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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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의 탄생

끔찍했던 외과 수술을 뒤바꾼 의사 조지프 리스터

리뷰 총점 8.9 (2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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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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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제2의 스티븐 존슨이 들려주는 영국의사 리스터 이야기, '수술의 탄생'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h*******c | 2020.11.29 리뷰제목
이 책은 영국 의사 조지프 리스터(1827~1912)에 관한 것이다. 리스터는 19세기 당시 숱한 환자가 죽어나가 도살장이나 다름없던 수술실을 소독하고 의사들의 위생을 강화시킨 장본인이다.   불과 150년 전만 해도 감염이나 소독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 수술 과정도 그렇고 수술 후 감염 대책도 전무했다. 수술 환자들은 합병증에 시달렸고 아이를 낳은 산모들은 산욕열에 걸렸다.
리뷰제목

 

이 책은 영국 의사 조지프 리스터(1827~1912)에 관한 것이다. 리스터는 19세기 당시 숱한 환자가 죽어나가 도살장이나 다름없던 수술실을 소독하고 의사들의 위생을 강화시킨 장본인이다.

 

불과 150년 전만 해도 감염이나 소독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 수술 과정도 그렇고 수술 후 감염 대책도 전무했다. 수술 환자들은 합병증에 시달렸고 아이를 낳은 산모들은 산욕열에 걸렸다. 당연히 사망률도 높았다. 심지어 수술 후 사망률이 50퍼센트나 됐다는 기록도 전한다.

 

당시 병원은 단독(丹毒), 감염 괴저, 패혈증과 고름혈증 등 4대 질병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입원하지 않았다면 걸리지 않았을 질병이었기 때문에 병원병이라는 별명까지 붙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감염 경로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리스터였다.

 

그가 해결의 실마리를 잡은 것은 1864년 루이 파스퇴르의 연구를 접한 후였다. 파스퇴르는 미생물이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리스터는 이 연구를 토대로 석탄산을 이용해 살균제를 개발했다. 이에 수술 도구를 살균하고 환자의 상처를 소독해 수술 후 감염으로 인한 사망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후 리스터는 이후 근대 병원과 의료의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런 업적 덕분에 리스터는 근대 외과의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저자가 운영하는 스미스소니언 채널 흥미로운 삶과 죽음

 

저자 린지 피츠해리스가 리스터를 이야기하면서 수술의 탄생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것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의학의 역사를 재미있게 전달하는 젊은 연구자이자 저술가로 정평이 나 있다. 현재 저자는 스미스소니언 채널 흥미로운 삶과 죽음(The Curious Life and Death Of...)’, 블로그 ‘외과의의 견습생(The Chirurgeon’s Apprentice)’과 유튜브 ‘나이프 아래서(Under the Knife)’  등  다방면에서 소통하고 강의하며 활약하고 있다.

 

피츠해리스는 미국인이지만 영국 옥스퍼드에서 과학사와 의학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의 내공과 필력은 영국 과학 작가 스티븐 존슨에 버금갈 정도다. 두 번째 책은 성형 수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뉴질랜드 의사 해럴드 길리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역시 기대된다.

 

저자의 말대로 리스터는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리스터에 관한 이야기를 1877년 그가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떠나던 무렵(나이 오십 때)에서 끝난다. 이후 거의 한 페이지 전체를 할애해 리스터의 성공담을 묘사한다.

 

자신의 이론과 방법이 받아들여진 뒤로 수십 년을 더 살았으며, 이윽고 외과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상임 외과의(영구직)로 임명되었다. 수십 년 동안 그는 온갖 영예와 상을 받았다.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의학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에게 주는 부데상도 받았다. 그는 기사 작위를 받고 남작이 되었다. 왕립협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나중에 자신의 이름을 딴 리스터 예방의학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여왕의 추밀 고문관이 되었고, 공로 훈장도 받았다. (중략)그리고 19122월 어느 추운 겨울 날 아침 평온하게 영면했다.”

