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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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

리뷰 총점 9.0 (3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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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 서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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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 - 셀린 벨로크 평점9점 | g*******7 | 2018.12.05 리뷰제목
우리는 살아가면서 힘들고 괴로운 상황을 자주 겪게 된다. 그럴 때마다 긍정적이면서 낙관적인 생각을 하라는 주문을 받지만, 사람에 따라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수 밖에 없는데,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는 그 괴로운 상황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며 그에 따른 해결책을 바로 쇼펜하우어의 주장과 아포리즘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
리뷰제목

 우리는 살아가면서 힘들고 괴로운 상황을 자주 겪게 된다. 그럴 때마다 긍정적이면서 낙관적인 생각을 하라는 주문을 받지만, 사람에 따라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수 밖에 없는데,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는 그 괴로운 상황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며 그에 따른 해결책을 바로 쇼펜하우어의 주장과 아포리즘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염세주의 철학자의 대명사로 알려진 쇼펜하우어가 하필 괴로운 날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더더욱 흥미롭게 느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괴롭고 힘든 상황에서 인간의 삶이 고통 뿐이며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염세주의를 논하는 것은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괴로움을 극복하고 우뚝 일어서는 것으로 종종 가르침을 받아온 우리에게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왠지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가 삶은 그저 고통이라고 주장한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실상은 고통이라고 생각되는 삶에 대한 진지한 분석을 통하여 그러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논하고 있기에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라는 책의 제목이 결코 모순이 아님을 알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사물 또는 세계의 본질이 '의지'가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변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든다면 사람의 눈이 보고자 하는 의지로 인하여 생성된 것이고, 자석이 쇠를 잡아당기는 것도 개체들의 '의지'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만물 생성의 근원이자 모든 악과 고통의 원천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괴로운 상황을 마주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지 또는 자연의 본능에 의하여 생겨날 수 밖에 없다.

 "모든 욕망은 결핍에서 생긴다.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생기는 것이다. 만족이 안 되는 이상 고통이다. 그런데 어떤 만족도 지속성은 없다. 만족은 새로운 욕망의 출발점일 뿐이다."

 - p. 37 中에서-

 욕망과 결핍, 만족과 그 만족의 지속성에 대한 이 글만 보아도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심지어 행복 또는 사랑, 지성 역시 쇼펜하우어의 '의지'에 따른 신기루이자 시녀라고 지적한다. 행복은 현재에는 잡을 수 없는 연기처럼 나타난다는 점에서 감각이 아닌 생각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사랑 역시 우리가 종족 번식을 하도록 자연이 창조한 환각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목표는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 하나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식을 낳기 위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우리가 고귀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을 하는 사랑을 단순한 짝짓기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을 하게 되지만, 그는 단호하게 개인의 의지가 자연의 섭리와 함께 하나로 집중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가치있는 것이라 말하면서 우리의 지적을 일축한다.

 "이러한 확고한 결정성으로 여려 개체들이 미래 세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비누 거품 같은 형이상학적 감정보다 더 가치 있고 고상한 목표가 아니겠는가?

 - p. 53 中에서 -

 

 결혼에 대하여 쇼펜하우어는 자연의 본능이라는 관점에서 아이를 만들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에 대하여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결혼이 서로의 조건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음을 우리 역시 인정하지 않는가? 어쩌면 쇼펜하우어의 표현은 너무나 직설적일 뿐, 결혼의 핵심을 자연의 본능이라는 관점에서 짚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사람은 짝짓기를 위한 목적으로 자연이 만들어낸 환상이니 아이가 생기면 이제 자연은 마법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도취는 끝났다."

