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수술'이라는 단어는 긴장과 두려움을 유발하지만 어떤 질병의 치료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현대적 수술은 적절한 통증 조절 수단과 체계적인 수술 환경을 갖추고 있어, 의사는 필요한 수술을 권할 수 있고 환자는 의사의 조언을 바탕으로 수술을 결심할 수 있다. 현대 의학에서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의학적 필요성이다. 통증과 감염 가능성도 수술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질병 치료에 우선하지 못한다. 현대 의학이 '통증과 감염을 정복'했다는 과감한 말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겸손하게 적더라도 상당부분 경감시킨 것은 사실이다. 당연히 이런 성공에는 선조들의 지혜와 노력 그리고 희생이 녹아 있다. <수술의 탄생>은 통증과 감염의 측면에서 발생한 혁신적 변화를 중심으로 수술을 안전한 영역으로 옮기고자 노력한 선조들의 노력과 결실을 다루고 있다.
불과 150년 전, 선진국에 속하는 유럽에서조차 수술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칼과 톱으로 시행되는 수술 과정은 마취 없이 진행되었기에 수술실은 환자의 비명과 몸부림으로 대혼란이었고 이를 구경하기 위한 관객들이 수술대 곁을 채우고 있었다. 무균과 살균에 대한 개념이 없어 수술실, 수술 도구, 외과 의사와 조수 등 수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일상적인 혹은 더러운 상태로 유지되어 운좋게 수술이 잘됐더라도 감염이 안생기길 기도해야 하는 형국이었다. 당시의 환자에게 수술이란 죽음을 각오한 일대 도전이었고 수술적 성공과 수술 후 감염으로부터의 해방은 작게는 외과 의사 크게는 신의 섭리에 기댈 뿐이었다. 신이 잠시라도 한눈팔지 않기를 바라며 수술에 임했을 것이다.
오래 전 수술이나 발치 시 통증을 줄이기 위해 아산화질소나 최면술이 시도됐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1842년 미국에서 크로포드 윌리엄스 롱이 처음으로 에테르를 이용한 마취에 성공했고 1846년 영국에서 로버트 리스턴이 하지 절단 수술에 에테르 마취를 도입해 성공적 결과를 보임으로써 환자의 비명과 고통의 몸부림 없는 수술이 가능하단 사실이 알려졌다.
로버트 리스턴의 역사적 시연에 참관하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조지프 리스터가 있었다. 리스터의 가문은 독실한 퀘이커교도로 세속적 놀이를 기피하고 성실하고 목가적인 삶을 중시했다. 리스터는 그의 아버지의 배려로 어린 시절부터 과학서적과 현미경을 가까이하며 지냈다. 의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형이 천연두와 뇌종양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하자 무력감과 회의감을 느껴 의업을 포기하려다 아버지의 격려로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19세기 수술은 환자는 물론이고 외과의사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의사가 수술 중 입는 상처는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생명을 위협했고 의대생이라면 필수적으로 겪어야 하는 해부학 실습은 어떤 보호장구도 없이 더러운 환경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수로 상처를 입는 경우 감염으로 생명을 잃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환자가 감염으로 죽어가듯 의사와 의대생들도 감염으로 목숨을 잃었다. 치료를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늘자 병원을 '죽음의 집'으로 여기는 풍조도 생겨났다. 감염에 대한 개념이 부재했던 시대에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간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신의 부름에 따랐다는 위안정도였다.
창자와 같은 내부장기에 손상을 입은 경우 예후는 극히 불량했다. 치료라는 것이 그냥 방치하거나 찢어진 창자를 불로 지지거나 환자가 불편을 호소하면 관장약을 쓰거나 브렌디를 양껏 마시게 하는 수준이었다. 결국 장기 손상을 입은 대부분의 환자는 마땅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운좋게 수술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병원에서의 입원생활은 또다른 도전이었다. 다닥다닥 붙은 병상과 불결하고 더러운 병원은 수많은 감염원의 배지로 작용해 입원 환자들의 목숨을 앗아가곤 했다.