 

나는 당대의 인물 존 스노우(1813~1858)가 떠오른다. 런던에서 유행한 콜레라를 성공적으로 퇴치했던 바로 그 인물. 스노우는 리스터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불운한 말년을 보냈다. 한때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주치의로 지내며 여왕의 아이를 두 번이나 받기도 했다. 1853년과 57년 여왕이 각각 레오폴드 왕자와 베아트리스 공주를 출산할 때 클로로포름으로 무통 분만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당대 의사들은 그를 질투했음인지 아니면 너무나 혁신적인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음인지 의사협회에서 제명하고 쫓아내 버렸다. 스노우는 결국 방황하고 괴로워하다가 1858년 뇌졸중으로 겨우 마흔다섯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물론 리스터 역시 여러 학자와 동료 의사들로부터 배척당하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업적을 인정받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을 보면 성공적인 인생은 재능 만으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불굴의 의지 그리고 한 스푼 정도의 운도 따라야 한다.

 

남궁인 응급의학전문의가 추천했다. 번역은 이한음 선생이 맡았다. 이 선생은 서울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과학전문 번역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책날개에 이 선생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이만저만 아쉬운 것이 아니다, 선생의 팬, 의외로 많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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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죽음의 집에서 치유의 집으로, 조지프 리스터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n*****m | 2020.11.21 리뷰제목
지금도 병원에서 병(病)을 얻어 온다는 말을 종종 하지만(그래서 소송이 걸리곤 한다), 과거엔(사실 그리 오랜 과거도 아니다) 병원은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죽기 위해 가는 곳이란 인상이 깊었다. 오랫동안 유럽에서 병원에 가는 것은 가난한 사람뿐이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의사를 집으로 불렀다.   수술은 더욱 그랬다. 마취제가 개발되고 쓰이기 전의 수술은 고통스러웠다. 외과
리뷰제목

지금도 병원에서 병()을 얻어 온다는 말을 종종 하지만(그래서 소송이 걸리곤 한다), 과거엔(사실 그리 오랜 과거도 아니다) 병원은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죽기 위해 가는 곳이란 인상이 깊었다. 오랫동안 유럽에서 병원에 가는 것은 가난한 사람뿐이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의사를 집으로 불렀다.

 

수술은 더욱 그랬다. 마취제가 개발되고 쓰이기 전의 수술은 고통스러웠다. 외과의들의 실력은 얼마나 고통 없이 잘 치료하느냐보다 얼마나 빨리 수술을 마치느냐로 가늠되었다. 그러다 1840년대 즈음 클로로포름 등 마취제가 나오면서 수술은 고통이 덜한 상태에서(고통이 없을 수는 없으므로) 이뤄질 수 있는 것으로 바뀔 수가 있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 수술을 받고도 죽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수술을 받고 난 후 고름이 차오르고, 열이 나면서 며칠 만에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당시의 지식으로는 이유를 몰랐다. 이유를 몰랐으므로 생()과 사()를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빈 병원의 이그나즈 제멜바이스였다(그 이전의 인물들, 알렉산드 고든, 웬델 홈스 같은 이들도 있지만). 파스퇴르와 코흐에 의해 세균설(혹은 배종설)이 나오기 전에 산부인과 병실 사이의 사망률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통해 병실로 들어가기 전 손씻기를 주장했다(그래서 제멜바이스는 감염관리의 아버지(Father of infection control)이라고도 불린다). 그 조치는 사망률 급감으로 나타났지만, 그의 주장은 다른 의사들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대신 정신병자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린지 피츠해리스가 쓰고 있듯이) “제멜바이스의 방법과 이론은 의학계에서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188)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수술에서 감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확산시킨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조지프 리스터였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현미경을 의학 연구에 활용했고, 파스퇴르의 세균 이론을 듣고는 이를 수술 기법에 접목하여 석탄산을 이용하여 소독법을 확립했다. 간단한 과정은 아니었지만, 그의 소독법은 전 세계의 외과의들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병원이 죽음의 집이 아니라 치유의 집이 될 수가 있었다.

