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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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모든 운명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대답

리뷰 총점 9.3 (2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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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 심리/정신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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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그러니까 삶에서 왜 라고 물어야 합니다.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m*****1 | 2020.10.18 리뷰제목
저자 빅터는 나치의 포로수용소에서 부모, 형, 아내를 잃고 그 자신도 여러 수용소를 떠돌다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책은 이런 이력의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강연한 내용 중 3편을 묶은 책이다.   참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불과 1년 전까지 나치의 포로수용소에서 죽음이 예비된 사람이 이렇듯 젊은이에게 강연을 할 수 있을까. 전쟁 후 생활을 위한 생존이었나, 아니라
리뷰제목

  저자 빅터는 나치의 포로수용소에서 부모, 형, 아내를 잃고 그 자신도 여러 수용소를 떠돌다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책은 이런 이력의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강연한 내용 중 3편을 묶은 책이다.

 

  참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불과 1년 전까지 나치의 포로수용소에서 죽음이 예비된 사람이 이렇듯 젊은이에게 강연을 할 수 있을까. 전쟁 후 생활을 위한 생존이었나, 아니라면 책 속의 그의 말처럼 전쟁을 겪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삶의 의지를 주고픈 각오였나. '외상후 스트레스'는 없었을까. 설마 없기나 했을까. 다만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그였기에 수용소에서도, 돌아왔어도 견디었다 생각한다. 실제 수용소 생활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가스실로 보내지지 않기 위해, 건강한 포로로 보이도록 관리했다한다.  다리를 절거나 무엇에 의하건 약해 보이면 선별되어 가스실로 보내지는..... 죽음 외엔 없었던 그곳에서 저자는 살아남았고 겪은 자로서 겪었거나 겪으며 내일을 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의 지금껏 삶은 그 나름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났고 이기고 지나오는 과정이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그것들은 당시는 자신을 힘들게 했었을 것이다. 그 고통의 실체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그 시기를 넘겼을 것이고 아니라면 고통이 준 치명적인 상처에 아파하고 상처가 드러난 생활을 하게 된다. 삶은 의무요 인생은 책임이다.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우리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기대를 하는 것. 삶이 주는 고통이 유의미한 고통이 되어야 하고 그 고통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일시적인 것과 무한한 것이 끊임없이 만나는 삶.

'좌절' '힘들다 '모른다' '관심 없다' '내 알 바 아니다' 는 수용소 같은 인생이요 삶이다. 책임은 끌려도 가겠지만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내 삶에 '예'라고 책임지고 '왜'라고 벗어나는 것. 나만의 미래에 '예'라고 하면서도 우리 사회의 미래에 '왜'라고 질문하는 것. 빅터는 내게 이것을 가르쳤다.

 

그럼에도 영광스러운 것, 미래, 곧 나만의 미래와 나를 둘러싼 일과 사람들의 미래가 매 순간 나의 선택에 달렸다는 걸 아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내가 내린 선택으로 실현한 것, '행동한' 것을 현실 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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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주간우수작 삶은, 의무이자, 기쁨이었습니다 평점8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c****g | 2020.10.31 리뷰제목
삶은, 의무이자, 기쁨이었습니다.코로나 시국에 삶은 마스크로 제한되고 이전에 하고 싶었던 일들,  여행다니고 인스타에 사진 올리는 일 등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한되는 삶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우울하게 만들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삶의 의미를 되새겨 주는 책을 읽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아닐
리뷰제목

삶은, 의무이자, 기쁨이었습니다.


코로나 시국에 삶은 마스크로 제한되고 이전에 하고 싶었던 일들,  여행다니고 인스타에 사진 올리는 일 등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한되는 삶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우울하게 만들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삶의 의미를 되새겨 주는 책을 읽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자살을 시도하려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자살하려고 도시 외곽으로 나가기 위해서 택시를 타려는 데 택시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죽음을 앞둔 마당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고 합니다. 죽기 직전 돈을 아까워 하는 모습이 자살을 결심한 사람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삶 속에서 행복을 기대하는 인간의 자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답니다.

