄연히 우리나라의 유물인데 일본에게 사정해서 전시해야 한다는 현실이 슬프게도 다가온다. 또 다른 슈퍼스타는 ‘세한도’. 그 외에도 ‘반가사유상’ 감상법, 세밀의 극치를 자랑하는 ‘보현행원품’. ‘태평성시도’등이 소개된다. 고려청자 비색의 찬란함, 백자 달항아리의 자연미등도 설명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박물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이제는 유물로 남았으나, 그것을 만들었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도공들의 고단함과 눈물을 이야기 한다. 일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못하고, 경복궁 뜰로 이사를 오게 된 많은 탑들의 사연 또한 애절하다. 중앙 박물관에 전시된 압도적 크기의 괘불의 쓰임새는 원래 사찰에서 “야단법석”의 행사를 할 때 걸어 두던 불화라고 한다. 장소에 따라 사람들이 그것을 대하는 느낌과 인상이 변한다. 사찰에서의 괘불 앞에서는 사람들은 소원을 빌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괘불 앞에서는 깊은 감동을 받는다.
마지막은 유물이 아닌 사진으로 보는 근현대사의 박물관을 조명한다. 특히, 세장의 사진을 사진이 촬영된 맥락으로 보면서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광성보 소 돈대 전투”, “수자기 앞에서 사진을 찍은 미군들”, “메켄지가 촬영한 의병” 이 세장의 사진이 우리에게 전하는 역사적 의미를 우리는 기억해 둬야 한다. 이름도 모르고, 직업도 모르지만,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만은 않았음을...
상황이 여의치 않아 박물관 견학이 쉽지 않은 요즘이지만, 이 책의 안내를 따라 꼭 다시 한 번 박물관을 찾으리라 다짐 해 본다. 이제 박물관은 틀림없이 나에게 다르게 다가 올 것 같다.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