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 1호 동시통역사' 라는 타이틀 만큼이나 그의 이력은 정말 화려하다. 그의 이력서만 A4용지 100페이지가 넘고, 분야별 목차까지 구분되어 있을 정도다. 말 그대로 이력서만 책 한 권이자 현대사라고 해도 될 판이다. 얼굴은 언론을 통해 몇 번 봤었지만, 그에 대해서 정확히 알게 된 건 2년 전 MBC의 한 예능에서였다. 기자 출신 통역가 겸 방송인인 안현모의 고모로 등장하면서 화제가 됐고. 이후 이 책의 띠지에도 등장하는 tvN의 예능에 재 등장하며 더욱 화제가 되기도 했다. 통역사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해 본 적은 있지만 현장에서 통역하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내야 하는 그야말로 인비져블의 대표적인 직업 중 하나여서 늘 궁금해 하던 직업군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기도 했다.
책의 전반은 저자가 통역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부터 시작해 30여 년간의 통역생활 비하인드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말미에 일과 병행해야 하는 엄마 통역사들의 애환과 자신의 가족 관련 이야기로 마무리를 한다. 저자는 한 방송에서 자녀는 딸 둘이고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거나 재학중라는 언급을 한 바 있다. 그의 딸들이 저자의 라이프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
"나는 워라밸이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p.324)."
해외 체류중이던 두 딸이 동시에 귀국한 어느 날 둘째 딸이 한 말이라고 한다. 저자의 두 딸은 우애가 너무 좋아 차를 나누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일상생활에 관한 주제가 사회 이슈로 옮겨가 진지하게 토론의 장이 만들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이 말 역시 그 때 나온 이야기라고 한다. "나는 엄마를 보면 워라밸을 다시 생각하게 돼."라고. 저자 자신은 우는 아이들 떼어놓고 나와 일을 했지만, 정작 자신이 아이었을 땐 너무 때를 써 10년 간 영어교사로 일했던 친정 엄마가 일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그 덕분에 더 혹독한 생활을 보내야 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포기하지 않았던 덕분인지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었을 땐 엄마가 TV에 나오면 친구와 친척들에게 자랑을 하곤 했다고 한다. 어느 날은 일이 너무 고돼 퇴근 후 아이들에게 "엄마 일 그만하고 집에 있을까?"라고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오히려 아이들이 '안된다, 엄마는 밖에 나가서 일해야 된다.'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 일화가 저자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고 한다. 정말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이런 상황만 보아도 저자가 통역사라는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둘째 딸이 왜 저런 말을 했는지도 말이다.
저 말이 너무 와 닿아 잠시 저자의 직업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이 책이 공감이 많이 되었던 건 나는 통역사도 아니고(심지어 영어도 정말 못한다.. 아직은.. 이라고 말하고 싶다. ^^;) 관련 분야를 간접적으로 겪어본 적도 없다. 외국인 연사가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는 학술행사에서 맨 뒤 통역부스에 앉아있는 통역사들을 본 것이 전부다.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그 작은 박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접할 수 있었다.
저자의 첫 통역 데뷔는 MBC에서 걸프전 상황 생중계를 동시통역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방송국에서 몇 달의 이력은 부처 인하우스 통역사로 시작해 주한 미국대사관, 에이전시를 통한 프리랜서에서 현재의 교수자리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문화와 관련된 통역을 할 때도 있었다고는 하나 '대한민국 정부 1호 통역사'라는 타이틀이 먼저 생각나게 하는 이력들이 워낙 많다보니 저자가 풀어놓은 통역사 생활의 수 많은 경험담들은 마치 현대사 책 한권을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특히 주한 미대사관 인하우스 통역사 시절 겪었던 이야기는 다른 책들을 통해(그 책들 역시 현장 경험자들의 비하인드가 담겼던 책들이다.) 알게 된 사실들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보게되는 재미있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한 예가 바로 북한이 NPT (핵확산방지조약)를 탈퇴하며 언급했던 북한의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발언을 했던 사건 관련 비하인드이다. 당시 전 지미 카터 대통령의 방북으로 전쟁을 막았던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지미 카터가 방북하도록 설득시킨 인물과 그 과정에 대한 얘기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 번은 책이 책을 부른 것이 아니고, 책이 책을 더해준 경험이라 책을 읽어야 될 이유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 GE의 CEO였던 '잭 웰치'의 통역을 담당했던 일화도 기억에 남는다. 인수합병등으로 악명이 꽤나 높아 그리 좋은 인상을 남긴 인물은 아니나 저자의 일화를 통해 그의 전혀 다른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윤종용 전 삼성 부회장과의 일화도 참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경험담 뒤에는 마치 잔잔한 호수위의 백조가 물 아래에서는 아둥바둥하며 계속 발을 휘젓는 것 같은 모습이 통역사 세계에도 있었다. 마냥 화려할 것만 같았던 그들 세계에서는 통역 기회를 얻고 잃는 과정이 정말 칼 같았다. 통역사와 에이전시간에 서로 배려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례도 많았지만, 특히 에이전시와의 관계는 상상이상이다. 먼지 만큼의 실수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해당 분야의 영어에 능통한 사람들 앞에서 통역을 해야 될 때는 당연히 긴장할 수 밖에 없어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한 후 해고되거나 도움을 받는 이야기에서는 정말 보통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기도 했다. 심지어 점심을 먹었다고 해고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세상에는 참 알지 못하는 구석 구석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도 실감하게 된다.
