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의 건축가들: 식민지 경성을 누빈 ‘B급’ 건축가들의 삶과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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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건축가들: 식민지 경성을 누빈 ‘B급’ 건축가들의 삶과 유산

식민지 경성을 누빈 ‘B급’ 건축가들의 삶과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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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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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모르는 건축가가 대부분이지만 소설가 이상이 눈에 들어왔다-경성의 건축가들 평점8점 | e****0 | 2017.11.16 리뷰제목
종로 네거리, 지금은 국세청 건물이 있는 그 자리에 일제 시대에는 화신백화점이 있었는데, 이곳은 한국인이 세운 현대식 백화점으로 유명했다. 뿐만 아니라 건물도 꽤 유명했다. 10층도 안되지만 당시로선 보기드문 고층건물이었고, 지방사람들이 일부러 구경올만큼 명소였다.이 화신백화점은 철거된 지 이십년도 더 됐을텐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 화신 백화점 외관이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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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네거리, 지금은 국세청 건물이 있는 그 자리에 일제 시대에는 화신백화점이 있었는데, 이곳은 한국인이 세운 현대식 백화점으로 유명했다. 뿐만 아니라 건물도 꽤 유명했다. 10층도 안되지만 당시로선 보기드문 고층건물이었고, 지방사람들이 일부러 구경올만큼 명소였다.

이 화신백화점은 철거된 지 이십년도 더 됐을텐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 화신 백화점 외관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아주 튼튼하고, 묵직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일제시대다 보니 화신백화점을 만든 건축가는 일본인이 아닐까 싶었는데, '경성의 건축가들'에서 보니 조선인이었다. 박길룡. 조선이 배출한 1세대 건축가로 당시 조선인 최고의 건축가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조선건축가들의 활동이 활발해 진 것은 일본에 의해  서구문명이 이식되면서였다. 경성이 개발되면서 또 징용,징병에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또 조선총독부에 취업을 할 수 있었다는 매력에 건축에 발을 딛는 사람들이 늘어났던 것이다.

 

 조선에 건축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데에는 1916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고등공업학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학교를 통해 건축실무을 담당할 수 있는 인력이 안정적으로 배출이 됐다.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조선 건축가들은 일본 건축가들과 비교해 차별을 겪어가며 실무경험을 쌓았고 그 뒤 조선 건축주들을 만나 백화점, 공장, 학교, 주택, 극장 등 건물을 독자적으로 설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해서 화신백화점 건설에 참여했던 이가 박길룡이었던 것이다. '경성의 건축가들'에는 박길룡을 비롯 모두 열두 명의 건축가들이 소개돼 있다. 여기에는 일본인 두명과 미국인 한명이 포함돼 있는데 소개된 인물 중 한 명만 빼놓고는 전혀 모르는 건축인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건축인 중 내가 알고 있었던 단 한 사람, 가장 눈길을 끌었던 인물은 소설가 이상이었다. 그는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건축기수로 근무한 이력의 소유자라는 거. '조감도'나 '건축무한육면각체'같이 그의 작품에서 건축의 색채가 물씬 풍겼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에게 숫자나 건축적 감각이 상상력의 젖줄이 되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직접 건물짓는 과정에 참여한 인물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해방후 장관을 5번이나 역임할 정도로, 건축 행정가쪽으로 더 활동했던  김윤기나 '우리말 건축사전'을  펴낸 장기인 등의 건축인들도 인상적이었다.

 

20년대 이후 경성에서는 백화점, 학교 등 근대적 문명시설이 본격적으로 건설된 시기인만큼 건축물에 근대사조를 반영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주도되는만큼 건축물에서나 건축가나 모두 혼란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일제가 주도하는 건설에 참여하는 과정에 겪어야 했던 갈등, 정서적으로는 반일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으니. 결국 한옥개량작업을 하거나, 개인 사무소를 열고 조선인 건축가들에게 일감을 주고 규합하는 등의 방식으로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려했고, 스스로 위안삼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하지만 갈등과 혼란은 건축물에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자유, 평등 등 서구의 근대적 가치가 담겨있는 근대적 시설이었음에도 일제에 의해 유도된 근대적 시설이었다는 점에서. 아무리 조선인의 손으로 세워졌다해도 건축물에도 일본 제국주의 색채가 묻어나는 그 균열이 투영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정신적으로 그 혼란을 감당해야 했던 조선인이 건축했기에  더더욱 그 불협화음이 도드라져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보면  경성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던 화신백화점 건물이나 또 식민지통치의 상징처럼 군림하다 90년대에 해체됐던 조선총독부 건물, 이렇게 지금은 사라진 경성시절 건물도 있지만  여전히 건재하게 존재하고 있는, 서울 시민에게는 눈에 익은 건축물이 상당수다.

