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경우
이 책은
이 책 『너의 경우』는 소설이다. 단편 소설집.
저자는 이미란, <1983년 광주일보와 1985년 서울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1997년 광주문학상, 2009년 광주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문예창작론과 작가론을 강의하고 있으며, 글쓰기 치유와 관련된 연구와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이 책에는 표제작인 「너의 경우」를 비롯하여 모두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당신 」,
「너의 경우」,
「일박 이일」,
「진실」,
「거짓말」
이 소설들의 특징은
그런데 이 소설들에서는 다른 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화자가 ‘너/당신’에게 말하는 형식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인칭 소설이다.
대개의 경우, 소설은 객관적인 시점에서 전지적 관점으로 말하는 화자가 등장하거나. 일인칭 시점에서 서술하는 형태의 1인칭 소설은 많이 볼 수 있는데 비하여 2인칭에게 말하는 형식의 소설은 드물다. 거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5편의 소설, 모두다 2인칭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형식 면에서
이 다섯 편의 소설, 어떻게 서술되는지 살펴보자.
「당신 」
화자(話者)는 ‘당신’이라 불리는 사람의 부인이다.
그러니 ‘당신’은 남성, 화자는 여성이다.
그 화자는 ‘나’라는 일인칭으로 자신을 지칭하니. 이건 일인칭과 이인칭이 혼합된 형식이다.
「너의 경우」,
여기에서 ‘너’라고 불리는 사람은 ‘수강생’이고, 도중에 ‘학우’, ‘다른 학생’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학생이다. 화자는 ‘연구실’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를 가르치는 교수다.
「일박 이일」,
‘너’는 여성이다. 남편이 있고, 시어머니와 친정 어머니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성이다.
그런데 화자가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화자는 전지적으로 ‘너’의 가정사를 다 알고 있는 사람임에 분명한데, ‘너’와의 관계는 알 수 없다. 전혀 정보가 주어지지 않은 채, 화자는 ‘너’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진실」,
‘너’는 시간 강사이면서 해바라기 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다. (123쪽)
임상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124쪽)
화자는? 이 작품 역시 화자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찾아볼 수 없다.
「거짓말」
‘당신’은 여자다. 아들이 있고 남편이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아들의 여자 친구인 승혜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화자는? 전지적 시점에서 ‘당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데, 화자와 ‘당신’의 관계는 알 수 없다. 어떤 정보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왜 2인칭을 사용했을까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2인칭으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그러면 그런 2인칭 시점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소설집의 말미에 있는 평론을 읽어보면 그 답이 나온다.
「너의 경우」,에서 사용된 2인칭 호칭의 사용은 독특한 서사적 효과를 발생시키는데 성공하고, 그러한 효과는 각 작품 주제 구현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각각의 작품에서 ‘너’라든가, ‘당신’을 모두 ‘그’와 ‘나’로 바꾸면, 그 즉시 작품을 감싸는 독특한 향취와 생생한 긴장감이 사라지고 만다는 점을 보더라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178뽁)
그런데 위에 언급한 것은 「당신 」과 「너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
왜냐하면 그 두 작품에서 화자와 ‘당신/너’의 관계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기에 2인칭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데, 나머지 작품은 다르다.
나머지 3편의 작품은 화자가 스토리를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데 그친다. 다시 말하면 굳이 화자가 ‘당신’이니 ‘너’니 하는 2인칭을 사용할 당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역시 평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일박 이일」,
이 작품은 ‘너’라는 단어를 ‘나’로 바꾸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사실상 이 작품은 일인칭 시점을 사용한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2쪽)
그러면 그러한 경우에도 2인칭을 사용한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평자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이 작품은 여전히 2인칭을 활용한다. 독자들을 향해 선언한다. 두 노인을 모시고 가는 ‘너’의 입장이 되어라. 2인칭의 활용이 약간은 어색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는 법. 이 작품에서 2인칭 활용은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디테일을 극대화하는데 기여한다. (193쪽)
내용 면에서
「당신 」 - ‘테세우스의 배’의 절묘한 활용
나는 ‘테세우스의 배’를 떠올린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크레타의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죽이고 젊은이들을 구출하여 돌아왔을 때, 아테네 사람들은 이 승전의 배를 잘 보존하고 싶었다. 그들은 세월이 흘러 부식된 널빤지를 뜯어내고 새 목재로 교체해 가면서 이 배를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의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런데 재료가 계속 교체되어 온 이 배를 그때의 ‘테세우스의 배’라고 말할 수 있을까? ‘테세우스의 배’라는 정체성은 어느 정도의 변모를 허용하는 것일까? 당신의 몸에 계속 당신이 아닌 것들이 끼어든다면, 당신은 언제까지 당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36쪽)
절묘한 활용이다.