 

잠들어 꿈을 꾸었습니다. 

삶은 기쁨인 듯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보았지요

삶은 의무였습니다.

나는 일했고 이제는 알아요

그 의무가 기쁨이었다는 것을

 

 

 

 

빅터 프랭클이 강연에서 인용한 타고르의 시입니다.  이 시에는 이번 강연에서 빅터 프랭클이 말하고자 한 것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삶은 의무이며, 그러므로 쉽게 포기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우리에게는 책임으로 다가옵니다. 그 책임은 무겁고 때로는 부담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삶에 있어서 '예'라고 대답하면서 삶의 그 의무가 기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던 빅터 프랭클은, 이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벗어나 다른 강연을 엮은 책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대답할 때>에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그가 겪은 경험담이어서 줄거리가 있었고 극한의 체험과 연관되어 쉽게 다가왔다면 이번 강연 이야기는 다소 추상적인 강연 내용이고 번역한 글이어서 조금은 어렵게 느껴집니다. 뭔가 다가오면서도 닿을 듯 말 듯한 느낌인데, 위의 타고르 시부터 천천히 읽어보면 전체적인 흐름이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빅터 플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극한의 삶을 체험해서인지 강연 곳곳에서는 삶을 포기하는 자살에 대해서 부정적인 면을 많이 보입니다. 물론 그런 체험 이전에도 자살은 좋은 것이 아니지요. 우리 인생의 핵심 과제는 내적으로 삶에 잘 자리 잡는 데 있고 자신의 내적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삶이란 의무를 지속하면서 이를 위해서 자신의 내적 능력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글쓴이가 경험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인간의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없었습니다. 고된 노동과 죽음이 함께 하는 시간속에서 근근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조금 후에 그나마 따뜻한 스프 한 그릇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겠지요. 이런 희망이 절대적인 것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희망없다는 것은 사람의 삶에 버팀목을 잃어버렸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글쓴이가 경험한 죽음의 수용소에는 수감자들이 정신적 버팀목을 잃어버렸을 때, 그에게 내적인 버팀목이 없어졌을 때 무너져내립니다. '우리에겐 흉악범조차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10년만 옥살이를 하면 되겠구나 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니까요'라고 말하는 빅터 플랭클의 말에서는 극한의 상황이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하게 만듭니다.

 

이런 삶속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요? 사람은 자기가 왜 사는지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인생은 의무입니다. 유일하고 커다란 책임입니다. 하지만 삶에는 기쁨도 존재합니다. 기쁨은 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 나타나야합니다. 행복은 결코 목표가 아니며 오직 결과일 따름입니다. 

운명은 우리 인생의 일부이고,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불가피한 고통이 눈앞에 있을 때, 고통은 선택에 따라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p40

 

우리가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지낼까요? 우리가 아직 젊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여기에서 글쓴이는 죽음은 삶에 있어서 강요!가 된다고 말합니다. 당장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우리는 보람있고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나는 아직 젊고 나에게 남은 인생은 많다고 생각하면 삶의 시간을 조금은 느슨하게 보내겠죠. 여기에 글쓴이는 죽음이란 강요를 뜻하며 우리는 그 안에서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된다고 말해줍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고, 삶은 유한하고, 시간은 제한돼 있고, 우리의 가능성도 한정적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시도하고, 가능성을 활용하고 현실화하고 충족시키며, 기회를 이용하고 만족시키는 행위를 의미있게 만듭니다.

 

삶 자체는 질문받는 것, 대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삶의 현존을 책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이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기회입니다! 

