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출판사 통신]
안녕하세요. 문예출판사의 문예남입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가 2013년 5월에 개봉된다고 합니다.^^
디카프리오, 사진만 봐도 멋있네요.
[레미제라블](2012년 12월), [안나 카레리나](2013년 3월 예정), [제인 에어](2011년 4월 개봉), [오만과 편견](2006년 3월 개봉) 세기의 고전들이 영화로 나오며 원작 소설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커지는 것 같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는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것을 우선 추천해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앵무새 죽이기>도 컬러 영화로 새로 나왔으면 좋겠네요.^^)
《위대한 개츠비》는 왜 "위대한"인가란 생각을 했다면
영화로 된 많은 소설이 있지만 여기서는 곧 5월에 개봉할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유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관한 이야기들을 보다보면 읽고 난 독자님들이 왜 "위대한" 개츠비인지 잘 모르겠다는 평이 종종 있어서 입니다. 수많은 좋은 말을 두고 유독 그 말을 가슴에 담아 둔 이유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저 문예남도 왜 "위대한"이란 수식이 붙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는 독자였었기 때문입니다.
(ㅜㅜ잠시 울먹이며...)
문예출판사 문예남은 이 책을 약 10여 년 전 열여덟에서 스물 사이에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왜 "위대한" 개츠비인가가 이해가 되지 않아 혹시, 번역의 문제일까 해서 원서명도 확인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원서명도 《The Great Gatsby》이니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 도대체 내가 뭘 잘 못 읽은 것일까란 자책으로 매일 같이 저를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 나이 서른이 넘고 나서, 《위대한 개츠비》가 영화화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위대한 개츠비>를 열어보았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줄거리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개츠비를 중심으로 말하면 가난한 개츠비가 가난 때문에 사랑하던 데이지와 이별하고 시간이 흘러 자수성가 한 다음 다시 데이지를 찾아갔으나 결국 데이지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그것도 데이지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정말 간략하게 정리한 소설의 내용입니다.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위대한 개츠비》를 100자도 안 되는 분량으로 요약해서는 안 되겠지만, 1920년의 미국의 상황과 개츠비 자신이 내면에서 무엇을 추구했는지를 들여다 보면 그 내용만으로도 크게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으로 공감되는 내용은 사랑을 위해 개츠비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어내고 희생했는가란 부분이며 다음으로 공감되는 내용은 개츠비의 노력이 그 당시의 사회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게 여겨지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에서 오는 슬픔입니다.
올바른 표현 방법이 없는 세상은 방향이 없다.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인 1920년의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전례가 없는 물질적 풍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미국 독립선언문에 나와있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꿈, 모든 사람이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정말로 이루어 질 것 같은 상황인 것이죠.
영화 스틸컷. 개츠비와 데이지 그리고 데이지의 남편 톰(으로 추정), 그 뒤로 스파이더맨 주인공 토비 맥과이어^^)
출처. http://thegreatgatsby.warnerbros.com
개츠비 또한 그런 행복을 꿈꾸었지만 아이러니하게 그 행복이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로 자신의 소망과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란 믿음은 실현 되지 않았으며, 그 믿음을 위한 노력도 기억에 남지 않는 시대에 대한 냉정한 지적이 <위대한 개츠비>에서 펼쳐집니다.
가난 때문에 데이지와 헤어졌고, 그래서 자수성가 했지만 개츠비는 다시 데이지에게 배신을 당하게 됩니다. 개츠비가 본래부터 상류계급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지만 누구나 평등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 냉정한 사회의 모습은 데이지의 죄(교통사고에 의한 살인)를 대신 감당하기로한 개츠비가 범인을 오해한 윌슨에게 살인을 당한 후 극적으로 표현됩니다. 개츠비가 주선한 수많은 파티에 참석해서 떠들고 간 그 누구도 개츠비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고, 개츠비가 죽어야 했던 원인을 제공한 데이지 마저 장례식에 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산 개츠비의 노력을 얄궂게 세상이 무시해 버리는 장면입니다.
소설에선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누구에게든 죽은 뒤가 아니고 살아 있을 때 우정을 보여주는 법을 배웁시다."라고, 좋은 말이지만 적어도 개츠비에게 있어서는 살아 있을 때 우정을 보여줘도 남는 것이 없다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질적 성공도 삶의 행복을 말할 수 없으며, 정신적 희생과 노력도 삶의 행복을 말할 수 없는 사회.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 때문에 끝없는 성공과 물질의 축적만을 상상하고 꿈꾸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린 시대. 물질 이외에 인간이 생각해야 할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시대.
오늘 당신이 친구에게 "힘내"라고 건낸 위로의 말을 당신이 성공하지 않으면 그 말은 아무 쓸모없다고 평가하고, 당신이 성공한 후나 죽은 후에 성공 혹은 죽었으니 아무에게도 위로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개츠비처럼 희망을 가지고 참고 견디며 "위대한" 개츠비가 되어야 할까요?
프랑스의 철학가 롤랑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보며 제가 진정으로 고민이 되는 부분은 위의 말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가 비록 성공을 했을지라도 우리 자신이 안고 있는 슬픔을 표현할 방법도 그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더구나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물질과 성공에 얽매인 우리 삶을 헤쳐나갈 현명한 지혜가 많은 분들께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문예출판사의 문예남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문예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