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새니얼 호손이 쓴 주홍글씨라는 책을 보고서
이젠 다들 주홍글자라고 책 제목을 바꾸고 있다고 한다. 그때의 글씨의 의미가 잘못 해석된 사례라고 하는데 아직 계정이 되어있지 않은 주홍글씨.
표지에 있듯이 그녀의 가슴에 알파벳 A라는 글자가 검은 바탕에 빨간 글씨로 써 있다.
청교도라는 절대적인 관습으로 개혁을 이끌고자 했던 종교로 너무나 절대적인 기준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왜곡이 되거나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피해를 보았고 마녀 재판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 자손중에 한명인 호손이
주홍글씨라는 책을 집필했다.
그가 왜 주홍글씨를 써 내려가는 과정과 서론에 입각하는 세관이란 부분이 원작에는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변역하면서 많이들 동반해서 인쇄하지 않고 오로지 주홍글씨만 번역해서 출간을 했다고 한다.
다른 출판사에서 찾아서 보면 도움이 될듯 하고
본격적인 내용에 시작이 감옥으로 부터 시작이 된다.
주인공의 등장 설명보다 시대적 배경에 대한 접근이 많이 설명을 하고 있다
우중충한 회색 옷차림에 고깔모자를 쓰고 수염이 텁수룩한 남자들이 더러는 수건을 쓰고 더러는 쓰지 않는 여인들과 함께 한 목조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그 목조건물은 감옥을 연상하고 있다는 것이 서두의 문구인듯 때문이다.
이줄거리를 누구엔가 읖조리듯 도덕의 꽃을 상징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장미로 대신하고픈 슬픈 이야기의 서막을 알린다,
초창기의 청교도 정신과 변질이 되어지는 상황속에서 헤스터 프린은
나의 남편과 정을 통한것도 아닌데 불측정 다수에 의해 공공의 적으로 인식이 되어졌고,정절이란 것을 지킬 생각이 없는 그런 여인으로 인식이 되어버린 그녀를 집중 공격의 대상이자 배척의 대상으로 대한다.
집단적 의식은 남들과 다르다는 편견으로 해석을 하고 기준을 만든다.
그러다 보니
헤스터는 구금이 끝나고서 품안에 있는 어린 아이 펄이 아름답게 성장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끝까지 헤스터는 그와 사랑을 나누고 펄은 낳게 만든 장본인을 고백하지 않고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면서 살아가고 있다.
정작 그런 일을 만든 젊은 목사인 딤즈테일은 지옥의 나날을 보내고 있고
죽다 살아온 헤스터의 남편은 그런 딤스테일을 벌을 주기 위해 온갖 행동으로 그를 괴롭히고 있다.
오직 그들만의 편견으로 헤스터에 대하여 그런 벌을 내릴수 있는 대상인지 알수 없는 그들의 문체속의 핵심이 어찌보면 우리에게
꼭 읽어야 할 도서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싶다.
복수심으로 타락해가는 가는 남편과
의지가 약해 가책에 허덕이는 목사 그리고
극복을 통해 그들을 감싸려는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죄와 벌이란 구조를 다시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 이책을 통해
알수 있다.
남녀 관계를 넘어 그 시대적 상황속에서 많은 상징적인 의미를 파악하면서 읽다보면 왜 읽어야 할지를 아는 소설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책하고 담을 쌓고 살다가 어쩐지 이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살고 있던 친척 집에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 중에서 유명한 고전소설 몇 권을 골라 내게 가져다주곤 했다.
당시 어린 여고생 마음에 불을 지핀 책이 있었는데, 바로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주인공 헤스터프린의 딸, 펄을 묘사한 부분을 보고 무척 놀라워했었다.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이 책을 계기로 한참 수능공부할 시기에 책에 빠져들게 되었다. 자습시간에 책을 읽다가 선생님께 머리를 맞았던 기억도 난다. 내가 맞아야 할 이유를 나는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그래도 읽었다. 지금도 후회는 안한다.