삶은 힘들수록 더욱 의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글쓴이는 극한의 삶을 살았던 경험 때문인지 힘들수록 더욱 의미가 있고 살아볼만 하다는 말을 종종 해줍니다. 넘사벽인 글쓴이의 경험은 책을 읽는 이들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부담일수도 있겠네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의미 충족에는 세 가지 주요 방향이 있습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하고, 행동하고, 창조하면서, 즉 무언가를 실현하면서 자신의 현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체험하면서, 자연과 예술과 인간을 사랑하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기회가 주어진 곳에서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현존재에 의미를 줄 수 있습니다. 

극한의 수용소에서는 생존 그 자체가 의미였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우리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헛되이 날려서는 안되겠지요. 그래서 글쓴이는 우선 삶!에 예!라고 대답하며 당장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 놓인 기회를 확정하고 얼마나 운명적이고 필연적인지 생각하고, 불가피한 제약에 당당히 맞서며 어떻게 대응하고, 행동하고,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의 존재는 우리가 삶을 의무이자 기쁨으로 여기며 하루하루 내적 능력을 키워가며 행복의 결과를 위해 살아가는 데 있겠죠.

 

 

자신의 삶에, 모든 운명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대답으로 글쓴이는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삶에 '예'라고 말하는 것은 온갖 상황에도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온갖 상황에서 가능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고난과 죽음(첫번째 강의), 육체적 정신적 질병(두 번째 강의) 혹은 강제 수용소라는 운명으로 고통당했음(세 번째 강의)에도 삶에 '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강연을 통해 여러분에게 보여드렸습니다.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글쓴이가 경험한, 아무런 보람조차 희망도 없던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그 의미가 있었다고- 저는 생각하기 힘들겠지만- 말해줍니다. 글쓴이는 극한의 체험을 견디어 내고 삶에 고통받는 다른 이들을 위해 책을 쓰고 로고테라피라는 심리학의 한 분야를 이끌어냈으며 삶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삶의 고통이 나를 짓누를 지라도, 그럼에도 삶에 우리는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내적 능력을 향상시키고 삶의 의무를 기쁨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을 것이고 최소한 그 기회라도 잡을 수 있겠죠.

 

손에 닿을 듯 말 듯 조금은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타고르의 시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읽어나가고 글쓴이의 극한의 체험을 조금이나마 공감한다면, 우리 삶에 의미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가을 날 아침, 서늘한 바람에 햇살은 따뜻합니다. 베란다의 식물은 아직 살아있고 밖에는 차량 소리를 비롯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삶이 설령 지금 당장 불행할지라도, 우리는 살아있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고, 삶의 과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capkhg/222137186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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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쉽지 않은 걸음을 옮겨야 할 때 더 들어 보아야 할 한마디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이달의 사락 k****t | 2020.10.24 리뷰제목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라는 본서는 빅터 프랭클씨의 로고테라피에 대한 세 번의 강연을 모은 강연집입니다. 이 책은 저에게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 이어 세 번째 접하는 빅터 프랭클씨의 저서였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그의 극한의 인생 역정과 로고테라피의 대략을 처음 대하는 저서였고 [삶의 의미를 찾
리뷰제목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라는 본서는 빅터 프랭클씨의 로고테라피에 대한 세 번의 강연을 모은 강연집입니다. 이 책은 저에게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 이어 세 번째 접하는 빅터 프랭클씨의 저서였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그의 극한의 인생 역정과 로고테라피의 대략을 처음 대하는 저서였고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로고테라피라는 그의 심리치료의 이론적 바탕을 깨우칠 수 있는 저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는 그의 로고테라피 이론에 바탕한 철학으로 일반 대중 또는 자살의 유혹을 느끼거나 질병의 고통이나 죽음을 앞두고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 번의 강연을 바탕으로 저술된 책입니다. 

