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하여
미리보기 공유하기

글쓰기에 대하여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여섯 번의 강의

리뷰 총점 9.6 (50건)
분야
인문 > 글쓰기
파일정보
EPUB(DRM) 51.28MB
지원기기
크레마 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폰 안드로이드패드 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 PC(Mac)

이 상품의 태그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회원리뷰 (21건) 회원리뷰 이동

종이책 주간우수작 글쓰기에 대하여(마거릿 애트우드) 평점10점 | t****d | 2021.03.10 리뷰제목
"대부분의 사람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 본인 머릿속에 책이 한 권 들어 있다고, 시간만 있으면 글로 풀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든 글쓰는 이의 자아상에 대해, 이만큼 예리한 통찰이 또 있을까?   이 책의 저자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캐나다 출신의 소설가이며, 시인, 에세이스트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는 작가이다. 그녀가 부커상을 두 차례를 수
리뷰제목

"대부분의 사람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 본인 머릿속에 책이 한 권 들어 있다고, 시간만 있으면 글로 풀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든 글쓰는 이의 자아상에 대해, 이만큼 예리한 통찰이 또 있을까?

 

이 책의 저자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캐나다 출신의 소설가이며, 시인, 에세이스트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는 작가이다. 그녀가 부커상을 두 차례를 수상한 것만 봐도, 그만큼 문제적이며 시의성있는 작품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그동안 수 차례에 걸쳐 글쓰기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았고, 이 책은 그간의 강의 내용들을 6개의 단락으로 묶어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선 그녀의 작품을, 혹은 글쓰는 스킬에 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이 책은 마치 작가 Writer 라는 (개념) 것을 가운데 놓고 그 주위를 계속해 돌면서 그것이 대체 무엇이고, 왜 존재하는지를 탐색하며 알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본문에는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등장하고, 다채롭게 인용된다. 이는 내가 가지고 있던 책과 작가,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개념을 확장하려는 시도처럼 다가왔다.

 

문자를 쓰고 읽을 줄 아는 이는 흰 여백에 연필만 주어지면 무엇이든 적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쓴다하면 다 작가라고 볼 수 있을까?

 

1장

<"물론 작가가 되는 것과 쓰는 것 자체는 (...) 구분할 필요가 있겠지요."

"아, 거 봐요!" 니키가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겁니다. 아무리 글을 써도 만약 작가가 될 수 없다면, 딱히 써야 할 필요도 없어요!" p31,32>

 

분명 '쓰는 것'과 '작가가 되는 것'은 구별된다. 그렇다면 이토록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왜 그토록 자기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 걸까? (독립출판이 하나의 출판 트렌드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동기에 대한 것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에 걸맞는 세가지 질문이 서론에 등장한다.

 

  •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 -왜 글을 쓰는가?
  • -글은 어디에서 오는가?

 

저자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왜 작가가 되었는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과정이 (신기하게도)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경험한 것과 흡사했다. 어쩌면 작가가 되겠다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어떻게 작가가 된 걸까요? 작가는 사람들이 변호사나 치과의사가 되겠다고 선택하는 것처럼 내가 택한 일도, 내가 택할 법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1956년, 축구장을 가로질러 하교하던 중에 그냥 갑자기 그렇게 된 거였어요. 머릿속으로 시를 쓴 뒤 종이에 옮겨 적었는데 그때부터 오로지 글을 쓰고 싶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안 났어요. 내가 쓴 시가 훌륭한지 어떤지도 몰랐지요. 하지만 알았대도 아마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경험이었으니까요. p43>

 

내가 쓴 시가 등단이 되어서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심상을 글로 옮겼을 뿐이고 이것을 계속 해 나가겠다고 결정했기에 그녀는 작가가 되었다.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러한 경험이었다. 

 

<작가는 그러니까 신문 기사를 쓰거나 판에 박힌 소설을 찍어내는 달인이 아닌 예술가가 되기를 열망하는 작가는, 정말 특별한 사람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걸까요? p60>

 

2장

여기에 대한 답을 두번째 장에서 찾는다.

그러한 인식의 저변에는 작가가 가진 이중성이 크게 작용한다,

 

<우리가 '작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버리는 두 개의 독립체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개별적인 작가 말입니다. 여기서 두 독립체라는 건,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의 존재,(중략)...

아무도 안 볼 때 그 몸을 넘겨받아 글쓰기에 사용하는, 같은 육체를 공유하지만 좀 더 희미하고 애매모호한 또 다른 존재를 의미합니다. p68,69>

 

저자는 일상의 존재와 글쓰는 존재의 두 가지가 독립되어 한 작가에게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 책의 세계는 픽션이며, 간접적인 경험과 상상력이 더해져 구현된 세계이다. 우리가 모두 경험한 것만 글로 써야한다면, 에세이, 르포르타주, 자전적인 전기소설 밖(논픽션)에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에게는 일상을 벗어난 자유로운 자아(for 글쓰기)가 따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작가가 글을 쓰는 시점과, 독자가 그 글을 읽는 시점은 늘 시간차가 존재한다. 그러한 연유로 작가는 부득이하게 이중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도 덧붙인다.

<모든 작가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방금 전에 읽었던 그 책의 작가를 절대 실제로 만날 수 없으니까요. 글을 쓰고 출간을 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출간할 때가 되면 책을 썼던 그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고 없지요. 또는 그렇다고 알리바이를 둘러댑니다. p71>

 

3장

좀 더 현실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아무리 유명하고, 많이 팔리는 작가라도, 그래서 얼마나 버는가?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등장하는 돈과 예술에 관한 것이다.

<이번엔 예술과 돈이라는 양 갈래에 대해 알아볼 차례입니다. 영어식 표현으로는 도로가 바퀴와 부딪치는 지점, 그러니까 작가가 예술적 기교라는 돌바닥과 월세라는 단단한 바퀴 사이에 꽉 끼게 되는 지점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작가는 돈을 위해 글을 써야 할까요? 돈이 아니면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야 할까요? 어떤 의도나 동기가 있어야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p102>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명성일까? 부일까? 둘 다면 더 좋겠지만, 실제로 우리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책도 많이 팔리고, 부도 많이 쌓을 수 있기를 소망할 것이다. 

 

<작가에게 이런 돈 문제는 선택입니다. 오직 선택의 문제일 뿐이에요 p104>

 

<글을 쓰고 이문을 남기는 사람이 

살아남아 다른 날 또 글을 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을 것" 이라는 금기아닌 금기가 존재한다. 우리는 왜 작가가 '부'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공고하게 만들어지 신화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가난하면서 진실한 예술가, 또는 부유하면서 영혼을 팔아넘기 예술가,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하거든요. 이렇게 신화가 굳어져가는 거지요. p109>

 

저자가 파리에서 만난 한 지식인의 질문 (당신이 베스트셀러를 쓴다는 게 사실인가요?)에 답을 하면서도 느꼈던 모멸감(혹은 당혹감일 것이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일부러 쓰는 건 아니에요."

