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독서회에서 11월에 읽은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입니다. 금년에는 유난히 러시아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 같습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유래가 없는 긴 독백 형식으로 된 소설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주제의 밑바탕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앙드레 지드는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1. 화자는 매사에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드러내어 혼란스럽고 논리적이지 않은 말들을 쏟아 내면서 도저히 납득 되지 않는 돌발적 행동들을 합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한 여러분의 느낌과 생각을 나누어 봅시다.
2부로 구성된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1부는 어떻게 보면 자기 비하인 듯하면서 당시의 러시아 사회에 대한 작가의 날선 비판을 담았습니다. 지하실이라는 사회로부터 고립된 공간에 숨어 삶에 대한 불안과 사회에 대한 은밀한 증오를 독백으로 내뱉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와의 접촉을 차단하는 것으로는 못내 불안했던 모양으로, 2부에서는 친구 즈베르코프의 송별연에 참석했다가 자신과 타인에게 불쾌감과 고통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그도 모자라서 매음굴로 향하는 친구들을 따라나섰다가 만나게 되는 리자라는 여인에게 훈계조의 설교를 장황하게 늘어놓게 됩니다.
일련의 과정을 보면 화자는 다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혼자서는 자기비하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강한 자들에게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감추고 강한 척하며, 약한 자에게는 고고한 척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2. 인상 깊었던 장면이나 공감했던 부분이 있다면 이야기해 봅시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1부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대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런 대목입니다. “나는 의학이나 의사를 존경하고는 있지만 치료라는 걸 받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여태까지 받아본 적도 없다. 더욱이 나는 극단적인 미신가이다. 이를테면 의학 따위를 존경할 만큼 미신가란 말이다(나는 미신가가 되지 않아도 될 만큼은 충분한 교육을 받았지만 그래도 역시 미신가이다). 좋다. 오기로라도 의사의 치료 같은 건 받지 않을 작정이다.”
모두에서 간장이 나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병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어디가 나쁜지 확실히 모른다고 하면서도 치료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습니다만, 의사를 만났을 때 혹여 중병에라도 걸렸다는 것이 밝혀질까 걱정하는 심사가 감춰진 것 같기도 합니다.
최근의 질병관리의 핵심이 예방에 맞춰지고 있습니다. 늘 건강에 신경을 써 질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을 피할 수 없다면 가급적 일찍 발견하여 적절한 치료를 받음으로서 중병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몸이 보내는 이상신호를 애써 무시하지 않고 그때마다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병원은 갈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만, 병원을 멀리할 이유는 없습니다.
3. "이봐, 리자, 내 얘기를 해주려는 거야! 나도 어렸을 적부터 가족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놈이 되진 않았을 거야. 이런 생각을 자주 하곤 해. 사실 가정이 아무리 원만하지 못해도 어쨌거나 어머니 아버지인데 원수도, 남도 아니잖아.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사랑을 표시할 때가 있겠지. 그럼 어쨌거나 넌 자기 집에 있다는 걸 알 테고. 하지만 나는 아예 가족도 없이 자랐어. 그 때문에 이런 놈이.... 이렇게 무감각한 놈이 된 게 분명해."(p147,민음사. 2부, 6) 화자가 리자에게 한 말입니다. 고아라는 성장배경과 지하인의 삶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물론 양친 부모의 지원을 받아가며 성장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들을 제 때 배우고 익히는 것이 순탄한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어려운 처지를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화자가 지하생활자가 된 것은 다니던 직장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지하공간으로 고립시킨 것을 보면 스스로를 사회에 녹아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는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매음굴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결국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이라고 리자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부족함으로 초래한 현재의 상황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4. 모욕적인 환송회의 두 번 째 장소인 유곽에서 매춘부 리자를 만납니다. 그녀에게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후 주소를 알려주며 찾아오라고 하지만 곧 후회합니다. 하인과의 갈등 중에 갑자기 리자가 찾아오고 복잡미묘한 분위기의 시간이 흐른 후 화자는 리자의 손에 돈을 찔러 넣어 주지만 그녀는 책상 위에 그 돈을 두고 갑니다.