 

그는 그 이전부터, 그리고 그 이후는 더욱더 최고의 외과의로서 칭송을 받았지만, 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제멜바이스에 비해서 덜 알려진 것도 사실이다(우리가 어떤 것을 기억하느냐는 사실 좀 편의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알 수 있는 예가 있다. 지금도 어느 편의점이나 약국이나 선반을 차지하고 있는 구강청결제 리스테린(listerin)’이 그것이다. 소독법을 확산시키고자 미국 필라델피아를 방문한 리스터의 강연을 듣고 조지프 조슈아 로런스라는 의사가 조제하고, 약제사인 조던 휘트 램버트가 상업화한 것이 지금도 가장 널리 쓰이는 구강청결제 중 하나가 바로 리스테린이다.

 

리스트의 삶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충실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외과의로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생각했고, 그것을 단지 기존의 방법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 기초해서 연구하고,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고 실제 수행하고, 또 개선함으로써 수술의 개념을 완전히 바꿀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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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수술의 탄생》 놀라운 19세기 의학의 역사! 평점8점 | r*******n | 2020.11.26 리뷰제목
1840년대에 외과 수술은 숨겨진 위험으로 가득한 지저분한 분야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했다. 그런 위험들 때문에, 많은 외과의는 아예 수술을 거부하고, 오로지 피부병과 상처처럼 외상을 치료하는 일만 하는 쪽을 택했다. 몸을 가르는 수술은 드물었고, 그것이 바로 수술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수술실에 관중이 빽빽하게 들어차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한 예로, 1840년에 글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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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대에 외과 수술은 숨겨진 위험으로 가득한 지저분한 분야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했다. 그런 위험들 때문에, 많은 외과의는 아예 수술을 거부하고, 오로지 피부병과 상처처럼 외상을 치료하는 일만 하는 쪽을 택했다. 몸을 가르는 수술은 드물었고, 그것이 바로 수술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수술실에 관중이 빽빽하게 들어차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한 예로, 1840년에 글래스고 왕립 병원에서 이루어진 수술은 120건에 불과했다. 언제나 수술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을 때에야 쓰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p.11~12

 

1846년 12월,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 수술실에 군중 수백 명이 모였다.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외과의가 허벅지 절단 수술 광경을 보여줄 예정이었고, 수술실에는 의대생들과 호기심 가득한 관객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수술실 한가운데에는 앞서 이루어진 해부의 흔적들이 달라붙어 있는 나무 탁자가 있었고, 밑바닥에는 잘린 팔다리에서 쏟아졌을 피에 흠뻑 젖은 톱밥들이 널려 있었다. 당시 외과의들은 엉겨 말라붙은 피로 떡칠이 된 앞치마를 두르고, 손이나 소술 도구를 씻는 일 없이 수술실로 들어오곤 했다. 따라서 사망은 대부분 수술 후 감염 때문에 일어났고, 수술실은 죽음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감염과 불결만이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진통제와 마취제가 개발되지 않아 수술의 고통 또한 끔찍했던 시절이었다.

 

 

불과 150년 전만 해도 수술의 결과가 거의 운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수술실이 죽음으로 가는 관문이었고, 의사들은 피가 튀는 수술대에 묶인 환자의 비명과 항의를 모질게 무시하며 수술을 진행했다고 하니 이는 무시무시한 공포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위생적이어야 할 병원이 도시에서 가장 불결한 장소였던 시절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의 한 부분이다.

 

이 책의 저자인 피츠해리스는 의학의 역사를 재미있게 전달하는 젊은 연구자이자 저술가로 끔찍하고 불결했던 수술실이 위생적인 의료 공간이 되기까지 19세기 의학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피가 뚝뚝 흐르고 톱으로 뼈를 자르는 당시의 공포스러운 수술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사진이나 이미지 한 장 없이도 매우 잔인하고 공포스러웠다. 그렇다면 도살장이나 다름없었던 수술실은 어떻게 위생적인 의료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일까.