 

그의 외침이 설득력 있는 것은 그가 실제 인류적 차원의 대재앙을 경험하고 살아남아 그로부터 깨달은 인생의 교훈을 전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가 한가한 삶을 살아온 한 사람으로 그저 사색의 결과만을 떠벌리고 있었다면 아무리 들어 볼 법하다 해도 그의 주장은 그럴싸한 훈계질 그 이상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사실 그의 로고테라피는 '그걸 누가 몰라서 그러겠나'하는 반감이 생기는 면도 있을 수 있고 다분히 그럴듯한 충고일뿐이라고 생각되는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설득력 있는 것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그의 인생의 한 여정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본서는 자살의 유혹을 느끼거나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어서 또는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작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그런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있을까요? 

 

그는 삶에 권태를 느낀다는 남녀 두 내담자의 실화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둘 다 '삶에 바라는 것이 더는 없어서'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불평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바라는 바가 없는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을 기다리는 무언가는 있었다고 하는군요. 남자에게는 학술적 저술이 여자에게는 멀리 외국에 살며 연락이 두절된 자녀가 그들을 필요로 했다고 합니다. 이 실례를 바탕으로 저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삶에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묻는 대신 "삶이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물을 수 있는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내 앞에 놓인 인생의 과제가 무엇인가하고 말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인생에게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이며 우리는  답변자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삶 자체는 질문 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우리 존재는 모두 인생에 대답하는 것, 책임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는 역설합니다. 더 나아가 이런 생각에서 보면 미래는 있건 없건 우리를 더는 놀라게 하지 못한다며 현재가  전부다, 현재야말로 끝없이 새로운 삶의 물음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로고테라피에서는 기본적인 이론의 바탕이지만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음을 압니다. 삶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에 대답하고 책임지는 존재다라는 데는 별다른 이의가 없지만 현재가 전부다라는 데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힘겨운 절망 앞에서 현재만을 바라본다면, 미래라는 희망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에 의지해 버티겠나 하는 의문이 이니까요. 사실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 언제 끝날지도 짐작 불가능한, 기한을 가늠할 수 없는 재앙이라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현실, 벗어나고픈 일상에서 의지 할 것이라고는 미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때에 미래가 곧 희망이 현실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빅터 프랭클씨가 현재가 전부다라고 말한 이유는 뭘까요? 

 

그가 그의 저서 마다 싣고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현실의 괴로움을 버티지 못하던 노인 한분이 환청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들리는 목소리에게 언제 전쟁이 끝나느냐 더 정확하게는 언제 자유의 몸이 되어 수용소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고 환청은 정확한 날짜를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렇게 희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짜가 다가오는 데도 강제 수용소에 갇혀 하루 한끼 스프 한모금으로 때우며 하루의 대부분을 버거운 노동을 해야 하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대우도 받지 못하면서 언제 가스실로 옮겨져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현실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 노인은 환청이 이야기 해준 날짜가 가까와오자 몸져 누웠고 해당 날짜의 바로 전날 상태가 악화되다가 당일이 되자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빅터 프랭클은 이 경험을 통해 섣부른 희망은 좌절과 함께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친 겁니다.

 

기쁨은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치 결과가 모습을 드러내듯, 스스로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에 행복은 결코 목표가 돼선 안되고, 될 수도 없고, 되지 못하며 오직 결과일 따름입니다.

 

 

이젠 그가 행복은 결과이지 목표일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를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이고 만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그이지만 그런 절대적인 운명에 내던져본 그이기에 그의 운명관은 참담할 정도로 무겁습니다. 

 

자기 운명에 저항하는 - 즉 실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에 저항하는 - 사람은 운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운명이란 바로 우리 삶의 일부이고, 그 어떤 운명적인 것도 완전체, 즉 현존재의 형태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절대 전체에서 혼자 뚝 떨어져 나올 수 없습니다. 