 - p. 60 中에서 -

 아이가 생긴 이후 부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물론 여전히 서로 사랑한다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것을 위와 같이 표현하는 쇼펜하우어를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흔히 살아가면서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부분들이 그저 무수히 많은 욕망의 덩어리일 뿐이며, 단지 잠깐 동안의 만족만이 있을 뿐이므로 쇼펜하우어는 삶의 현장이란 욕망들이 투쟁하는 장소이며, 이로 인하여 우리의 삶은 고통일 뿐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우리가 죽는다 해도 '의지'에 따른 맹목적인 욕망은 그치지 않으며 종의 번식과 지속이라는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을 논하면서도 자살과 같은 죽음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는 이 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괴로운 날에 접하게 되면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죽음을 통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삶이 고통의 연속이자 그 자체라는 말은 언뜻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우리가 괴롭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우리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만물의 근원인 '본능적인 의지'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꾸로 이러한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러한 의구심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본질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우리가 이를 의식하지 않으면 '살고자 하는 의지'라는 폭군에 우리를 내주게 된다."

 - p. 134 中에서 -

 다소 형이상학적인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저자는 행동 철학의 일환으로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예술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즉, 예술은 외양의 파도 속에 흔들리는 것을 영원한 형태로 고정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예술 작품에는 적어도 시선을 변화하는 힘과 재능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예술 작품(그림 또는 음악)에 대한 감상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술 작품을 통하여 그러한 흐름에 대한 인식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한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수많은 위험과 쓴맛을 느끼며 끊임없는 노력을 평생 한다. 단순히 일자리나 칭호, 명예 같은 것만 아니라 부, 학문, 예술 또한 기본적으로 단 하나의 목표 때문에 추구되는 것인데, 그 궁극적 목적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존경을 받기 위함이다. 이것만 보아도 인간의 광기가 어느 정도인지 증명된다."

 - p. 168 中에서 -

 타자의 시선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비판을 보면 그동안 우리가 왜 성공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받아왔던 것이 결국 인간의 광기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최근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행복을 찾는 방법들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생각은 탁월해 보인다. 실제로 그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의지'에 의한 고통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음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더하여 관조, 초연, 연민은 물론 니르바나와 키에티슴(정적주의) 역시 '의지'에 휩쓸린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론으로 제시되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고 나아가야 하는 방향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실상 개인의 의지가 아닌 자연 또는 살고자 하는 '의지'에 따른 것임을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쉽게 이해하긴 어렵더라도 우리의 삶을 달리 생각할 여지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는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통하여 행동 철학을 표방하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에 따른 만물의 생성과 이치는 색다른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대안으로 제시되는 행동 철학 부분은 다소 빈약하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이 세상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이었다. 아마 그의 철학을 잘 이해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행동 또는 대안을 스스로 모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쇼펜하우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를 그저 염세주의 철학자로만 잘못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충분히 그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가져볼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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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인생에서 파랑새를 붙드는 방법 평점10점 | y*****2 | 2019.09.09 리뷰제목
이 책을 골라든 것은 아마도 오래 전에 읽은 강원대학교의 김선희교수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http://blog.yes24.com/document/5689789>를 읽은 기억이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철학적 상담을 통하여 현대인의 마음의 병을 치료하려는 철학상담치료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김선희교수는 그 꼬투리를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적 사유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괴로운
리뷰제목

이 책을 골라든 것은 아마도 오래 전에 읽은 강원대학교의 김선희교수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http://blog.yes24.com/document/5689789>를 읽은 기억이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철학적 상담을 통하여 현대인의 마음의 병을 치료하려는 철학상담치료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김선희교수는 그 꼬투리를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적 사유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는 싱가포르에 있는 프랑스 국제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셀렌 벨로크 교수가 ‘우리의 삶을 바꾸기 위해 위대한 철학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달라’  뜻에서 썼다고 합니다. ‘철학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하면서 우리의 삶을 개선하려는 야망 같은 것을 가진다’는 철학의 본질에 기반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책의 독자들은 새로운 철학적 이론의 도움을 얻어 자기 문제들을 해석해보고 또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마침내 그 문제를 해결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도 했습니다.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을 바꾼 다음에라야 우리 삶과 그 의미라는 더 큰 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1. 진단하기, 2. 이해하기, 3. 적용하기, 4. 내다보기 등의 순서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진단하기의 과정에서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는지, 즉 우리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어서 파악된 문제를 이해하는 단계인데, 여기에서 혁신적인 철학적 테제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즉 새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용하기의 단계에서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행동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어나갈 수 있도록 행동에 옮김으로서 본격적인 문제해결 과정에 돌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내다보기의 단계에서는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적 견해를 통하여 삶을 더 총괄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고 합니다. 즉 일상에서 자신을 관리하게 된 것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단계라 하겠습니다.