 

 

2차 출혈, 패혈증, 고름혈증, 병원 감염 괴저, 파상풍, 단독 같은 너무나 친숙한 적들은 언제나 병동에 있었다. 상처는 으레 감염되어 곪기 마련이었다. 리스터의 남성 급성 환자 병실은 1층에 있었다. 바로 옆에는 앞서 콜레라가 대유행할 때 죽은 이들의 썩어 가는 시신들이 흘러 넘치고 있는 묘지가 있었다. 병실은 묘지와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었다... 또 병원 전체에 손과 수술 도구를 씻는 설비가 거의 없었다... 모든 것에 한 꺼풀 때가 묻어 있었다.      p.177

 

끔찍했던 외과 수술을 뒤바꾸고 <소독>이라는 개념을 발견해 의료 혁명에 앞장선 것은 의사 조지프 리스터였다. 19세기 병원을 초토화시키던 것은 단독, 감염 괴저, 패혈증, 고름혈증이었다. 감염으로 죽는 환자의 대부분은 애초에 입원하지 않았다면 그 병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감염병이 어떻게 전파되는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는데, 리스터는 당시 루이 파스퇴르라는 생물학자의 연구를 접하고 자신만의 살균제를 개발하게 된다. 이를 통해 수술 후 감염으로 인한 사망을 크게 줄였고, 소독과 위생을 강조해 외과를 현대 의학의 한 분야로 변모시켰다. 이 책은 의사 조지프 리스터의 일생과 소독법의 발전을 통해 병원이 어떻게 죽음의 공간에서 치료의 공간이 되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팬데믹 이후 마스크를 시작으로 손 소독제 등 위생용품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안전 민감증이 만들어낸 결벽에 가까운 위생이 바이러스 확산을 차단하는 기능 외에도 여타의 다른 감염병 발생도 크게 줄어들었다고 하니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감염과 소독, 위생이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된 지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다가 의학서나 역사서라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흥미롭고,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가독성 있는 책이기도 하다. 피가 흐르고, 악취가 풍기며, 섬뜩하고 오싹한 19세기 의학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의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낸 선구자를 만나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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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수술의 탄생 - 린지 피츠해리스 평점10점 | YES마니아 : 골드 t******8 | 2020.11.20 리뷰제목
사람들에게 '수술'이라는 단어는 긴장과 두려움을 유발하지만 어떤 질병의 치료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현대적 수술은 적절한 통증 조절 수단과 체계적인 수술 환경을 갖추고 있어, 의사는 필요한 수술을 권할 수 있고 환자는 의사의 조언을 바탕으로 수술을 결심할 수 있다. 현대 의학에서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의학적 필요성이다. 통증과 감염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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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수술'이라는 단어는 긴장과 두려움을 유발하지만 어떤 질병의 치료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현대적 수술은 적절한 통증 조절 수단과 체계적인 수술 환경을 갖추고 있어, 의사는 필요한 수술을 권할 수 있고 환자는 의사의 조언을 바탕으로 수술을 결심할 수 있다. 현대 의학에서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의학적 필요성이다. 통증과 감염 가능성도 수술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질병 치료에 우선하지 못한다. 현대 의학이 '통증과 감염을 정복'했다는 과감한 말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겸손하게 적더라도 상당부분 경감시킨 것은 사실이다. 당연히 이런 성공에는 선조들의 지혜와 노력 그리고 희생이 녹아 있다. <수술의 탄생>은 통증과 감염의 측면에서 발생한 혁신적 변화를 중심으로 수술을 안전한 영역으로 옮기고자 노력한 선조들의 노력과 결실을 다루고 있다.  


불과 150년 전, 선진국에 속하는 유럽에서조차 수술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칼과 톱으로 시행되는 수술 과정은 마취 없이 진행되었기에 수술실은 환자의 비명과 몸부림으로 대혼란이었고 이를 구경하기 위한 관객들이 수술대 곁을 채우고 있었다. 무균과 살균에 대한 개념이 없어 수술실, 수술 도구, 외과 의사와 조수 등 수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일상적인 혹은 더러운 상태로 유지되어 운좋게 수술이 잘됐더라도 감염이 안생기길 기도해야 하는 형국이었다. 당시의 환자에게 수술이란 죽음을 각오한 일대 도전이었고 수술적 성공과 수술 후 감염으로부터의 해방은 작게는 외과 의사 크게는 신의 섭리에 기댈 뿐이었다. 신이 잠시라도 한눈팔지 않기를 바라며 수술에 임했을 것이다. 