 

 

이토록 무거운 운명관을 지닌 그이지만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운명은 우리 인생의 일부이고,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부과된 것입니다. 그것은 매 순간의 과제입니다. 이로부터 삶은 힘들수록 더욱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생에는 의미가 있으며 그 생에서 무거운 운명이라는 과제가 주어진다해도 그 역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삶은 힘들수록 더욱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힘든 삶이라고 더 의미 있는 삶일 수 있을까요?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이 의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의미있자고 고통을 모두 떠안아야 할 필요는 무엇일까요? 게다가 모두가 고통을 이겨내거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고통이 뚫고 지나가 상처만으로 낭자해져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의미를 찾아라 그 지나간 고통을 잊고 다시 일어서는 게 의미다라고 해야 하는 걸까요? 

 

이쯤이면 로고테라피라는 것은 무의미하고 슬픈 생이라는 것의 실체에 의미를 덧입히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의미 부여를 하지 못하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기에 로고테라피가 나름의 역할은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자는 질병에서도 죽음에서도 의미의 상실만이 아니라 의미를 충족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강제 수용소에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생을 돌아보고 자존감을 느끼며 죽어간 한 여성의 예를 들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삶의 의미는 대부분 우리가 외적인 운명과 맞닥뜨렸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고, 더는 계획할 수 없거나 아예 처음부터 그것을 바꿀 수 없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씨의 로고테라피는 이해가 쉽습니다. 명쾌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녹녹치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의미있는 가르침인 것은 그럼에도 우리에게 의미 잃은 삶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일 겁니다.  

 

모든 개인의 일회성은 오히려 (유기체에 대한 각 세포의 기능적 의미와 유사하게) 더 중요한 전체, 즉 인간 공동체에 자신을 연관시키면서 가치의 의미를 보존합니다. 일회성은 일회성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를 위할 때만 비로소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씨는 우리가 보다 의미를 발견하기 쉬운 길도 제시합니다. 유한한 인생 한정된 개인이라는 데서 벗어나 전체를 위해 인간 공동체에 공헌하며 가치를 지니라고요. 의미는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발견되는 것이다라는 것이 로고테라피의 가르침입니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자신의 한계에만 짖눌려서 생을 한탄하기만 하기보다 보다 큰 전체를 위하여 생을 살아가겠다는 의미 부여도 무의미해져 버린 삶에 생동감을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른다고 여겨집니다.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삶에 바랄 것이 사라졌다" "이 고통에서 무슨 의미를 찾으라는 말이냐" 하는 의문을 갖게 되신 분들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삶의 의미를 찾아서] 그리고 본서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를 권해 드립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살아있는 순간까지 삶을, 운명을 감당해야 할 테니까요. 그 감당해야 하는 날들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더이상 살아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이 아닐테니까요. 그러니 의미를 찾을 길을 함께 걸어봅시다. 그 첫걸음이 어려울 때 빅터 프랭클씨의 조언들이 우리를 다독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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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평점10점 | t*****1 | 2020.08.30 리뷰제목
책상 앞 벽에 빅터 프랭클의 말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 우리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의 힘이 있다. 우리의 선택에 우리의 성장과 자유가 달려있다."(Between stimulus and response there is a space. In that space is our power to choose our response. In our response lies our growth and our freedom.)삶에 어떤 장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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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앞 벽에 빅터 프랭클의 말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 그 공간에 우리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의 힘이 있다. 우리의 선택에 우리의 성장과 자유가 달려있다."

(Between stimulus and response there is a space. In that space is our power to choose our response. In our response lies our growth and our freedom.)


삶에 어떤 장애물이 느껴질 때마다 이 문장을 기억하며 의도적으로 반응을 선택하려 하는데, 가끔, 그리고 요즘은 부쩍 빈도가 늘어서, ‘삶에 의미가 있을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진하게 올라올 때가 있다. 이런 물음에 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책,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를 읽고 싶었다.



2차 대전이 끝나 빅터 프랭클이 강제수용소를 나온 이듬해인 1946년에 시민대학에서 진행한 3번의 강연 원고가 실린 이 책은 내 책상 앞에 붙어 있는 인용문의 확장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선택하는데 있어서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 지, 우리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리고 고난과 죽음, 육체적·정신적 질병, 강제 수용소라는 극악한 상황에서 놀라운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실제 사례!를 보여준다.