이왕가 미술관 (현 덕수궁 현대미술관)이나  조선은행 본점( 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보성전문학교 본관(현 고려대학교 본관) 등..

특히 서울역. 기차를 타고 자주 서울역에 내렸던 어린 내 눈에도  본관의 둥근 지붕은 독특했고 멋져보였다. 이국적이기까지 했고 지금도 가끔 들르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경성제국 대학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이렇듯 건축물은 오랜 시간 특정 공간을 점유하며, 그 시공간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고 건축물에는  트렌드를 넘어서는 시대의 가치와 사조, 설계한 건축인의 정신이  담겨있다.그렇기에 일부 경성시절 건축물은 일제 유물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해체한 것 조선 총독부 건물이고.

그렇다면 경성시대에 건축물을 지었던 건축가들은 어땠을까? 식민지백성 대부분이 그랬듯이 그들 역시나 현실과 지향점 사이에서 갈등과 혼란을 겪어야 했다. 현실 안주와 반일.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그들은 건축물에서나 삶에서나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또 내 나이를 실감하게 됐다. 지금은 사라진 화신백화점, 조선총독부 건물이 내 어린시절 추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한해가 저무는 무렵이라 그런지 오래도 살았구나하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도 요즘 경성시절 건물들이 일제시대의 영욕을 겪어내고 근대 유적으로 지정되고 있는 것에서 다수의 추억 속에 자리잡고, 역사로 존재하게 되는 건축물이 갖는 시공간의 힘 또한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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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경성의 건축가들 평점10점 | l******s | 2019.05.08 리뷰제목
명동예술극장     서울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명동에 대한투자금융이라는 금융회사가 있었다. 나는 내가 다니던 회사가 발행한 융통어음을 그때 용어로는 와리(わり), 즉 할인(割引)해서 자금을 차입해오는 용무로 대한투자금융 건물에 출입을 했는데 그 건물은 당시 명동 주변에 흔했던 개발독재시대에 대충 지어 올린 철골 콘크리트 건물들과는 사뭇 다른 고풍스러운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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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예술극장

 

 

서울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명동에 대한투자금융이라는 금융회사가 있었다. 나는 내가 다니던 회사가 발행한 융통어음을 그때 용어로는 와리(わり), 즉 할인(割引)해서 자금을 차입해오는 용무로 대한투자금융 건물에 출입을 했는데 그 건물은 당시 명동 주변에 흔했던 개발독재시대에 대충 지어 올린 철골 콘크리트 건물들과는 사뭇 다른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고 있었다. 당시 투금으로 불리던 투자금융회사들은 급여를 쎄게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나처럼 상경계를 전공한 대학 졸업자들에게는 취업하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 고풍스러운 건물을 사무실로 쓰던 ‘대투’의 거래 창구마저 근사하게 보이던 기억이 생생하다. 부러웠으리라. 다른 한편 대투 건물에 출입할 때마다 나는 이 멋진 건물이 곧 사라질 것 같다는 아쉬운 감정을 느끼곤 했다. 아마 그것은 건물 자체로는 멋있으나 주변의 건물들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이를테면 이 건물 역시 주변 건물과 평준화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예감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한다. 내 그 어설픈 예감과는 별개로, 부도가 날 것을 알고 융통어음을 찍어 돈을 빌리던 기업들과, 부도가 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 어음을 할인하여 돈을 빌려 주던 투자금융회사들은 IMF시대에 세트로 정말 부도가 나버렸으며 그 바람에 나도 직장을 옮긴 후 더 이상 명동 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5년 세월을 넘어, 최근 『경성의 건축가들』이라는 책을 읽다가 25년 전 내가 사라질 것 같다는 예감을 하며 출입하던 대투 건물의 사연과 행방을 알게 되었다. 그 건물은 일제시대인 1937년 다마타 기쓰지(玉田橘治)라는 일본인 건축가의 설계로 당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던 명동에 메이지자(明治座)라는 극장 건물로 세워졌다 한다. 해방 후 건물은 서울시 등으로 소유권이 이전되며 국립극장으로 사용되다가 1975년 대투가 인수하여 사무실 건물로 사용하였으며 1997년 IMF 시절 대투의 도산으로 헐릴 위기에 처하자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건물의 역사성을 알아보고 보존 운동을 벌여 2004년 문화관광부가 건물을 매입, 복원 공사를 거쳐 2009년에 국립극단 소속 명동예술극장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25년전 내 예감의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던 셈이다. 책 『경성의 건축가들』들은 일제시대와 해방 후 우리 땅에서 활동한 건축가와 건축업계 인물들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저자 김소연이 머리말에 밝히기로 책을 처음 기획할 때 주변 반응이 거기 “뭐 볼 게 있다고!”였다 하며 YES24의 추천에 혹 하여 책을 구매한 나조차도 충동구매를 한 것이겠거니, 그래 뭐 볼 게 있겠냐 이왕 산 책이니 볼 거 없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해보자 펼친 책인데 거의 단숨에 다 읽었다. 현재의 우리는 역사라는 시간과 한반도라는 공간의 토대 위에 오늘을 살고 있다. 『경성의 건축가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고민과 과제들의 시공간적 기원을 찾는 작업의 일부라는 점에서 - 때로 ‘일그러진 시대’ 운운하는 오바가 살짝 거슬린다는 점만 빼면 - 확실히 볼 게 있는 책이었다. 