 

<문학적 가치와 돈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돈이 되는 좋은 책, 돈이 되는 나쁜 책, 돈이 안 되는 좋은 책, 돈이 안 되는 나쁜 책. 조합은 이렇게 네 가지뿐입니다. p111>

 

4장

다음 4장에 이어지는 내용은 작가가 마주하게 되는 '도덕 및 사회적 책임'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이 예술 활동을 통제하며 예술가에게 간섭하는 지점은 '돈과 힘'이라고, 예술가가 예술 활동으로 사람들에게 간섭하는 지점은 '도덕 및 사회적 책임'이라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질문은 아주 짧게 압축 할 수 있습니다. 시장에 영혼을 팔았는가? 만약 그랬다면 얼마에 팔았고, 누가 샀는가? 영혼을 팔지 않았다면 누가 예술가를 껍질 무른 게처럼 짓밝는가? 영혼을 판 대가로 예술가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p152>

 

그렇다면 작가는 글을 쓸 때 도덕적 판단이 없는 중립적인 글을 써야할까?

 

<도덕적 함의가 전혀 없는 글을 쓰는 게 가능할까요? "아뇨." 

"도덕적 함의가 담기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나와야 하고, 그 결과물의 옳고 그름에 대해선 독자가 판단할 거예요. 작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말이에요." p163>

 

<등장인물이나 결과에 대한 가치 판단은 작가가 하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공개적으로 해선 안 되지요. (중략)

하지만 독자들은 작품 속 인물을 해석하고, 고로 판단합니다. p163>

 

<언어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아요. p164>

 

조지 오웰은 글쓰기 자체가 정치와는 무관할 수 없는 활동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작가는 글 속에서 가치 판단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소설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김지영씨의 삶을 보여주며, 그와 함께 1960-2016년까지의 통계자료가 각주로 달린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책은 향후 2년간 스테디셀러가 되면서 많은 독자가 읽으며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소설이 되었고, 평론가들로부터는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평을 받는다. 

 

<작품이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걸 정하는 건 작가가 아니라 독자예요. p177>

 

5장

5장은 독자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독자와 관련한 세가지 질문이 등장한다.

  • -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 -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책의 기능, 그러니까 의무는 무엇인가?
  • -독자가 책을 읽고 있을 때, 작가는 어디에 있는가?

 

<대상이 없는데 글을 쓰는 소설가는 드뭅니다. 보통은 가상의 일기를 쓰는 소설가들조차 독자를 상정하지요. p184>

 

<작가들의 공통적인 딜레마는 지금이든 나중이든 누군가가 자신의 글을 읽을까 하는 것입니다. p185>

 

<독자가 작가와 시공간상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든 상관없이, 오직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닙니다." 

"시는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에요." (영화 <일 포스티노> 중에서) >

 

작가가 글을 쓰는데 꼭 필요한 것은 도구적으로는 언어(문자)이며, 최종적으로는 독자이다. 작품을 읽고 해석하며, 사유하는 독자로 인해 작가의 작품은 완성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 역시 글을 쓰고자 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쓰여졌고, 저자가 보낸 메세지는 나를 통해서 재해석된다. 저자가 6강의 강좌를 정리했지만, 나에게는 유의미한 하나의 강의만 남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작가와 독자는 별도로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지만 책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의 가상의 유기체와 다름 없다는 생각도 든다.

 

6장

마지막 6장은 다소, 은유적이다.

다루고 있는 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고, 그에 대한 서사시와 소설 작품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어둠 속 지하세상, 죽음이 아니라 이야기가 존재하는 곳.

고로 '이야기 story'는 어떻게 탄생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읽혔다.

 

<이번 장의 제목은 "죽은 자와 협상하기"로, 모든 서술적 글쓰기, 아니 어쩌면 모든 글쓰기는 사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매혹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가설을 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사후세계로 들어가, 죽은 자로부터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데려오고자 하는 욕망에서 글쓰기가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거죠. p220>

 

<이야기가 있는 곳? 이야기는 암흑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감이 떠오르는 것을 섬광에 비유하는 것이지요. 내러티브 속으로, 내러티브의 과정 속으로 들어가는 건 어두운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어요. 시인들도 이 사실을 압니다. 역시나 컴컴한 길을 지나가니까요. 영감의 우물은 저 아래로 이어지는 굴입니다. p244>

 

책 속에 인용된 소설들은 내가 읽었던 것보다 그렇지 않은 작품이 더 많았다. 풍부한 인용은 각주 페이지가 252쪽에서 265쪽까지 정리된 걸로만 봐도 얼마나한 양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자기 글을 쓰고 싶어하는 지금, 이 책이 매력적인 글쓰기, 스티븐 킹이 쓴 <유혹하는 글쓰기>처럼 실제적인 예시와 가이드를 전하진 않지만, 왜 글을 쓰고자 하는 걸까? 하는 내면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어떤 지점에서 글쓰기가 시작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

 

yes24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35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35 댓글 40
종이책 작가의 글쓰기, 그리고 작가의 삶 평점10점 | h*****7 | 2023.10.19 리뷰제목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이 블로그에 많이 보여서 검색하다가 만나게 된 책이다. 오랫동안 글을 써왔지만 글쓰기 관련 책을 만나면 늘 설렌다. 더구나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세계적인 문학가이며 부커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다는 대작가는 어떤 글쓰기로 자신의 삶을 엮어가는지 궁금했다. 서문을 읽으면서 벌써 노작가의 문장들은 나를 미소짓게 했다. 1960년대 초반에 영문학도였던 저
리뷰제목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이 블로그에 많이 보여서 검색하다가 만나게 된 책이다. 오랫동안 글을 써왔지만 글쓰기 관련 책을 만나면 늘 설렌다. 더구나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세계적인 문학가이며 부커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다는 대작가는 어떤 글쓰기로 자신의 삶을 엮어가는지 궁금했다. 서문을 읽으면서 벌써 노작가의 문장들은 나를 미소짓게 했다. 1960년대 초반에 영문학도였던 저자는 윌리엄 엠프슨이 쓴 모호함의 일곱 가지 유형이라는 권위있는 비평서를 읽어야 했고 2000년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엠프슨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대략적인 주제는 글쓰기’, 또는 작가가 된다는 것이었고 청년층과 노년층, 남자와 여자, 문학 전문가와 학생, 일반 독자 등 다양한 관객을 대상으로 한 여섯 번의 강의 내용이 이 책으로 엮어졌다.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지만 숱한 글쓰기 작법을 말하는 책은 아니다. 작가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그 강의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것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글 쓰는 법에 대한 책도, 나의 저술 활동에 대한 책도, 특정한 사람, 시대, 국가의 글에 대한 책도 아니다. (중략) 작가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글이다. 그 위치라는 게 언제나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이 책은 한 40년 동안 글의 광산에서 노동해온 사람이 한밤중에 깨어나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다음 날 써볼까 생각해볼 법한 책이다.’(p17)

 

 

그렇다면 아마도 글쓰기는 어둠, 그리고 욕망이나 충동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 들어가서 운이 좋으면 어둠을 밝히고 빛 속으로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오리라는 욕망 또는 충동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어둠, 그런 욕망에 대한 책이다.’(p25)

