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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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리뷰 총점 9.4 (7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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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역사이론/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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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신선한 지적 자극! - 고고학 이야기 평점10점 | h*****7 | 2019.09.05 리뷰제목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역사 도서전용 깜짝 상품권을 받게 된 것이 계기였다. 많은 책들 중에 지적이고 해맑은 표정의 저자와, ‘고고학 여행’이라는 제목이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무척 흥미롭고 신선한 지적 체험을 경험한 기분이다.  고고학 하면 공룡화석이나 황금과 보물 찾는 이야기가 먼저 떠올랐을 만큼 어렴풋이 알고 있던 고고학, 고고학자들
리뷰제목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역사 도서전용 깜짝 상품권을 받게 된 것이 계기였다. 많은 책들 중에 지적이고 해맑은 표정의 저자와, ‘고고학 여행이라는 제목이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무척 흥미롭고 신선한 지적 체험을 경험한 기분이다



 고고학 하면 공룡화석이나 황금과 보물 찾는 이야기가 먼저 떠올랐을 만큼 어렴풋이 알고 있던 고고학, 고고학자들이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초등학교 때부터 고고학자를 꿈꾸며 살아왔다는 저자는 여러 교수들의 추천 평에 어울리는 타고난 이야기꾼 같다. 시베리아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주로 중국, 몽골, 중앙아시아 등에서 활동했는데, 그만큼 다양하고 풍성한 사례의 발굴 이야기를 생생하고 현장감 있게 들려준다. 단순히 유물과 유적을 발굴하는 것만이 아니라 발굴된 대상은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는 느낌이었다. 차가운 유물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따뜻한 체온과 감성을 호흡했던 존재,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저는 바로 유물을 통해 죽어 있는 과거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고학적인 연구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그 유물들이 원래의 기능을 잃고 땅속에 묻혀야 합니다. ,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죽고 난 다음에 고고학자들은 다시 그들을 꺼내어 부활시킵니다. 생동감 있는 삶의 모습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는 셈입니다.’(P8~9)


 죽어서 묻힌 사람을 부활시킨다?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자손의 기억에 남아 대대손손 회자되는 것처럼 고고학자들이 하는 일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고고학이란 무엇일까.

 

고고학은 쉽게 설명하면, 유물을 연구해서 과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지식, 문화 등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은 왜 그렇게 과거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많았을까?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건 바로 과거를 생각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인류의 진화하는 숙명에 기인한다.’(P22)

 

 어쩌면 인간은 과거의 향수에 빠져 사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미래는 아직 닥치지 않아 알 수 없다. 현재를 살면서도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나,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살아갈 때도 흔히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은가.

 

 이렇듯 고고학에 대한 관점도 과거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유물을 통해 지혜를 얻기도 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진화하고자하는 심리의 시스템에 연유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유인원의 직립보행이야말로 목숨을 건 진화였다고 한다. 두뇌와 지혜를 얻는 대신 너무나 많은 동물적인 장점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30여종의 인류 중 현생인류를 제외하고 모두 멸종했다니 새삼 인류의 진화가 위대하게 느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유물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당시 어떤 음식을 먹고 살았는가 밝히는 것이었다. 토기의 바닥에 남은 곡물의 찌꺼기를 분석하여 5000년 전 중국에서 맥주를 마셨다는 것을 밝혀낸다. 곡물 중에는 보리가 섞여있음을 알아냈는데 보리는 중국에서 자생하는 곡물이 아니었고, 여기서 5000년 전에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동서의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해낸다. 영겁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흔적을 읽어낸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이렇게 유물, 유적을 발굴하고 분석하며 과거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나 문화를 읽어내는 것이 고고학의 역할이다. 과거의 사람들을 통해서 인류의 나아갈 길이나 의미 있는 삶의 통찰이 가능하게 해주는 고고학, 멋진 학문인 것 같다. 황금이나 보물을 찾아내는 일을 기대하며 고고학을 시작하는 사람이 많지만 정작 하루 일과 후 맥주가 한 잔이 고고학자들을 묶어두는 힘이라니 직업의 세계는 어디나 비슷한 모양이다.

 

 무언가를 후대에 전하고 남기려는 인간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가 보다. 쓰던 물건이나 그릇, 애정을 쏟았던 가축들의 뼈까지. 또 남은 사람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감성이 담긴 편지가 발견되기도 한다. 발굴하는 과정에서 고고학자들이 느끼는 감정 또한 예사로울 것 같지 않다. 보이지 않는 땅 속 과거의 유물들을 통해 사유하고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채색해주는 고고학자들이 달라보였다. 단순히 유물의 발굴에 그치지 않고, 과거의 사람과 유물에서 한때 인간의 따뜻한 숨결을 되찾아 주는 일이다. 이런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고 내일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사색하게 한다. 우리가 걷는 길, 아래 어딘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죽음과 삶은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고학은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이다.“


전쟁과 고고학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파괴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전쟁이 현실 사회의 구조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고고학은 지층의 구조를 파괴하여 그 속에 있는 유적과 유물을 꺼낸다. 전쟁은 서로를 파괴하는 행위를 통해서 새로운 사회의 질서를 부여한다. 고고학은 땅을 파헤쳐서 자연에 숨어 있는 유적과 유물을 꺼낸다는 점에서 유적을 파괴한다고도 볼 수 있다. 전쟁에서 승자가 그 이후의 세상을 재편하듯이 유적을 파괴하고 그 속의 유물을 꺼내서 과거를 다시 재편하는 고고학자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서로 닮아 있다.’(P213) 


