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 특유의 철학과 매력을 동시에 맛볼 수 있었던 작품.
특히 너무나 인간적이고 솔직한 표현들을 읽다 보면
어떤 예리한 부분에 폐부를 정확히 찔려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데군데 살포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몇몇 유머러스한 묘사에 한편 놀라게도 된다.
몇 개 예를 들자면,
"가령 친구의 마누라는 신성불가침이었지요.
다만 그런 경우엔 아주 솔직하게, 며칠 전에 그 남편에게 우정을 갖기를 그쳐버렸답니다"
"어여쁜 단역 여배우와 최초의 랑데부를 갖기 위해서라면
아인슈타인과의 대담을 열 번이라도 마다했을 것입니다"
"성공의 겉모습은 남의 눈에 잘못 띌 경우엔 당나귀 같은 놈의 비위라도 건드리게 되거든요."
등과 같은 것들인데
요즘 시대에 걸맞은 유머러스함은 아니지만
난해하기만 할 것 같다는 카뮈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일면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준 문장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은
아마도 이게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심판받지 않으려고 황급히 남을 심판하는 겁니다.
하는 수 없지요.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
마치 인간 본성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듯 천연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자기에겐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각 분야마다 고소와 발뺌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고 있어서 그런가
더 와닿는다.
나는 비교적 '한가한 사람' 들을 자주 만나는 일을 한다. 덕분에 소일거리 삼아 '이야기'를 풀
어놓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상당히 많은 내용들을 귀에 담았는데, 그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
하는 것은 한때 자신의 '과거' 를 이야기 하는 과거의 이야기... 즉 한 시대를 살았던 어느 인간
의 '인생'의 이야기였다. 물론 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사회에 대한 대단한 공헌도, 반대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악행도 없이, 그 스스로 조용하
게, 아니면 있는 힘껏 어려움을 가로지르며, 나와 그 속의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아 온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인생은 격정의 파도는 있을지 언정 '태풍의 격렬함'은 덜하다, 그러나 이 카뮈
의 전락은 다르다. 이 책은 그야말로 나락으로 추락한 어느 한 인물의 자화상이자, 그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의 역활을 한다.
그렇다.이 책의 내용이 표현하는 것은 영광속에서 살다, 나락으로 추락한 한 인간의 인생이다.
암스테르담 한 구석의 술집을 중심으로 지식인'클라망스'가 풀어놓는 그의 이야기는 정의를 수
호하던 과거, 잘나가던 시절의 기쁨과 더불어, 어느 사건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
는 처지가 되어버린 '오늘' 에 이르기까지의 크나 큰 인생의 굴곡이 그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여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목격하였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
로, 그는 사회의 지탄을 받는다. 그러나 그 비난이 과연 정당한 것이였을까? 앞.뒤 상황에 관
계없이 '자살을 방조했다.' 라는 것만 들여다 보면, 그의 행동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그와 여인의 관계, 이미 여인은 자살을 마음억었다는 조건, 제3자로서 물에 빠지
는 소리를 '자살'로 판단하지 못한 클라망스의 선택 이 모두를 생각하면, 그는 악의있는 범죄
를 저지른 것도 아니요, 눈 앞의 죽음을 방조한 냉혈한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비난
한다. 그리고 어느 사람들은 '나름 정의감' 에 불타, 클라망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또 그것
을 이르며 '자신의 정의' 라 부르며 세상에 자랑하기도 한다.
객관성을 상실한 비난, 그리고 단순한 선택의 실수가 죄악으로 둔갑한 이 상황에서의 정의는
분명히 정상적인 정의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때문에 클라망스는 말한다.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 모두가 이미 죄인이라고. 그리고 실제 알베르 카뮈가 살았던 그시대의 전쟁,파괴, 나치
스, 레지스탕스와 그들에 의해 피어나는 초연과 죽음의 열풍이 불어닥치는 이 세상은 분명 과
거의 낭만주의를 날려버리는 추악한 죄악의 시대의 도래였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카뮈의 '클라망스'는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하거나, 해결하는 등의 소심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함은 물론, 이 세상의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가 참
회자 그리고 심판관으로서, 이성을 가진 인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타인을 단죄하기 이전
에, 나 자신의 죄부터 돌아보고 그 죄를 갚으라' 혹 카뮈는 이러한 교훈을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 자신의 추악함을 감춘 주제에, 정의로운 척 행동하고, 타인을 쉽게 비난하는
자들이 이 세상엔 너무나도 많다. 또한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정의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어
느 한 사람을 추락시키고, 또 그것을 보며 즐거워 하는, 즉 마음속에 악마를 품은 소인배일 뿐
이다. 진정한 정의 를 행하는 방법... 이 책에서 그것은 나 자신과 모든것을 용서하는 그 순
간을 빛내는 것이다.