 

 

이 책의 내용은 1장 길찾기 제2장 이중성 제3장 헌신 제4장 유혹 제5장 성찬식 제6장 하강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쓰기에 대하여라는 제목과 달리 작가와 독자의 관계나 작가의 삶과 처세, 작가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 에 대한 주제를 단테와 셰익스피어, 에밀리 디킨슨과 에이드리언 리치 등 톨킨과 스티븐 킹에 이르기까지 장대하고 심오한 글쓰기에 대한 사유를 펼치고 있다. 재미있고 때로는 아리송한 질문과 답으로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할머니는 교사였고 할아버지는 시골의사, 가족에게 헌신적인 아버지를 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덕분인지 글에서 위트와 여유로움이 느껴졌고 작가의 시선으로 인간의 삶을 꿰뚫고 있는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작가의 길에서 아무런 걸림돌 같은 것도 없을 법한데 시대적 상황에서였을까. 남성 작가들과 달리 불리했던 여성 작가로서의 삶이나, 오직 예술을 좋아하는 것으로 글을 써야 했던 힘듦을 토로한다. 남성 예술가들은 예술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질 수 있었지만, 여성 예술가에겐 그런 삶이 걸림돌이라고 여겼다. 또 그 시대에는 돈을 위해글을 쓴다거나 그렇다고 생각만 되어도 매춘 행위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베스트셀러로 만들기 위해 마케팅을 하고 여성 작가들이 활약이 두드러지는 지금의 현실과 얼마나 대비되는 이야기인가. 오직 돈을 위해서, 가난에 허덕이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글을 썼던 체호프, 관객에게 먹힐만한 글을 썼던 셰익스피어, 전업으로 글을 썼던 찰스 디킨스,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 등을 언급하면서 돈이라는 요소를 놓고 볼 때 누가 더 낫다거나 못하다고 재단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많은 책을 섭렵하다 보면 필경 작가로 태어나는 것일까. 열여섯이 될 때까지 폭넓으면서 무차별적이었던 독서 경험-제인 오스틴부터 싸구려 SF모비딕까지 아울렀지만, 아무도 과장이나 직업으로서의 글쓰기, 일로써 글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작가가 되었을까. 축구장을 가로질러 하교하던 중 머릿속으로 시를 쓴 뒤 종이에 옮겨 적었는데 그때부터 오로지 글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야구장에서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하던 하루키가 떠오른다. 이렇듯 작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대작가의 작품들을 인용하며 글쓰기 강의는 물 흐르듯 이어진다.

 

 

책을 출간하는 것은 때로 자신이 마음속으로 저지른 것과는 전혀 다른 범죄로 재판에 회부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종류의 예술가는 총살 집행장에 일렬로 줄을 서 있다는 악담을 피해갈 수 없다는 점에서 전부 같습니다.

 

한 권의 책이 나오는 것을 산고(産苦)에 비유하기도 한다. 책 출간으로 재판에 회부되고 총살 집행장에 일렬로 줄을 선 예술가들의 모습으로 표현한 부분을 읽으며 웃음이 났다. 대문학가도 이렇게 예민하구나. 일단 집필이 끝난 작품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의 손에 들어간다. 호평도 있지만 따끔한 독설도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작가에게 있어 숙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밖에도 작가의 이중성에 대한 얘기도 흥미로웠다. 모든 작가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작가라는 이름은 두 개의 독립체가 형성하는데, 을 쓰고 있지 않을 때의 존재와 글쓰기를 하는 같은 육체를 말한다. 책을 썼던 그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고 없기 때문에 작가는 두 자아가 한 몸을 공유하고 있으며 다른 자아로 변하는 순간을 예측하거나 포착하기 어렵다.’(P71)고 했다. 이중성이야기는 우리 중 누가 이 글을 썼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보르헤스의 딜레마를 꺼내고 나아가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 나오는 탄소 원자 이야기로 나아간다. 또 글을 쓰는 행위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거울을 통과하는 순간에 벌어진다고. 결국 작가와 독자는 모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고. 이중성 이야기는 왠지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여섯 번의 강의를 모아 놓은 이 책은 순서대로 읽어도 좋지만 끌리는 장을 먼저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글쓰기는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작가는 꼭 이래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주로 질문형으로 던지기 때문에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책을 읽는 사람은 글쓰기와 작가에 대한 지향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작가의 얘기는 만족스러운 지적 사유를 선물로 줄 것이다. 생각지 않게 이 책을 오래 걸려 읽고 리뷰를 늦게 쓰는 바람에 처음 느꼈던 감흥의 정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이것은 온전히 내 책임이다. 가끔 들춰 보며 내 글쓰기는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독서의 범위가 편협하지 않은지 점검해 보려고 한다.

 

 

 

 

 

19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9 댓글 6
종이책 [글쓰기에 대하여] 작가가 된다는 것은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s*******4 | 2021.04.03 리뷰제목
<글쓰기에 대하여> 마거릿 애트우드/ 박설영 역 프시케의숲/ 2021년 3월 1일   "작가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통찰을 통해 진정한 작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1. 들어가며   "작가란 무엇인가?"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렸을 때 문학 작품, 추리소설 등을 읽으면서 '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쓰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
리뷰제목

글쓰기에 대하여

마거릿 애트우드/ 박설영 역

프시케의숲/ 2021년 3월 1일

 

"작가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통찰을 통해

진정한 작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1. 들어가며

 

"작가란 무엇인가?"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렸을 때 문학 작품, 추리소설 등을 읽으면서 '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쓰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정말 대단하다.' 라고 생각하며 작가의 스토리 구성, 스토리 내용 및 짜임새 등에 감탄하며 '역시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냐.' 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과거의 작가들은 정말 작가 수업, 글쓰기 수업을 전공으로 받고 직업으로 작가를 선택해서 글을 써왔다. 그래서 국문과를 전공하거나 문예창작과 등을 전공하고 수상 실적을 거둬 등단해야 비로소 작가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글쓰기 훈련도, 글쓰기에 대한 전공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여 작가가 되었다. 오히려 오랜 글쓰기 훈련과  전문적인 작가 수업을 받지 않고서도 작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왔다. 누구나 글을 쓰고, 자신이 원하면 책을 출간해서,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튜버 또는 파워블러거, 주식투자 성공한 사람 등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글로 써서 책을 낸다. 그리고 그 책들은 어느새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래서 요즘 베스트셀러를 검색해보면 전문 작가들의 책보다는 그런 류의 책들이 눈에 많이 띄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책들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보는 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고 걱정이 된다. 물론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 쓰고 그것을 책으로 출간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은 좋으나, 글을 쓴다는 것, 작가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너무나 가볍게 느껴지고, 마치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라고 하면 작가가 가진 특성과 고유한 본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소위 작가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고민과 걱정을 하던 나에게 마거릿 애트우트가 쓴 [글쓰기에 대하여] 는 나의 고민과 걱정을 해결해주었다. 저자의 작가에 대한 철학적 통찰과 사유를 통해 나는 비로소 작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었고, 진정한 작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요즘 같이 너도 나도 작가인 현실 속에서 마거릿 애트우드가 전하는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강의 내용을 들어보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2. 책 속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해 논의해왔다. 그러나 주로 그들은 글쓰기 기술 측면에 주목하여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잘할 수 있을까에 치중해왔다. 우리들 또한 그런 글쓰기 기법만을 배워 글을 잘 쓰려고만 했지, 근본적으로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작가가 글을 쓰는 행위 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런 점에서 작가에 대한 철학적 통찰과 다양한 문학작품들을 통한 사유를 보여준 그녀의 글쓰기 강의가 더욱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첫 시집으로 단박에 캐나다연방총독상을 받았다. 그 후 50~60년 동안 시집 18종, 단편소설집 9종 등 문학 분야에서 풍성하고 다양한 업적을 기록하였다. 