 파괴해야 만이 과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세상에 밝혀낼 수 있다. 파괴를 전제로 하는 점에서 전쟁과 고고학이 닮은 점을 끌어내는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알고자 하는 인간의 호기심과 본능이 고고학이 발생하고 발전하는 토대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오래전 우리 지역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공고가 있고나서 유적이 발견되어 공사가 몇 해 늦어진 적이 있었다. 개발은 작업이 동반되기 때문에 땅 속에 있는 유적의 파괴는 필연적이며, 건물이나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공사에 앞서 미리 유적을 발굴하는 것이 구제발굴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도입 30년도 안 되는 구제발굴을 통해 얼마나 많은 유적이 사라졌는지 모른다고 한다.


 또한 현대의 정치가와 사업가들의 개발, 경제논리를 앞세워 고고학 유적이 파괴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말한다. 레고 랜드 건설현장인 춘천의 중도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발견된 사례를보여준다. 무덤이 아닌 집자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한국은 물론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연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4대강 사업의 경우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개발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어떤 유적이 있었는지 발굴은 제대로 되었는지 정보는 미약하다고 했다. 마구잡이식 구제발굴로 인해 사라지는 유적이 없어야 할 것이다. 제대로 된 조사와 발굴이 정책화되어 통해 소중한 유물과 유적이 유실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꿈꾸거나 죽은 뒤에도 여전히 부귀영화를 꿈꾸며 황금으로 치장하여 땅 속에 묻혔다. 하지만 그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남아 있는 건 오직 황금뿐이다. 오히려 무덤에 넣은 황금이 많을수록 도굴꾼들의 우선 표적이 되었다. 무덤은 깨지고 황금은 빼앗겼다. 수많은 무덤을 발굴하면서 이처럼 덧없는 인간의 욕망을 깨닫게 되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에서 중요한 건 뭘까? 이 한 문장이 그 힌트가 되지 않을 까 싶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다 공짜야. 그걸 누릴 줄 알면 부자인 거야.”(P302~303)


어떤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맑은 공기, 따사로운 햇살, 풍성한 자연의 혜택이 모두 공짜다. 더 가지기 위해 초조해 하기 보다는 가진 것을 제대로 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오랫동안 발굴현장을 누빈 저자가 끌어올린 삶의 통찰이 어우러진 고고학여행의 생생한 이야기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앞으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을 보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 것 같다. 왠지 애정을 담아 그들의 삶의 모습은 어땠을까 상상하게 될 것 같다. 고조선의 공무도하가와 하프의 기원, 유물의 도굴 이야기, 3천 년 전 두만강 유역 사람들이 침을 놓아 몸을 치유했던 시간의 기억을 밝혀내는 이야기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하다. 언젠가는 흔적 없이 사라질 인생이다. 고고학 여행이야기는 어떻게 하면 오늘을 가장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사색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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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평점9점 | s******4 | 2023.08.06 리뷰제목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저자 강인욱, 흐름출판, 2019년   이 책의 저자 강인욱님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본과와 석사를 졸업하고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 고고민족학여구소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고학자를 꿈꾸며 살아왔고, 지금도 경희대 사학과 교수로 근무하며 고고학을 강의하고 있다.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매년 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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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저자 강인욱, 흐름출판, 2019

 

이 책의 저자 강인욱님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본과와 석사를 졸업하고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 고고민족학여구소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고학자를 꿈꾸며 살아왔고, 지금도 경희대 사학과 교수로 근무하며 고고학을 강의하고 있다.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매년 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 등을 다니며 새로운 자료를 조사하고 있다. JTBC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하고, 조선일보, 서울신문, 한겨례등에 칼럼을 다수 연재하는 등 고고학의 진짜 매력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유라시아 역사 기행, 진실은 유물에 있다, 북방 고고학 개론등이 있다.

 

이 책에는 신나는 보물찾기도, 실무적인 고고학 이론도 없다. 대신에 과거의 사람을 직접 만지고 냄새 맡는 고고학자로서의 생생한 느낌을 독자와 나누고자 한다. 다소 낯설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저자는 그 생생함이야말로 고고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가진 놀라운 매력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석사 졸업 이후 박사과정을 위해 시베리아로 유학을 떠나 주로 중국, 몽골, 중앙아시아 등을 조사해 왔다. 다른 한국의 고고학자들과 달리 유라시아 일대를 다니면서 찬란한 황금 유물에서 자작나무를 감싼 시베리아 원주민의 인골까지 다양한 유물들과 씨름하면 살았고 그 시간의 기록을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한다.

고고학자는 일반인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토기편 한 점을 발견할 때 작지만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고고학의 매력은 바로 유물을 통해 죽어 있는 과거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고고학적인 연구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그 유물들이 원래의 기능을 잃고 땅속에 묻혀야 한다. , 죽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죽고 난 다음에 고고학자들은 다시 그들을 꺼내어 부활시키나. 생동감 있는 삶의 모습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는 셈이다.

 

저자가 고고학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된 계기가 있다. 지난 2016년 러시아에서 조선시대의 미라와 관련된 발표를 할 때였다. 1998년 안동에서 발견된 이응대묘의 출토품에서 31살에 요절한 남편을 떠나보내는 부인이 써서 무덤 속에 넣어준 마지막 편지인 원이 어머니의 편지이다.