20대 후반에 다시 추억에 젖어들었다. 나는 원래 읽었던 책을 또 읽는 걸 좋아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타인의 잘못에 매우 냉혹하게 반응한다. 특히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는 누가 욕을 해도 당사자는 욕을 먹어야 마땅하다는 듯이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다양한 기사들에 달리는 댓글들이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가 많다.
책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청교도 시대'이다.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모든 사람에게 드리워져 도덕이 곧 법이 되었던 때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의 한국이나 사람들은 별로 다르지 않다.
여기 간음의 죄를 짓고 아이를 낳은 한 여인이 있다. 아버지는 누군지 모른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이 여인을 구경하며 조롱하고, 끔찍히 여겼다. 지금은 각자의 공간에서 인터넷 광장에 모여 조롱하며 끔찍히 여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내가 지은 죄를 알고, 또 그것에 대해 수군수군 거리거나 때로는 부모의 얘기를 들은 솔직한 어린 아이들이 와서 대놓고 조롱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내가 어딜 가나 나를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있고, 그것이 나의 치부를 가르친다면 아마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남다른 면이 있는 여자다. 그녀는 다른 곳에서 살아도 되었지만, 딸까지 데리고 있는 마당에 청교도 전통을 벗어난 고장으로 도망가지 않고 그 마을을 벗어나지 않은, 그러나 인적이 드문 외딴 오두막에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도 다 죄를 짓지 않느냐, 다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닌가, 하는 목소리가 내면에서 들리지만 그것을 또 하나의 죄로 여기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여인이다. 그녀는 자기 가슴에 달린 글자 'A'가 자기의 딸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는 길이 된다고 믿었다.
함께 조롱받아야 할 사람, '아서 딤즈데일'목사는 사람들의 편견에 의해 추앙받는 사람이었다. 그의 목소리, 내면의 세밀함, 그 세밀함에서 나오는 거룩한 몸짓들이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사람들에겐 성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밝히지 못한 죄로 인해 평생을 고통하지만, 자기의 죄를 고백할 용기 없는 비겁한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전혀 비겁하게 그려지진 않는다. 충분히, 헤스터 프린보다도 더 강하게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비겁한 마음이어서 그를 약하게 만들고, 결국 그를 죽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인물, 아내의 부정을 보아야 했던 '로저 칠링워드'. 그는 처음엔 가장 큰 피해자였지만 마지막으로 갈 수록 가장 추악해지는 인물이다. 자신이 당했던 배신과 고통을 갚아주기 위해서 아서 딤즈데일 목사 옆에 머문다. 천사의 얼굴을 가장하고 선, 목사 양심의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을 날카롭게 찌르는 인물이 된다.
나다니엘 호손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걸까?
결국 모두가 죄인이다. 군중들도, 거룩해 보였던 아서 딤즈데일 목사도, 배신을 당한 로저 칠링워드 박사도. 그러나 오히려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던 헤스터 프린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해갔다.
관점은 속죄하는 그녀의 생활에 있지 않다.
그녀의 고백 속에서 나타나듯이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만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그녀에게 고통을 주셨어도 펄이라는 소망을 함께 주셨고, 그녀가 앞으로는 더욱 깨끗하게 살아갈 수 있는 굴레를 주신 것이기도 했다.
"제가 이것으로부터 배운 교훈을 어린 펄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헤스터 프린은 손가락으로 주홍글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 봐, 그것은 그대의 부끄러움의 표시야!"
장관은 엄격하게 대답했다.
- p.87
"이애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앱니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들이 나에게서 뺏어간 모든 것을 보상해주시려고 나에게 주신 애에요. 그러나 이애는 또한 나의 고통입니다. 이애가 나의 생명을 붙들어주기도 하지만, 이애는 또한 나에게 벌을 줍니다. 당신들은 이애가 사랑을 받을 줄만 아는 주홍글씨라는 것을 모르세요? 그래서 나의 죄에 대한 천 배 만 배의 징벌의 힘을 가졌다는 것을 모르세요? 당신들은 이애를 가져가지 못합니다. 내가 먼저 죽어버릴 테예요."