이 작품에서 테세우스의 배를 등장시켜 소설 속의 남편에게 적용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다. 이보다 절묘하고 적절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남편의 신체는 마치 테세우스의 배처럼 바뀌고 있다. 해서 이제는 완전한 젊은이가 되었다. ‘나’와 같이 가면 다른 이들이 아들이냐고 묻고, 사위 삼으면 좋겠다는 말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니 이제 ‘당신’은 예전의 ‘당신’이 아닌 것이다. 마치 테세우스의 배처럼,
「진실」 vs. 「거짓말」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완전히 대비되는 제목을 앞 뒤로 배치해 놓은 저자의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어,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읽게 된다.
「진실」에서는, 진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상황, 그래서 분명 거짓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마무리 부분에서 드러난 진실은?
「거짓말」에서는, 어떤 식으로 거짓말을 알아차리는가, 독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너의 경우」에서 기록해 두고 싶은 것들
화자는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교수다.
해서 작품 곳곳에 소설 기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 중 몇 개 적어 본다.
작가는 자신의 주인공을 최대한 괴롭힐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야 해요. 그래야 갈등이 극대화되거든요. (55쪽)
주인공의 두려움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써보세요. 주인공에게 벌어진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도 면밀하게 그려보세요. 이야기의 진실성을 최대한 담보하려면, 디테일이 최곱니다. (56쪽)
나는 소설의 진실성이라고 하는 게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의 논리성과 통일성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한다. (56쪽)
다시, 이 책은
굳이 2인칭 시점을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데 관심을 가지고 읽으면 작품들이 재미있게 읽힌다.
그 안에 화자와 ‘당신/너’의 관계도 흥미를 갖게 하거니와, 저자가 2인칭을 사용하기 위하여 애쓴 흔적을 작품 곳곳에서 찾아보는 것도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재미있다.
「일박 이일」, 「진실」, 「거짓말」, 이렇게 3편에서는 평자가 말한 것처럼 화자가 말하는 ‘당신/너’가 독자인 ‘나’가 되어서 작품 속 상황으로 뛰어 들어가 본다는 마음으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흥미롭고, 새로운 작품들을 만났다. 2인칭 구조로 소설 쓰기를 시도하여 소설의 지경을 한 차원 넓힌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ㅇ
다양한 나와 너 : 너의 경우 - 이미란
*본 도서는 출판사로 부터 제공받았습니다.*
먼저 제목과 같은 <너의 경우>라는 단편은 작가의 실제 직업이 국문과 교수님이시다보니 한 편의 합평 강의시간을 보는 것 같았다. 극의 플롯과 서사의 전개와 더불어 글을 쓰면서 치유되는 학생들에 대한 영감에서 글이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재미있게 읽었던 첫 단편인 <당신?>은 오랜시간 같이 살아온 남편이 남도 아니고 남의편도 아니고 “내가 알았던 당신 맞아?“ 라는 의미가 함축된 <당신?> 인 것 같았다. 소설의 대부분이 대단히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있는데.(대부분이) 오래 살았던 그리고, 삶도 한번 누리고 가면 되는거지 타입의 남편이 포스트휴먼 이니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더니, 인공장기로, 인공안구로 점점 사이보그가 되가면서 실제로 젊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아내가 나온다. 그런데, 젊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선택을 계속하는 것(경제적, 감정적)을 느껴야 하고, 거기에 이제 아들 현승이마저 그렇게 만들려는 남편 당신이 누구냐고 한다. 실제로 있을법한 일에 내가 주로 읽던 젊은 작가들과는 다른 방식의 인물묘사와 느낌들이 남달랐다. 아마 내가 읽었던 작가들이라면, 남편을 바라보는 인물(나)와 더불어 남편의 관점에서의 중단편이 나오면서 이야기의 짝을 이뤘을 것 같은데, 의외로 변해가는 남편의 입장에서의 이야기가 들어보고 싶은 글이었다. 다시 태어나고 젊어짐을 선택한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바라보는 사람처럼 생명연장을 갈구하는 그런 느낌은 아닐텐데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생과 젊음을 탐하지 않는가 말이다.
<일박 이일>에서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일박이일 여행을 떠난 며느리이자 딸인 내가 나온다. 두 어머니들의 사정이 다르고, 애정도 다르고, 형편도, 건강상태도 다 다르시다. 그렇지만 둘 다 내가 보호자이고,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상대들이다. 신경쓰는 부분이 다르고, 묘하게 우위를 양보하는 어떤쪽이 보기 싫으면서, 한쪽이 감추고자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묘하게 모른척하는 재주를 가진 주인공이다. 이 어머니는 이렇게 보내드려야 하고, 이 어머니는 이렇게 맞춰드려야 한다. 나와 가족과 남들과의 경계에 있는 경계선에 있는 인물처럼 그려낸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병증도 보살펴야 하는 두 분이 있고 없고에 따라 드러나지 않는가. 나도 십년정도만 지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걸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더라. 이렇게 보호자 구실을 할 수 있는 번듯한 어른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소설이었다. 나와 너의 다름은 무엇일까. 내가 아닌 그 이외는 전부 바깥으로 봐야하는지, 남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려야 하는지, 혹은 헤아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더라.
