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책에 온전히 집중해서 읽지 못하고,
읽고난 후에도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노안이 와서, 나이가 들어서 등등 갖다붙일 핑계는 많았지만
예전처럼 책을 온전히 즐길 수 없다는 아쉬운 마음은 달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책을 어떻게 읽는가"에 대한 책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어려운 책을 읽고 써서 공감을 하지 못했고(내가 못읽어봤으니...),
또 어떤 사람은 책하고 너무 상관없는 자기 얘기만 해서 실망스러웠고 그랬다.
그러다 한승혜 작가의 글을 만났다.
어떤 분야에서 일하던 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책을 많이 읽고,
거의 일반인(?)에 가까운 시각으로 책을 분석해줘서 좋았다.
전문가들의 글은 솔직히 일반인이 읽기가 어렵다.
심리나 철학 전공자들이 전문썰(!)을 풀기 시작하면 그부분은 슬쩍 넘어가면서
이정도 베이스는 있어야 리뷰를 쓰는건가 자괴감도 들었다.
제목이 낯익다 했더니 바틀비의 "저도 어렵습니다" 시리즈다.
이정모 관장의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을 읽은 기억이 난다.
다시 조금씩 읽기 시작한 소설에 대해 한승혜 작가는 어떤 감상을 썼는지 궁금했다.
아쉽게도 내가 읽은 책들이 별로 없었다.
나도 나름 읽는다고 읽는데 이렇게 읽어본 책이 없다니.
다시 한번 나의 독서패턴을 반성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한참 소설을 읽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소설을 읽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게 예전에 어른들이 말하던 "내 인생이 소설 같아서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던 시기였다.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다보니
별별 입장이 다 되어보게 되었다. 정말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책 자체도 잘 못읽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또 소설을 조금씩 읽어보게 되었다. 이유가 뭘까?
사람들은 왜 소설을 읽을까? 한때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에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을 때,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자극적이고 신기한 재미를 느끼고 싶을 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목적으로 소설을 읽는다. 심심하니까. 시간을 때우려고. 어떤 자극과 흥미를 찾아서. 나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 내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소설을 통해 만나며 대리만족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 사람들은 자신을 잊기 위해서뿐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도 역시 소설을 읽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이 경험했던 어떤 순간들, 감각들,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을 되살리고 싶거나 잊고 싶지 않아서, 혹은 잊고 지나쳤던 것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 과거에 두고 온 것을 잠깐이나마 다시 만나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을 말이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개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도 소설을 읽고,
그 반대로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도 소설을 읽는가보다.
어떨땐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책을 읽는 내 모습에 환멸을 느낄 때도 있다.
아무리 책 읽기 자체가 내 경험과 생각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책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순간순간 모든 것을 나의 입장에 대입하는 걸 느끼는 순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책을 읽고 있는 것인가, 이럴 바에야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 낫지 않나 책 읽기를 중단할 때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심해지는 이 증상은 온전히 책읽기에 몰두하는 것을 방해하곤 한다.
아마 저자가 말한 "자신이 경험했던 어떤 순간들, 감각들,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을 되살리고 싶거나 잊지 않고 싶다"는 감정이 지나쳐서 일지도.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점점 영미소설을 읽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도 해석이 가능해진다.
아무래도 영미쪽의 상황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SF소설을 재밌게 읽는다는 것.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인데 왜 그런걸까?
주제 자체가 미래의 어두운 면, 나이듦에 대한 공포 등이 들어가 있어서일까?
내 인식 깊은 곳에 들어있는 걱정스러움이 SF 소설에 투사되어 있어 공감이 많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소심하고 비겁하며 여러모로 부족한 내가 드물게 용감해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좋은 소설을 읽었을 때다. 훌륭한 소설을 읽고 난 다음에는 왠지 모르게 나를 드러낼 용기가 생긴다. 나의 뾰족함, 나의 무지함, 나의 나약함을 마주 볼 수 있게 되고, 왠지 그걸 타인에게 보여주어도, 그래서 설사 미움받을지라도 괜찮다는 마음이 생겨난다. 감추고 숨기기에만 급급했던 나에 대해 조금 더 말하고 싶어진다. 잠시 잠깐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상처를 감수하더라도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어느 틈에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만약 이 책에서 용기나 사랑이 느껴진다면 그건 모두 내가 읽었던 소설들 덕분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그럼에도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솔직하게 고백한다.
책을 읽으면 사람이 확~ 변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종교를 가지고 있어도 그 종교가 주장하는 관용과 용서가 부족한 사람이 많듯,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생각이 깊거나 바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 잊었지만 실낱같이 기억나는 구절이 나를 살게 하고, 나를 힘내게 하고, 나를 웃게하듯.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에 대한 명쾌한 산문집,
한승혜 작가의 <저도 소설은 어렵습니다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