- p. 89~90
아서 딤즈데일 목사가 죽고, 로저 칠링워드마저 죽게 되었을 때 그녀는 펄을 데리고 그 마을을 떠난다. 그러다 한 참 후 그 오두막으로 다시 돌아와 여전히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고 홀로 살게된다. 그즈음에는 말못할 비밀을 가진 여인들이 그녀를 찾아와 진심어린 충고를 듣고 돌아가게 된다.
주홍글씨 'A'는 더이상 조롱거리가 아니었다. 소망을 잃어버릴 것 같은 사람들에게 빛이 되었다. 사람들의 편견은 무마되었다. 그가 저지른 잘못이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길이 되었다. 그러나 죽으면서도 끝까지 그녀는 그 글자를 지우지 않는다. 아마 그 글자가 없었더라면 얻지 못했을 그 내면의 무한한 소득을 감사히 여긴 것이 아닐까. 당했던 슬픔 또한 잊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의 비밀을 '죄와 속죄'라는 측면에서 정말 잘 풀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해 뒤에 킹스 채플이 세워진 곳에 인접한 묘지 안, 오래되어서 가라앉은 어떤 무덤 옆에다 새 무덤 하나를 팠다. 잠든 두 시체가 합칠 권리가 없다는 듯이 오래된 무덤과 새 무덤 사이에는 간격이 있었다. 그러나 두 무덤을 위한 묘비는 하나뿐이었다. 둘레에는 문장이 새겨진 묘비들이 총총히 서 있었으나, 한 장의 석판으로 된 이 비석에는 관심 있는 조사자라면 발견하겠지만 뜻을 몰라서 갸우뚱할, 방패를 새겨놓은 것 같은 무늬가 나타나 보였다. 거기에는 명구가 들어 있었고 그 명구의 내용을 표어라고 볼 수도 있고 우리가 지금 끝맺는 이야기의 간추림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말할 수 없이 음침한 비석에 가까이 가보면 검은 바탕보다도 음침한 영원히 불타는 주홍글씨의 빛으로 간신히 구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검은 바탕에 주홍글씨 A>
- p. 282
흔히 아는 이야기라며 읽지 않는 책이 또 있다. 가슴에 주홍글씨를 단 여자.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는 유명하지만 책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하다.
주인공 헤스터가 높은 처형대 단상에 군중들 앞에 서게 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불륜의 표시인 주홍글씨를 단 그녀. 처형이 아니라 망신을 주기 위함이지만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불륜의 증거인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서 그녀는 동네 한 바퀴를 강제로 돈 뒤 다시 감옥으로 들어간다.
지금이야 간통이 형법상의 죄가 되지 않지만 당시 엄격한 청교도 이민 사회에서는 커다란 죄였다. 헤스터는 끝까지 상대 남자를 밝히지 않았다. 그녀의 두 남자, 그녀의 남편과 불륜 상대가 그녀의 인생을 휘젓는다.
사실 그녀의 나이 많은 남편은 몇 년 째 소식이 끊겼다. 공교롭게도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 날, 그는 높은 단상 위에 서 있는 그녀를 목격한다. 간통으로 처벌을 받고 있는 거라는 사람들의 말에 그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나이든 남편은 지식 욕구가 충만해 학자처럼 모든 걸 연구했던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그녀를 용서한 듯 보이지만 그는 복수를 계획한다. 먼저 상대 남자를 찾아내야 한다. 상대 남자는 바로 마을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젊은 딤즈데일 목사다.
외진 곳에서 딸 펄을 키우며 살아가는 헤스터, 자신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들통날까 괴로워하는 젊은 목사, 아내의 배신에 분노하는 나이든 남편. 이 세 영혼의 힘겨운 생애가 서로 얽혀 든다.
