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수난
0. 오늘 본 증보판을 떠올리면서 ‘데카르트의 수난’, 아니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수난’을 떠올렸습니다. 7개월 전에 올린 것과 다른 것을 추가해 올립니다.
1. 2023년 02월 19일 한동일, 『라틴어 수업』, (흐름출판, 2017년 06월 30일)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한동일은 이렇게 썼습니다.
“<코지토/코기토 에르고 숨>. 이 말은 테카르트가 자신의 저서 『철학의 원리』에 남긴 철학적 언명으로 서구 철학의 기본 요소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 책은 원래 학자들이 아니라 프랑스 독자들을 위해 프랑스어로 썼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 역시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 “쥬 뻥스(빵스) 동끄 쥬 쒸 Je pense donc je suis”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 철학의 중심인 중세와의 단절을 나타내기 위해 프랑스어 대신 라틴어 표현을 더 많이 쓰게 되었고, 그것이 현재에 와서는 프랑스어 원문보다 라틴어 표현이 더욱 유명해진 계기가 됐습니다.”
1) 라틴어 표현 “코기토 에르고 숨”이 『철학의 원리』(1644)에 등장하는 것은 맞습니다. (정확히는 에고 코기토, 에르고 숨.) 라틴어 저작이니 라틴어로 표현한 것은 당연하지요. 하지만 이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프랑스어 저작 『방법서설』(1637)로, 프랑스어 “쥬 빵쓰, 동끄 쥬 쒸” 였습니다.
2) “중세와의 단절을 나타내기 위해 프랑스어 대신 라틴어 표현을 더 많이 쓰게 되었고...”라는 말은 완전한 오류입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서부와 중부 유럽에서 라틴어는 중세요, 자국어는 근대입니다. 중세는 민족보다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문명권이 더 중요했던 시기입니다. 종교가 쇠락하면서 민족주의가 발흥하게 되고 동시에 라틴어보다는 자국어를 선호하게 됩니다. 중세 신학과 단절을 위해서 데카르트는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썼고, 거기서 “난 생각한다, 고로 난 존재한다”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3) 라틴어 코기토가 프랑스어 표현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당시 학술언어가 라틴어였다는 것이 결정적 원인입니다. 방법서설도 라틴어로 번역되고 (특히 외국) 학자들은 그 판본을 더 많이 봤습니다. 독일철학도 칸트에서 종합이 되지만 칸트 역시 초기저작과 주요 용어는 라틴어를 사용했습니다. 독일철학이 독일어철학이 되는 것은 사실상 헤겔부터입니다. 그만큼 유럽에서 라틴어의 영향은 오래 지속됩니다.
4) 위에서 말한 대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ie pen?e, donc ie ?uis)”를 방법서설(1637)에서 불어로 썼습니다. 이후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1641), 「제2성찰」에서는 라틴어로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ego ?um, ego exi?to)”로 바뀝니다. 이는 다시 『철학의 원리』(1644) 1부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go cogito, ergo ?um)”로 바뀝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지적하자면, 철학의 원리에서 라틴어로 적은 것은 방법서설의 라틴어역에 등장하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 아니라 “에고 코기토, 에르고 숨”입니다.
5) 한동일은 100쇄 출간을 기념해서 이른바 개정증보판을 냈습니다. 한동일, 『라틴어 수업 (개정증보판)』, (흐름출판, 2023년 08월 15일).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명백한 오류는 하나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저자와 출판사는 이미 누릴 것 다 누린 상태고, 모두 팬덤에 휩싸였기 때문에 수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국에서 저자나 역자가 지적을 받고 수정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그런 수정은 자존심에 치명타를 입는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도 학생을 잘 지도해야지만, 학생도 선생을 자극해야 합니다. 저자가 독자에게 가르침을 주지만, 독자도 저자의 오류는 지적해야 합니다.
2. 최신 번역서에도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수난’은 이어집니다.
로랑스 드빌레르 저/이주영 역, 『모든 삶은 흐른다 - 삶의 지표가 필요한 당신에게 바다가 건네는 말』, 피카(FIKA), 2023. 번역자는 19면에 있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구절을 줄인 표현"이라고 주를 달았습니다. 코기토와 숨은 그 자체로 각각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한국 인문학의 현주소입니다.
3. 무엇보다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수난’은 (서양철학을 조금이라도 접한) 한국인 절대다수에게 각인된 코기토와 숨의 관계를 원인-결과로 보는 문제입니다. 보통 (서양) 철학사 몇 章節만 읽어도 한국 독서인 상위 1프로에 들어갑니다. (왜냐면 대부분은 이러저런 이유로 서양철학에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프로의 대부분도 코기토와 숨의 관계를 그렇게 간주합니다. 현재 번역된 철학사 대부분은 그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인들이 정확한 주해없이 맥락을 이해하면서 선후나 인과가 아닌 동시성이라는 것을 간파하기란 어렵습니다.
4. 사실 영어 앰(am)에 해당하는 쒸(suis), 그리고 이그지스트(existe)를 구별해 번역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어 'je suis' 또는 영어 'I am'을 '있다'라고 하지, '존재하다'고는 옮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존재하다로 하면, exist(e)의 역어 선택이 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논의가 필요하므로 생략합니다.
* 인용은 모두 “(공고육부 후원) 샤를 아당 & 폴 탄리(편), 『데카르트저작집』(전 11권), 1897-1909”입니다. (방법서설: 6권-32면;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7권-25면; 철학의 원리: 8권-7면). 또한 저작집에 있는 위 인용문은 당시 인쇄된 방식 그대로이며, 이태리체입니다. 저작집 출간 당시는 j는 i로, 단어 마지막이 아닌 s는 ?로 식자했습니다. 오타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