 

당신 생전에 함께 누워서 다른 사람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라고 말하곤 하셨지요.이 편지를 보시고 제잘 오늘 꿈에서만이라도 나와 주세요.”

 

고고학자로서 저자가 발굴하고 연구했던 수많은 무덤에는 이 세계를 떠나는 사람에게 보내는 남은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죽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만들지는 못한다. 이 세계를 떠나는 사람에게 보내는 남은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다.

우리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죽음으로 수렴이 되어 망각이 되고, 망각되어 버린 기억은 다시 유물이라는 몸으로 부활한다. 고고학자에게 유물이란 다시 살아난 기억의 편린이다. 이렇게 죽음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고고학이다.

저자는 유물을 통해 과거 사람들과 더 가깝게 만나보고, 미지의 땅을 찾아가 수 많은 유물과 과거의 사람들을 만난 느낌과 감동을 독자에게 전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책 속에서

 

# 11 파괴와 복원, 고고학 발굴의 패러독스

고고학만큼 역설적인 학문이 없다.

왜냐하면 과거를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유적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도면과 사진을 남기며 신충하게 발굴을 진행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번 발굴한 유적은 어떠한 경우에도 되돌릴 수 없다. 간혹 유적을 발굴하지 않고 유보하는 경우도 있다. 땅속에 있는 것이 역설적으로 유적을 오래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발굴을 하지 않는 것도 답이다. 아니다. 발굴을 하지 않으면 정작 과거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기에 오히려 고고학의 발전은 저해된다. 그러니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것이 고고학 발굴이 지향하는 바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수술 자국이 작을수록 좋은 외과수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고고학자들을 발굴 작업에서 사소한 정보라도 놓칠까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유적이 나오면 세밀하게 유물과 유적을 촬영하고, 도면으로 만들어 놓으면 모든 과정을 일일이 노트한다. 기계의 도움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고고학 발굴에서의 많은 과정은 여전히 사람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다. 고고학 현장에서 강인한 체력과 꼼꼼함이 동시에 요구되는 이유이다.

고고학이 파괴를 의미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구제발굴때문이다. 보통 현대 구조물을 만드는 경우 땅을 깊게 파거나 메우는 정지(整地) 작업이 동반되기 때문에 땅속에 있는 유적의 파괴는 필연적이다. 구제발굴은 건물이나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땅속에 있는 유적이 불가피하게 파괴될 때 공사에 앞서 미리 유적을 발굴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 건설 공사가 많아지면서 한국에서는 전체 발굴의 95% 이상이 구제발굴이다. 정말 중요한 유적이라면 아예 공사가 중단되거나 유적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발굴이 끝나면 건물들이 들어서고 영영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는 속담이 있다. 고고학도 그러하다. 과거의 유적이 파괴되어 우리에게 그 속살을 보여 줄 때 비로소 우리는 과거인들의 모습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상처를 당연시하고 발굴에만 급급하게 된다면 후대에 물려줄 유물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몇 천년의 세월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과거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만큼 후대 역시 누리기를 원한다면 문화재의 보존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 것이야말로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고고학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느꼈다. 나는 과거의 유물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들에 대해 궁금해졌다. 과거의 인류가 어떻게 살았으며, 그들의 문화와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다. 과거의 인류가 우리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비교하고 싶었다. 나는 고고학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거창고 전문적이 것이 아닌 그냥 보통사람들도 흥미를 가질고 볼 수 있는 고고학에 관한 책이라 재미있고 유익했다. 저자의 다른 책들에도 관심이 생기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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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그들도 나처럼 평점9점 | s*****l | 2019.07.19 리뷰제목
대규모 택지조성사업 현장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나무를 베어내고 산과 구릉의 속살이 드러난 자리에 선캡과 마스크로 중무장을 한 아줌마들이 아주 오래 전의 집터인 듯 보이는 매장문화재 발굴터에서 세월아 네월아 솔질을 하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은 너른 공터에는 뙤약볕과 마른 먼지만 가득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이었다. 그 허허로운 풍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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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택지조성사업 현장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나무를 베어내고 산과 구릉의 속살이 드러난 자리에 선캡과 마스크로 중무장을 한 아줌마들이 아주 오래 전의 집터인 듯 보이는 매장문화재 발굴터에서 세월아 네월아 솔질을 하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은 너른 공터에는 뙤약볕과 마른 먼지만 가득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이었다. 그 허허로운 풍경에 점점이 박힌 저 여인네들은 도대체 누구의 지시를 받고 성과도 없는 무한 반복의 솔질을 해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들의 어깨 위로 비스듬한 석양이 쏟아지고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파란 방수포가 씌워졌다.