저자는 “철학은 ‘영혼의 약’이다”라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약의 부작용을 미리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미리 경고합니다. 아마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극약처방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약물학의 시조 파라켈수스가 남긴 ‘모든 것은 독이며 독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용량만이 독이 없는 것을 정한다.’라는 금언처럼 부작용이 없는 만큼 사용하면 극약도 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산다는 것은 고통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자체로는 실로 고유한 가치가 없고, 삶이 움직이면서 유지되는 것은 필요와 환상에 의해서다. 그것이 멈추는 순간 실존의 빈곤과 공허는 명백해진다(‘소품과 부록’)”라고 말입니다. 행복이나 사랑도 그저 고통을 누그러뜨리려는 희망에서 오는 환상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가는 이유는 살고자 하는 의지의 분출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자유의지이건 맹목적인 충동이던 간에 말입니다.

결국 삶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려면 행복이나 사랑이라는 환상에 묻어 잊어버리려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맹목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에 휘둘리지 말고 주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조함으로서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더하여 결핍을 보충하려는 의지에서 생기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점에 대하여 쇼펜하우어는 ‘사물들을 멀리 놓는 것만 아니라 가까이 앞에 놓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사물들을 순수하게 관조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이다.’(‘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설명합니다.

자신의 삶을 관리할 수 있게 된 단계에서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부정하는 것으로 삶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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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그럼에도 살아야 하므로 평점7점 | r*********s | 2018.11.30 리뷰제목
관건은 살고자 함의 형태를 띤 모든 것을 억누르는 것이다. 고통의 부재 속에서야 비로소 휴식이 가능하다. 고통을 맞아 고통을 거부하면 명철함에 이르지 못하고, 도리어 이런 인식은 우리의 개별적 실존 의지까지 잡아먹게 된다. ‘의지’가 자기 자신을 잡아먹어 스스로 사라지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욕망에서 두려움으로, 기쁨에서 고통으로 가지 않는다. “삶이 악몽”이 되게 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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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건은 살고자 함의 형태를 띤 모든 것을 억누르는 것이다. 고통의 부재 속에서야 비로소 휴식이 가능하다. 고통을 맞아 고통을 거부하면 명철함에 이르지 못하고, 도리어 이런 인식은 우리의 개별적 실존 의지까지 잡아먹게 된다. ‘의지’가 자기 자신을 잡아먹어 스스로 사라지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욕망에서 두려움으로, 기쁨에서 고통으로 가지 않는다. “삶이 악몽”이 되게 만드는 결코 굴복하지 않고, 결코 꺼지지 않는 희망 대신에 “대양 같은 고요한 상태”에, 지극히 깊은 휴식과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는 안전함에 이르려면 말이다. (227쪽)

 

 세상의 모든 책은 저마다의 의미를 지닌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다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문학(소설, 에세이)을 편식하는 내게도 필요한 말이다. 인문, 철학, 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용기를 내는 건 여전히 어렵다. 자음과모음의 필로테라피 시리즈는 이전에 땐 시리즈의 개정판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만난 건 비참할 땐 스피노자』였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도 쉬운 독서는 아니었다.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에 대한 나의 기대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아니라 괴로운 날엔’에 기울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제목만으로 쇼펜하우어가 추구한 삶의 방향이나 태도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책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삶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고통에 대해 진단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 있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사고를 인용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흥미로운 점은 각 장마다 짚고 넘어가기를 두어 질문을 던진다. 질문을 읽고 현재의 내 모습(욕망, 불평, 불안,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생은 전투이며 우리는 손에 무기를 든 채 죽어갈 것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자는 거의 없다. 부상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측 가능한 타격 정도는 피해보려고 몸을 움직여보지만 우리 몸이 얼마나 여기저기 찢겨 있는지는 보지 못한다. (15쪽)