" 여보세요. 폐가 안된다면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주인공 클라망스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끝까지 그의 독백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는 프랑스 변호사로 자신이 매우 균형 잡힌 사람이며,
그로 인해 자신의 삶마저 완벽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런 그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센 강변에서 그의 등 뒤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주변엔 아무도 없다. 그 뒤 클라망스의 삶은 조금씩 균형을 잃어
간다.
자유롭고 강인하며, 누구보다 현명하고, 겸손하며, 총명한 머리로 자신의 삶을 사랑했던 클라망스는 자신의 등뒤에서 울려퍼졌던
웃음소리로 인해 문득 기만적인 자신의 삶을 깨닫는다.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모든 말들이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을 얻기 위해 그저 모든
것을 스치며 살았던 것뿐이라는 고백을 한다.
"내 생에서
적어도 커다란 사랑을 하나 맺었는데, 그 사랑의 대상이 항상 나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의 감격은 언제나 내게로 향하고, 나의 감동은 나에 관한 것입니다. p59 "
그리고 이어지는 고백, " 조각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려면 미사여구는 집어치워야 합니다. p70"
웃음소리가 들렸던
날로부터 2~3년 전, 클라망스는 센 강을 건너 집으로 가는 길에 검정 옷을 입은 호리호리한 한 여성을 스쳐지나간다. 그녀를 지나 오십미터쯤
갔을때 여자는 자신이 서있던 자리에서 자살을 한다. 물속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이 들렸다. 그 순간 클라망스는 얼어붙은
몸으로 '이미 늦었다. 너무 멀어...'라는 생각만 되뇌다 집으로 돌아갔다. 클라망스를 향한 웃음 소리는 이사건 이후
듣게된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만 보였던 그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사건은 클라망스의 인생에 상처를 남기고, 그의 삶에
피를 흘리게 했다. 그는 두려웠다. 자신의 삶에 흐르고 있는 피가 심판의 대상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심판대에
올려지기 전에 그는 자신이 심판자가 되기로 결정한다. 결국 자신의 삶에 심판받아야 할 무엇이 생겼다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클라망스는 프랑스에서
암스테르담의 작은 술집 '멕시코시티'에서 '고해 판사'라는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타인에게 다가가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스스로의 죄를 고하게 만든 후, 자신은 그들의 심판자로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을 위로하는 클라망스, 그러나 처음부터
클라망스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린 다 같은 죄인일 뿐입니다'.라는 동의를 얻어내어 자신의 비인간적이었던 행동을
동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멕시코시티에 앉아 자신의 결함으로 상대를 짓눌러 버린 후(광대한 자기비판), 아직 죄를 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보다 자신이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클라망스는 그렇게 다시 자신만의 우월성을 만들어 심판자의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죄를 고하다 "우리 꼴을
보십시오"라고 클라망스가 말하는 순간, 그 말에 상대는 자신을 심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클라망스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들의 괘씸한 생애를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만들며 위안을 얻고 있었다. 그리고
말한다.
"한번 해보세요, 당신 자신의 고백을 크나큰 형제애를 갖고
틀림없이 들어드리겠습니다. p141
이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그렇게 클라망스는 인간의 안락은 결국 인간의 이중성 속에 있는 것이며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한다. 고해 판사가 되어 그에게 속죄를 한 사람들로부터 그는 인간의 이중성이란 보편성을 얻어낸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너와 나, 우리는 모든 사실 추악함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고, 계속해서 종횡무진 자신의 죄를 고하며, 스스로의 추악함을
공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판할 심판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자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비판하고 있는 클라망스만이 오를 수 있는
곳이였다.
나는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연대를 얻기
위해 자신의 삶을 비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편하지 만은 않았다.