오랜만에 굉장히 신선한 소설을 읽었다.
<너의 경우> 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로, 문예창작학과의 교수님이 쓰신 소설이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지만 이 책을 읽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소설에 대해 강의하시는 분의 글은 어떨지! 그런 궁금함이 가장 컸다. 책을 읽어보기 잘한 것 같다. 굉장히 정형적이고 딱딱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낯선 시점(2인칭)을 선택한 것부터 해서 스토리의 소재, 전개 등이 신선했다.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들을 몰입시키지 못하는 글도 있다. <너의 경우>를 읽으며 궁금해지는 전개에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소설들은 독자를 몰입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특히 첫 번째 단편 <당신?>은 굉장히 강렬했다.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중년의 남성이 죽을 고비를 넘긴 이후, 과학기술 신봉자가 되어 몸을 개조하여 나가는 과정을 부인의 시점에서 쓴 이 글은 ‘불편한 골짜기’를 유발하기까지 한다. 소설에서는 변해가는 남편을 보며 ‘나’가 영화 트랜센던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남편 행동은 영화에서보다 더 불편해....... 여튼 굉장히 이질적인 감정을 가지고 부인의 불안을 따라가다 보면 충격적인 결말에 다다른다.
이인칭 시점은 소설에서는 굉장히 낯설지만 사실 요즘 사람들한테 가장 적합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타인의 행동이나 말 등을 통해 본인의 생각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타인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본인의 심정을 털어놓는 인터넷 게시판이 활성화된 오늘날에 알맞은 글쓰기 방식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는지도. 세 번 째 이야기인 <일박 이일>은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며느리의 여행을 다뤘다는 점에서 이인칭 시점으로 전개한 게 정말 기가 막힌 소재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튼 간만에 읽은 국내 소설집이었는데 하루 만에 완독했을 정도로 문장도 깔끔하여 술술 읽히고 도저히 궁금해서 그 다음 이야기들을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전개에 감탄했다. 수록된 단편 중 <너의 경우>에서는 단편소설 수업의 진행에 대한 부분이 언급되는데, 소설 내용과는 별개로 글 쓰는 과정 자체가 본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점에서 <너의 경우>를 읽은 하루의 시간은 말하지 못하는 그 결말, 그것에 대해 글을 써 보는 용기를 가져야겠다는 결심이 들기도 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서평_너의 경우_이미란_예서
참 불편하면서도 독특했다. 그게 나빴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시점 때문에 읽는 내내 어색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랬었어, 너는 그럴 거야, 하며 나를 가둬 놓으려는 느낌도 들었고 이야기의 대상이 누구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사실 너라는 2인칭 시점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작가님의 과감한 시도에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다시 생각을 고쳐보면 내가 중간에 있고 나와 너라고 부르는 존재가 있는 듯했다. 사실 이렇게 소설을 쓰는 게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잘못 쓰면 네가 다른 사람으로 바뀔 것 같고 전개에 있어서 한계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님의 예리한 시선과 탁월한 필력으로 이야기를 잘 이끌고 갔다.
'너의 경우'
과제로 소설을 쓰고 있는 너라는 인물을 학생들은 비평을 해주고 선생님은 어색한 부분을 고치게 하며 지도를 해주고 있다. 습작품은 어느 학교 여학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너라는 인물이 가진 내면적인 심리를 표현한 것 같다.
소설 자체는 평범한 학교 이야기로 보였지만 인물에 대한 감정 표현이나 문장을 쓰는 법 등을 고쳐나가는 부분에서 어쩌면 너라는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꼭 완성이 되어야 하고 주제가 반드시 드러나야 하겠지만 초고나 시놉시스를 쓰면서 찾아갈 수도 있다.
내가 이야기 속에 일부가 되어서 마치 직접 겪는 일처럼 느껴진다는 신기한 현상.
바로 이것이 이 소설의 매력처럼 보인다.
뛰어난 문장, 매력적인 스토리, 화려한 인물들이 아니라 너라는 시점에서 나와 뭔가 교감을 하는 접점을 있다는 것.
왠지 이 시대가 윈하는 새로운 느낌의 소설처럼 보였다. 시점의 변화가 소설의 재미를 주었고 독특함이 있었다.
하지만 2인칭 시점 소설을 흉내 내며 내가 공모전에 글을 내기에는 아직 모험적인 느낌이 든다. 책의 뒤편에는 이 소설의 해석이 있어서 차마 느끼지 못했던 소설의 매력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좋은 소설은 권위 있는 학자로부터 전문적으로 해석이 될 수 있는 거구나, 했다.
아무튼 앞으로의 작품이 또 기대가 되는 독특한 느낌의 소설이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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