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이 사회적 '이슈'를 다룰 때, 그것은 종종 소설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소설 자체가 자신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거부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례는 한국에 있다. 2016년에 쓰인 조남주 작가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당시 나는 이것이 '소설임을 거부하는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82년생 김지영>에는 작품 중간중간에 통계가 삽입되어 있다. 주로 남녀 성별을 기준으로 발생하는 차별(언제나 여성이 피해자 쪽인 차별)을 근거하기 위한 통계가 제시되는데, 소설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통계 자료들이 과연 문학적으로 정당한 장치였는가를 두고, 그것들이 지나치게 자의적인 인용이며 통계의 왜곡된 해석을 유도하거나 잘못된 일반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등의 문제점들이 이미 지적된 바 있지만, 사실 내가 보기에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통계의 삽입 그 자체가 이미 문제라는 것. 소설의 본질이 타인에 대한 공부라고 믿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 소설이란 개인(인물)의 고유함과 단독성을 보여 주고 타인이 나와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공부하기 위한 것이지, 개개인을 하나의 범주에 가둬 놓고 그들과 내가 언제나 동일하다는 재확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자가 유발하는 것이 인식 혹은 이해라면, 후자가 유도하는 것은 거의 강제에 가까운 공감이다. <82년생 김지영>에서 통계가 하는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통계 안에 사람들을 가두고 이것이 현실이라고, 이게 진짜 세상이라고 강요하는 것. '김지영'이라는 한 인물의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인생 서사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을, 이 작가는 굳이 통계 자료를 삽입하여 '김지영'이라는 고유한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로 일반화하려 했다. 덕분에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을 수 없게 됐다. 작품 속 모든 통계들이 이 소설이 소설로 읽히는 것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이제 소설은 더 이상 소설이 아니게 된다. '정치 소설'이 아니라 그냥 '정치'인 셈이다.
서론이 길었다. <빛을 두려워하는>을 읽고 위와 같은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위의 사례에서처럼 소위 '정치 소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함정으로부터 이 소설은 꽤 영리하게 탈출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좋은 소설은 좋은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나쁜 소설은 나쁜 질문을 던지는가? 아니, 그들은 질문이 아니라 정해진 답을 던진다. 그럴 때, 소설은 소설로서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스스로 상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 더글라스 케네디의 열네 번째 소설도 정치 소설로 분류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그 모든 실패한 정치 소설들처럼 정해진 답만을 부르짖을 것이냐, 아니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질문을 던지는 데 성공할 것이냐를 따져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후자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2.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임신 중절은 정당한가?" 모두 알다시피 미국은 51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주마다 법률이 다르다. 텍사스 주 정부는 21년 9월에 임신 중절 금지법을 시행한 반면, 캘리포니아 주에서 임신 중절 수술은 합법이다. 임신 중절을 반대하는 단체의 저항이 거센 만큼, 임신 중절을 옹호하는 단체의 입장도 단호하다. 이렇게 임신 중절 찬성/반대의 층위로만 이 소설을 보게 되면, 소설은 매우 간단해진다. 강경한 임신 중절 반대 운동을 벌이던 단체가, 임신 중절 수술을 하는 병원을 테러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는다. 태아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살인과 테러를 벌이는 아이러니. 이렇게 시작된 소설의 스토리는 이후에 훨씬 복잡하게 전개되지만, 결국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임신 중절 문제를 놓고 치열한 갈등을 벌이던 사람들이, 끝내 대화하지 못하고 폭력에 도달하여 겪게 되는 비극의 이야기. 좀 더 쉽게 옮겨 볼까. 생각이 다르단 이유로 싸우다가 결국 서로 죽고 죽이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쯤에서 물어보자. 이 소설은 자신이 던진 질문에 얼마나 충실하게 대답했는가? 소설은 임신 중절 수술을 둘러싼 상반되는 두 가지 입장을 보여주고, 그 두 입장이 얼마나 복잡한 문제로 얽혀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임신 중절 문제는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복잡한 개념들의 충돌이라는 것. 하지만 여기에 결론은 없다. (그래서 임신 중절이 옳은 거냐 잘못된 거냐?) 이 소설은 임신 중절이 정당하다고도, 정당하지 않다고도 말한 바 없다. 모르겠다고 말할 뿐.
그러나 여기까지 읽고 이 소설을 그저 무책임한 소설로 치부하지 말았으면 한다. 다른 층위에서 읽을 수도 있다. 질문을 바꿔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소설이, 임신 중절의 정당성을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의 정당성을 질문하고 있다고 말이다. 작중 '앨리스'의 대사 중 이런 것이 있다.
빛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달라요. 우리와는 달리 확신을 갖고 있어요. 저는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이 두려워요.
-422p
이 소설의 제목 '빛을 두려워하는'은 아마도 위 문장으로부터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임신 중절 찬성파와 반대파 두 축이 팽팽하게 대립하며 이 소설을 구성해왔다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위 문장에서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싸움은 임신 중절을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의 양방적 싸움이 아니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행사하는 일방적 폭력이다.
이 소설은 임신 중절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작가 자신도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적어도 이 작가는, 정답을 알 수 없는 이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태도인지는 구별할 줄 안다. 폭력이 아니라 대화로, 무분별한 비난이 아니라 건설적인 비판으로 맞서야 한다는 식의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로지 내 말만이 맞다는 무조건적인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 소설 속 인물들에서 악역을 찾아보자. 스토리 상으로 봤을 때 임신 중절 반대 운동을 하는 이들이 악역이다. 그들은 테러를 일으키고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다. 이들이 악역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임신 중절 반대 운동을 하는 이들이 악역이다',라고 적는다면 그것은 틀렸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악역이 된 이유를 잘못 암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임신 중절에 반대하기 때문에 악역인 게 아니라, 임신 중절 반대가 무조건 옳다는 자기만의 확신에 빠졌기 때문에 악역이다. 그 확신 때문에 그들은 무슨 일이든 벌인다. 그들이 테러를 일으키고도 반성이나 사죄가 아니라 "그래도 이건 옳은 일이었다"고 말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그 병적인 '확신' 때문이니까.
따라서 이 소설에서 이분법은 이렇게 적용되어야 옳다. 임신 중절 찬성/반대의 이분법이 아니라, 스스로를 확신하고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이들과, 의심하고 검열하며 언제나 다른 가능성도 열어둘 줄 아는 이들. 이 소설의 제목대로 표현하면, 빛을 찾았다고 확신하는 이들과, 빛을 두려워하는 이들. 빛을 두려워하는(두려워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압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확실한 해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
-316p
3.
다시, '정치 소설' 이야기로 돌아 오자. 앞서 <빛을 두려워하는>이, 많은 정치 소설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함정으로부터 꽤 영리하게 탈출한 것처럼 보인다고 썼다. 이 소설의 핵심적인 소재가 '임신 중절 문제'인 것은 당연하고 분명하다. 그러나 꼭 임신 중절 문제여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소재가 '동물의 권리문제' 였거나 '젠더 갈등 문제' 혹은 그 외의 다른 이슈로 대체되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거라는 말이다. '어떤' 이슈를 다루느냐가 아니라 이슈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영리하다. 자신이 소설임을 잃지 않은 정치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