타인의 판단과 평가에 자신의 삶이 흔들리고 무너질까
두려워 모든 것을 다 끄집어 내어 삶의 이중성을 낱낱히 보여주기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뜨끔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삶이란 것이 본디 아름다운 모습만을 하고 있지는 않다. 누구든 보여주고 싶지 않은, 들키고 싶지 않은 어두운 빛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회색빛은 숨겨둔 채 타인의 어둠을 향해서만 언성을 높이고, 손가락질을 하고, 심지어 물어뜯어 다시는
재생하지 못하게 끔찍한 악몽으로 선물하기도 한다. 그런 우리가 과연 누구의 삶을 심판할 수 있을까. ? 다른 이들의 삶을 심판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드러내 스스로의 추함을 고백할 용기가 우리에게는 없지 않은가? 있다한들, 그 고백이 심판자의 권리를 줄 수는 없지
않을까?
사실 센 강 다리 위에서 목숨을 끊은 여성은 클라망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건이였다. 클라망스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다리 아래로 뛰어내린 여자보다 그의 삶이 더욱 고통스러워야 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클라망스는 지나치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삶이, 그토록 끔찍한 자기애가 그저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며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이중성, 삶의
밝음과 어두움의 모든 면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니까... 그날 센 강 다리 위 그를 스쳐간 죽음이 그가 가진 삶의 이중성을
더욱 적나라하게 말해줬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살아내기 위해선 이중성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고해판사'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먼져 고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심판하고, 그로인해 자신의 죄가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또한 자기 만족과 합리화일 뿐이며 기만적이기 까지하다.
쏟아지는 클라망스의 고백은 분명 우리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나는 심판하려 하지 않는다. 무엇을 심판한단 말인가...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용하여 여전히 자신만은 높은곳에 서길
바라는 그의 욕심은 인간의 이중성을 다시한번 드러낼 뿐이다. 결국 우리는 어느 누구도 심판자의 자격이 없다. 고해판사가 되어 심판자의 자리에
오르려는 클라망스의 태도또한 불완전한 인간의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모두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면 '심판과 참회'는 처음
부터 인간의 몫이 아닐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클라망스의 참회는 이중성에 대한 또다른 역설인지도 모르겠다.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서로 참회한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닌 동정과 격려, 죄인의 연대의식을 위한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참회로 심판자의 자리에 오르려 했던 클라망스의
기만적인 자기 합리화는 인간의 또다른 이중성을 보여줄뿐이며, 그의 삶은 고해판사라는 이름처럼 아이러니 하게 전락할 뿐이다.
나는 나의 죄를 고하며 전락하기 보다 인간의 이중성을 인정하고, 심판자의 자리를 넘보지 않겠다. 인간의 불완전함에
필요한것은 조롱과 멸시, 비웃음,제멋대로의 판단과 해석이 아니다. 클라망스가 자신을 향한 웃음소리를 듣지 못했던 순간이 유일하게 사랑을 욕망하며
갈구했던 순간임을 기억하자. 30년동안 자신만을 사랑해왔던 남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삶 위에서 사랑을 욕망하고 있었다. 어쩌면 클라망스를 불렀던
소리에 대한 답이 고해판사가 아닌 사랑이 되어야 했던건 아닐까?...
-2017.5.26 책읽는 엄마/ 카뮈의 다른 책을 꼭
읽어 봐야 겠다.. 너무나 매력적인 책이다.!!
좋은 작품은 독자가 우선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 담겨 있어도 하염없이 지루하고 어려운 문장들이 이어진다면 결국은 독자는 작품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 것이고 외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재미있기만 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가벼운 문장과 쉽게 에피소드들이 진행되는 작품은 읽을 때는 잘 읽히지만 한 번 읽고 나면 독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그런 작품이 되기 때문입니다.
역시 좋은 작품을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재미를 주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이번에 읽은 알베르 까뮈의 전락은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동시에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장 자체도 크기 어렵지 않고 잘 읽히면서도 점점 변해가는 인물의 묘사를 통해 독자가 생각할 주제를 많이 던져 주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의 심리적인 변화도 볼만한 부분이어서 이렇게 변화해가는 동안 후회와 좌절에 파묻혀 가야만 하는가에 대한 생각과 내 모습과의 비교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주는 작품이 아닌가 하는 복잡한 인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알베르 까뮈의 작품을 여러 권 읽어 봤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 읽은 전락은 처음 읽은 작품으로 역시 알베르 까뮈의 작품은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고 앞으로 더욱 많은 그의 작품들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