화자와 리자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화자는 리자에게 왜 돈을 주었으며, 리자가 그 돈을 두고 간 까닭은 무엇일까요
화자가 리자에게 건넨 돈도 결국은 친구 시모노프로부터 빌린 돈입니다. 화자가 리자에게 돈을 준 것은 자신이 리자의 앞날을 걱정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자가 그 돈을 두고 간 것은 화자가 살고 있는 지하실의 분위기로 보아 그 돈은 자신보다는 화자에게 더 절실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5. 화자는 인간을 계몽해주면 필연적으로 선량하고 고결한 인간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젖먹이같이 순진하다고 비웃으면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독립적인 욕망 하나뿐이다, 이 독립성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든,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간에. 거참, 대체 욕망이라는 게 뭔지...'(p44, 민음사. 1부 7)
라고 말합니다.
약 160년 전에 쓰여진 화자(작가)의 이 말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나누어 봅시다.
문예출판사 판에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독자적인 자유로운 의욕뿐이다. 이 자유로운 의욕의 대가가 아무리 비싸더라도, 그리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더라고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참으로 이 의욕만큼 처치 곤란한 것도 다시없을 것이다.(39쪽)”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각자의 의욕이나 욕망을 자유롭게 행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의욕이나 욕망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일상처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타인의 의욕이나 욕망을 꺾지 못하면 자신의 의욕이나 욕망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는 극도로 불안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서로의 의욕이나 욕망을 적정선에 맞추도록 조정하는 기전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교육 혹운 계몽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생각이 젖먹이같이 순진하다고 보는 작가의 생각이 옳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인간은 진짜 고통을, 다시 말해서 파괴와 혼돈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52쪽)”라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저자는 반어적으로 수정궁이라고 부르면서 냉소를 퍼부은 공산공동사회를 추구한다는 당시 소비에트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주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6. 지하로 부터의 수기를 읽은 후 느낀 점을 자유롭게 이야기해 봅시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작가가 당시 소비에트 사회가 명목상 추구한 공산공동사회의 추악한 이면을 20녁 가까이 지하생활을 이어온 화자를 통하여 반어적으로 비판했다고 해석합니다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현대사회에서도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고 고립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변명하는 구실을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구하려 할 수도 있다고 보여 우려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롬 그루프먼은 <희망의 힘>에서 긍정의 심리학이 세상의 난관을 이겨내는데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전독서회 이달 모임에서 읽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보니 최근에는 러시아 문학작품을 많이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변두리에 있는 지하방에 세 들어 살고 있는 화자가 자신의 처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전반부와 고립된 생활에 지친 화자가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가 갈등을 빚고 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를 가는 친구들을 따라 매음굴을 갔다가 만난 리자라는 여인과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후반부로 구성됩니다.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남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인간이다.”라고 운을 떼는 것을 보면 화자는 자존감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신이 충분한 교육을 받았고, 의학이아 의사를 존경하고는 있지만 치료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저 고집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대하여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있을만한데 실천적 인간을 부러워하는 속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아 그리고 보니 화자는 40살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40에 이르렀으면 사물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고 해서 불혹(不惑)의 나이라고 합니다만, 화자는 세상이나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앙앙불락(怏怏不樂)하고 있습니다. 관청에 다니고는 있지만 하위관리인 까닭에 생활에 여유가 없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녀를 부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는 하녀가 아니라 하인을 부리는 것으로 나와서 헷갈리기도 합니다.