http://blog.daum.net/oalbat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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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구매 [경성의 건축가들-김소연] 잘 몰랐던 이야기를 알아가는 즐거움 평점9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s*******1 | 2020.04.08 리뷰제목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유현준 교수는 “사람과 건축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하며, “건축과 사람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상호 영향을 주면서 의미를 규정한다.(p.7)”고 말했다. 또한 건축물은 “시대정신을 반영(p.119)” 하기 때문에, “건축 공간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비춰볼 수 있다. (p.21)”고 말했다. 여기에 비춰볼 때 김소연 대표의 <경성의 건축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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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유현준 교수는 사람과 건축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하며, “건축과 사람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상호 영향을 주면서 의미를 규정한다.(p.7)”고 말했다. 또한 건축물은 시대정신을 반영(p.119)” 하기 때문에, “건축 공간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비춰볼 수 있다. (p.21)”고 말했다. 여기에 비춰볼 때 김소연 대표의 경성의 건축가들은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시작을 알아보기에 가장 적합한 책이다. 제목 그대로 사람과 건축물을 한 번에 살펴 볼 수 있다. 사람을 통해서, 그들이 세운 건축물을 통해서 그 시대를 상상케 한다.

이 책이 재미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일제강점기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사농공상이라는 구체제의 위계질서가 살아있지만, 일제에 의해 모든 것이 바뀌고 있던 혼란한 시기. 게다가 당시에 지어진 대부분의 대형 건축물은 식민통치를 위해 설치되는 상황을 감안하면, 건축가라는 개인 역시 혼란스러웠을 테다. 국가와 민족, 조국의 현실을 고민하지만, 일본을 통해서 신기술을 배워야 했던 그 시절의 복잡한 감정을 떠올려 본다. 저자가 박길용씨를 저자가 평가 한 말은 건축가를 떠나 당시의 시절을 관통해 살았던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몸은 친일이라는 환경에 있었고, 마음은 조선인의 염원을 품었다. 의식은 제국을 향한 동경과 식민지의 콤플렉스에 흔들렸다. 식민 교육, 식민 권력, 식민 자본을 바탕으로 성장한 그 시대 건축가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내면이었다. 자본과 권력은 가까이 있지만 정작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식민지 건축가의 운명이기도 했다. p.55”

 

이렇게 방황하는 건축가를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결국은 혼란기, 나라를 잃은 시기에 누구나 겪었을 일이다. 만약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고민해 본다. 건축가는 기술인으로서 차별받던 인식이 오히려 친일의 궤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던 아이러니까지 생각해보면 단순하게 친일과 반일, 민족과 반민족의 범위는 협소해 보인다.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구조가 오히려 성역을 만든 걸까. “건축 바깥의 문제를 끌어안으며 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속도는 느(p.153)”렸다는 날선 비판에 이어, 저자가 소개한 임화의 이야기가 인상 깊다. 우리는 어쩌면 친일을 너무 단선적으로만, 당위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지 고민해 본다. 내가 그 자리, 그 순간에 있었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 시절을 살았을까.