 

"시간여행을 꿈꾸는 인간의 판타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고고학이 발달해서 사람들이 꿈꾸던 찬란한 과거 같은 건 없다고 밝혀진다 해도 혹은 인류가 바라마지않는 미래는 결코 오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시간여행을 꿈꿀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이라는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과 색다를 시공간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호기심에 있다." (p.26)

 

내가 어느 택지조성사업의 현장에서 보았던 황량하고 나른한 풍경은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에도 그대로 옮겨진다. '고고학자들은 흙먼지 자욱한 열악한 환경에서 발굴을 합니다'로 시작되는 그의 저서는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고고학에 대한 편견이나 헛된 상상을 일거에 깨트린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이나 아프리카 오지의 어느 사막지대에서 거대 공룡의 화석을 발굴하는 그런 장면들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어렵게 발굴한 토기 조각을 통해, 토기의 밑바닥에 남아 있는 식물 성분을 통해 과거의 생활상을 연구하고 그 시절의 문화와 풍습을 상상하며 이를 통하여 알게 된 고고학자들의 지식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게 그들의 임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짧게는 100여 년 전서부터 길게는 수천 년에 이르기까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더욱 또렷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고고학자인 셈이다.

 

"사람들이 고고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유물이 주는 여러 가지 창의적인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 전시품 안에 잇는 유물을 보면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 고고학에서는 하나의 유물을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또한 새로운 유물은 계속 발견되고 그에 대한 해석 역시 계속 바뀐다. 이렇듯 고고학에는 정답이 없다. 고고학은 매일 바뀌어가는 일상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p.277)

 

고고학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내가 고고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의 이 책에 매료되었던 까닭은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마도 저자의 유려한 문체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그것은 고고학자로서의 풍부한 현장 경험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러시아, 시베리아, 몽골, 중앙아시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직접 발굴을 주도했다는 저자는 책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실제 발굴 이야기들을 실감 나게 전하고 있다.

 

"초원을 조사할 때에 틈만 나면 땅에 누워보곤 한다. 그러면 온갖 풀들의 희미한 향이 더 또렷하게 맡아진다. 민트향, 맵싸한 향, 달콤한 향, 이 초원의 향은 순간 다른 시간으로 나를 데려간다. 수천 년간 이 땅에서 살아온 유목민들의 삶 속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들과 나는 이렇게 향기로 소통을 한다. 나 혼자 하는 공상일지도 모르겠지만." (p.144)

 

책을 읽는 독자는 고고학이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밝히는 고리타분한 학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컨대 무덤을 발굴한 고고학자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무덤에서 발굴한 여러 유물을 통해 추론하고, 검증하며, 때로는 상상을 통해 종합한다. 노련한 형사가 작은 단서들을 취합하여 범인을 확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확증하기 위해서 고고학자는 무덤을 발굴하고, 향기와 음악과 음식 등 다양한 주제를 연구하며 마약이나 젓갈 또는 문신과 같은 생소한 분야를 탐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고고학은 한 시대를 연구하는 종합학문인 셈이다.

 

"살아가면서 경험한 행복한 기억은 동시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때에 대한 슬픈 기억이기도 하다. 타투는 고통스러운 행위이지만 그럼으로써 그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몸의 감촉과 정신의 기억이 함께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타투야말로 몸에 새기는 마음의 지도가 아닐까 싶다." (p.191)

 

나는 산길을 걸을 때마다 과거에 이 길을 걸었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곤 한다. 그들도 나처럼 헐떡거리며 저 언덕을 숨 가쁘게 올랐고, 정상의 바위 위에 앉아 흐르는 땀을 식혔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녹색의 삼림을 보며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했을까. 저 멀리 느긋하게 흐르는 시간들을 손에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처럼 허망하게 바라만 보았을까. 내가 걷는 이 길 위에서 그들도 나처럼 별의별 생각들을 떠올리면서 상념에 젖곤 했을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을 읽었던 오늘, 나는 먼 과거를 향해 시간여행을 한다. 그들도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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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오늘의 지혜를 만드는 흔적들...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평점8점 | YES마니아 : 로얄 n******i | 2020.01.28 리뷰제목
집에서 가까운 곳에 박물관이 생겼다. 기존에 박물관 비슷한 전시실 정도로 운영하던 곳에 국립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을 한 거다. 조금씩, 그 시대의 유물과 생활 흔적을 마주하는 기분은 묘했다. '저걸로 고기를 잘랐다고? 이런 옷을 입고 살았다고? 그 시대의 무덤은 이랬구나.' 싶은 눈앞의 것들은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찾아내고 그 시대를 확인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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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가까운 곳에 박물관이 생겼다. 기존에 박물관 비슷한 전시실 정도로 운영하던 곳에 국립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을 한 거다. 조금씩, 그 시대의 유물과 생활 흔적을 마주하는 기분은 묘했다. '저걸로 고기를 잘랐다고? 이런 옷을 입고 살았다고? 그 시대의 무덤은 이랬구나.' 싶은 눈앞의 것들은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찾아내고 그 시대를 확인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는데, 보면 볼수록 그 시대의 생활이 궁금해졌다. 인간의 생활이 진화하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하나씩 찾아가는 생활의 지혜가 놀라울 뿐이었다. 어쩌면 그 시대에 살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이미 문명의 맛을 알아버렸으니...), 한 번쯤은 모험하듯 여행하듯 다녀오고 싶은 마음도 든다. 영화에서 보던 시간 여행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이니까 가능한 설렘과 모험일 테고, 현실의 시대 발굴은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한 작업이라는 것을 이 책으로 알게 됐다.

