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문구만으로도 꼭 읽어야 할 소설이 아니겠는가. 이미 유명을 달리했으니 그의 새로운 소설을 이제 읽을 수 없다는 건데. 움베르토 에코를 사랑하는 독자들이 꼭 읽어야 할 소설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글을 제대로 읽은 게 겨우 두세 권의 소설이다. 다채로운 경력답게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 소설인 『제0호』 또한 어렵지 않을까 염려 되었던 게 사실이다.
소설은 그저그런 직업을 거쳐온 중년의 콜론나가 창간을 앞둔 신문사 주필의 한 저널리스트의 회상록을 대신해 쓰는 일을 맡는다. 그들이 창간하기로 한 신문은 <도마니>라는 이름으로 창간하기로 해놓고 끝내 창간되지 않을 신문이다. 신문을 내기 위해 1년 동안 준비하면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 책을 쓰면 된다.
신문을 창간하기로 한 시메이 주필은 기자 여섯 명을 불러 모으고 그들은 창간되지 않을 신문을 발간하기로 한다. 일례로 아무리 폭탄을 던진 적이 없다 해도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제0호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콜론나는 기자들이 쓴 기사들을 검토하는 역할 즉 데스크를 맡는다.
소설은 상당히 풍자적이다. 발간하지도 않을 신문 기사에 반박을 하는 독자들이 진짜로 나타날 날에 대비해 독자들이 보낸 편지들을 지어내고 기자들이 다시 반박하는 등의 연습을 하는 편집 회의를 한다. 코미디가 따로 없는 장면이 아닌가.
저널리즘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글이었다. 만약 어떤 한 뉴스가 보도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기사다. 그런 기사를 덮기 위해서는 새로운 뉴스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사람들의 이목을 확실하게 끌만한 충격적인 것을 터트리는 식이다.
수많은 정치인들과 저널리스트들이 자주 해온 패턴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그러지 않았나. 어느 기업에 해가 될만한 기사가 나왔을 때 그걸 덮기 위해 한 연예인의 스캔들을 내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들은 새로 발표된 스캔들에 눈을 돌려 떠들기 시작하고 그들이 숨기고자했던 뉴스는 조용히 덮인다.
신문들은 뉴스를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뉴스를 덮어서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 (250페이지)
에코가 무솔리니의 죽음과 죽은 무솔리니가 가짜라는 사실을 왜 나타냈는가이다. 감추기 급급한 사실을 또다른 뉴스로 눈가림을 해 그들의 치부를 숨기고자 했다. 하나의 가설을 세워 사건을 조사하던 기자의 죽음이 가져온 파장은 컸다. 그들을 추구하고자 했던 기간에서 충분히 일렀으니까. 음모론과 함께 저널리즘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종종 뉴스에서 말하는 모든 것들이 진실인가 의문스러워한다. 묻히고 묻히는 기사들 속에서 진실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물론 사실을 말하는 뉴스지만 종종 감추어지니 일반 시민들은 눈가리고 아웅식에 넘어가고 만다. 에코는 이런 것들을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나의 가설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기사이며 파장을 불러올 기사들은 종종 수면 아래로 조용히 묻혀버린다는 것을.
체포되어 공개 처형된 무솔리니가 대역이었다는 근거는 콜론나가 보기에도 독자가 보기에도 허술하기 짝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는 점, 당대 사람들이 무솔리니의 얼굴을 잘 몰랐다는 점, 1주일만에 수척했던 무솔리니가 퉁퉁하게 살이 올라있었다는 점 등을 기반으로 한 추측성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몇가지 모순까지 존재하기에 브라가도초는 만일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디에 있었겠는가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거대한 역사의 음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가짜와 진짜가 교묘하게 섞어서 짜맞추면 누군가에게 무언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내일 창간되지 않을 창간 준비호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음모론에 빠진 브라가도초가 진실의 실 조각들을 모아서 짜낸 스토리 어딘가에는 누군가를 두렵게 하는 무서운 진실이 숨어있었다.