 

가령 이번 태평양 전쟁에 만일 일본이지지 않고 승리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살아가려 생각했느냐고. 나는 이것이 자기비판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남도 나쁘고 나도 나쁘다 이게 아니라, 남은 다 나보다 착하고 훌륭한 것 같은데 나만이 가장 나쁘다고 감히 긍정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자기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임화. p.377

 

개인적으로 한국 근대사와 일제 강점기에 관심이 많다.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대기 때문이다. 서구 신식문화를 수용하며 새로움을 배워나가는 설렘과 식민지인으로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시기. 이 양가적인 감정 속에서 우리 조상들은 아주 가끔의 희극과 수많은 비극을 썼다. 그리고 내가 모르던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해 준 저자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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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용은 앞과 뒤가 달랐다. 앞에서는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두루두루 인정을 받고 인맥을 쌓은 성공한 건축가였다. 뒤에서는 격렬하지는 않지만 그 나름의 방식으로 조선인의 정체성을 끌고 나갔다. 그것이 3.1운동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인지, 종로에서 일본인과 대치하며 삶을 버(p.54)텨온 조선인의 근성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 몸은 친일이라는 환경에 있었고, 마음은 조선인의 염원을 품었다. 의식은 제국을 향한 동경과 식민지의 콤플렉스에 흔들렸다. 식민 교육, 식민 권력, 식민 자본을 바탕으로 성장한 그 시대 건축가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내면이었다. 자본과 권력은 가까이 있지만 정작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식민지 건축가의 운명이기도 했다. p.55

내가 생각하는 박길용의 최고 업적은 이런 것이다. ‘최초유일의 신화가 아니다. 그는 최초유일이라는 영향력으로 차별받던 조선인 건축가들을 품었다. 그들과 함께 건축 안과 밖을 넘나들었다. p.56

사농공상의 관념이 존재하던 시대에 건축가를 미장이로 알던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인식이 건축가에게는 오히려 보호막이 되었다. 양날의 칼처럼 건축가도 그 보호막 뒤에서 과학과 기술의 중립성이라는 함정에 빠지곤 했다. 건축 안의 문제는 예민했지만, 건축 바깥의 문제를 끌어안으며 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속도는 느렸다. p.153

시대상은 보여도 시대의식은 보이지 않는 삶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p.204

장기인은 용어가 지식이고 사상이라고 믿었다. 건축용어는 설계, 시공, 구조, 설비, 재료, 법규, 전통건축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만큼 여러 분야의 건축 지식을 섭렵하게 된다. p.243

자기비판이란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고 근본적인 문제일 것 같습니다. 새로운 조선 문학의 정신적 출발점의 하나로서 자기비판의 문제는 제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비판의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하겠느냐 할 때 나는(p.376) 이렇게 생각합니다. ... 가령 이번 태평양 전쟁에 만일 일본이지지 않고 승리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살아가려 생각했느냐고. 나는 이것이 자기비판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남도 나쁘고 나도 나쁘다 이게 아니라, 남은 다 나보다 착하고 훌륭한 것 같은데 나만이 가장 나쁘다고 감히 긍정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자기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임화. p.377

건축은 사물이 아니라 사연이라는 것을.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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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틀에 갇히지 아니한 삶 평점8점 | q*****2 | 2017.07.15 리뷰제목
천재 아니면 바보, 친일 아니면 반일. 세상에 단 두 가지만 존재하면 명쾌하고도 쉬울 것 같아서일까. 난 가끔씩 극단적인 이분법을 세상에 적용해보려는 시도를 하곤 한다. 그리고 그 때마다 예외라 일컬어질 법한 존재들과 마주하곤 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들, 그들의 입체적 삶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믿는다. 실상 나도 나를 잘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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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아니면 바보, 친일 아니면 반일. 

세상에 단 두 가지만 존재하면 명쾌하고도 쉬울 것 같아서일까. 난 가끔씩 극단적인 이분법을 세상에 적용해보려는 시도를 하곤 한다. 그리고 그 때마다 예외라 일컬어질 법한 존재들과 마주하곤 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들, 그들의 입체적 삶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믿는다. 실상 나도 나를 잘 모르면서 어찌 남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단 말인가!

과거 어느 시점을 살다간 사람들의 삶을 만날 때면 이러한 어려움은 가중된다. 오늘날을 벗어나 그들의 시대로도 한 번 즈음 가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후대에 지탄받을 줄 정녕 몰랐던 걸까. 당장에의 이익에만 급급할 정도로 미래를 바라보는 눈을 지니지 못했던 것일까. 이미 죽은 이로부터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결국 그들의 삶을 해석하는 일은 살아있는 우리의 몫이다. 