목사는 자신의 딸 펄을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내적 고통으로 그는 점차 시들어간다. 영험한 의사로 동네 사람들의 신뢰를 얻은 전남편은 목사의 병을 고쳐주겠다며 그와 함께 살게 된다. 남편은 이미 목사가 상대남자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헤스터는 목사에게 펄과 함께 셋이 멀리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이제 세 사람의 앞날에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전남편의 끈질긴 복수는 그들을 계속 따라잡는다.
이들의 운명은 결국 비극이 될까? 마지막 반전은 목사의 용기있는 행동이다. 결말에서 어린 딸과 아버지의 입맞춤이 인상적이다.
"펄은 그의 입술에 입맞추었다. 그 순간에게 아이에게 내렸던 마술이 풀렸다. 그 야성적인 어린애가 슬픈 장면을 겪고 나서 동정심이 생긴 것이다. 아이의 눈물이 아버지의 뺨 위로 흘렀을 때 아이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 가운데서 자라고 다시는 세상 사람과 다투지 않으며, 세상에서 한 여인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이었다."
슬픈 전설처럼 전혀 내려오는 주홍글씨를 단 여인. 그녀의 사랑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감내하기 힘든 수치심을 극복하고 자신의 딸을 지켜낸 모성애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나서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나서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구하는 길이다.
읽기 힘든 고전도 있지만 <주홍글씨>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재미와 감동 면에서 적극 추천하고 싶다. 독서 모임에서 직접 사람들과 소감을 나누며 읽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이다.
어릴적 읽고 다시 읽게 된 주홍글자는 남다른 기분이 든다.
아마도 그때는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홍글자는 뭔가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강렬함을 어린 내게 주었던 것 같다...
그 후에는 나스타샤 킨스키의 영화로 주홍글자를 접했었다.
열정을 감춘 그녀의 순수한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읽어보니 그때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던 그 무엇이
여전히 그대로 살아 있음을 느끼며 대작가의 필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감탄하며 그만 순식간에 읽어버리고 말았다.
부정을 저지른 헤스터 프린과 그 결과물로 탄생한 딸 펄,
아내와 부정을 저지른 자를 찾아내 단죄하려는 남편 로저 칠링워스...
그리고 목사라는 고결한 직분뒤에 숨어 자신의 죄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하는 나약한 남자 아서 딤스데일....
역시나 강한 것은 여자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묵묵히 그 벌을 달게 받음으로써 구원으로 나가려는 헤스터에 비해
이 두 남자~
그녀의 죄와 얽혀있는 이 두남자는 한마디로 비겁하기 그지 없다.
아서 딤스데일은 고결한 인품으로 추앙받으며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죄는 내보일 용기도 없고 그 영혼을 구제받을 수도 없다.
그의 정신은 혼란스럽고 그로 인해 그의 육체는 시들어 간다.
그의 이러한 타락은 선함과 진리라는 그가 그토록 추구하는 목적에서 영원히 격리되어 버렸다.
헤스터는 간통의 상징인 주홍글자 A를 가슴에 달고 살아야 했지만
그는 어두운 마음속에 감추고 살아야 했다.
남편인 로저 칠링워스 ~
그 역시 위선적인 사람이다.
의사의 권위를 이용해 끊임없이 딤스데일의 주변을 맴돌며 그 마음 속 비밀을 캐내려 하고
심신의 병에 간섭하며 야금야금 그의 영혼을 파들어 가는데 이 모든것이
잔인한 목적에 기반하고 있다.
즉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못하는 딤스데일의 나약함을 이용해 끔찍한 복수를 행하고 있는 셈이다.
헤스터와 딤스데일은 그들이 유지해야하는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참담한 것인가를 깨닫고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며 도피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원죄의 씻김이란 도피로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딤스데일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감추어둔 죄를 세상에 고백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햇살 아래에서 헤스터와 펄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영원한 고통의 감옥에 그를 가두려던 칠링워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다.
17세기 중엽 보스턴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청교도 식민지 시대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인물들의 탁월한 심리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단숨에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치밀한 구성과 정교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은 과연 고전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시대는 다르지만 현재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게 고전의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