그 모든 뉴스는 오래전부터 유포되고 있었어. 다만 집단의 기억에서 뉴스들이 지워졌던 거야. 모자이크의 조각들을 한데 모으려면 기록보관소나 자료실에 가면 돼...마치 새로운 폭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이전 뉴스를 지워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모든 것을 끌어내 다시 죽 늘어놓기만 하면 돼. 브라가도초가 바로 그 일을 했고, BBC도 그 일을 한 거야. 재료를 혼합해서 저마다 칵테일을 만들었어. 그래서 우리 앞에 두 잔의 완벽한 칵테일이 있어.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어.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철학가이자 소설가,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의 글은 흥미로우면서 이야기 이외의 요소에 더욱 눈길이 가는 경우가 많다. [장미의 이름]은 한 수도원에서 발생한 의문의 사건들을 조사하는 것이 이야기의 주요 맥락이지만, 그 사건을 파헤치면서 오히려 중세의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오히려 더욱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채로운 이력과 더불어 스스로 수많은 책을 읽고 보유한 장서가답게 에코의 작품에는 방대한 지식과 그 지식을 바탕으로 새롭게 탄생된 이야기들이 가득하기에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마다 그가 고안한 문체와 더불어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서 때론 어렵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제0호]는 어렵지 않게 에코의 많은 부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내일'이라는 의미를 가진 신문 '도마니'를 창간하기 위하여 그 준비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제0호]는 독자들이 어렵지 않게 에코가 오늘날 언론의 그릇된 행태를 꼬집고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도마니'라는 신문 자체가 구독자에게 뉴스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유력자가 특정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하여 창간 준비를 하고 있으니 애초부터 이 신문은 제대로 창간될 수 밖에 없음을 내포하고 있던 것이다. 주필인 시메이 스스로 콜론나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자신의 목적이 '도마니'의 창간이 아닌 신문을 내기 위해 1년 동안 준비하면서 겪은 일을 한 저널리스트의 회상록 형식으로 책을 내기 위함을 밝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작품이 오늘날의 언론에 대한 풍자가 주요 내용임을 예상할 수 있게 된다.
"협박이라는 말은 쓰지 마세요. 우리는 뉴스를 싣습니다. [뉴욕 타임스]가 말하듯이, 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 를..."
- p. 38 中에서 -
'도마니'의 창간 목적이 특정 세력에 대한 협박 수단이라고 반문하는 콜론나에 대한 주필 시메이의 이 짧은 주의는 [제0호]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협박'과 '뉴스'가 전혀 상반된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실제 두 단어가 오히려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 대사로 하여금 에코는 뉴스가 본질을 잃고, 오히려 협박의 수단으로 전락하였음을 반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역시 언론의 행태에서 이러한 모습을 자주 목격하고 있기에 어렵지 않게 에코의 글에 공감하게 된다.
실제 이탈리아에서 총리를 지냈던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제0호]의 곳곳에서 등장한다. 베를루스코니 역시 언론사를 소유한 기업인이었기에 '도마니'의 후원자가 베를루스코니를 모델로 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도 있다. '내일을 알려면 어제를 보라'라는 취지를 내세우면서 신문 창간 과정을 통하여 언론의 행태를 샅샅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자신들의 신문이 진짜 창간될 것이라고 믿는 마이아를 비롯한 기자들은 시메이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모여서 취재할 내용을 선정하고, 그것을 기사로 쓰는 과정에 대한 표현을 검토하는 부분들은 실제 신문 창간 준비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메이가 주도하는 방식은 이내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의 표현을 인용하여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든지 구독자의 수준이 높지 않다라는 점을 강조하여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목적이라는 이유로 저급한 표현을 마다하지 않는 시메이의 방식에 대하여 마이아는 반론을 제기한다. 이러한 마이아의 반론은 분명 언론의 정상적인 방향 제시이지만, 오히려 그녀가 시메이로부터 철저히 무시되고 심지어 동료 기자인 브라가노초로부터 자폐아라는 핀잔을 듣게 된다. 인물들간의 갈등으로 보이는 이 대목은 원래 언론의 목적을 뒤로하고 그릇된 흐름을 보여주는 행태에 대한 상징처럼 느껴지게 된다. 비단 이러한 것이 에코를 둘러싼 이탈리아의 언론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어렵지 않게 공감하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에코는 무솔리니에 대한 음모론을 브라가노초의 입을 빌려 이야기함으로써 또 다른 흥미를 제공한다. 