 이 책의 첫 시작이다. 지극히 사실적이며 현실적이지만 선뜻 다음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는 것도 솔직한 마음이었다. 인간의 생은 고통이고 행복은 환상이라는 것. 맞는 말이지만 괴로운 날에 읽었다가는 더욱 비참해지고 절망에 빠질 게 분명하다. 마음을 다잡고 철학자의 조언이니 잘 들어보자고 다짐하면서도 내게는 버거운 책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고통의 근본을 찾아 진단을 해야만 그것을 이해하고 풀어나갈 방향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건 맞는 말이다. ‘산다는 것은 고통’이라는 걸 진단했으니 그럼에도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확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 이해하기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 인생은 전투이니 모든 것이 다 나에겐 적이라는 것일까. 관계에 대한 부분은 일정 부분 수긍이 간다.


 인간관계에서 끊임없이 상처를 받지 않나? 인간관계는 쇼펜하우어가 말한 대로 고슴도치의 삶 같지 않나? 타자를 향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타자는 거꾸로 자기 가시를 돋우어 자신을 보호한다. 누군가가 당신을 알고 싶어서 당신에게 다가올 때 당신은 즉각 보호막을 치지 않나? (123쪽)


 진단하고 이해한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 이 부분에서 저자의 조언은 익숙하면서도 보편적이다. 타자에 대한 관심을 거두라는 것, 그러니까 이 말은 타자의 시선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보며 초연해지라 말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관계를 맺은 이들을 시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그럼에도 “나는 이거 원한지 않아” “나는 더 이상 이거 원하지 않아” (170쪽)란 주문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살다 보면 괴로울 때가 자주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절망하고 화를 낸다면 다시 일어서기가 어려울 것이다. 존재 자체가 고통이라는 지인의 말처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만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이 책이 그런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에게는 아닌 것 같다. 안타깝게도.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6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6 댓글 0
종이책 [서평]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 평점8점 | u*******c | 2018.12.14 리뷰제목
벼르고 벼르던 쇼펜하우어에 입문했다.철학을, 현실에서 겪는 문제의 원인 분석과 해결책 제시라는 관점으로 엮은 시리즈의마지막 책이다.책의 큰 틀 (진단하기, 이해하기, 적용하기, 내다보기)을 따라 인간으로 살면서 숙명적으로 느끼게 되는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 지옥같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지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을 통해 알아보게 된다.우선,
리뷰제목


벼르고 벼르던 쇼펜하우어에 입문했다.



철학을, 현실에서 겪는 문제의 원인 분석과 해결책 제시라는 관점으로 엮은 시리즈의

마지막 책이다.


책의 큰 틀 (진단하기, 이해하기, 적용하기, 내다보기)을 따라 인간으로 살면서 숙명적으로 느끼게 되는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 지옥같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지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을 통해 알아보게 된다.


우선, 인간의 삶을 진단해본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사는 이상 실존이 주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가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의미가 변화하여 언젠가는 더 이상 나에게 

같은 강도의 절실함을 주지 못하고, 그러한 경험이 반복될 수록 공허함과 무상함은 커져간다.


가장 절실한 목표를 달성하여도 당장 그 다음 목표를 향하는 우리의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사실 철저하게 본성에 의거한) 의지와 욕망은 끝을 모른다.