『눈먼 암살자』(2000)와  『증언들』(2019)로 그녀는 두 차례나 세계적인 문학상인 부커상을 받아왔으며 매해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 책은 마거릿 애트우드가 등단한 지 40년 정도 되는 때에 집필한 것으로 2002년 영미권에 서 초판이 발행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그녀의 강의를 엮은 것이기도 하다. 2000년에 그녀가 『눈먼 암살자』(2000)로 첫 번째 부커상을 받고 나서 케임브리지대학이 '엠프슨 강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거릿 애트우드에게 강연을 요청했다. 이 엠프슨 강의는 저명한 작가와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학자들을 초청해 다양한 문학적, 문화적 주제를 쉽게 탐구하는 독특한 장으로서,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와 영문학부가 공동으로 후원하는 강연 시리즈이다. 강연 요청을 받은 그녀는 2년 정도의 준비 기간을 가지고 난 후 여섯 번의 강의를 했다. 그리고 해당 6회 강의를 원형으로 하여 단행본 형식에 걸맞게 완성도를 높여  『Negotiating with the Dead: A Writer on Writing』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원제인 ‘죽은 자와 협상하기’는 제6장의 부제에서 가져온 것으로, 해당 장은 “이야기를 찾아나는 여정과 그 어둡고도 복잡한 길”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제목대로 '글쓰기'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서 마거릿 애트우드는 세 가지 질문을 통해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준다. 작가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글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6개의 장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해당 주제에 접근할 때 일반적인 작법서나 작가로서의 자서전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보다는 글쓰기를 둘러싼 심오하고 본질적인 질문에 답해 나가는 것이 기본적인 목표였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글쓰기에 대한 기술이나 방법을 다루지 않는다.

 

이 책은 그 강의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것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글 쓰는 법에 대한 책도, 나의 저술 활동에 대한 책도, 특정한 사람, 시대, 국가의 글에 대한 책도 아니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으려나? 말하자면 작가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글이다. 그 위치라는 게 언제나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이 책은 한 40년 동안 글의 광산에서 노동해온 사람이 한밤중에 깨어나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다음 날 써볼까 생각해볼 법한 책이다. (p.17)

 



첫 번째 질문: 작가란 무엇인가(1장~2장)

.

"작가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글을 쓰면 그게 작가가 아니겠어요?"

-일본 작가 아베 코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 중-

종이에 글을 끄적일 줄 아냐고? 이봐, 그거야 맨날 하는 거잖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한 단어씩 적으면 되지. (...)학교에서 글 쓰는 건 배웠잖아? 배웠을 거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쳐. 그러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적어. 그러고 아무나 시켜서 쉼표 나부랭이 같은 것을 넣어달라고 하면 돼. (...) 그건 거기 사람들이 해줄거야." 

-엘모어 레너드의 소설 속 한 마약업자의 대사 중-

 

정말 작가란 말하고 싶은 내용을 종이 위에 끄적이면 되는 걸까. 소설 속 마약업자의 말대로 떠오른 아이디어와 말하고 싶은 내용을 그저 적기만 하면 작가가 되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이에 대해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것은 작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작가는 신문 기사를 쓰거나 판에 박힌 소성을 찍어내는 달인이 아니다. 그저 말하고 싶은 내용을 종이에 쓴다고 해서 모두다 작가는 아닌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입밖으로 내지 않을 뿐, 본인 머릿속에 책이 한 권 들어 있다고. 시간만 있으면 글로 풀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책 한 권은 품고 있다. 즉 사람들이 읽고 싶어할 만한 경험을 하고 산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이 '작가가 된다는 것'과 동의어인 건 아니다. (p.58)

 

그러면 작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자전적인 삶을 통해 작가가 된 과정에 대해 말해준다. 그녀는 작가가 되기 위해 일부러 노력하지 않았다. 말그대로 자신이 선택한 일도, 자신이 선택해야 할 법한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냥 갑자기 그렇게 어느 순간 작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어떻게 작가가 된 걸까요? 작가는 사람들이 변호사나 치과의시가 되겠다고 선택하는 것처럼 내가 택한 일도, 내가 택할 법한 일도 아니었다. 1956년, 축구장을 가로질러 하교하던 중에 그냥 갑자기 그렇게 된 거였다. 머릿속으로 시를 쓴 뒤 종이에 옮겨 적었는데 그때부터 오로지 글을 쓰고 싶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안 났다. 내가 쓴 시가 훌륭한지 어떤 지도 몰랐다. 하지만 알았대도 아마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경험이었으니까요. 너무 강렬한 경험이었어요. (p.43)

 

그러면 작가는 그녀의 경험처럼 어느 순간에 갑자기 되어 버리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릿속에 책 한 권이 들어있을 정도로 저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가지고 있는데, 왜 그들은 작가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예술가가 되기를 열망하는 작가는. 정말 특별한 사람일까?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2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제2장은 보다 일반적인 논의로 방향을 트는데, 특히 ‘닮은꼴’이라는 개념으로 해당 주제에 접근하는 것이 독특하다. 여기서 작가의 이중성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두 개의 독립체로 존재한다.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의 존재, 즉 개를 산책시키고 규칙적으로 세차고 일상생활을 영위해나가는 '생활인'으로서의 작가와 아무도 안 볼 때 그 몸을 넘겨받아 글쓰기에 사용하는 같은 육체를 공유하지만 좀 더 희미하고 애매모호한 또 다른 존재인, 예술성을 추구하는 작가 이렇게 두 개의 작가의 모습이 있다.

 

그러면 난 누구였을까요? 아마 나의 사악한 쌍둥이나 정체가 불분명한 나의 닮은 꼴이었을 겁니다. 어쨌거나 나는 작가이므로 낮이 지나면 정체불명의 닮은꼴을 어딘가 숨겨둬야 하는 밤이 찾아온다. (p.70)

 

이렇듯 작가는 두 개의 자아, 닮은 꼴이 존재한다. 그 닮은 꼴은 정체가 불분명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닮은 꼴은 겉으로 드러나서도 안 되고, 남한테 보일 수도 없는 숨겨둬야 하는 존재이다. 그 존재는 오직 예술성을 추구해 글을 쓸 때만 나타날 지도 모른다. 