후반부에 그동안 연락을 끊다시피하고 지내던 친구 시모노프를 만나러 집을 나섰습니다. 이런 그의 행동을 보면 지하에 처박혀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사는 것은 또 아닌 듯합니다. 시모노프를 만나러 갔을 때 친구들이 장교로 근무하는 즈베르코프라는 친구가 먼 지방으로 전속가는 것을 환송하는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자신도 참석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 친한 친구들도 아닌데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반동에서 나온 행동이 아닌가 싶습니가. 그리고 보면 화자는 충동적인 성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친구들은 화자에게는 통보하지 않고 모임을 한 시간 늦게 시작합니다. 화자는 결국 한 시간 넘게 친구들을 기다려야 했고, 그 점이 불쾌한 까닭에 모임 내내 불퉁거리고 술에 취하게 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 긴 건배사를 즐긴다고 하는데, 화자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술을 마실 때 보니, “우리들의 과거와 미래를 축보하는 뜻에서 건배하세, 우라아!(113쪽)”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앞부분은 건배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고, 끝에 덧붙이는 “우라아!”는 일종의 ‘건배’와 같은 구호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든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킨 화자는 친구들이 2차로 매음굴로 간다는 말을 듣고는 시모노프에게 돈을 꾸어 자신도 따라가게 됩니다. 이 또한 어려운 처지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충동적 행동의 일환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만나게 되는 리자에게는 이런 삶을 청산하는 것이 좋겠다는 설교조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을 보면 과시욕도 만만치가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찾아오라고 초대하기까지 합니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적 모티프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어쩌면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반사회적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분위기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전반에서 느끼는 바와 결을 같이 하는 느낌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이제서야 읽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언제나 읽을때 만큼은 부담스럽지만,
다 읽고 나면 마치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동시에 괴리감이 밀려온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언뜻 제목만 들어서는 난 수감자의 수기를 얘기하는지 알았지만,
막상 책을 접하고나니 다른 뜻의 지하수감자의 수기였다.
이 책은 흥미로운 지점들이 무척이나 많다.
수많은 사고와 고민을 만든다.
책을 읽고나서는 나란 존재는 어떤 인물인가? 나 또한 비슷한 상황이 있는지 가늠케 만든다.
실제 지하생활자처럼 우리는 본능과 이성사이를 오가곤 한다.
여자친구와 싸우는 도중에도 확김에 하는 동물적인 행동과,
그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정신적인 싸움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제를 해야 될 순간 나의 본능을 발휘함으로써 어쩌면 일이 해결될 수 있고,
반대로 오히려 악화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우리의 판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메뉴얼적인 공리주의적인 행동양식이 있다면, 그건 인간의 자유라 말 할 수 있는것인가?
사실 이책의 전체적인 틀을 공산주의와 비교해도 무관하지 않다.
그들의 사상과 개념을 개인에게 주입함으로써 한 개인을, 인간을 개조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은 자유롭게 생활하지만, 사상과 개념은 국가적인 신념을 따른다면
그들의 정신은 자유로운가?
또한 인간은 이성과 지성, 본능으로 나뉠 수 있는데
이성과 지성에 관한 여러인간들의 평균적인 표를 만들어 공리적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정의한다면 과연 그것이 올바른 것인가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부분으로인해서 모든사회주의학설에 대하여 극도의 증오를 품고
사회주의 이론에 의한 합리적 사회 통제를 개인의 노예화, 개성의 유린이라고 규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고난을 다 겪으면서, 한편으로는
인간의 내부에 공존하는 모순된 두개의 요소, 신성과 잔인성, 신성과 악마성, 인종과 반항의식,우월감과 열등감 등
이른바 이중인격을 발견하고, 온갖 방면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불굴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옮긴이는 말한다.
1부는 말그대로 지하생활자의 거침없는 토로와 의견, 알몸 날것 그대로의 논의로 이루어져 있으며
2부는 그 본능을 숨긴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욕망의 모습의 예들을 그린다.
2부를 보면서 느끼는것은 수 많지만, 그렇지만 한가지 개인적인 해석을 말해보겠다.
2부의 시작과 동시에 자신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걸 좋아하지 않을경우가 많아
책을 읽음은 물론 자신의 고뇌에 대해 굉장히 자신있어하는 모습이다.
주인공이 언급한 '로멘티시즘'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 왔다.
왜 그는 갑자기 뜬급없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지고 수도 없이 이야기를 할려고 하는가?
소설 중반부에 가면 그 이유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고상함을 앞세워 사람을 지배하려 한다고 말한다.
한없이 상대방의 영혼을 지배하려 들었다.