오래 전 수술이나 발치 시 통증을 줄이기 위해 아산화질소나 최면술이 시도됐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1842년 미국에서 크로포드 윌리엄스 롱이 처음으로 에테르를 이용한 마취에 성공했고 1846년 영국에서 로버트 리스턴이 하지 절단 수술에 에테르 마취를 도입해 성공적 결과를 보임으로써 환자의 비명과 고통의 몸부림 없는 수술이 가능하단 사실이 알려졌다.


로버트 리스턴의 역사적 시연에 참관하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조지프 리스터가 있었다. 리스터의 가문은 독실한 퀘이커교도로 세속적 놀이를 기피하고 성실하고 목가적인 삶을 중시했다. 리스터는 그의 아버지의 배려로 어린 시절부터 과학서적과 현미경을 가까이하며 지냈다. 의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형이 천연두와 뇌종양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하자 무력감과 회의감을 느껴 의업을 포기하려다 아버지의 격려로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19세기 수술은 환자는 물론이고 외과의사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의사가 수술 중 입는 상처는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생명을 위협했고 의대생이라면 필수적으로 겪어야 하는 해부학 실습은 어떤 보호장구도 없이 더러운 환경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수로 상처를 입는 경우 감염으로 생명을 잃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환자가 감염으로 죽어가듯 의사와 의대생들도 감염으로 목숨을 잃었다. 치료를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늘자 병원을 '죽음의 집'으로 여기는 풍조도 생겨났다. 감염에 대한 개념이 부재했던 시대에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간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신의 부름에 따랐다는 위안정도였다.  


창자와 같은 내부장기에 손상을 입은 경우 예후는 극히 불량했다. 치료라는 것이 그냥 방치하거나 찢어진 창자를 불로 지지거나 환자가 불편을 호소하면 관장약을 쓰거나 브렌디를 양껏 마시게 하는 수준이었다. 결국 장기 손상을 입은 대부분의 환자는 마땅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운좋게 수술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병원에서의 입원생활은 또다른 도전이었다. 다닥다닥 붙은 병상과 불결하고 더러운 병원은 수많은 감염원의 배지로 작용해 입원 환자들의 목숨을 앗아가곤 했다. 


1851년 리스터는 우연히 창자에 자상을 입은 환자를 집도할 기회를 얻는다. 주정뱅이 남편의 칼에 찔린 줄리아란 여자는 창자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고 리스터가 근무하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에 이송됐고 리스터는 창자를 봉합하고 복강으로 넣은 후 피부를 봉합하는 수술을 완수했다. 당시의 창자의 손상에 대한 치료 방법은 중구난방이었고 치료 결과는 회의적이었는데 다행히 리스터의 치료는 적절했고 줄리아는 쾌차하였다. 리스터는 상처와 수술 부위에 대한 청결이 중요하단 사실도 깨달았다. 무균적 환경이란 개념이 없어 수술실은 이전에 수술했던 환자들의 피와 조직으로 범벅돼 있었고 수술 기구도 소독 없이 재사용되는 상황에서 소독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은 커다란 진보였다.  


리스터는 진료하는 환자에서 채취한 샘플과 다양한 생명체의 기관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852년 환자의 감염 조직에서 긁어낸 표본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다 균일한 크기의 것을 발견하는데 리스터는 이를 병원성 물질(material morbi)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리스터 자신도 자신의 발견이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띠는지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19세기 중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는 사임이라는 외과계의 거장이 있었다. 리스터는 1853년 경험을 넓히고자 했고, 은사의 조언으로 사임을 찾아간다. 이듬해 리스터는 사임의 수련의(chief)가 되었고 사임과 함께 많은 수술을 시행한다. 