 

또한 독자로서 우리는 이중성을 가진 작가를 만날 수 없다. 왜냐하면 방금 전에 읽었던 책의 작가를 절대 실제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글을 쓰고 출간을 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책을 출간할 때가 되면 책을 썼던 그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그 책을 썼던 순간의 그 사람은 사라지고 없다. 

또한 작가 또한 독자에 대해 모른다. 독자는 대개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와 독자는 서로를 볼 수 없다.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것은 책이며, 작가가 죽은 지 한참 후에 독자가 책을 접할 수도 있다. 독자와 작가는 오직 책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질문: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3장~5장)

 

작가는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다름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돈 또는 예술을 위해서, 둘째 도덕과 사회적 책임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독자를 위해서이다. 그래서 이 3가지 대답에 대해 3장, 4장, 5장에서 다양한 문학 작품의 사유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첫째, 돈 or 예술을 위해서

3장에서는 예술과 돈의 대립 속에서 이를 논한다. 작가는 생활인이기도 하고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들도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선느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롯이 작품만을 바라볼 수도, 순전히 돈만을 추구할 수도 없다. 

"작가들을 보면 팔릴 거란 확신도 없으면서 책을 쓰는 데 몇 년을 허비하잖아요.

왜 그런 짓을 할까요?"

"돈 때문이지, 대박이 터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p. 103

 

글을 쓰고 이문을 남기는 사람이

살아남아 다른 날 또 글을 쓸 수 있다. 

-p.105

 

말그대로 작가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 작가 역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돈이 필요하다. 그들은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원자를 모집하거나, 따로 직장에 다니거나, 시장에 책을 내다 팔 수도 있다. 이렇게 작가가 살아남아야, 돈 문제에 대해 집착하지 않아야 다른 날 또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돈 즉 부일까? 작가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글을 써도 되는걸까? 그러나, 우리는 작가가 오직 돈을 벌 목적으로 글을 쓴다고 말한다면 그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아직도 우리의 인식 속에는 작가는 '부'만을 축적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금기 사항이 자리잡아 있다. 그러면 우리는 작가의 현실을 이해하면서도 부를 축적하는 것을 비난하는 걸까? 그것은 오랫동안 신화로서 굳어진 인식과 생각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 가난하면서도 진실한 예술가, 또는 부유하면서도 영혼을 팔아넘긴 예술가,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하거든요. 이렇게 신화가 굳어져가는 것이지요." (p.109)

 

그래서 순수한 야망을 품고 진짜 작가, 진짜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 작가에는 이것이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작가는 예술만을 추구해야 할까? 저자는 시나 소설을 예술로 만드는 가치는 시장 교환 영역에서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한 가치는 작동 방식이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다른 영역을 재능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재능은 무게를 재서 측정할 수도, 돈을 주고 살 수도 없다. 또한 재능을 기대하고 요구할 수도 없다. 재능은 주어지는 것이기에 다른 방식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존재의 충만함에서 나오는 은총이다. 그래서 재능을 달라고 기도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기도에 꼭 응답을 받는 건 아니다. 


소설을 창작할 땐 1할의 영감과 9할의 노력이 필요하다지만, 작품이 예술로서 살아남으려면1할의 영감이 무조건 있어야 한다. (p.110)

 

“아름다운 것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찾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들은 선택받은 사람들로, 그들에겐 아름다운 것이 오롯이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p.125)

 

이렇듯 작가의 작품이 예술로 인정받으러면 작가에게 영감과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작가가 예술만을 추구하면 아름다운 것은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작가의 얘술성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능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능과 예술성이 주어지는 대가로 작가는 신으로부터 희생과 헌신을 요구받는다.

예술의 신이 예술가를 선택하는 것이지, 그 반대로는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술가엔 천형처럼 비극과 파멸의 기운이 감돈다. (p.125)

 

“아, 이게 피할 수 없는 예술가의 운명이지요.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지만, 소수만이 선택받고 그 중 일부는 순교하고 맙니다. (p.128)

 

남성 예술가에게도 이런 희생이 요구되었는데 하물며 여성 예술가에게 요구된 희생은 오죽했을까. 이에 대해 저자가 시인 지망생이었을 때 여성 예술가에게 이런 희생과 헌신은 자연스럽게 요구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대중이 원하고 이해하던 여성 예술가의 이미지였다. 반쯤 죽은 수녀의 모습 말이다. (p.129)

 

그러면 ‘길은 좁고 문은 협소한’ 예술지상주의로 향하는 길에 놓인 ‘절망의 늪’을 피해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다른 길을 택하면 어떻게 될까요?

 

둘째, 도덕 and 사회적 책임을 위해서

제4장에서는 예술과 사회적 책임 간의 모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작가의 예술 추구와 사회적 책임 간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숨겨져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작가들을 훑어보면 그들이 언제나 정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작가에게 정치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성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다.

-시릴 코널리,<약속의 적>

 

작가는 예술에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며 완벽한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직한 목표라고 생각하게 된다. 예술을 추구하고 헌신하는 과정은 수양 과정과 같다. 그 수양 과정에서 기다림의 기도, 영적인 비움, 자아의 부정, 이 모든 것이 나름의 역할을 한다.

 

돈과 권력에 대한 질문은 아주 짧게 요약할 수 있다. 시장에 영혼을 팔았는가? 만약 그랬다면 얼마에 팔았느냐? 누가 샀는가? 영혼을 팔지 않는다면 누가 예술가를 껍질 무른 게처럼 짓밟는가? 영혼을 판 대가로 예술가가 얻고자 하는 것 무엇일까?  (p.152)

 

그러면 작가는 도덕적 함의가 전혀 없는 글을 써야만 할까?

이에 대해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도덕적 함의가 담기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나와야 하고, 그 결과물의 옳고 그름에 대해선 독자가 판단할 거예요. 작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말이에요." (p.163)

 

즉 등장인물이나 결과에 대한 가치 판단은 작가가 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아닌 독자가 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작품 속 인물을 해석하고,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매일같이 우리를 둘러싼 주변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다. 언어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 인간의 뇌가 욕망에 대해 중립적이 않기 때문이며, 그래서 언어 속에는 이미 가치 판단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작가는 보편적 인류와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정말로 권력이 주어진다면, 권력의 사다리 어디쯤에 자리잡아야 할까요? 선택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원하는 대로 하고 결과는 스스로 감수하라.'고 말하겠어요. 아니면 " 이야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라"고 혹은 "공들여 쓰다 보면 사회라는 문제는 절로 해결된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작품이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걸 정하는 것은 바로 독자인 것이다. 

 

셋째,  독자를 위해서

-영원한 삼각관계:

: 작가, 독자, 그리고 매개체로서의 책

 

작가와 독자는 양 꼭짓점에 존재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두 점을 연결하는 줄이 없다. 그런 작가와 독자를 중간에 이어주는 꼭짓점이 바로 글자. 텍스트인 책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 번째 점인 책은 유일하게 다른 두 꼭짓점인 작가와 독자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책을 통해, 즉 지면을 통해서 소통한다. 독자 역시 지면과 소통한다. 즉 작가와 독자는 오직 지면을 통해서만 소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지면이란 보이지 않는 손이 독자더러 해독하라고 흔적을 남겨놓은 곳이다.  