저자가 주목한 건 건축이었다. 사실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는 왜곡된 시선이라 할지라도 적잖은 책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근데 건축 분야에 대해서는 내 스스로가 관심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이제껏 읽어본 책이 없지 싶다. 일제가 주장하는 대로 우리 자신에게 발전을 위한 역량이 부재했던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근대로 나아가려는 모든 움직임이 일제에 의해 꺾인 마당이었기에 그와 같은 주장이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이 시기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당시의 변화 또한 우리 사회의 일부로서 우린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했다.

건축은 도시의 인상에 변화를 가져다 준다. 초가집만이 즐비했던 식민지 경성에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건물이 들어섰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지가 궁금하다. 우리의 것을 철저히 부정하는 시기답게, 오로지 외부의 것을 복사하려 든 것만 같은 건물들도 있었을 것이요, 우리를 지배한 일제의 것과 꼭 닮은 형태의 건물들도 꽤 등장했을 것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가 탱자가 되듯 기존의 틀 안에 속하지 않는 형태의 건물들도 생겨났다. 전통적인 한옥 지붕을 씌웠으나 내부는 서구의 것을 본딴 형태의 건물들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경성만의 것이었다. 

이와 같은 건물들이 등장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 중에는 물론 일본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패권을 거머줬으며, 자유자재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식민지에서 펼칠 수 있었다. 아주 드물게 조선인 건축가들도 있기는 했는데, 성장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온갖 차별조치는 그들이 성인이 된 이후로도 지속됐다. 
오늘날 많은 건축물들은 차가운 재질을 사용해 만들어졌다. 튼튼하기 때문인 듯한데, 대신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듯해 아쉬움이 크다. 허나 나는 개별 건축물이 지닌 특성에 깃든 사람의 향기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번 독서를 하며 나는 건축물이 지닌 특성에 건축가의 삶과 사상이 반영될 수도 있음을 배웠다. 비슷한 시대를 살다 갔지만 박길룡과 강윤, 이천승 등이 남긴 건축물은 그들의 상이한 인생만큼이나 달랐다. 출세까지는 아닐지라도 당시 조선인들이 건축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조선총독부에 적을 두는 등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래서 나름 이름을 남긴 건축가들은 하나같이 조선총독부 소속을 자랑 아닌 자랑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 곧 진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라 믿었던 이들은 자연스레 우리의 건축 양식을 해체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천승 같은 이의 경우, 아예 출세의 길을 좇아 만주국으로 향하기도 했다. 다수의 친일파가 광복이후 어떠한 죗값도 치르지 않았듯 이천승의 이력 또한 딱히 문제 삼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경험은 모든 것이 파괴된 경성을 다시금 일으킬 도시계획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야 만다. 식민지 시절 도시형 한옥 건축일에 떠밀려 참여했던 장기인이 써 내려간 인생은 이와는 또 달랐다. 그는 모든 이들이 부정한 우리 것에 매달렸고, 유난히도 일본식 용어가 많이 쓰이는 건축 분야에 우리말을 도입하기 위해 애썼다. 그가 처음으로 사용했다던 '배흘림기둥'이라는 단어가 오늘 따라 실로 푸근하게 다가왔다. 어여쁜 우리말을 사용할 수 있어서 우리의 삶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가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부디 많은 이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앞서기도 했다.

이 시대를 살다간 건축가들은 어떠한 시선을 하고 바라보는 게 옳을까. 자신의 의지를 좇기에는 시대가 참으로 혼탁했다. 시인 이상이 남긴 누구도 쉬이 이해치 못할 작품들 또한 뒤틀린 시대의 반영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건물을 설계하고 쌓아 올릴 수 있었던 그들은 행운아였던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축적되는 울분을 대다수는 토로치 못한 채 이름없는 삶을 살다 갔으니까. 우리의 근대는 그런 시기였다. 바라는 건 많은데 충족되는 건 없는 욕구불만의 시대, 달라져야 한다는 의욕은 넘치나 현실의 뒷받침을 기대해선 안 되는 서글픔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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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교육진담TV 수요독서] 김소연 / 경성의 건축가들 평점9점 | s*********b | 2021.10.27 리뷰제목
2분 퀵서비스 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1910년, 우리에겐 뼈아픈 역사로 기록되는 해입니다. 이후 36년 동안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통치 아래 놓이죠. 하지만 그 와중에 살 사람은 살아야 하고, 일본이 가져온 신식 근대 문화는 일본 통치와 함께 우리 삶 곳곳에 녹아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살고 일하는 공간을 만드는 건축도 예외는 아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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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우리에겐 뼈아픈 역사로 기록되는 해입니다. 이후 36년 동안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통치 아래 놓이죠. 하지만 그 와중에 살 사람은 살아야 하고, 일본이 가져온 신식 근대 문화는 일본 통치와 함께 우리 삶 곳곳에 녹아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살고 일하는 공간을 만드는 건축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 곳곳엔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소재와 공법을 이용한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섭니다.