다람쥐가 챗바퀴를 돌듯, 이 덧없음을 의식하지 않고 살다가 이런 현시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

삶의 원동력을 잃게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이러한 절망 속에서 살게 된 것일까.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싶어하고, 생명 유지의 매커니즘이 현재를 부정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인만큼 (성장), 

표면적으로는 이성으로 포장된 우리의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도 사실은 자연적인 본능에 불과하다고

이해한다. 자유롭게 선택한 것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본능과 자연법칙의 노예이며,

우리 뜻대로 이뤄낼 수 있는 영원한 행복이나 평화는 없다.


이런 절망의 굴레 속에서도 고통없이 삶을 사는 방법이 있을까.

이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조언은 더 '자기관리'를 하라는 여느 해결책들과 다르다.

즉, 나를 잠시 벗어나 객관적으로 삶의 양상을 조망하는 것.

우주의 차원에서 일개의 개개인에 연연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철학적 관조와 예술의 감상은 우리가 구할 수 없는 것을 꽉 쥐고 놓치않으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순수한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이다.


자못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한 이 아이디어를 내가 처한 상황 속에 직접적으로 연결하면

이해가 쉽다.


지금으로선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남편의 영원한 부재를 (죽음 또는 결별의 이유로)

'내 스스로'가 되어 온전히 겪고 슬퍼한다면 나는 고통 속에 미쳐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내게 나의 충동과, 욕망에 매몰되지 말고 객관적이고 담담한 시선으로

상황을 관조하라고 말한다.


내가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그의 물질적인 형상을 잃었을 뿐, 

내가 사랑한 그의 본질은 언제든,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형태로 영원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슬퍼할 일도, 억울해 할 일도 없는 것이다. 


현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지금에서야 어려운 사고방식이지만, 그 때가 된다면 유일한 안식처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괴로운 날에' 읽어야 하는 쇼펜하우어라고 무릎을 탁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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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쇼펜하우어를 만나다 평점7점 | 이달의 사락 b********5 | 2018.11.20 리뷰제목
대개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을 좋아하지 그 반대로 부정적이고 어두운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그런데 여기 염세주의의 원조인 철학자가 있다.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는 비관적인 사상을 설파했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말하는 책이다.첫 장을 읽노라면 ‘뭐 이렇게 꼬인 사람이 있지’ 싶다.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19세기에 염세주의를 철학으로 발전
리뷰제목

 대개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을 좋아하지 그 반대로 부정적이고 어두운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염세주의의 원조인 철학자가 있다.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는 비관적인 사상을 설파했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말하는 책이다.
첫 장을 읽노라면 ‘뭐 이렇게 꼬인 사람이 있지’ 싶다.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19세기에 염세주의를 철학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물론 인생에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님은 나도 진즉에 파악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사람의 생애의 모든 것이 공허하다고 설파하는 것이다.
아주 가까운 곳에 이런 사람이 늘 있다면 왠지 피곤할 것 같다.
그래도 쇼펜하우어라는 학자가 뭐라고 얘기했는지 한번 끝까지 들어는 보기로 마음 먹고 읽어 나갔다.

우리는 열정이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한다. 즉 어떤 존재나 사물, 생각, 활동에 열정적이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 열정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다 (고 쇼펜하우어는 단언한다). 왜냐하면 존재, 생각, 활동 그 무엇도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고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 만족했더래도 또 다른 욕망이 생기고 결국 만족은 결코 채울 수 없는 것이 된다.
다른 존재로, 다른 생각과 활동으로 옮겨 보지만 모든 것의 끝은 같고, 그 결과 열정을 쫓은 사람은 극심하게 피로하게 된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극심한 피로는 어쩔 수 없이 환멸이란 감정을 부른다.

『인생은 우리가 감사히 맛보기 위해 있는 것이고,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 믿는 일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中)

인간의 영혼은 복잡하고, 욕망은 감추어져 있다. 영혼과 욕망은 모순이고 가변적이다.