히틀러에 대한 음모론과 마찬가지로 실제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로마 교황청의 도움으로 은신처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었으며, 전후 이탈리아의 우익 세력과 연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브라가노초는 이 부분을 비밀리에 취재하고 있음을 콜론나에게 털어 놓는데, 이는 언론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비판이 가득한 상황을 묘한 긴장감으로 바꿔놓는다. 애초부터 이 작품이 콜론나가 자신의 집에 누군가가 침입했던 흔적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이러한 긴장감은 이미 예고가 되어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에코의 음모론은 댄 브라운의 그것과는 달리 느껴진다. 그의 음모론은 음모론 그 자체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의 음모가 주요 쟁점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당시 중세의 상황과 분위기를 상세히 전달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제0호]의 무솔리니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음모론 역시 긴장감 제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후 이탈리아의 혼란스러운 정치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무솔리니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가 이탈리아의 '글라디오'와 같은 우파와의 연계설이라든지 이를 지원한 미국의 CIA, 우파와 좌파의 대립에 대한 이야기는 무솔리니라는 변수를 제거해도 실제 이탈리아의 현대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0호]는 에코 스스로 술회한 것처럼 독자들에게 지금까지 그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것들을 압축하여 좀 더 이해하기 쉽게끔 보여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중략) 그래도 그의 얼굴은 미국 영화배우 텔리 사발라스, 특히 형사 코작으로 연기했던 사발라스의 얼굴이었다. 이런, 한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다른 인물을 끌어다 쓰는 나의 이 인유법은 도통 버릴 수가 없다.
- p. 51 中에서 -
콜론나의 입을 빌어서 에코는 자신의 작품에서 인물들을 묘사하는 인유법에 대하여 직접 인용하고 있는 이 부분만 본다면 그는 [제0호]를 통하여 그간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것들을 압축하여 드러내고 있다라고 느껴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정말로 이 작품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을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언론에 대한 풍자와 비판, 그리고, 무솔리니의 생존에 대한 음모론으로 [제0호]를 기억할 수 있겠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으로 인하여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을 쓰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을 떠올려 본다면 [제0호]는 이야기 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음을 짐작케 된다. 마지막으로 좀 더 쉽고 명확하게 자신의 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제0호]는 이렇게 이야기 자체로 또는 이야기 너머에 대한 생각으로 음미할 수 있기에 에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남의 작품을 인용하는 나쁜 버릇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쓰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 p.28
리뷰를 쓰기 위해 다른 분들의 리뷰를 몰래 훔쳐보기 시작한다. 나는 분명 불성실한 독자임에 틀림없다. 다 읽고 나서도 내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리뷰를 보고서야 아, 이런 내용이었구나 하고 깨닫다니. 그러니까 이 소설, 신문창간을 준비하는 소설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 신문창간을 하지 않기 위해 신문창간을 준비한다는...뭐 그런 소설이었다구?
신사인 척하지 마, 콜론나, 자네가 어떻게 하는지 내가 지켜봤거든. 자네는 남들이 눈치재지 않게 그녀를 홀깃거렸어. 내 생각을 말하자면, 그 여자는 유혹에 응할 것 같아. 사실 여자들은 모두가 유혹을 마다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여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거야. 내 취향에 비춰 보면, 그 여자는 너무 말랐어. 가슴도 없고.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괜찮은 것 같기는 하던걸.
- p.51
왜 하필이면이런 문장을 발췌한 거냐구? 이렇게 보니까, 신문창간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그 취지에 공감이 가지 않아? 사실인지 아닌지보다는 이슈 그 자체에 매달리는 언론이라면, 정말 믿으면 안 될 것 같지 않나? 진실이라는 것은 먼 곳에서 헤매고 있는데,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이 언론의 세태. 지금도 많이 행해지고 있는 걸. 거기에 넘어가곤 하는 우리들이 참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 그리고 누군가는 우리를 비웃곤 하겠지. 겨우 그 정도에 넘어가냐고!