 

저자는 고고학이란 학문을 경건하게 대하면서도, 그 유물들의 발굴에서 느끼는 시대의 흔적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발굴 과정에서 직접 겪은 체험을 이야기하듯 들려주면서, 그것들을 바라보며 확인하는 그 시대 삶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감정이 인간미 넘쳤다. 때로는 슬픈 현실을, 때로는 즐거운 한때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류의 과정이 그대로 담긴 흔적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박물관이나 전시관에서 봐왔던 많은 것이 새삼 더 다르고 깊게 다가온다. 생활의 흔적들이기도 하지만, 그 흔적들의 발전은 오늘의 우리에 이르게 되었다는 게, 구석구석 삶의 지혜들이 쌓여있다는 게 보인다. 사용하다 보니 불편한 것들은 점점 생활에 편리하게 업그레이드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차근차근 인류의 생활은 더욱 편하게 발전해왔을 거라는 사실의 증명 같은 거. 그러니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유물들은 단순하게 화석이나 골동품 바라보듯 신기함으로만 느끼면 안 될 것 같다. 인류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발자취이고 흔적들일 테니까.

 

 

 

고고학자를 '시간여행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유물을 찾고 과거를 경험하면서 보이는 것들에 많은 상상과 실제를 더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우리가 역사책이나 수업 시간에 간략하게 배우던 과거의 이야기를 좀 더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색을 입힌다. 어떻게 보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20여 년의 시간을 고고학자로 활동하면서 돌아다니던 곳, 중앙아시아와 중국, 몽골과 시베리아 등의 발굴에 참여하고 거기서 발견한 유물들에서 본 것들을 말하는데 느껴지는 놀라움과 자부심 같은 게 있다. 본인이 택한 학문에 대한 존경, 경험으로 확인한 시간여행에 대한 흥미로움, 인류 역사의 흔적들이 만들어낸 현실의 모습까지 보면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시간을 연결한다. 특히 고고학 자료의 절반 이상이 무덤이라면서, 무덤은 죽은 이를 묻은 곳이면서 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곳이라는 게 인상적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치르는 장례식 자체가 남은 이들에게도 필요한 시간이지만 죽은 이를 잘 보내기 위한 방식이 아닐까? 누군가의 죽음을 보면서 느끼는, 언젠가 나에게도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는 방식이기도 할 듯하다.

 

 

고고학 발굴에서 시간의 무게를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이 바로 시각적인 아름다움, 색채이다. 사진이나 책은 가장 먼저 색부터 바랜다. 아무리 아름다운 옷이라고 해도 땅속에 버려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색을 잃어버린다. 때문에 색이 잘남아 있는 유물을 발견하면 강렬한 인상으로 남게 된다. (117페이지)

 

지나간 것들, 죽은 이들의 흔적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시대를 읽기도 하지만, 음식이나 냄새 같은 것들의 자취를 찾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기에 그 흔적을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고대의 악기를 발견했을 때 어느 시대를 규정하면서도 같은 악기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니 음악의 흐름, 유행 같은 것을 찾아낸다. 사실 유행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과한 것 같긴 한데, 어떤 붐이 일어나는 것처럼 음악의 분위기나 사용하는 악기도 널리 퍼지는 것 아닐까 싶다. 구금이 고대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이 즐기던 악기였다고 했는데, 발해 유적에서도 구금이 발견된 것을 보고 동아시아 전역에서 발해 음악이 유행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쉬운 것은 그 당시의 악보나 다른 흔적들이 남아 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떤 음악이 유행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음악의 복원도 할 수 없다는 것도. 깨진 조각을 이어 붙이듯이 유물의 완전한 형태를 예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이렇듯 물리적인 흔적을 다 찾아낼 수 없는 것들이 너무 안타깝다. 어떤 향기나 음식, 맛 같은 것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우리가 먹는 건 우리 몸속에 쌓인다. 고고학은 살아 있을 때 우리가 먹은 음식을 밝힌다. 거기에는 우리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아마 수천 년 뒤에 한국의 요릿집이나 정육점 자리를 분석한다면 지금의 한국인들이 좋아했던 고기 부위와 숨겨진 식성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뼈들을 부위와 종류별로 일일이 분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먹는 것으로 당신을 밝히겠다는 사바랭의 말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고학은 너무도 흥미로운 학문이다. 그러니 한 끼 먹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시길. (159페이지)

 

토기의 바닥에 곡물의 찌꺼기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5000년 전에는 중국에서 맥주를 마셨다는 걸 알아내기도 한다. 음식의 흔적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하던 우려는 이렇게 뭔가를 찾아냄으로써 그 기우를 덜어낸다. 특히 보리가 섞여 있던 곡물이었음을 알았을 때는 보리가 중국에서 자생하는 곡물이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동서의 교류가 만들어낸 곡물의 이동이라는 것까지 알아낸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단순하고 쉬운 방식의 '흔적 찾기' 같은데, 신기하면서도 하나하나 그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한 시대의 모습을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고학이란 학문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에서 시작되는 건 아닐까 싶다. 알고 싶은 것, 찾아가고 싶은 곳의 이야기를 듣고 싶기에 계속 활동하고 발굴하면서 그 흔적들을 찾아내는 희열을 느끼고 하는 거 말이다. 발굴된 유물을 통해 인류가 이뤄낸 삶의 지혜를 발견하면서도, 어떤 흐름으로 현재에 이르렀는지 파악하면서, 조금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나온 과정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찾아내고 유추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상상하는 재미까지 더해진다. 인류의 진화에 관한 욕망은 '직립보행이 목숨을 건 진화'였다고 말하는 것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인류의 두뇌는 더 커지고 지식을 얻으면서 동물적인 장점은 서서히 퇴화했듯이. 과거의 인류에서 시작된 인간 세상의 흐름은 앞으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흘러갈지 기대된다. 그 기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고고학이란 학문과 고고학자의 역할이 클 것 같다. 비록 고된 하루의 끝이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마무리되는 게 소박하지만, 그 맥주 한 잔의 힘으로 또다시 인류의 흔적을 찾아가는 모험을 마다할 수 없다. ^^