리스터는 사임의 딸인 애그니스와 결혼했다. 양가로부터 받은 지원으로 집에 실험실을 세우고 어떤 상처는 깨끗하게 아무는 반면 다른 상처는 악화를 거쳐 생명을 위협하는가를 연구했다. 인간 대신 개구리를 대상으로 상처와 염증의 관계 및 염증의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다. 1859년 리스터는 글래스고 대학교에 흠정교수 자리에 지원했고 1860년부터 글래스고에서 의대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열정적 강의는 학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1861년 글래스고 왕립 병원의 외과의로 임용된다. 


성심으로 환자를 진료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염증과 감염으로 수많은 환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고민을 거듭하고 있지만 원인과 해결책을 찾지 못한 결과에 리스터는 좌절했다. 이때 효모를 연구해 세균에 대한 개념을 발견하고 미생물의 자연발생설을 부정한 파스퇴르의 연구 결과는 리스터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파스퇴르는 살균을 위해 열, 여과, 소독제가 유용하다고 생각했고 리스터는 이 가운데 상처에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소독제에 집중한다. 당시 페놀 성분의 석탄산의 소독 효과가 널리 알려져 있었고 리스터는 석탄산을 환부에 사용하기 시작한다. 결과는 놀라웠다. 복합골절이나 심한 상처를 가진 환자는 염증이 심해지다 생명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상처를 깨끗이 하고 석탄산으로 드레싱하자 상처가 잘 낫는 모습을 보였다. 리스터는 자신의 경험을 학회에 발표하고 세균에 의한 감염이 상처를 악화시키고 폐혈증으로 이끈다는 사실과 이를 예방하기 위한 소독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다. 


리스터의 석탄산을 이용한 소독법은 임상적으로 유용성이 증명되었으나 리스터의 성취를 시기하거나 미심쩍어하는 세력의 반발을 낳았다. 그들은 리스터의 방법을 폄하하며 새롭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다고 비난했다. 리스터는 낙담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1869년 장인이자 은사인 사임이 뇌졸중으로 에든버러 대학교 임상 외과직을 내려 놓자 리스터가 후임으로 들어간다. 같은 해 리스터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부친 조지프 잭슨이 사망했고 이듬해 사임이 사망함으로써 리스터의 슬픔은 배가 되었다. 학계의 비난에 고통받던 시기에 든든한 버팀목을 연달아 잃은 리스터의 상심은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컸을 것이다. 


리스터는 석탄산을 이용한 소독법을 개선 발전시키면서 감염을 일으키는 다른 원인에 대해 생각했다. 리스터는 수술 중 지혈을 위해 사용되는 봉합사가 감염원이 될 수 있다고 여겨 기존에 사용하던 비단실 대신 창자실(catgut, 오늘날까지 흡수성 봉합사로 이용된다)을 사용했다.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석탄산 소독법과 창자실을 사용하는 리스터 소독법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유럽대륙에서 먼저 나왔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데 리스터 방법이 사용되었고 결과는 굉장히 고무적이여서 리스터 찬양자들이 증가했다. 그러자 영국 내에서도 리스터를 옹호하는 의견이 점차 확산됐다.


1871년 빅토리아 여왕이 겨드랑이의 종기로 고통받을 때 리스터가 부름을 받았고 여왕의 종기에 대한 수술적 치료를 성공적으로 해냄으로써 리스터 방법은 더욱 신뢰를 얻게 됐다. 빅토리아 여왕을 치료하면서 상처 부위의 삼출액을 배출하는 드레인(drainage)을 최초로 사용하기도 했다. 리스터의 명성은 점차 쌓여갔고 그의 헌신적 업적을 찬양하는 무리도 늘어갔다.


유럽에서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킨 리스터 방법에 대해 미국에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미국 의사 협회는 리스터의 방법을 비판하고자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국제 의학 대회에 리스터를 초대했다. 초대에 응한 리스터는 균이 감염을 일으키고 소독을 통해 균을 배제함으로써 감염률을 낮출 수 있다고 열띤 강연을 펼쳤으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리스터 방법에 대해 호의적인 몇몇 의사들의 초대로 강연과 시연을 함으로써 리스터는 자신의 주장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노력했고 그의 방법이 가진 효능과 그것을 전달할려는 리스터의 노력은 그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이들에게조차 감명을 줘 리스터 옹호자로 탈발꿈시켰다. 