「왜 우리손가락이 열 개일까? 왜냐하면 만약 손가락이 여섯 개라면 십계명이 6계명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도둑질을 할 수도 있고 거짓 증언을 할 수도 있고 남의 아내나 남의 재산을 탐낼 수도 있게 되니까. 왜 신은 더없이 완전한 존재일까? 왜냐하면 만약 신이 더없이 불완전하다면 바로 내 사촌 구스타보 같을 테니까.」
나도 놀이에 동참했다. 「왜 위스키는 스코틀랜드에서 발명되었을까? 왜냐하면 만약 일본에서 발명되었다면 쌀로 빚은 맑은 술이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위스키에 소다수를 섞은 하이볼을 마실 수 없으니까. 왜 바다는 저리도 넓을까? 왜냐하면 세상에 물고기가 너무 많아서 그란 산 베르나르도 같은 좁다란 산중 호수에 그것들을 다 모아 둘 수 없으니까. 왜 암탉은 150번 우는 걸까? 왜냐하면 프리메이슨의 등급 수가 33이라고 해서 33회를 울었다가는 프리메이슨의 그랜드 마스터가 될지도 모르니까.」
- pp.98`~99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신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왜라는 질문을 해야 하지. 그렇지. 그리고 거기에 대한 답도 해야 하지. 그 답을 위한 놀이를 하는 부분. 그 놀이에는 "진실성"이 포함되어 있다. 웃기긴 하지만, 의미도 있고, 공감도 되는 놀이들.
언뜻 보기에는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속임수일 수도 있어요.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나서 이제 손을 씻었으니 벌하지 말고 덮어 달라는 말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 P.147
용서를 할 때 주의할 점은 그 사람이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지 안 비는지에 대해서는 용서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겉으로만 봐서 느껴지는 모습은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용서를 할 때는 조건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면역이 되어 있어. 누가 새로운 이야기라면서 우리에게 뭔가를 들려주기도 하지. 그러면 우리는 그보다 더 나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해. 그러고는 듣고 보니 그 얘기는 가짜일 거라고 덧붙이지. 미국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그리고 유럽의 반을 차지하는 나라들의 정보기관이며 우리 정부며 신문들이 거짓말을 했다면, BBC 역시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 괜찮은 시민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뭐가 중요할까? 진짜 중요한 문제는 딱 하나야. 세금이 더럽게 쓰이지 않도록 아예 내지 않는 거라고, 위에서 명령하며 사는 사람들은 저희끼리 알아서 잘 살아. 저희가 원하는 대로 살고, 어떤 식으로든 저희 뱃속을 채워지. 아멘. 보다시피 시메이하고 두 달 동안이나 일했더니 얻은 게 있어. 나도 남들처럼 영악해졌잖아.
- PP.312~313
취재를 할 때는 누군가에게 새로운 얘기를 듣겠지. 문제는 그 얘기에 얼마만큼의 신빙성이 있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의 이야기도 방송의 이야기도 전부 다 믿을 수는 없다. 매일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에서 매일 바쁘게 찍어내는 신문과 방송들은 그렇기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라도 하듯이, 『제0호』는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그 죽음이 의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0호』에서 신문은 결코 창간되어서는 안되는 무의미하면서 유의미한 존재다.
마이아는 나에게 다시 마음의 평화를 주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되살려 주었다. 적어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고요하게 불신하도록 만들어 준 것은 분명하다. 삶은 견딜 만하다.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면 된다. 스칼렛 오하라가 말한 대로- 남의 말을 인용하는 버릇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나도 알지만, 나는 1인칭으로 말하는 것을 포기했고, 이제 남들이 말하라독 그냥 내버려두고자 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
산 줄리오섬은 햇살에 다시 빛날 것이다.
- P.318
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 이게 여기 나오는 문징이었나? 가끔은 헷갈리기도 한다. 이거 누군가가 번역오류한 거였다는 말도 있던데. 번역오류건, 실제 작가가 쓴 문장이건, 중요한 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때에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라며 희망을 갖는 것. 그 희망스런 삶에 오늘 잠깐 나를 묻어본다.
『제0호』는 내 소설들 가운데 학식을 가장 적게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이전 소설들이 말러의 교향곡들이라면, 이 소설은 재즈에 가깝죠.
- P.327 <옮긴이의 말> 중에서.