통역사라는 직업에 임하는 저자의 한결같은 자세도 정말 인상적이었지만, 저자의 수 많은 경험담을 통해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의사 전달을 위한 '영어'라는 언어 매개체를 제외하면 그 안에 있던 사람들간의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이다. 한 편으로는 저렇게까지 칼 같아야 되는 거구나 싶다가도 저게 맞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저자는 어느 일방이 입장이 아닌 한 반 물러나 전체적인 시각에서 상호간의 입장을 다시 생각해보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항상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서로가 자신을 낮추거나 감수하면서 양보하는 사례 또한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였는지 나는 언어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이야기 속 수 많은 상황들이 너무도 공감이 되었다.
이 외에도 저자가 자신의 학생들에게 혹독하게 훈련 시키는 방법을 선택한 이유, 제자들의 학습 방식과 그에 따른 결과 등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 공감이 되었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세계 공영어가 된 영어의 발음과 관련된 저자의 생각이었다. 2003년 이었던가.. 토익 시험이 전면 개편 되었던 적이 있다. 주입식 영어 교육은 둘째 치더라도 과거 대한민국 영어 교육은 버터 발음이 지배적이었다.(누가 보면 영어 완전 잘하는 줄 알겠네..) 그러다 갑작스럽게 토익 시험 보려고 준비하다가 'Schedule'의 발음이 '스케쥴(미국식 발음)' 혹은 '쉐줄(영국식)'로 발음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정말 해머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당시 충격이 너무 컸던 덕분인지 이젠 한 번에 알아듣지만, 그 충격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근데, 이 영어 발음 때문에 통역사들도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면서 최근에 인도 영어, 아프리카 영어, 싱글리시(싱가포르 영어)와 같은 말이 생겨날 정도로 개성 강한 자신들 만의 독특한 발음과 스타일로 변화해 가고 있어서 비영어권 국가의 통역을 맞게 되면 또 해당 영어를 미리 공부해야 실수 없이 통역을 마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자가 덧붙이는 말이 있다. 이렇게 영어가 다양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데, 우리도 영어를 공부할 때 원어민처럼 완벽한 영어나 영국 상유층 영어를 구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식 억양일지라도 발음 기호에 맞게 발음하고, 문법에 맞는 문장을 구사하면 전세계 어디서든지 충분히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발음이 형편 없더라도 상심하지 말고 표현력과 문장력을 기르는데 더 노력을 기울이라고 조언한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 발음 하나에도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던 것에 비하면 그런 수고를 다른 곳에 들이라는 이 조언은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목과 관련된 내용이 아닌 통역사라는 직업의 뒷 이야기가 궁금해 선택했지만, 저자의 직업이 언어가 주 업무이다 보니 은연중에 영어 공부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길 기대하기도 했던 것 같다. 저자의 경험담 하나 하나가 정확한 내용은 몰라도 메인 뉴스에서 꾸준히 접해오던 내용이라 통역사의 글을 통해 또 다른 시각에서 새로운 사실을 접할 수 있었던 부분도 너무 재미있었고, 화려할 것만 같았던 그들도 다른 직장인들과 같이 어쩌면 더 혹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 하는 모습을 보며 많이 놀라기도, 화가나기도, 공감이 가기도 했다. 통역사라는 직업도 그 안에서는 모든 상황을 만들고 구성하고 있는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이 책을 언어라는 매게체로 의사전달을 하는 통역사라는 직업과 언어가 아닌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이야기에 집중해서 보면 또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을거라 감히 권해보고 싶은 책이다. 오랜만에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2023년 6월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