 

 

어렵게 우연처럼 찾아낸 작은 흔적들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확인하게 되는 것들을 마주한 것 같다. 마음으로 보이는 것들이 불러오는 감정이 대단했다. 발굴에서 시작된 인류 역사를 확인하게 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누구나 쉽게 읽으면서 고고학을 만나는 재미를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실제 발굴의 이야기에서는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는 듯하면서도, 발굴 이후의 시간 추적 같은 이야기는 신비롭다. '아, 우리가 이렇게 발전해왔구나. 인간이 이렇게 진화해왔구나. 너무 다른, 때로는 너무 비슷한 생활에 인간미가 여기서 나오는구나.' 싶은 공감과 감동까지 만든다. 유물을 통해 과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문화를 밝히는 과정인 고고학이, 이 책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인류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시간을 계속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지식을 전달하면서도 즐거움을 놓치지 않았고, 하나의 학문을 알아가는 흥미로운 과정이었다. 과거의 유물이 우리가 미래를 열어 가는데 더 현명해질 수 있도록 거울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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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흥마로운 고고학 평점10점 | e******s | 2021.07.17 리뷰제목
한 저자의 책을 읽을 때는 출판 시기 순서로 읽는 것이 저자들의 사고 발달 과정을 일을 수 있어 좋은데 이 저자의 책은 우연히(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빌리다가 눈에 띄었다.) 읽게 되어 가장 최근 책인 '테라 인코그니타' 먼저 읽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도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우리가 '정설'로 알고 있는 고고학적 사실이 사실로 판단되기 까지
리뷰제목

한 저자의 책을 읽을 때는 출판 시기 순서로 읽는 것이 저자들의 사고 발달 과정을 일을 수 있어 좋은데 이 저자의 책은 우연히(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빌리다가 눈에 띄었다.) 읽게 되어 가장 최근 책인 '테라 인코그니타' 먼저 읽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도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우리가 '정설'로 알고 있는 고고학적 사실이 사실로 판단되기 까지 발굴의 역사, 해석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어 재미있다. 고고학적인 유물은 발굴되고 나서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무엇인지 인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릴 때 서양에서 나온 공룡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는 공룡이 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공룡의 흔적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서 중요한 것은 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자랄 때는 나라에 돈이 없어서 공룡까지 발굴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경제가 좀 여유로우니 공룡 연구도 하고 고고학 연구도 활발해 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최근에 경주의 한 무덤에서 180cm 되는 시신을 새로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 중동이나 중앙 아시아인? 조사할 수 있는 DNA가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정말 흥미롭다.  

또 저자의 책들을 짧은 기간에 함께 읽으므로서 각각의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화를 기억하게 되었다.  중국의 홍산 문화는 내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약간 애매한 위치에 있기에 이걸 가지고 우리 민족과 연결 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중국의 한족과 연결 시키는 것도...... 그냥 먼저 살았던 사람들일 뿐이다. 

 

목차

서문 고고학자의 비밀노트를 꺼내며
책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들

프롤로그. 고고학, 과거와 미래를 잇는 현재라는 다리


1. 죽은 이를 위한 사랑의 흔적

30쪽
그런 의미에서 무덤은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제2의 자궁과 은 곳이다. 무렵에 사람을 묻을 때에 우리는 죽은 사람이 완전히 라지는 것이 아니라 저승에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을 기대한다. 러 다양한 무덤 중에서 항아리에 사람을 묻는 독무덤 (옹관묘)이 는 것이 있다. 이 독무덤은 마한시대에 우리나라 전라남도 일대 서 널리 쓰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 독무덤은 전 세계적 로 어린아이가 죽으면 넣어서 묻는 풍습으로 널리 퍼져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의 관을 항아리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항아리는 곧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죽어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아가듯 몸을 구부려서 넣는 독무덤만큼 무덤의 의미를 상징적으 잘 표현하는 유물도 없다.

무덤은 매장과 제사라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 그 의미를 체화시키는 상징이었다. 무덤이라는 거대한 제단에 정 적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세계로 나아 가는 과정이 되었다. 즉, 무덤은 죽음이라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죽음이 다시 태어나는 황홀한 경험의 장eroricizing deat으로 만들었다. 사람의 죽음이라는 가장 꺼리는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 로 무덤을 만들고, 그들을 기억하는 제사를 마치 축제처럼 지냈으 로써 고대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할수있었다.

보통 대학의 박물관에 가면 옹관묘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볼 때 마다 궁금했었다. 왜 저렇게 만들었는지....
 

2. 불에 깃든 황홀과 허무
3. 술, 신이 허락한 음료
4. 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77쪽
시베리아의 버섯 중에는 유독 빨갛고 예쁘게 생긴 것이 있다 대버섯으로, 환각작용도 크고 치명적인 독도 가진 위험한 버섯 다. 그런데 과거 사제들은 의식을 행할 때 이 독버섯의 약효를 하기도 했다. 시베리아의 시민들은 하늘과 맞닿는 엑스타시( 초월상태)를 일으켰는데, 이러한 정황은 유라시아 초원 일대의 입주 남아 있다.

