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 2층에서 뛰어내려 허리를 삐는 바람에 1주일가량 꼼짝도 못 한 적이 있다- 새로 지은 건물 2층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같은 반의 한 녀석이 농담으로 ‘아무리 잘난 체 으스대도 거기서 뛰어내릴 수는 없을 걸, 이 겁쟁이야.’ 하고 자꾸만 놀려 댔기 때문이다(본문 중에서).
초등학교 3년을 시골 외가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 시절 난 등하굣길에 물 빠진 방죽 길을 거닐곤 했다. 내가 그 길을 고집했던 이유는 오며가며 어른들과 부딪히기 싫고 부산스런 머슴애들과 대거리하기 귀찮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방죽 길을 메우고 있는 자연과의 대화를 위해서였다. 살아보겠다고 돌멩이 틈새를 비집고 불쑥 자라 오른 들풀과 들꽃들, 거의 사라진 쫄쫄대는 물로 몸을 적시는 작은 청개구리들, 울퉁불퉁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던 자갈들... 내가 만나는 어른들과 머슴애들의 말은 죄다 먼지 풀풀 날리는 소음으로 다가오는데, 왜 길이라고 볼 수도 없이 푹 꺼진 그 방죽 길에 생겨난 모든 것들은 다 살갑고 다정스럽게 다가오던지... 소곤소곤 거리는 자연의 재잘거림을 떨어져서는 너무 그립고 불안해서 잠시도 참아내지 못했던 그 시절의 나는 또래 친구들에게는 이해받지 못 하는 부류이자 장난 걸고 싶은 아이였나 보다. 그렇다고, 내가 장난에 말려들었다고 해서 순전히 당하기만 한건 아니었다. 딴엔 오기와 강단도 있었으니까.
그날도 방죽 길로 하교하던 나를 향해 머슴아들이 외쳤다. 야! 넌 왜 맨날 거 밑으로만 댕기냐. 거기가 그렇게도 좋으냐. 돌멩이가 니 친구라도 되냐. 돌멩이라면 요기도 있는디, 우덜이 발로 차서 돌멩이 보내주끄나. 그럼 난 지지 않고 딱 한마디 던졌다. 발로 차든지 덴지든지 니들 맘대로 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키득거리던 머슴애 하나가 발로 찬 돌멩이가 굴러 떨어져 내 머리를 강타해 피가 철철 흘렀다. 상황판단할 리 없는 머슴애들은 이미 그 자릴 떠난 뒤였고, 나는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은 채 눈물만 찔끔거리며 외가에 도착했다. 피와 눈물범벅이 된 내 모습을 본 외삼촌은 이내 화가 났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도대체 언눔의 자슥이 니 머리를 일케 맹글었냐. 울지 말고 얘기혀 봐라잉. 사실 그 때 내가 운건 깨진 머리와 피 때문이 아닌, 그 사건으로 인해 들풀과 들꽃과 돌멩이와 청개구리와 대화를 하지 못한데 있었다. 그러나 삼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머리에 피를 보게 만든 그 머슴애를 끝끝내 찾아내서는 아랫도리를 벗긴 후 볼기짝이 피멍이 들 정도로 패주었다.
다음 날 아무 생각 없이 교실에 들어섰더니 칠판이 꽉 찰 정도의 커다란 글자로 ‘덴푸라 선생님’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덴푸라를 먹으면 그렇게 우스운 것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학생 한 녀석이 ‘하지만 네 그릇은 좀 너무하잖아유.’하고 말했다- 10분 뒤 다음 교실에 들어가자 ‘덴푸라 국수 네 그릇. 단 절대 웃지 말 것.’이라는 글이 칠판에 쓰여 있었다(본문 중에서).
문득 소세키의 도련님과 어린 시절 나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에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실소를 터뜨렸다. 이유 없는 빈정거림과 불의 앞에서는 결코 참지 못한 덕인지 탓인지 도련님은 번번이 당한다. 그러나 중요한건 정작 본인은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다리가 부러지고 손가락이 베이고 심지어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 학생들에게조차 수차례 놀림을 받아도 말이다. 거기까지라면 그나마 다행일까. 경단과 국수 한 그릇(아! 도련님은 국수 네 그릇을 해치우는 바람에 다음날 전교에 소문이 퍼져 놀림거리가 된다)도 못 먹게 되는 건 약과이고, 이제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일파만파 퍼지는 바람에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는 상태에 처한다. 마치 그의 주변을 배회하는 잠복근무조라도 있는 듯이. 이제 도련님은 할 일 없고 참으로 터무니없어 뵈는 그 잠복근무조의 비열함과 옹졸함에 치를 떤다. 유독 자신의 행위에 배 나라 감 나라 참견하는 치들을 향해 이를 간다. 정확한 배후를 알지 못하는 데도 어쨌든 그는 투덜댄다. 그들이 자신에게 그럴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으므로 도련님의 성냄은 매우 정당하다. 아니, 국수와 경단 먹은 것과 온천에 옴서 감서 빨간 수건을 목에 걸고 다닌다고 해서 타인에게 무슨 피해가 있단 말인가.
-자네는 그처럼 솔직하니까... 그러니까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인데(빨간 셔츠 교감)/어차피 경험은 부족합니다. 이력서에도 써 두었지만 23년 4개월 살았으니까요(도련님)/아, 그렇기 때문에 생각지 않는 데서 이용당하는 일이 있을 거란 말 일세/정직하게 살면 누가 이용을 한 대도 무서울 것 없습니다(도련님)/-못되지 않으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그는 믿는 듯하다- 이럴 바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거짓말을 하지 마라’ ‘정직하게 살아라’ 라고 가르치지 않는 편이 좋다(본문 중에서).