Oh, My Gosh! 제일 쉬운 소설이라고? 희망스런 삶에 잠깐 나를 묻어본 뒤에, 다시 소설의 발자취를 뒤돌아본다. 너무너무너너무. 길고 긴 0호였다. 아무것도 창간되지 않아도 그 의미를 깊게깊게 새겨본 나만의 훔쳐보기. 난, 글쓰기를 그만두지 않기로 또 한번 결정했다. 움베르트 에코는 떠났지만, 소설은 나의 마음에 남아 미래의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제0호』는 창간되지 못했기에 가질 수 있는 우리의 희망이다.
이 리뷰는 리뷰어클럽을 통해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샤덴프로이데> . 즉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죠. 모름지기 신문은 그런 감정을 존중하고 북돋워야 해요. -p218
우리는 수많은 음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의 일대기는 더욱 흥미롭고 신비한 이야기들이 많다. 세월호의 실소유주 유병언의 시체는 사실 대역이라는 의문으로 시작하여 광해군 역시도 대역일 것이라는 상상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듯이 한 번쯤은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의혹과 음모로 느껴질 때가 많다. 뇌가 넘치도록 끊임없이 정보를 주입해야 하는데다 가짜 뉴스를 만들기 쉬워진 인터넷 환경에서 진실과 거짓을 걸러줄 수 있는 필터기능의 언론이 필요한 세상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제0호』 의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대필 작가 콜론나는 글 쓰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이름이 아닌 타인의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하고 번역 일을 통해 입에 풀칠만 하고 산다. 그가 능력이 있으면서도 ‘대필 작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독일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어 번역일 때문에 학사학위를 받지 못하였고 그 덕에 그는 평생을 대필 작가로 먹고 살아야 했다는 설명이 있다. 추리소설을 써달라는 이에게 자신의 문체로 타인의 이름을 빌어 소설을 발표한다. (타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소설의 문체가 자신의 문체임을 볼 때마다 콜론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런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시메이 주필은 <한 저널리스트의 회상록>이라는 책을 집필해 달라고 한다. 물론 시메이의 이름으로. 그렇게 6명의 기자와 한 팀이 되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하는데 어느 날, 무솔리니의 죽음을 추적하던 브라가도초가 살해당하면서 책집필은 취소된다. 브라가도초가 말하고 싶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은 주역이었던 이들을 조역으로, 조역이었던 이들을 주역으로 내세우며 왜곡된 현실을 비춘다. 대필 작가로 살았던 이의 삶, 무솔리니의 대역으로 살았던 이의 삶, 세계 뉴스의 헤드라인만 뽑아서 고치는 형태로 쓰는 신문기자들의 삶은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처럼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부차적인 삶들이다. 그렇게 소설은 세 가지의 왜곡된 이들의 삶에서 권력 이데올로기에 지배받는 허상의 메커니즘을 그린다. 첫 번째 왜곡은 대필 작가로 50년을 살아온 작가의 삶이다. 두 번째 왜곡은 로마의 부활을 꿈꾸었으나 히틀러와 손잡고 잔인한 독재자였던 무솔리니의 최후이다. 카톨릭의 나라에서 교황청의 막강한 권력배경으로 무솔리니의 대역이 존재했으며 광장에서 총살당하는 그 순간의 무솔리니는 대역이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왜곡은 창간하지 않을 신문을 만드는 신문기자들이다. 이 세 가지의 왜곡을 통해 에코는 실질과 다른 허상이 지배하는 현실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혜경궁 김씨가 이재명 부인이라는 뉴스가 언론사마다 보도가 된다. 온라인에서 설왕설래하며 치열한 댓글싸움을 보기도 하였고, 뉴스를 거짓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온통 음모투성이인 것만 같다. 이재명에게도 무솔리니 같은 대역이 있거나, 소설의 주인공처럼 글을 대신 해주는 사람이 존재했던 것일까? 어쨌거나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어느 날 갑자기 유병언이 살아있다는 속보가 터지고 내 남편이 사실 여자였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 만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느끼게 할, 허구속의 현실이라는 묘한 오버랩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더라? 그래, 진리란 그런 거야. 사람들이 무언가를 더 폭로하면 다 거짓말처럼 보이게 하지.-p311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