학교 다닐 때는 예를 들어주면 그냥 듣고 흘려 듣는 경향이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구체적인 예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이 책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사례에 언급된 사람들을 대하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개별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모두 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말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불완전”하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의 질문에 답변하고 행동해나가며, 바로 그런 선택과 행동에서 그가 어떤 인간인지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 두 부분이 책의 내용을 잘 요약해주는 것 같아 공유해본다.



의미의 충족에는 세 가지 주요 방향이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먼저 인간은 뭔가를 하고, 행동하고, 창조하면서, 즉 무언가를 실현하면서 자신의 현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체험하면서, 자연과 예술과 인간을 사랑하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기회가 주어진 곳에서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현존재에 의미를 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앞에 놓인 기회를 확정하고, 얼마나 운명적이고 필연적인지 생각하고, 불가피한 제약에 당당히 맞서며 어떻게 대응하고, 행동하고,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은 사는 동안 그때그때 ‘순간의 요구’에 부응하고, 의미를 충족시키는 방향을 종종 뜻하지 않게 변경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삶의 의미는 오직 구체적인 것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이라 함은 모든 개별적 인간뿐 아니라 개별적 순간과도 관련돼 있습니다. 즉 삶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각 개인과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61



… “내가 삶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묻는 대신 “삶이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물을 수 있는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내 앞에 놓인 인생의 과제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생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 잘못됐다는 것도 압니다흔히들 질문받는 것처럼 질문한다면 말이죠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없고 인생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답변자일 뿐입니다우리는 대답해야 하는 자입니다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물음, ‘생사의 문제’에 답해야 하는 존재입니다삶 자체는 질문을 받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닙니다우리 존재는 모두 인생에 대답하는 것책임지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닙니다이런 생각에서 보면 미래는 있건 없건 우리를 더는 놀라게 하지 못합니다현재가 전부이고현재야말로 끝없이 새로운 삶의 물음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모든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하지만 무엇이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알 필요는 없습니다또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도 마찬가지입니다...

32-33



어제 책을 다 읽고 잠을 잤는데 새벽에 꿈을 꿨다. 낯선 도시의 커다란 교차로에서 방향을 잃어 잠시 당황하다가 유명한 호텔 건물을 발견하고는 저 곳을 기준으로 지도 앱이라도 활용해서 검색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서평을 쓰면서 책을 다시 보니 띠지를 벗긴 책 표지의 나침반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래?’라는 삶의 물음이 들리는 것 같을 때 이 책을 읽는 것이 구체적인 나의 답변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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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삶의 태도이다. 평점10점 | YES마니아 : 골드 e******o | 2020.10.31 리뷰제목
마지막 잎새여, 조금만 더 버텨보기를!  곳곳에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고 있다. 뉴스에선 코로나 블루로 사회적 고립감을 느낀 20대의 젊은 여성들의 자살이 급증했다고 한다. 실업과 우울감으로 더 이상 삶을 살아갈 의미를 찾지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굳이 죽음을 앞당기지 않아도 죽음은 우리를 찾아온다. 그러니 조금 만 더 버텨보는 것은 어떨까. 죽을 만큼
리뷰제목

 

마지막 잎새여, 조금만 더 버텨보기를!