1883년 빅토리아 여왕에게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되었으며 1912년 평생을 질병과 싸우던 외과의사 리스터는 인류에게 진보된 의술과 의학을 선물하고 눈을 감는다. 




리뷰는 딱딱했을지 모르지만 책은 재밌는 스릴러처럼 역사적 사실을 전개한다. 무미건조한 주제가 될 법한 '수술이 안전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개연성이 뛰어난 소설처럼 엮은 저자의 필력에 감탄이 나왔다. <수술의 탄생>는 조지프 리스터라는 인물의 평전처럼 읽을 수도 있고 문학 작품으로 접근할 수도 있으며 의학에 관한 역사서로 볼 수도 있다.   


인간은 더 높은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죽은 자신을 디딤돌 삼아서 

-앨프리드 테니슨

19세기 초 영국은 공식적으로 교수형 당한 시체만을 해부용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많은 해부학자들과 외사의사들은 시체 부족에 시달렸다. 그래서 음성적 거래가 성행했는데 잔혹한 살인자로부터 시신을 구매하거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강탈한 도굴업자로부터 시체를 사들이는 식이었다. 이런 폐해에 대한 단속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19세기 중반 가난한 자의 무연고 시신을 해부실습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면서 시체 매매가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도덕적으로 맹렬한 비난의 대상이 될 시체 매매로 인해 의학과 외과수술이 진보했다는 점은 씁쓸하고 침울한 그늘을 드리운다. 희생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죽은 자들의 헌신은 현대 의학의 수혜를 누리는 모든 이들로부터 애도와 감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견해는 으레 의심 받기 마련이고, 대개 거부된다.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널리 퍼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 존 로크 

리스터의 소독법은 의학의 획기적 전환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의학자들은 리스터의 방법을 폄하하고 비난했다. 다행스럽게도 리스터는 굳은 의지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보였고 그 덕에 우리는 안전한 수술 환경과 효율적인 상처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수술의 탄생>를 보며 리스터를 비롯한 뛰어난 영웅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빛을 더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리고 현재의 학자들 또한 미래에 빛을 더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우리의 생을 더욱 자유롭게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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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의료 공간의 탄생 평점10점 | q*****2 | 2022.05.29 리뷰제목
크게 아픈 적이 없었음은 실로 행운이다. 실력 있는 의시가 많고, 대부분 치유에 성공한다는 믿음이 있다곤 하나 굳이 병원을 드나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평소와 조금이라도 다른 통증 같은 게 느껴질 때면 두려움이 일기도 한다. 혹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는 어마어마한 질병의 가능성에 대해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다 보면 고맙게도 그와 같은 증상은 사라지고는 해왔다. 심리
리뷰제목

크게 아픈 적이 없었음은 실로 행운이다. 실력 있는 의시가 많고, 대부분 치유에 성공한다는 믿음이 있다곤 하나 굳이 병원을 드나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평소와 조금이라도 다른 통증 같은 게 느껴질 때면 두려움이 일기도 한다. 혹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는 어마어마한 질병의 가능성에 대해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다 보면 고맙게도 그와 같은 증상은 사라지고는 해왔다.