알타이 칼바다시 암각화를 비롯해 다양한 입각화에 나타난 시민들의 모습은 공통적으로 머리가 버섯 모양이었다. 기독교나 불교교 할 것 없이 신격화된 모습은 머리 뒤로 아우라 같은 광채가 비치는 것으로 표현된다. 시베리아의 샤먼들은 광채 대신에 머리에서 버섯이 자라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 버섯 머리의 샤먼은 알래스카와 이어지는 북극해 추코트카 반도의 페그티멜 암각화에서도 발견되었다. 페그티멜 암각화는 한국에서도 제법 알려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와 마찬가지로 고래잡이를 하는 장 면이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암각화에서도 이런 버섯머리의 샤먼이 발견된다. 이는 1만 5000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버섯을 이용한 샤먼 들이 유라시아 곳곳에 있었고, 이들의 일파가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는 증거일 것이다.

몽골 울란바토르 근처에 약 2000년 전에 만들어진 흉노 선우(왕) 고분에서도 버섯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로 2007년에 발굴된 노 인-울라 20호 고분이다. 

페그티멜 암각화 https://en.wikipedia.org/wiki/Petroglyph

 

5. 마음을 울리는 소리 없는 음악

93쪽
샤먼은 나무 근처에 마치 병풍처럼 그들의 세계관을 묘사한 신화를 표현한 가죽그림을 걸었다. 이로써 샤먼 의식의 준비는 마친 셈이다. 분위기가 고조된 순간 치장을 마친 샤먼이 다시 등장했다. 황금빛의 청동 방울과 거울을 몸에 주렁주렁 걸친 샤먼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영롱한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샤먼의 가슴에 건 거울 은 햇빛을 반사해 마치 가슴에 태양을 품고 있는 듯했다. 샤먼은 천 천히 북을 치면서 낮은 목소리로 구절을 읊었다. 옆에서 악사들은 과정을 치면서 샤먼의 의식을 도와주고 있었다. 특히 심벌즈 같이 생긴 집에서 울려 퍼지는 그 영롱한 울림은 나를 홀렸다. 샤먼의 의식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제 의식을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세형동검 문화 시기인 2400년 전에 등장하는 동검과 청동방울, 거울도 바로 샤먼의 도구였다. 우리나라 세형동검문화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유사하게 생긴 청동방울과 거울은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의 샤먼들이 지금도 여전히 쓰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국보로 지정된 팔주령(여덟 개의 방울이 달린 도구)과 장대에 다는 방울 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북처럼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 도 있었다. 둥근 거울처럼 생긴 청동기로, 이름은 원개형동기(둥근 모양의 청동기)라고 한다.

시베리아 샤먼 https://en.wikipedia.org/wiki/Shamanism_in_Siberia

부리야트 공화국 https://en.wikipedia.org/wiki/Buryats

 

101쪽
약 3000년 전을 전후하여 전차로 전쟁을 하던 시대가 끝나게 되면서 전차는 전쟁무기가 아닌 하늘의 전령사나 지혜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전차를 타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나 고대 인도에서 지혜로 세계를 통치하는 전륜성왕이 전차의 바퀴 로 표현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렇게 전차가 하늘과 땅을 잇는 소통의 도구로 바뀌면서 전차에 달린 방울도 한반도를 포함한 유라시아 일대에서는 샤먼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샤먼의 도구로서 청동방울을 본격적인 악기로 발달시킨 나라는 중국이었다. 

103쪽
바르간의 원리는 악기를 이빨 사이에 끼우고 철판을 튕기는 것 이다. 입은 공명통 역할을 하니 입 모양을 다양하게 해서 그 소리의 울림을 조절한다. 한국에서는 이 악기를 본 사람은 물론이고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유목민들에게서만 널리 유행했기 때 문이다. 유럽으로는 13세기가 되어서야 전래가 되었지만, 동아시아 에서는 이미 3500년 전의 무덤에서 구금이 출토되었다.

2014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고고민족학연구소에 자료 를 조사하러 갔다. 친한 고고학자 니나 레센코(그녀는 나와 몇 해 동 안 크라스키노의 발해 유적을 발굴했다)가 보여줄 것이 있다며 나를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머리핀처럼 생긴 손가락 크기의 철기 유물을 보여주었다.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바로 바르간이에요. 발해유적에서는 처음 나왔답니다."

바르간 https://en.wikipedia.org/wiki/Jew%27s_harp
         바르간이 서양에서는 유태인 하프로 알려져 있나보다.

106쪽가야금 이전에도 또 다른 현악기가 있었다. 서양에서 발달해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과 한국으로 전래된 하프의 일종인 후이다. 이 공후는 동쪽으로는 알타이까지 이어졌다. 고조선 가요인 <공무도하가>는 공후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가요를 채록한 사람은 고조선의 하급관리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당대 또는 고조선 멸망 직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 지은이에 대해서는 뱃사공, 곽리자고,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 등 다 양한 설이 있는데, 아마 많은 노래가 그러하듯 채록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 <공무도하가>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고대가요가 되었다. <공무도하가>는 1세기 때 채옹의 '금조',에, 1세기 초에 쓰여진 최표의 '고금주'에 이미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 동아시아 일대에서도 널리 사랑받았다.

