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무이자, 기쁨이었습니다.
코로나 시국에 삶은 마스크로 제한되고 이전에 하고 싶었던 일들, 여행다니고 인스타에 사진 올리는 일 등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한되는 삶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우울하게 만들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삶의 의미를 되새겨 주는 책을 읽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자살을 시도하려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자살하려고 도시 외곽으로 나가기 위해서 택시를 타려는 데 택시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죽음을 앞둔 마당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고 합니다. 죽기 직전 돈을 아까워 하는 모습이 자살을 결심한 사람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삶 속에서 행복을 기대하는 인간의 자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답니다.
잠들어 꿈을 꾸었습니다.
삶은 기쁨인 듯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보았지요
삶은 의무였습니다.
나는 일했고 이제는 알아요
그 의무가 기쁨이었다는 것을
빅터 프랭클이 강연에서 인용한 타고르의 시입니다. 이 시에는 이번 강연에서 빅터 프랭클이 말하고자 한 것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삶은 의무이며, 그러므로 쉽게 포기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우리에게는 책임으로 다가옵니다. 그 책임은 무겁고 때로는 부담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삶에 있어서 '예'라고 대답하면서 삶의 그 의무가 기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던 빅터 프랭클은, 이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벗어나 다른 강연을 엮은 책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대답할 때>에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그가 겪은 경험담이어서 줄거리가 있었고 극한의 체험과 연관되어 쉽게 다가왔다면 이번 강연 이야기는 다소 추상적인 강연 내용이고 번역한 글이어서 조금은 어렵게 느껴집니다. 뭔가 다가오면서도 닿을 듯 말 듯한 느낌인데, 위의 타고르 시부터 천천히 읽어보면 전체적인 흐름이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빅터 플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극한의 삶을 체험해서인지 강연 곳곳에서는 삶을 포기하는 자살에 대해서 부정적인 면을 많이 보입니다. 물론 그런 체험 이전에도 자살은 좋은 것이 아니지요. 우리 인생의 핵심 과제는 내적으로 삶에 잘 자리 잡는 데 있고 자신의 내적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삶이란 의무를 지속하면서 이를 위해서 자신의 내적 능력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글쓴이가 경험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인간의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없었습니다. 고된 노동과 죽음이 함께 하는 시간속에서 근근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조금 후에 그나마 따뜻한 스프 한 그릇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겠지요. 이런 희망이 절대적인 것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희망없다는 것은 사람의 삶에 버팀목을 잃어버렸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글쓴이가 경험한 죽음의 수용소에는 수감자들이 정신적 버팀목을 잃어버렸을 때, 그에게 내적인 버팀목이 없어졌을 때 무너져내립니다. '우리에겐 흉악범조차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10년만 옥살이를 하면 되겠구나 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니까요'라고 말하는 빅터 플랭클의 말에서는 극한의 상황이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하게 만듭니다.
이런 삶속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요? 사람은 자기가 왜 사는지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인생은 의무입니다. 유일하고 커다란 책임입니다. 하지만 삶에는 기쁨도 존재합니다. 기쁨은 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 나타나야합니다. 행복은 결코 목표가 아니며 오직 결과일 따름입니다.
운명은 우리 인생의 일부이고,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불가피한 고통이 눈앞에 있을 때, 고통은 선택에 따라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p40
우리가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지낼까요? 우리가 아직 젊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여기에서 글쓴이는 죽음은 삶에 있어서 강요!가 된다고 말합니다. 당장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우리는 보람있고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나는 아직 젊고 나에게 남은 인생은 많다고 생각하면 삶의 시간을 조금은 느슨하게 보내겠죠. 여기에 글쓴이는 죽음이란 강요를 뜻하며 우리는 그 안에서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된다고 말해줍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고, 삶은 유한하고, 시간은 제한돼 있고, 우리의 가능성도 한정적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시도하고, 가능성을 활용하고 현실화하고 충족시키며, 기회를 이용하고 만족시키는 행위를 의미있게 만듭니다.
삶 자체는 질문받는 것, 대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삶의 현존을 책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이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기회입니다!
삶은 힘들수록 더욱 의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글쓴이는 극한의 삶을 살았던 경험 때문인지 힘들수록 더욱 의미가 있고 살아볼만 하다는 말을 종종 해줍니다. 넘사벽인 글쓴이의 경험은 책을 읽는 이들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부담일수도 있겠네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의미 충족에는 세 가지 주요 방향이 있습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하고, 행동하고, 창조하면서, 즉 무언가를 실현하면서 자신의 현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체험하면서, 자연과 예술과 인간을 사랑하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기회가 주어진 곳에서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현존재에 의미를 줄 수 있습니다.
극한의 수용소에서는 생존 그 자체가 의미였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우리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헛되이 날려서는 안되겠지요. 그래서 글쓴이는 우선 삶!에 예!라고 대답하며 당장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 놓인 기회를 확정하고 얼마나 운명적이고 필연적인지 생각하고, 불가피한 제약에 당당히 맞서며 어떻게 대응하고, 행동하고,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의 존재는 우리가 삶을 의무이자 기쁨으로 여기며 하루하루 내적 능력을 키워가며 행복의 결과를 위해 살아가는 데 있겠죠.
자신의 삶에, 모든 운명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대답으로 글쓴이는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삶에 '예'라고 말하는 것은 온갖 상황에도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온갖 상황에서 가능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고난과 죽음(첫번째 강의), 육체적 정신적 질병(두 번째 강의) 혹은 강제 수용소라는 운명으로 고통당했음(세 번째 강의)에도 삶에 '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강연을 통해 여러분에게 보여드렸습니다.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글쓴이가 경험한, 아무런 보람조차 희망도 없던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그 의미가 있었다고- 저는 생각하기 힘들겠지만- 말해줍니다. 글쓴이는 극한의 체험을 견디어 내고 삶에 고통받는 다른 이들을 위해 책을 쓰고 로고테라피라는 심리학의 한 분야를 이끌어냈으며 삶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삶의 고통이 나를 짓누를 지라도, 그럼에도 삶에 우리는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내적 능력을 향상시키고 삶의 의무를 기쁨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을 것이고 최소한 그 기회라도 잡을 수 있겠죠.
손에 닿을 듯 말 듯 조금은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타고르의 시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읽어나가고 글쓴이의 극한의 체험을 조금이나마 공감한다면, 우리 삶에 의미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가을 날 아침, 서늘한 바람에 햇살은 따뜻합니다. 베란다의 식물은 아직 살아있고 밖에는 차량 소리를 비롯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삶이 설령 지금 당장 불행할지라도, 우리는 살아있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고, 삶의 과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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