1851년 리스터는 우연히 창자에 자상을 입은 환자를 집도할 기회를 얻는다. 주정뱅이 남편의 칼에 찔린 줄리아란 여자는 창자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고 리스터가 근무하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에 이송됐고 리스터는 창자를 봉합하고 복강으로 넣은 후 피부를 봉합하는 수술을 완수했다. 당시의 창자의 손상에 대한 치료 방법은 중구난방이었고 치료 결과는 회의적이었는데 다행히 리스터의 치료는 적절했고 줄리아는 쾌차하였다. 리스터는 상처와 수술 부위에 대한 청결이 중요하단 사실도 깨달았다. 무균적 환경이란 개념이 없어 수술실은 이전에 수술했던 환자들의 피와 조직으로 범벅돼 있었고 수술 기구도 소독 없이 재사용되는 상황에서 소독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은 커다란 진보였다.
리스터는 진료하는 환자에서 채취한 샘플과 다양한 생명체의 기관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852년 환자의 감염 조직에서 긁어낸 표본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다 균일한 크기의 것을 발견하는데 리스터는 이를 병원성 물질(material morbi)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리스터 자신도 자신의 발견이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띠는지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19세기 중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는 사임이라는 외과계의 거장이 있었다. 리스터는 1853년 경험을 넓히고자 했고, 은사의 조언으로 사임을 찾아간다. 이듬해 리스터는 사임의 수련의(chief)가 되었고 사임과 함께 많은 수술을 시행한다.
리스터는 사임의 딸인 애그니스와 결혼했다. 양가로부터 받은 지원으로 집에 실험실을 세우고 어떤 상처는 깨끗하게 아무는 반면 다른 상처는 악화를 거쳐 생명을 위협하는가를 연구했다. 인간 대신 개구리를 대상으로 상처와 염증의 관계 및 염증의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다. 1859년 리스터는 글래스고 대학교에 흠정교수 자리에 지원했고 1860년부터 글래스고에서 의대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열정적 강의는 학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1861년 글래스고 왕립 병원의 외과의로 임용된다.
성심으로 환자를 진료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염증과 감염으로 수많은 환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고민을 거듭하고 있지만 원인과 해결책을 찾지 못한 결과에 리스터는 좌절했다. 이때 효모를 연구해 세균에 대한 개념을 발견하고 미생물의 자연발생설을 부정한 파스퇴르의 연구 결과는 리스터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파스퇴르는 살균을 위해 열, 여과, 소독제가 유용하다고 생각했고 리스터는 이 가운데 상처에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소독제에 집중한다. 당시 페놀 성분의 석탄산의 소독 효과가 널리 알려져 있었고 리스터는 석탄산을 환부에 사용하기 시작한다. 결과는 놀라웠다. 복합골절이나 심한 상처를 가진 환자는 염증이 심해지다 생명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상처를 깨끗이 하고 석탄산으로 드레싱하자 상처가 잘 낫는 모습을 보였다. 리스터는 자신의 경험을 학회에 발표하고 세균에 의한 감염이 상처를 악화시키고 폐혈증으로 이끈다는 사실과 이를 예방하기 위한 소독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다.
리스터의 석탄산을 이용한 소독법은 임상적으로 유용성이 증명되었으나 리스터의 성취를 시기하거나 미심쩍어하는 세력의 반발을 낳았다. 그들은 리스터의 방법을 폄하하며 새롭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다고 비난했다. 리스터는 낙담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1869년 장인이자 은사인 사임이 뇌졸중으로 에든버러 대학교 임상 외과직을 내려 놓자 리스터가 후임으로 들어간다. 같은 해 리스터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부친 조지프 잭슨이 사망했고 이듬해 사임이 사망함으로써 리스터의 슬픔은 배가 되었다. 학계의 비난에 고통받던 시기에 든든한 버팀목을 연달아 잃은 리스터의 상심은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컸을 것이다.