 

그러면 독자가 책을 읽고 있을 때 작가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작가의 이중성 개념을 살펴볼 때 독자가 글을 읽을 때 작가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을 말했다. 만약 같은 장소에 있었으면 서로 말을 나눴거나, 훔쳐보는 현장을 딱 걸렸을 테니까 말이다.

독자는 일종의 스파이다. 스파이, 무단침입자. 남의 편지와 일기를 상습적으로 읽는 사람이요, 듣지 않고 엿듣는다. (p.183)

 

이런 점에서 작가와 독자는 서로 모르는 존재이다. 작가와 독자는 서로에게 '무명인'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책은 익명이고, 모든 독자도 그렇다. 읽고 쓰는 것은, 이를테면 연기하는 것과 극장에 가는 것과는 달리 둘 다 어느 정도의 고독, 나아가 어느 정도의 비밀주의를 전제로 한다. 즉 작가는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자, 눈에 보이지도 않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독자에게 말을 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누군지도 알 수도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알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는 무명인의 존재인 독자이지만 그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작가는 글을 쓴다. 즉 작가가 글을 쓰는 건 바로 '독자'를 위해서이다. '그들' 이 아닌 '당신'인 독자를 위해, '친애하는 독자를 위해, 누군가, 어떤 ' 한 사람' 을 위해서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이다.  

 


 

세 번째 질문: 글은 어디에서 오는가(6장)

-죽은 자와 협상하기

누가 왜 지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걸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이며, 저자의 은유적이지만 글의 근본적인 기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다양한 문학작품 속에 드러난 글  속에 제시된 생각들을 통해 글의 기원을 밝혀내는 과정이 참신하고 좋았다. 

6장에서는 '글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해 논의한다. 이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글쓰기 동기와 관련되어 있다. 저자는 글쓰기란 곧 '어둠을 밝히고 빛 속으로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오리라는 욕망 혹은 충동'이라고 말한다. 그런 관점을 저자는 '삶과 죽음'의 맥락과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즉 어둠 중의 어둠이 죽음이라면, 글쓰기는 인간의 실존과 관련해서 무척이나 중요한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모든 글쓰기는 사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매혹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가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글쓰기 자체가 무엇보다도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반작용인 것이다. 

위험을 무릎쓰고 사후세계로 들어가, 죽은 자로부터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데려오고자 하는 욕망에서 글쓰기가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거죠. (p.220)

 

글을 쓰는 행위는 사고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과정으로 남는 건 일련의 화석화된 발자국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예술 형태인 그림, 조각, 음악은 오래 지속될 수 있지만, '목소리'로서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글쓰기는 글을 쓰는 행위이고, 목소리를 위한 악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가장 자주 하는 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모든 작가는 '지금'에서' 옛날 옛적'으로 가야 합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야 합니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저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과거에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보기에 따라서 절도든, 회수든, 뭐든 해야 합니다. 죽은 자들이 제아무리 보물을 갖고 있다고 해도, 산 자들의 땅으로 되가져와 시간 속에 또 한 번 들이지 않는 이상, 그러니까 관객의 영역에, 독자의 영역에, 변화의 영역에 들이지 않는 이상, 그 보물은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요. (p.247)

 

그곳에 가는 건 쉽지만 돌아오는 건 어렵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모든 이야기를 돌에 새겨야만 합니다. 운이 좋아 올바른 독자를 만나면 돌이 말을 할 겁니다. 돌이 혼자 세상에 남아 이야기를 들려즐 겁니다. (p.248)

 


 

3. 나가며

 

지금까지 작가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글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해 답해왔다. 그렇게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마거릿 애트우드의 섬세한 접근 방식이 돋보였다. 저자는 결론을 '이것이다.' 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고 행간을 넉넉히 남겨놓음으로써 가능성과 열린 생각을 허용했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과정 중에 수많은 작가와 수많은 작품을 예로 들면서 화려한 인용을 했다. 단테와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 작가에서부터 에밀리 디킨슨, 엘리스 먼로 같은 뛰어난 소설가, 톨킨과 스티븐 킹 같은 장르 작가 등 8페이지에 걸쳐 인용글을 실을 정도로 다양한 작가와 작품들을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과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했다. 또한 40년 간의 작가 생활을 통해 나온 저자의 경험으로부터 글쓰기에 대한 마거릿 애트우드 만의 특유의 관점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작가에 대한 깊이있는 철학적 통찰과 사유로 인해서 우리는 진정한 작가는 어떠해야 하는지,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써야 하고, 그 글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과 독자가 되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예리하고 깊이있는 사유와 통찰을 통해 진정한 글쓰기와 진정한 책읽기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이 내게 목소리를 남겨놓아,

사람들이 그 목소리로 나를 알아보게 될 겁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9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9 댓글 6
종이책 글쓰기에 대하여 평점8점 | g****3 | 2021.09.05 리뷰제목
최근 들어 과거 어느때보다 글쓰기와 관련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사소한 sns 공간에서의 자기표현을 위한 글쓰기부터 의견 교류를 위한 글쓰기까지, 쉽게 자기 글을 남기고 발행할수 있는 플랫폼의 등장으로 예전보다 글을 쓰고 표현할 수 있는 매체도 더 다양해졌고 그만큼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도 커졌다.   신간 코너의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 '글쓰기에 대하여'
리뷰제목

최근 들어 과거 어느때보다 글쓰기와 관련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사소한 sns 공간에서의 자기표현을 위한 글쓰기부터 의견 교류를 위한 글쓰기까지, 쉽게 자기 글을 남기고 발행할수 있는 플랫폼의 등장으로 예전보다 글을 쓰고 표현할 수 있는 매체도 더 다양해졌고 그만큼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도 커졌다.

 

신간 코너의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 '글쓰기에 대하여' 제목을 보고 이 책은 연륜이 있는 대작가의 글쓰기의 방법과 훈련에 대한 책일것이라고 혼자 단정지었다.

글쓰기에 대한 호기심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이라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읽어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글쓰기의 방법을 논하는 책이 아니었다. 저자인 마거릿 애트우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저자의 6번의 외부 강의를 담아 정리한 책이었는데 작가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하여 글을 쓰는가, 작가들 심연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어쩌면 작가들 스스로도 정확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탐구해 보는 책이기도 했다.  