결국 그에게 주변사람들이란 존재는 그저 그에게 이기고 항복시키기 위한 데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위의 부분들을 내게는 무척이나 깊은 고민을 안겨준다.
왜 그랬을까?
나의 개인적인 해석으론 자신의 유능함과 지식을 우리는 어느누군가에게 본능적으로
알리고 자랑하고 얘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정말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일부로 내색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식은 뿝어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기에 주인공에게 로멘티시즘은
자신이 이런 매력적인 사람,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발설하고 싶어하는 그의 욕망이다.
한가지 더 말하자면 우리는 지식인이랍시고 항상 내색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아는척을 함과 동시에 그 오류범위를 줄여나간다.
즉 지식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실수도 고찰할 수 있다는 것인데, 지식이 많은 사람은 내색하지 않는다라는
우리의 무의식에 숨겨진 공리적인 이론하나때문에 우리는 발전이 늦을 수 있다.
필자도 실제 그런적 있다.
책을 계속 읽음과 동시에 새로운 단어를 알아내고, 그 단어를 어쩌다 보니 사용하게 된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있느냐?
나는 그 말에 발끈하면서도, 침착하게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을 얘기하지만 그 역시 정확한것이 아닌
그 말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을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 이유에서 더이상 침착하지 못할망정 열등감으로 변질되고 되려 그 뜻은 어찌되었든 상관없이
이기려고 드는 목적으로 바뀐다.
위와 같은 상황을 겪다보니 내게는 말을 하는것을 아끼게 되었다.
그러나 아끼게 되니 혼자만의 고민과 고독이 오히려 더욱 줄어 들게 되었다.
이유는 내가 무엇이 잘못된건지 겪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버린다.
둘 중 한가지를 택해야 됬다.
지식이 얕은 인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고상한척 하는 지식인처럼 보일 것인가?
나는 지식이 얕은 인간이 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떠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점점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단어들과 달리 새로운 단어들이 그간 내머리에 축적되어 그단어가 텨나올려고한다.
그 말을 나는 그냥 입밖으로 올림과 동시에 나는 개망신을 당할것이다.
그러나 계속 사용하지만, 어느 순간 남들의 따가운 시선에 나는 점차 말을 할때 단어의 정리가 안되고
말을 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변해 갔다.
위의 말이 길어졌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름 아닌
사용해봄으로써 시행착오를 느끼고 파괴되어야지만 구원되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의욕은 아무리 비이성적인 형태로 나타나더라도 의식의 힘으로 그것을 저지할 수도 없거니와
무엇이든 정답이 없든 어떤 행위를 지도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지하생활자처럼 우리는 공상으로 빠지면 안되겠지만
나에게 이 책은 다름아닌 우리의 본능, 그리고 우리를 수많은 의심을하고
논리를 반박을 하면서 얻는것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의 의심을 차단하는 사회주의적 이론에 반박한다.
갑싼 행복과 고결한 고민중 과연 어떤것이 좋은것인가?
갑싼 행복이란 어쩌면 평균치에 맞추고 사회가 원하는데로 산다면 편안하다.
그치만 고결한 고민은 끝내 나자신을 괴롭힘과 동시에 발전적인 태도를 할수 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능력이고 무기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느낀것은
어쩌면 그에게도 자신의 지식을 마음껏 토론하며, 산생활을 병행했다면
그의 말처럼 정말 위대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까 한다.
물론 위의 리뷰는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고민거리를 한가득 던져주고 가는 고귀한 책이다.
도선생의 작품 목록을 보면 처녀작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쭉 이어지다가 중간에 10년정도 끊기는 지점이 있다.
그 기간이 바로 군대에 징집되고 시베리아 유형을 갔다오는 기간이다.
그리고 나온 작품이 지하생활자의 수기이다.
이 이전과 이후의 글들은 사뭇 다르다. 보다 심오해진다.
유명한 대문호의 글이라고 처음부터 끝내주는 건 아니다.
후반기에 쓴 작품들에 비해 아무래도 초기 작품들은 나이도 적고 경험도 적어서 그런지 깊이가 덜하다.
도선생의 유명한 작품들은 거의 이 작품 이후에 나왔으며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