또 사람은 필요가 채워진 후에는 권태라는 상태와 만난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어떤 노력을 하고 있지 않거나 지적인 일에 몰두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 자체로 환원된다. 무의미나 허무감은 그때 느껴지는 것이다.
삶은 그 자체로는 실로 고유한 가치가 없고, 삶이 움직이면서 유지되는 것은 필요와 환상에 의해서다. 그것이 멈추는 순간 실존의 빈곤과 공허는 명백해진다.』
( 소품과 부록 中에서)

쇼펜하우어는 저작을 통해 이토록 비관적인 생각들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신념과 가치관을 옹호하는 사상이라면, 누군가가 자살을 해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이러한 관념을 바탕으로 하기에 쇼펜하우어에게 이런 언명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행복은 환상이다.’ 라는 것.
행복이야 말로 만족을 모르는 것이라고 본다. 착시고 착각일 뿐이다.
우리는 희망에 희망을 걸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행복의 관점으로 새로운 목표와 약속에 취해 미친 듯이 에너지를 소비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수고와 소비 끝에 만나는 것이 실망일 것이라고 한다.

『모든 희망과 열망은 광기와 방황에 불과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 37쪽)

목표를 향해 달리다 보면 새로운 기쁨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새로운 실망과 낙담 역시 생기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철학자는 단정한다.

사랑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더 극단적이다.
이성과의 사랑을 극혐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생물학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본 것이다.
연애 감정이란 당시에는 숭고해 보여도 결국에는 번식을 위한 환상이라고 단언한다.
나로선 그다지 동조할 수 없는 주장이었지만, 남의 사랑관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길게 말할 생각이 없어서 이 파트는 대략 넘어갔다. ^^

생물체, 무생물체, 사물의 내적인 본질은 자연력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썼다.
모든 자연력 속에서 만물의 살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철학자가 말한 의지는 의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존과 생산, 성장을 목표로 한 본능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조금 난해한 문장들이지만 쇼펜하우어에 다가가려면 원저의 글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의지’는 내밀한 실체로, 전체의 핵이자, 고유하고 특별한 부분의 핵이다. 거의 맹목적이다 싶은 무조건적인 자연의 힘 속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식물을 발육하고 광물을 수정으로 만드는 힘에서, 북쪽으로 자기를 띠는 나침반의 바늘 및 자화 현상에서, +와 -의 양극성에서, 이 둘 사이의 요소를 조합하거나 해체하는 힘에서, 떨어지는 돌을 지구 쪽으로 끌어당기고 태양 쪽으로 지구를 끌어당기는 중력에서도.
쇼펜하우어는 이 모든 힘과, 인간의 행위가 의지에 의해서 작동한다고 하였다.

이 책의 작가 셀린 벨로크는 쇼펜하우어를 빌려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삶의 수고, 분투의 보상이란 게 과연 있을까 하고 말이다.

쇼펜하우어의 원작도, 벨로크의 해석도 가차없이 냉정하다. 그런데 한번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필요는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우리 삶의 고통과 비참함, 그리고 노력은 성과를 통해 보상되는 것일까?』
( p.91)

100페이지 정도를 넘어서면서 조금 읽는 피로도가 찾아왔다.
저자가 해설해 들려주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이 하나, 둘 생겨났어서다.

셀린 벨로크의 해석이 맞다고 가정하고 100페이지까지 왔는데 저자가 교묘하다고 느끼면서 책에 의구심이 생겼다. 셀린은 자신의 글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영화들을 ‘증거’로 뒷받침한다. 그런데 꽤 영화광인 내게도 듣도 보도 못한 특이한 영화를 굳이 거론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물론 세상에 기괴한 영화도 있고, 저자가 예시한 영화는 아마 그런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쇼펜하우어를 독자에게 안내하면서 이에 끼워맞추기 위해서 특수한 영화들만 골라서 다뤘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었다.