책 제목이 '작가에 대하여'라고 되어 있었으면 책의 내용을 넘겨짚지 않았을것이란 생각도 들고 더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을까 생각이들었다. 그런데 또 제목이 틀리진 않은게 작가들의 글쓰기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들, 글을 쓰면서 하는 고민들이 가득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레짐작이 어긋난 책은 오히려 읽어나가면서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글쓰기의 방법이 아니라 글을 쓴다는것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책은 작가들은 왜 쓰는가부터 시작하여 무엇을 위하여 글을 쓰는가에 대한 질문이 담겨있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와 책 사이 어디쯤에 머물러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작가와 글쓰기에 관련된 심오하고도 철학적인 이야기들이 저자 특유의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한 시선으로 잘 정리되어 있어서 읽는 내내 나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볼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작가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

물론 정답은 없다. 때론 밥벌이로, 자신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무언가를 위하여, 독자를 위하여,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누군가를 설득할 목적으로, 혹은 정말 독특하게도 자신의 내면의 치유를 위하여 창작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하고 어떤것이 옳은것이라고 말할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이유로 글을 쓰던간에 작가들은 글을 쓰는 과정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수많은 내적 갈등을 겪고 씨름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상업의 신과 예술의 신 사이에서의 갈등이 될수도 있고 자신의 신념과 대중이 바라는 이상 사이에서의 갈등이 될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를 찾고 풀어가는 과정에서 작가는 수많은 고민과 상념에 휩싸인다.

 

글쓰기가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며 특히나 다양한 매체와 플랫폼이 등장하고 전문작가가 아니더라도 일반인이 출판을 하기에 예전보다 쉬워진것이 사실이다.

과거 어느때보다 작가가 되기 위한 벽이 낮아졌고 그렇게 작가의 길로 진입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작가에 대해 너무 쉽게 평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점에 대해서 마거릿애트우드는 아주 적절한 비유를 들어가며 이야기하고 있다.

 

오페라 가수가 되려면 타고난 목소리와 수년간의 연습이 필요하지요. 작곡가가 되려면 듣는 귀가 있어야 하고, 댄서가 되려면 균형 잡힌 몸이 있어야 하고, 무대에서 연기를 하려면 대사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각 예술가가 되는 건 외견상 이제 글쓰기와 비슷하게 취급받지요.

누군가가 "우리집 네 살짜리 꼬마도 이것보다 잘하겠다"라고 말한다면, 문제의 예술가가 실은 재능도 없는데 운이나 수완이 좋아서 잘된 것이며, 어쩌면 사기꾼일 수도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한 질투와 경멸이 내포돼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예술가를 차별화하는 타고난 재능이나 비범한 능력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더 이상 모르겠을 때 주로 나타나지요

 

글쓰기를 볼까요. 대부분의 사람이 입밖으로 내지 않을 뿐, 본인 머릿속에 책이 한 권 들어 있다고, 시간만 있으면 글로 풀어낼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생각은 어느 정도는 진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책 한권은 품고 있거든요.

즉, 사람들이 읽고 싶어할 만한 경험을 하고 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이 '작가가 된다는 것'과 동의어인 건 아닙니다.

 

좀 더 음침한 예를 들어보지요. 누구나 묘지에 구덩이를 팔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모두가 묏자리 파는 일꾼이 되는 건 아닙니다. 후자는 훨씬 더 많은 체력과 끈기를 필요로 합니다. 또한 일의 성격상, 심오한 상징성을 지니지요. 묏자리 파는 사람은 그냥 구멍을 파는게 아니에요.

양 어깨 위에 다른 사람들의 심리적 투사, 두려움, 환상, 근심, 미신의 무게를 짊어집니다.

싫든 좋든 죽음을 상정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공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여느 공적 역할처럼 그 역할의 중요성, 즉 그 역할의 정서적, 상징적 내용의 중요성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대문자 W로 시작하는 작가 Writer의 역할도 마찬가지지요.

(p.58 길찾기 중)

 

우리모두가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는 부분 혹은 너무 쉽게 넘겨 짚는 부분이다.

작가들이 책을 내기 이전의 겪는 시간들에 대해서 저자는 친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어떤 내적 갈등과 고난속에서 이야기를 탄생시키는지, 그 속에서 어떤 지난한 과정들을 겪고 각자의 책들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책속에는 저자의 어린시절 이야기와 어떻게 시를 쓰고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자신의 이야기들도 담겨있다.

어린시절 도시가 아닌 숲에서 자라난 그녀는 조용히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지으며 노는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마도 이야기꾼으로 자라나기에 최적의 환경이 아니었나 싶다.

온갖 상상을 동원해 이야기를 지어내며 놀던 그녀의 어린시절은 평생에 걸쳐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는 그녀의 근간이 되었을것이라 짐작된다.

 

대개 작가들의 어린 시절은 그들의 천직과 남다른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들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책과 고독이 함께합니다.

나 역시 그랬지요. 북부에는 영화도 극장도 없었고, 라디오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책은 늘 곁에 있었지요. 일찍이 읽는 법을 깨쳐서 독서광이 된 나는 책이라는 책은 잡히는 대로 전부 읽었습니다. 책을 읽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아이들이 조용한 것을 좋아했고, 책을 읽는 아이는 매우 조용하니까요.

...

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고립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그리고 살면서 여러 이야기꾼을 만나지요. 나의 첫 이야기꾼은 오빠였어요.

처음엔 듣기만 하던 나는 금새 이야기 짓기에 합류했습니다. 아이디어가 바닥나거나 관객 역할을 맡고 싶을 때까지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게 규칙이었지요.

 

대단한 흡입력을 갖춘 탄탄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마거릿 애트우드라는 저자의 필력의 시작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짐작이 된다. 

어떤이는 타고난 글쓰기 재능을 갖추고 있는 반면 어떤이는 꾸준함으로 그 재능에 못지 않은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이슬아는 '부지런한 사랑'에서 언급했는데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 두가지를 모두 갖춘 엄청난 내공의 작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 80이 넘어서도 왕성한 글쓰기 활동을 하는 그녀가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10대후반 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서 시인으로 여성작가로의 삶을 일찌감치 시작한 그녀는 당시 캐나다에서 여성으로서 시인이나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여성 작가에 대한 편견이 어떠했는지,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1939년생인 그녀가 성장한 시대는 놀라울만큼 보수적인 환경이었다.

몇백년전도 아니고 불과 6-70년전인데 말이다.

지금의 캐나다를 떠올리면 상상이 안갈만큼 사회속에서 여성에 대해 차별이 존재하고 엄격한 나라였다.

그런 환경속에서 일찌감치 여성 시인이자 작가가 된다는것이 어떤의미였는지를 읽다보니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해오면서 작가의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는 그녀가 새삼 더 빛나 보였다.

 

작가들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과 그 과정에서의 복잡하고 어두운 길에 대한 이야기들 속에서 내가 그동안 만났던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과 그 속의 이야기들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그들이 어떤 고민과 고뇌속에서 그 이야기들을 탄생시키고 이끌어갔을지 새삼 그들의 시간들을 상상해보게 되었다.

 

작가와 책과 독자를 영원한 삼각관계로 묘사한 저자는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작가와 독자가 연결되는 과정속에서 작가는 책을 읽고 있는 그 사람의 방안에 존재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작가는 책속이 아닌 전혀 다른 공간속에서 이질적인 인물로서 존재할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가 소설을 읽으며 자꾸만 작가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작가가 우리가 상상하는, 내가 읽고있는 책 속 존재가 아닐수 있음을 새삼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작가의 내적갈등과 고민속에서  탄생된 이야기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가끔씩 어른거리는 작가를 만나기도 하면서 작가가 이 책을 통해 하려는 말들의 메세지를 가만히 헤아려보게 된다. 작가와 독자사이에 적당히 느슨한 거리로 연결된 책을 통해서 말이다.