 

 곳곳에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고 있다. 뉴스에선 코로나 블루로 사회적 고립감을 느낀 20대의 젊은 여성들의 자살이 급증했다고 한다. 실업과 우울감으로 더 이상 삶을 살아갈 의미를 찾지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굳이 죽음을 앞당기지 않아도 죽음은 우리를 찾아온다. 그러니 조금 만 더 버텨보는 것은 어떨까. 죽을 만큼 힘들지만, 죽는 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조금 만 더 힘을 내보면 어떨까. 그러다 보면 문득 살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죽기 진전 돈을 아까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자살을 결심한 사람에겐 무의미해 보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삶 속에서 행복을 기대하는 이간의 이러한 자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책 30페이지

 

만약 당신이 살아갈 삶의 가치를 찾지 못해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더라도, 주어진 삶에 '예'라고 대답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 한 명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그는 아마 당신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모두에겐 -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코페르니쿠스적' - 전환환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180도 바뀐 생각의 생각의 전환, 더는 "내가 삶에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묻는 대신 "삶이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물을 수 있는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내 앞에 인생의 과제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없고 - 인새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 답변자일 뿐입니다! 책 32페이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일이다.


 

동물 중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종이 있을까? 아마 인간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자살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인간적인 가치를 포기하는 행동 자체가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이 우리를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다. 버거운 고통가운데서도 인내하며 삶을 살아내려는 의지야말로 인간의 존엄과 위대함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죽음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돌아온 정신의학자 빅터 플랭클은 불가피하기 맞이한 고통도 우리의 선택에 따라 의미있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상황에 압도되어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행동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

 

그는 생명을 저버리면서 해결할 수 없다고 여긴 인생의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인생의 게임 규칙을 어겼다는 것을 자살한 사람은 모릅니다. 그것으로 인생의 게임 규칙을 어겼다는 것을 자살한 사람은 모릅니다...이 게임 규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이기라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것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책 43페이지

 

 

 

 

 

지금, 삶이 내게 바라는 것에 책임을 져라.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몸뚱이만 남은 상태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생산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절락했다.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는 인간은 바로 가스실로 보내졌다. 수감자들의 생각은 따뜻한 수프를 마음껏 먹는 일차적인 욕구로 가득차 있었다.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은 그곳에서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단지 배고픔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 행복해지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자각했다.

 

행복한 미래 속에 자신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다. 감옥에서 그는 따뜻한 수프를 꿈꾸는 대신 많은 대중 앞에서 강연하는 자신을 그려보았다고 한다. 누군가는 살아남아 수용소의 경험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할 것인가?

하지만 나만을 위해 한다면 나란 사람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할 것인가?

책 50페이지

 

수감되기전 정신과의사였던 그는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을 분석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고민했다. 의료적 사제(프랭클이 목사나 사제가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듯이 의사도 그런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만든 개념)로서의 과제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 임했다.

 

 

 

 

고통이 삶의 의미가 되는 태도를 선택하라


 

프랭클은 수용소에서의 체험 뿐 아니라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을 만나면서, 질병(고통)이 곧 (삶의)의미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자주 목도했다. 질병을 통해 오히려 의미의 획득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프랭클은 자신의 죽음을 죽으려 선택했던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던 수감자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병원에서도 만났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사람들을 아끼고 배려, 마지막 순간에 드러난 소박하고 인간적인 업적'을 남기는 환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죽기전까지 가족이나 주변인들에게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 노력했다.

 

삶 전체에 죽음을 의미 있게 삽입하는 것, 죽어 가면서도 인생의 의미를 충족하는 것, 그것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삶의 전체 의미 안에서 죽음의 유의미성을 그대로 보도고 시각을 전환함으로써, 병들고 죽어 가는 순간도 단순히 잃는 것과 얻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데 더 이상 놀라지 않습니다. 책 66페이지

 

우리는 때로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신의 실존이 얼마나 무의미했는지 깨닫는다. 그런 깨달음은 우리를 절망가운데 내던지기도 하지만, 삶의 본질을 바로 보게 만들기도 한다. 마지막순간에 가까울수록 진짜 중요한 것을 보는 눈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마지막,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 일상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행복한 미소를 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각하게 된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생의 의지와 살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질병과 죽음이 본질적인 것을 가려낼 수 있는 눈을 허락하고, 삶의 의미를 획득하게 만드는 순간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생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다. 그러한 생의 의지는 아무리 그 환자가 질병의 한 복판에 서있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고유한 권리이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생산 도구로 전락한 수감자일지라도, '질병, 불치병, 어떤 치료 불가능한 정신병 앓고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살 권리를 내어줄 수는 없는 것이라 말한다. 자신의 죽음을 죽을 권리를 그 누구도 앗아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환자에게 스스로 자신의 삶에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 말로 죽음을 앞 둔 환자 앞에서 할 의사의 역할이다.