중간 쯤에 <미션>을 두 페이지를 할애하면서 예로 드는 것에는 더욱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주인공 로드리고가 회심한 이후에 어떤 사건을 만나자 다시 자신의 폭력 성향을 드러냈다고 셀린은 썼다. 물론 이는 영화에서 맞다. 하지만 왜 결말은 이야기하지 않는가. 로드리고 신부는 포르투칼 군대에 무장으로 저항하려고 했는데 그러다가 자신도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로드리고는 그렇다 쳐도,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다른 신부는 처음부터 비폭력 저항을 하다 총을 맞아 죽기도 했다.

쇼펜하우어 원저를 읽지 못했기에 셀린 벨로크의 글을 일일이 평가해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만 예로 들어도 그 예시가 적절하지 못했는데 작가는 천연덕스럽게 논거로 사용했다.
이러한 교묘한 전개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기꺼이 다가가고자 하는 독자의 시도에도 찬물을 끼얹는 거라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면서 150페이지에 당도했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소화하기도 만만치 않은데 작가의 화법에도 적응이 안 된다.
책을 읽는 것이 괴로움이 되어갈 뻔한 순간 다행히 공감할 수 있는 파트를 만나서 반색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평화를 맛보기》 챕터는 자연의 풍경을 미적으로 관조하는 것의 중요함을 말한다.
이는 아름답고 훌륭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으로 이어지면서 이 주제를 살펴본다.

『자연에 자유로운 시선을 던져보면, 열정과 필요와 근심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운 사람 역시나 기분이 신선해지고, 유쾌해지며, 힘이 솟는다. 번개 같은 사랑, 폭군 같은 욕망, 공포, 한마디로 ‘원하기’라는 그 모든 비참함에 즉각적이고 경이로운 휴식을 선사하는 것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 146쪽)

쇼펜하우어는 미적인 아름다움에서 오락적이지 않을수록 더 그 특성이 고양된다고 봤다.
미적 즐거움은 그 대상을 기쁘게 느끼는데 있다고 하였다. 기쁨은 유흥이나 오락을 넘어선다.

이전까지의 책에 따르면 인간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소심한 사람은 끝까지 그렇고, 무모한 사람도 그렇다. 반항적인 사람은 늘 저항하고, 충성스런 사람은 언제나 찬사를 늘어놓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 주제로 넘어오면 예술은 놀라울만큼 평가절상된다.
지금 내가 다른 책을 집어들은 건가 싶을 만치다.

변화는 매우 드물고, 진보와 성장이란 없다고 못 박던 책은 예술에서 반전같은 가능성을 발견한다. 쇼펜하우어도 예술을 매우 가치있게 말하고 있었다.
『예술 작품은 적어도 시선을 변화하는 힘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 ( 151쪽)

쇼펜하우어는 [소품과 부록]이란 저서에서 적고 있다. ‘시인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어떤 혼란으로부터 유일무이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인간의 삶과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음악은 우리의 충실한 위로의 벗이자, 진정제이며, 안정제라고 셀린은 말한다.

한편 자연과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다른 이유는 잠시 우리 자신을 잊는 것이다.
자신의 쾌락과 이익, 만족 등의 추구 속에 있으면 그에 따른 실망과 좌절 속에 예속되어 있다.
세계의 중심에 자신의 에고ego를 놓치 말고, 세계 그 자체를 중심에 놓는 경험을 해야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 관조이고 관조의 미덕이다.
풍경과 음악을 순수하게 관조함으로써, 이런 순간들만큼은 우리의 에고에서 벗어난다.

저자 셀린 벨로크는 쇼펜하우어를 통해 ‘초연’의 개념을 전달한다. 초연함으로써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비난에도 아첨에도 무심할 때 초연하게 살 수 있다.
초연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 평판에 맞추기 위해 살게 될지 모른다. 또 타인들 눈에 아름다운 이미지로 남고자 이미지의 족쇄에 붙잡힐 수도 있다.