 

그 중심에는 경성고공, 경성고등공업학교가 있습니다. 조선에 근대 건축물을 세우는 현장에서 일할 실무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총독부가 세운 교육기관입니다. 재학생 상당수는 일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도 섞여 있었죠. 이들은 졸업 후 총독부에 취직해 관 주도의 프로젝트에 대거 참여합니다. 이런 프로젝트, 그리고 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자로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문화콘텐츠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건물들. 그들의 이름은 낯익지만, 그 건물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은 낯섭니다. 바로 그 이름들을 다루는 책, 김소연의 경성의 건축가들입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꼽은 키워드는 경성고등공업학교, 줄여서 경성고공입니다.

 

경성고공은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라는 이름으로 총독부가 만들었고, 1922년에 경성고공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우리나라가 광복되기 직전 잠깐 경성공전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긴 했지만, 경성고공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오래 유지됐습니다.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분명한데, 이른바 ‘근대’적인 서양 건축물들을 조선 곳곳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스펙터클’을 전시하며 일본의 통치를 선전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고, 한반도의 전통적인 ‘전근대적’ 건축문화를 바꿔 근대 문화를 이식하려는 목적도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경성고공에 진학해 공부한 조선인들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 학교에서 배우는 그 건축 기술과 방식과 문화가, 한반도에 적합한가? 사람들이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인기 없는 건축물이 될 것이고, 반면 전통을 너무 고수하면 합리적이지 못한 결과물이 나오죠.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건축가들은 이 고민의 결과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합니다. 큰 건물에서 마당을 없애버리고 복도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근대적 전환’을 추구하는가 하면, 철도 역사에 한옥 지붕을 도입해 멋을 내기도 합니다. 서양의 역사에서 유행했던 온갖 건축 양식을 뒤섞어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 시기에 ‘근대 학문의 수입처’ 역할을 담당했던, 특히 서울 지역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등학교나 대학 건물들에 이 실험의 흔적들이 진하게 남아있습니다. 일본의 세력 확장에 따라 이들의 손길은 조선을 넘어 지금의 중국 동북부 지역, 우리가 흔히 만주라고 부르는 곳에 지어지는 건축물에까지 배어있습니다.

 

이런 실험으로서의 건축이 지니는 다양성만큼이나, 이 책에 등장하는 건축가들의 삶 속에도 다양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에게 동시에 의뢰를 받았지만 본인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건축가 박길룡이라든가, 조선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던 종교인 천도교의 본당을 설계한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라든가, 경성고공 출신은 아니지만 선교사 인맥을 통해 맨몸으로 건축을 시작해 이름을 남긴 강윤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건축가들은 침략자 일본 대 저항자 조선이라는 단순한 시각에서 벗어나 더 넓은 시각에서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데 도움을 줍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콘텐츠,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이 책과 함께 추천드리는 콘텐츠는 종로 걷기입니다. 현재 종로는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여 있고 옛날 건물이 이미 많이 사라진 상태이지만, 개발이 덜 된 지역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이색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건물들 중에 상당수는 종로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들 중 일부는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건축가 김세연이 설계한 미츠코시 백화점과 조지아 백화점은 각각 지금의 신세계 본점과 롯데 본점이 대표적이겠네요. 건축가들이 자기 사무실을 내고 주로 활동했던 종로 일대 조계사 쪽 건물들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재개발되지 않고 그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옥마을이라고 부르는 북촌이나 서촌, 익선동에 있는 건물들 상당수도 사실은 이때 지어진 ‘한양절충형’ 한옥이고요. 요즘 트렌드는 복고라는데, 진정한 복고는 이른바 ‘모던 보이’ ‘모던 걸’ 아닐까요? 종로를 거닐면서 직접 되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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