리스터는 석탄산을 이용한 소독법을 개선 발전시키면서 감염을 일으키는 다른 원인에 대해 생각했다. 리스터는 수술 중 지혈을 위해 사용되는 봉합사가 감염원이 될 수 있다고 여겨 기존에 사용하던 비단실 대신 창자실(catgut, 오늘날까지 흡수성 봉합사로 이용된다)을 사용했다.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석탄산 소독법과 창자실을 사용하는 리스터 소독법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유럽대륙에서 먼저 나왔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데 리스터 방법이 사용되었고 결과는 굉장히 고무적이여서 리스터 찬양자들이 증가했다. 그러자 영국 내에서도 리스터를 옹호하는 의견이 점차 확산됐다.
1871년 빅토리아 여왕이 겨드랑이의 종기로 고통받을 때 리스터가 부름을 받았고 여왕의 종기에 대한 수술적 치료를 성공적으로 해냄으로써 리스터 방법은 더욱 신뢰를 얻게 됐다. 빅토리아 여왕을 치료하면서 상처 부위의 삼출액을 배출하는 드레인(drainage)을 최초로 사용하기도 했다. 리스터의 명성은 점차 쌓여갔고 그의 헌신적 업적을 찬양하는 무리도 늘어갔다.
유럽에서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킨 리스터 방법에 대해 미국에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미국 의사 협회는 리스터의 방법을 비판하고자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국제 의학 대회에 리스터를 초대했다. 초대에 응한 리스터는 균이 감염을 일으키고 소독을 통해 균을 배제함으로써 감염률을 낮출 수 있다고 열띤 강연을 펼쳤으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리스터 방법에 대해 호의적인 몇몇 의사들의 초대로 강연과 시연을 함으로써 리스터는 자신의 주장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노력했고 그의 방법이 가진 효능과 그것을 전달할려는 리스터의 노력은 그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이들에게조차 감명을 줘 리스터 옹호자로 탈발꿈시켰다.
1883년 빅토리아 여왕에게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되었으며 1912년 평생을 질병과 싸우던 외과의사 리스터는 인류에게 진보된 의술과 의학을 선물하고 눈을 감는다.
리뷰는 딱딱했을지 모르지만 책은 재밌는 스릴러처럼 역사적 사실을 전개한다. 무미건조한 주제가 될 법한 '수술이 안전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개연성이 뛰어난 소설처럼 엮은 저자의 필력에 감탄이 나왔다. <수술의 탄생>는 조지프 리스터라는 인물의 평전처럼 읽을 수도 있고 문학 작품으로 접근할 수도 있으며 의학에 관한 역사서로 볼 수도 있다.
인간은 더 높은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죽은 자신을 디딤돌 삼아서
-앨프리드 테니슨
19세기 초 영국은 공식적으로 교수형 당한 시체만을 해부용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많은 해부학자들과 외사의사들은 시체 부족에 시달렸다. 그래서 음성적 거래가 성행했는데 잔혹한 살인자로부터 시신을 구매하거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강탈한 도굴업자로부터 시체를 사들이는 식이었다. 이런 폐해에 대한 단속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19세기 중반 가난한 자의 무연고 시신을 해부실습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면서 시체 매매가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도덕적으로 맹렬한 비난의 대상이 될 시체 매매로 인해 의학과 외과수술이 진보했다는 점은 씁쓸하고 침울한 그늘을 드리운다. 희생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죽은 자들의 헌신은 현대 의학의 수혜를 누리는 모든 이들로부터 애도와 감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견해는 으레 의심 받기 마련이고, 대개 거부된다.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널리 퍼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 존 로크
리스터의 소독법은 의학의 획기적 전환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의학자들은 리스터의 방법을 폄하하고 비난했다. 다행스럽게도 리스터는 굳은 의지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보였고 그 덕에 우리는 안전한 수술 환경과 효율적인 상처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수술의 탄생>를 보며 리스터를 비롯한 뛰어난 영웅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빛을 더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리고 현재의 학자들 또한 미래에 빛을 더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우리의 생을 더욱 자유롭게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