세상은 왜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찔벅찔벅 건드리는 걸까. 옳은 소리에 귀를 닫고 아첨하는 소리에만 귀를 여는 걸까. 내가 초등학교 3년을 외가에서 보낸 이유 역시 담임선생님께 밑보였기 때문이다. 내 나이 일곱에 아빠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엄마는 우리 세 자매를 키우시느라 늘 동분서주하셨다. 그러니 우리 엄마는 다른 집 애들 엄마처럼 개소주네 쌀 한가마니네 돈이네 바리바리 싸들고 딸래미들 담임을 일일이 쫓아다닐 여유가 없었던 거다. 거기다 모르긴 해도 나의 당돌함이 더해져 담임의 미움을 샀을 만한 일이 있긴 있었다. 실은 이 책의 도련님처럼 당시 나는 내가 했던 행동과 말들이 담임에게 그렇게 미움을 받을 만한 일인지도 몰랐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내가 아니더라도 손든 아이들이 부지기수인데 왜 나까지 꼭 손을 들어 꼭두각시 앵무새처럼 선생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지, 추기 싫은 춤을 억지로 춰가며 부모님께 거짓 몸짓으로 미소를 드려야하는 것인지, 난 그런 일들이 싫었고 그래서 안했다. 신학기 부모참관수업에 다들 예쁜 몸짓으로 흔들어대는데 나만 그대로 멈춰라 자세로 있던 것이 화근이 되었고 참다못한 담임의 꾸중을 들었던 엄마는 발끈하셨고 두 분은 서로 격렬히 말다툼하셨고 엄마는 교육청에 담임을 신고하셨고 나는 시내 어느 초등학교서도 안 받아줄 거라 했고 그래서 시골 외가댁으로 보내졌다.
말솜씨 좋은 사람이 착하다는 법은 없다. 공격을 당한 쪽이 반드시 악인인 것도 아니다. 겉으로는 빨간 셔츠(교감)가 옳지만, 겉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뱃속까지 상대방의 마음에 들게 만들 수는 없다. 돈이나 위력이나 이론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면, 고리 대금업자나 경찰이나 대학 교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남의 호감을 사게 되어야 할 것이다(본문 중에서).
유순한 끝물호박(영어 교사)을 내몰고, 부하 교사(역시 끝물호박 선생을 칭함)의 애인을 빼앗는 등 직분과 도덕을 망각한 빨간 셔츠(교감)와 미술교사. 비분강개한 도련님은 이제 불의에 맞서 거센 바람(수학 교사)과 함께 복수일전을 펼친다. 마치 어린 시절 내 외삼촌이 머슴애의 볼기짝을 앙칼지게 패준 것처럼 엄마가 촌지를 바치지 않았다고 날 미워한 담임을 처단한 것처럼, 도련님과 거센 바람 역시 빨간 셔츠(교감)와 아첨꾼(미술 교사)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러준다. 이 부분에서 나는 통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어찌나 속이 다 후련하던지. 마치 적을 KO펀치 일타 한방으로 쓰러뜨려버린 기분이었달까.
신문사 측과 한패가 되어 도련님과 거센 바람을 학교에서 몰아내려던 잔당들은 이제 침묵한다. 그러나 아주 잠깐일 것이다. 왜? 곧 온순한 끝물호박 선생이, 패가망신한 소녀 가장이, 또 다른 아첨꾼이, 할 일 없이 괴롭혀대는 잠복근무조가 그 잔당들 곁을 채울 것이기에. 이 괴상망측한 삶의 가르침을 소세키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나열해 보인 것이다. 잔당들과 결탁한 그 혹독한 가르침이 가해오는 채찍의 고통과 사랑의 매 앞에 얼마나 당당히 맞설 수 있을까 혹은 의연할 수 있을까를. 그런가하면 지뢰로만 가득해 보이는 이 위험천만한 세상에, 소세키는 일말의 희망을 던져본다. 그 파동이 몰고 올 두 번째 세 번째 희망의 연쇄 고리를 스리슬쩍 숨겨놓은 채, 응큼하게도 그의 묘사는 결말 직전까지도 가차 없다. 이래도 참을 수 있겠어? 정말 못 살아 먹겠지? 그냥 포기하지 그래? 이렇듯 더 깊은 늪으로 밀고 밀어 넣는 듯 보이지만, 실은 구원의 동아줄 하나를 감춰 놓고선 태연하게 능청을 떤다.
온갖 처방전으로도 퇴치되지 않는 메뚜기 떼로 득시글거림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돌진하는 무소의 뿔이, 바로 우리의 도련님이라면, 세상물정 모르고 지기 싫어하고 때때로 제멋대로이기까지 했던 그의 무모한 배짱과 옹고집은 바로 처방전이다. 신혈이 나고 토하고 기침하는 잠복기를 거친 후의 처방전은 대개는 면역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이제 두 번의 신혈과 구토와 기침은 한 번으로 줄어들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 단, 그 잠복기동안 내 이마에 손 한 번 더 얹어주고 얼굴 한 번 더 들여다봐주고 땀 한 번 더 닦아줄 이가 있다면 우리의 병은, 세상은 좀 더 빨리 치료될 것이다. 바로 그 때, 도련님의 외짝이 뿔을 안쓰러워한 기요할머니가 기꺼이 그의 나머지 뿔이 되어 비로소 두 개의 뿔로 짝이 되어준다. 바로 저 기요할머니가 소세키가 숨겨놓은 히든카드, 희망임을 혹 당신은 눈치 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