3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3 댓글 0
종이책 글을 쓴다는 것, 작가가 된다는 것 평점8점 | b*******7 | 2021.03.11 리뷰제목
<글쓰기에 대하여>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 박설영 옮김   "작가가 된다는 것에 관한 여섯 번의 강의" 나는 언제나 작가가 되고 싶었다. 글을 쓴다는 것, 내 머릿속을 뱅글뱅글 돌아다니는 상상과 망상의 그 어디즈음에 속하는 것들을 글로 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면, 나의 하소연, 나만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나의 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
리뷰제목


 

<글쓰기에 대하여>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 박설영 옮김

 

"작가가 된다는 것에 관한 여섯 번의 강의"

나는 언제나 작가가 되고 싶었다. 글을 쓴다는 것, 내 머릿속을 뱅글뱅글 돌아다니는 상상과 망상의 그 어디즈음에 속하는 것들을 글로 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면, 나의 하소연, 나만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나의 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만났다. 솔직히 책의 정보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 책을 어떻게하면 잘쓰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기대를 산산히 부숴트리고, 이 책은 글쓰는 방법이 아닌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고찰이라고 봐야한다.

책을 읽으면서, 뭔가 어려운 말들이 내 머릿속을 더욱 어지럽히는 것 같았다. 빈 종이에 최대한 정리하며 책을 읽었다. 이 책은 글쓰는 것이 어떤 행위인지, 내가 왜 작가가 되고 싶은지, 작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어림짐작만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을 제대로 정립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마냥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작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마냥 글을 쓴다는 것만으로는 작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을 쓰고 싶다고 작가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책을 쓴 작가는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로 유명한 마거릿 애트우드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작가로서 세계에서 자신의 명성을 공고히 다진 인물이다. 예스에서 볼 수 있는 작가 소개에는...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소설가이자 시인, 에세이스트.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빼어난 작품 활동을 해왔다. 부커상을 두 차례 수상한 것을 비롯해 수많은 영예로운 상을 받았으며, 매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된다. 여러 작품들이 대중 독자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39년 11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태어나, 삼림곤충학을 연구하는 아버지를 따라 퀘벡 북부의 숲속과 도시를 오가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고등학생 시절이던 1956년 어느 날 문득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토론토대학에서 영문학 학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스물여섯 살에 첫 시집 『서클 게임』(1964)을 출간했으며, 이 시집으로 캐나다연방총독상을 받았다. 대표적인 소설 작품으로 『시녀 이야기』(1985), 『고양이 눈』(1988), 『도둑 신부』(1993), 『그레이스』(1996), 『오릭스와 크레이크』(2003), 『홍수의 해』(2009) 등이 있다. 2000년에 『눈먼 암살자』로 부커상을 받은 데 이어, 2019년에 『증언들』로 또다시 부커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 밖에 아서클라크상, 프란츠카프카상, 미국PEN협회평생공로상 등을 받았다.

 

이 책은 2000년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강의를 요청 받은 마거릿 애트우드가 글쓰기와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여섯번으로 나눠 강의를 했던 것을 정리해 출간한 것이다. 

[1강. 길찾기]에서는 작가란 무엇인지, 왜 마거릿 애트우드가 작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해서 작가가 된것이 아니다. 그저 어느날 우연히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책과 고독과 함께한 마거릿 애트우드는, 다양한 상상을 머릿속에 품고 살아왔다. 그것은 이야기로 바뀌고, 점차 글로 바뀌었다. 그것이 자연스레 작가가 되도록 그를 이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거릿 애트우드는 글쓰기는 글을 쓰는 평범한 활동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일기를 쓰는 것도 글을 쓰는 활동이다. 글을 쓰는 사람을 작가라고 부르지만, 일기를 쓰는 사람에게 작가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작가라는 이름에 사회적 인정과 무게감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사회적 인정을 받아야만, 사회에서 작가에게 강요하는 무게감을 견디는 사람만이 작가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을 긴 말로 풀어 이야기한다.

[2장. 이중성]에서는 글을 쓰는 작가의 정체성과 글을 쓰지 않는 작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중성이라 말한다. 두 정체성을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때론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작가와 독자가 글을 쓰고, 읽는 과정에서 현재와 다른 것의 시간이 확장된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나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가상의 인물과 현실)를 통해 새로운 시간을 얻는다고 볼 수도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3장. 헌신]에서는 글을 쓰는 것에서 예술성만을 좇을 것인지, 사회적 책임을 지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맞춰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때 나는 고민을 했다. 내가 책을 쓴다면, 모든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만의 언어로 독특한 이야기를 써서 예술의 정점을 찍는 글을 쓸 것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글을 쉬운 말로 쓸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4장. 유혹]에서는 작가가 가지는 글쓰기의 태도를 언급한다. 자신의 글을 읽게 만들기 위해 독자를 유혹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을수록, 작가에게 열광할수록 작가의 명성은 높아지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권력을 쥘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작가가 작품의 의미를 정할 수 있을까? 아무리 독자에게 달콤한 말과 글을 전하더라도, 글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는 작가가 스스로 부여할 수 없다. 그것은 독자가 스스로 글을 읽고 소화하면서 부여한다는 것을 언급하며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5장. 성찬식]에서는 작가와 독자, 책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한다. 작가는 글을 써서 책을 만들고, 독자를 책을 읽고 호불을 가지고, 또한 작가에 대한 비난과 열광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본질적인 것은, 작가가 글을 써서 책을 만드는 이유는 작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을 만드는 것은, 그것을 읽어주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글을 읽어주는 존재가 없다면 작가가 책을 쓸 이유는 자연스럽게 소멸되기 때문이다.

[6장. 하강]에서는 작가들이 본인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이전의 죽은 자들(그러니까 이전에 글을 썼던 작가들이나 인물들)을 연구하기 위해 현재에서 내려와 탐구를 하고, 다시 현재로 끌고나와 글을 써야함을 말한다. 현재 과거의 이야기를 비틀거나, 낯설게 만들어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이야기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총 6장에 나뉜 이 책은 작가의 존재이유와,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무게감을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지기를 원하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생각이 담겨있다. 솔직히 글을 쓴다는 것은 꽤나 고단한 작업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글을 수도없이 다듬고 다듬어야 하는 것이고. 글을 썼다고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힘든 과정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행위가 가지는 힘듦을 알 수 있게 만든다. 마냥 작가라는 직위가 가지는 낭만보다는, 현실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나는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원하는 예비 작가들이 한번쯤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쓰고 싶은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이 글을 쓴 후에 작가가 겪게되는 과정을 미리 경험하고 싶다면 읽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2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2 댓글 0

한줄평 (29건) 한줄평 이동

총 평점 9.7점 9.7 / 10.0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