 

무의미와 의미의 차이는 오직 인간에 의해서 결정된다. 책 108 페이지

 

프랭클이 수용소에 처음 들어가서 만난 선배가 막 들어온 신입 수감자들에게 해준 중요한 조언이 하나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모를 깔끔하게 유지하며, 일할 수 있다는 인상을 남기도로고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선배의 조언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면서, 그들은 최대한 보초병의 눈에 띄지 않길 바랬으며 집단 속에 자신을 철저히 숨기려 했다. 수감자들이 머리는 이전의 삶에서 누렸던 1차적 욕구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무감각과 흥분 상태를 오가며 우리가 떠올리는 전형적인 강제 수용소의 수감자들이 되었고, 정신분석학자들은 그들이 내적으로 퇴행하였다고 보았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은 수감자들은 절대 외적인 강요를 받은 적이 없이 스스로 그런 입장을 취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수용소의 힘과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을 멀리하기로 결정하고, 무감정과 흥분을 억제하려는 자유의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다른 수감자들과 달리 내적 퇴행이 아니라 내적 진보를 이루어냈으며, 진정한 인간의 위대함에 이르도록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자신도 바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느 누구도 수감자로부터 내적 능력, 본래 인간의 자유까지 빼앗을 순 없었습니다. 비록 그 밖의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수용소에서 빼앗을 수 있었고 실제로도 빼앗같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책 99페이지

 

우리가 당한 고통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 않고 내적으로 진보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드는 것은 철저히 우리의 몫이다. 프랭클은 무의미한 고통과 의미있는 고통의 차이는 오직 인간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최후의 의미에 대한, 존재의 초의미에 대한 믿음을 선택할 때, 그 믿음은 모든 믿음이 그러하듯 창조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말입니다...믿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실현합니다!..생각의 가능성 하나를 붙잡는 것은 단순히 생각의 가능성을 붙잡는 것 이상이라는걸 말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생각의 가능성 하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책 87페이지

 

 

 

 

그럼에도 우리는 삶에 '예'라고 말하려 하네


 

우리는 늘 주어진 각자의 일상 속에 살아간다. 그 일상을 현존하며 살아가기 위해 의식적으로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을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이 나에게 부과한 책임에 최선을 다하려 할 때 느끼는 기쁨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인도한다고 프랭클은 말한다.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를 거의 모두 견디어낸다. 책 103페이지

 

죽음과 질병, 운명으로붙터 벗어나고 회피하고 싶지만 다음 순간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모든 것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어디서 나오는 지 아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치 친위대가 강요한 죽음이 아닌 우리의 죽음을 죽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과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러한 과제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어떤 요청에 의한 책임입니까? 누가 다른 사람을 대변해서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까요? 이 마지막 질문은 누구가 스스로 마지막 순간에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책 105페이지

 

이것이 제 모든 강연의 최종적인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세 강연을 통해 여러분에게 보여드렸습니다. 인간은 그럼에도 - 이 모든 것에도, 고난과 죽음(첫 번째 강의), 육체적, 정신적 질병(두 번째 강의) 혹은 강제 수용소라는 운명으로 고통당했음(마지막 세 번째 강의)에도 - 삶에 '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책 116페이지 

 

 

 * 빅터 프랭클의 책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대답할 때】 은 그가 1946년 3,4월에 걸쳐 오스트리아 빈 노동자 주가 지역인 오타크링 시민 대학에서 강연할 때 사용한 원고들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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