심리적인 거리낌과는 별개로 아프면 병원을 가야 한다는 사고는 보편화됐다. 과거에도 의료진은 존재했지만 현재와는 그 양상이 사뭇 달랐던 듯하다. 조지프 리스터의 인생을 닮은 <수술의 탄생>을 읽는 동안 내가 가장 자주 느꼈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인류의 역사가 곧 진보라고 하였지만, 진보 이전의 삶이 이토록 끔찍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바 없었다. 부디 상상이었으면 좋겠지만 엄연한 진실이었다. 콧물이 흐르거나 기침이 나는 일에 대한 단순한 처방을 뛰어넘어 그 시절에도 외과적 처치, 즉 수술은 존재했는데 그 형태가 오늘날과는 여러 모로 달랐다. 다른 곳도 아닌 수술실이므로 더욱 중시돼야 했을 위생에 대해 어느 누구도 관심을 아니 가진 듯했다. 수술복은 앞선 수술로 인해 있는 힘껏 더럽혀진 상태였는데, 오히려 이는 전임자의 놀라운 성과를 의미하는 걸로 여겨져 영광처럼 받아들여졌다. 코로나19 이후 더더욱 중시된 손 씻기마저도 행하는 이가 없었다. 피부를 자르고 꿰매는 도구라 하여 깔끔했을 리 없다. 수술대에 누울 수 있었던 이들은 한정적이었다. 적잖은 이들은 입원 거부를 당하였다. 부유한 이들이라면 제 집에서 치료받기를 택했다. 보다 익숙한 환경에 대한 선호가 이에 영향을 미쳤을 터이나, 한 편으로는 병원이 죽음의 신이 머무는 공간처럼 인식됐던 탓이 컸다.

저자의 서술 속 리스터는 괴짜의 모습과 닮은 꼴이었다. 집안은 부유했고, 그는 아버지의 부에 힘입어 오래도록 직업전선에 뛰어들지 않아도 됐다. 허나 아버지가 그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은 현미경 같았으니, 리스터는 당대 많은 의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현미경을 활용해 온갖 조직을 살피고 성실하게도 이를 일일이 그림으로 남겼다. 유약할 것도 같았지만 사방으로 피가 튀는 수술실에서 달아나지 않았던 걸 보면 나름 담력을 타고는 난 듯도 했다. 오늘날 의학이 그로부터 힘입은 바가 크단 걸 감안하면 그의 담대함은 인류에게 축복이었다.

오늘날이었으면 윤리적으로 용납되지 않았을 많은 시도가 당대엔 자유로웠다. 인간이 아니므로 살아있는 개나 개구리 등이 영문도 모른 채 실험 대상으로 전락했다. 지극히 정상인 뇌를 드러내고 부분 부분을 순차적으로 망가뜨려가며 인체의 신비에 대한 이해를 높였던 당시의 방식에 대한 거부감이 절로 일었다. 물론 그와 같은 과정이 있었기에 리스터와 같은 거장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이리라. 또한, 리스터는 자신이 옳다 여기는 것을 추구함에 있어 강인한 집념을 보였다. 그는 상처 부위가 짓무르고 고름이 생성되는 걸 주목했으며, 온전히 의학 분야라 하긴 힘든 파스퇴르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응용하여 자신만의 방식을 고안했다. 성공 사례가 쌓여가는 와중에도 세상은 스타의 탄생에 대한 거부 반응을 여실히 드러냈으며, 오랜 기간 동안 그의 소독법은 금기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 처한 인물들이 그의 손 아래서 생명을 되찾았다. 게다가 당시엔 더욱 거대한 영향력을 선보였을 여왕 치료에까지 성공하면서 그는 의학 그 자체처럼 추앙받기 시작했다. 의술 그 자체도 물론 훌륭했지만 그를 위대하게 만들어 준 건 따로 있었다. 그의 기록은 착실했다. 의술을 독식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담긴 듯도 했다. 비록 이를 받아들인 이들이 충분히 성실하게 기록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리스터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경우도 없진 않았지만, 마음을 먹는다면 누구라도 그를 스승 삼아 자신의 의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추종자들이 심히 많아진 후에도 그는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1870년에 시작한 연구의 기록이 1899년까지 이어질 정도로, 그는 끊임없이 미흡한 점을 고쳐가면서 스스로 발전을 일구었다.

<수술의 탄생>은 의학 서적이기에 앞서 한 인물의 생애를 촘촘히 다룬 헌사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의학계의 불확실성을 한 꺼풀씩 제거해 나간 리스터의 모습에 한동안 말을 잃었다. 신은 이따금 이토록 초인적인 존재를 탄생시킴으로써 인류가 절망에 늪에 빠지는 걸 방지하는 모양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기꺼이 순응한 모든 이들에게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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