더 이상 자신의 생각, 관점, 견해가 모든 경우에서 이기기를 바라지 않을 때 초연함을 체득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자유란, 개인적인 사건이 닥쳤을 때 그 모든 걸 다 해결하려는 욕망을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p.165)

책에 따르면 세계라는 무대는 전쟁터다. 인간들은 자신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싸우고 있다. 상대를 지배하려 하고, 제패하려 한다. 우리는 자신을 혹독하게 평가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신의 주가가 올라가고 내려가는지 체크한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이 빛날 때 그의 광채가 다른 사람에게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일상적인 곳에서 벌이는 토론, 회합의 논쟁, 직장 동료들과 커피 자판기 앞에서 나누는 대화 등. 작가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사회적 게임이며, 매치이며, 일대일 결투다.
그렇다고 일체의 사회 관계를 끊는 것이 해답일까. 작가는 이것조차 상대에게 제압했다는 착각을 줄 수 있고, 자신만 배제되는 억울한 사태를 겪을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작가가 제시하는 가장 완전한 평화는 타자가 우리에게 갖는 의견에 초연할 때만 얻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범함이 내포된다
초연은 거리 두기의 기술이기도 하다.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진정 행복해질 수 있다고 작가는 강조한다.

자기 자신에게 좋거나 나쁘거나 한 것을 찾는 것은 도리어 소중한 자아를 망치는 일이 된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무심해져야 도리어 행복해진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휴식을 가질 수 있다.

(다른 의견이 더 많겠지만 어쨌든 책에 따르면)
자연을 관찰하며 얻는 교훈은 개별성과 특별함을 지닌 생명 존재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생명이란 부조리다. 우리는 자연, 동물과 마찬가지로 소멸하여 죽는다. 개인들의 개별성은 죽어 사라지는데 쇼펜하우어는 종 種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의 어떤 것은 유산, 전승을 통해 전해질 수 있다.

‘사실 무한히 사는 사람을 본다는 것도 악몽이기는 하다.’ (p.208)
최근에 매트 헤이그의 소설에서 4세기를 살은 남자의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래서 이 문장에 공감이 갔다.
죽음이란 사건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언제고 죽지 않는다는 것이 더 공포스러운 일일 것이다.

책은 내내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이야기를 펼쳐왔다. 파괴적이기도 했던 거침없는 글들.

마지막 페이지는 급격하게 훈훈하고 교훈적인 가르침을 던지면서 끝을 맺는다.
생이 고통이고 허무라고 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생명을 마치는 것도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p.210)

아마 자살하는 사람은 매우 상반되는 생각을 품었을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너무나 가치가 있거나 반대로 전혀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말이다.
사실은 그는 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삶으로부터 기인하는 고통은 느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나은 환경과 상황이었다면 죽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의 작가는 생의 진짜 본성을 이해함으로써 생에 지나친 기대를 갖지 않을 것을 주장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우리에게 생의 본성 자체를 깨닫게 했다. 살고자 하는 의지의 본성을 이해시키고자 시도했다고 한다.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말하며, 반면 희망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설파했다.

숱한 자기계발과 성공학은 자기 긍정과 확신감을 찬양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펼쳤다.
자기 긍정과 확신은 바람직한 이념이 아닐뿐더러, 지고의 가치는 더욱 아니라고 말이다.

오히려 자기 긍정과 확신에는 어리석음과 위해함이 있다고 이 책의 작가는 말한다.
차라리 쇼펜하우어처럼 자기 고유의 개별성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더 나은 생을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쉼 없는 스트레스, 환멸과 권태를 피할 수 있다.
대신에 안심함과 휴식, 평온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을 얻을 수 있다고 작가는 쓰고 있다.

『의지주의를 포기하자. 진정한 휴식을 위한 키에티슴
quietisme, 그러니까 정적주의와 소극주의, 일종의 형세관망주의를 실천해보자.』
( 239쪽)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서 책을 제공받아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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