<공무도하가>가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건 역설적이게도 고조선 을 멸망시킨 한무제의 역할이 컸다. 한무제는 음악을 관장하는 악 부를 설치해 사방의 노래를 체계적으로 수집했다. 당시 악부의 노 래 채록은 다양한 노래를 통해 군가를 제정하여 각지로 파견되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공무도하가>는 서글픈 사랑의 노래로, 가족들을 고향에 두고 떠난 군인들의 심금을 울렸 을 것이다.
 

114쪽

여기서 주목되는 유목민들이 바로 앞서 언급한 중국 만리장성 지대에서 널리 흥했던 흉노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고조선을 흉노의 왼쪽 어깨라고 할 정도로 흉노와 고조선은 서로 통했다. 또한 기원전 4세기경에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번성했던 유목민족들은 실크로드를 따라서 만리장성을 따라 동아시아로 진출했고, 고조선과 맞닿았다. 이러한 고조선과 초원 지역과의 연관성은 황금, 철제 무 기와 마구에 잘 남아 있다. 중원을 거치지 않고 고조선이 직접 중 앙아시아 초원 지역의 유목문화로부터 공후를 수입했을 가능성이 더 큰 건 이 때문이다. 초원 지역과 많은 교류를 했던 발해 정효공주의 무덤 벽화에도 휴대용 공휴가 그려져 있다. 이렇듯 고조선 이 후에도 우리의 고대사에서 공후로 대표되는 초원의 음악은 계속 연 주되었던 것 같다. <공무도하가>는 이처럼 서역의 음악과 이어졌던 2000년 전의 교류를 반증해주는 귀한 자료이다.

고고학책을 읽다보면 한반도는 최소한 삼국시대 이전에는 중국의 영향 만큼이나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나의 역사적 사고가 너무 중국 중심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 빛바랜 유물에 숨어 있는 화려함

124쪽
2000년 전 유라시아의 최대 군사강국이었던 흉노를 무너뜨린 것은 강대한 군사력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간파하고 흔들던 중국의 화려한 사치품들이었던 것이다. 단조로운 초원의 빛깔에 싫증을 내 어 아름다운 빛깔을 탐한 결과가 나라의 멸망이라니. 진정한 경국 지색은 이런 것이 아닐까.

7. 지난 세월의 향기

137쪽
마늘은 한나라 때에 실크로드를 따라서 아시아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쪽마늘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히브리 노예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이라고 구약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모세가 이 집트를 탈출한 엑소더스 이후에 히브리인들이 마늘이 없다는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적혀 있다. 실제로 투탕카멘의 무덤과 같은 고대 이집트의 여러 유적에서 건조된 마늘의 흔적이 발굴에서 발견된다.

대신에 유라시아 전역에서는 '야생마늘' 또는 '마늘'이라고 도 불리는 명이나물이 널리 애용되었다. 야생마늘은 학명으로도 'Allium ursinum L.'. 곰의 마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단군신화에 쑥과 마늘이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마 늘은 아마 곰마늘의 일종일 가능성이 더 크다. 최근 연구에서는 유럽의 24개 언어를 조사해본 결과 공통적으로 명이나물은 '곰마 늘' 또는 '파'로 부른다고 한다.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공통적으로 봄에 알싸한 곰마늘을 즐겨 먹었다. 마늘은 유라시아 전역에 분포해서 극동의 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니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마늘은 유라시아 전역에 서 자생하던 야생마늘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139쪽

이제까지 많은 연구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쑥과 마늘의 의미를 통과의례, 빛과 하늘의 신화. 글과 호랑이의 모텔 등 다양하게 해석 해왔다. 그런데 단군신화의 진짜 의의는 바로 유라시아의 보편성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핀란드에서 태평양 연안의 감사카까지 곰과 관련된 신화가 없는 부족은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지역에서 는 기나긴 겨울을 지나 등장하는 알싸한 곰마늘의 힘을 느낄 수 있 다. 어쩌면 곰마늘의 맛과 향에서 단군신화에서 잊혀진 또 다른 이 야기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 마늘이 우리가 지금 먹는 마늘이 아니었어?

곰신화를 가진 민족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터키에도 곰전설이 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다. 

 

8. 발해인들도 돼지고기를 좋아했을까
9. 중국 황제도 반한 고조선의 젓갈
10. 몸에 새겨진 시간의 기억

175쪽

대학원 시절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뼈로 만든 수백 개의 바늘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였기에 무덤 안에 바늘귀도 없는 바늘 수백 개를 넣었을까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그 바늘들이 침의 일종이라는 걸 밝혀낸 건 그로부터 20년이 훨씬 지난 2016년이었다.

서울대학교에는 과거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한반도는 물론 만 주 일대에서 모아둔 다양한 유물들이 있다. 다양한 컬렉션 중에서 도 특히 두만강 일대의 선사시대 유물과 발해의 유물이 많다. 그 이유는 1930년대 이후 일본이 만주 침략을 본격화 할 때 경성제국대 학의 사학과 교수들이 함께 만주 일대를 조사했기 때문이다. 이 뼈 바늘들은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지다 료사쿠가 1938년에 두 강 부근의 연길 소영자 유적을 조사할 때 발견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만주 일대를 군사기지화 하면서 소련과 접경한 연 변시 외곽에 비행기 격납고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약 3000년 전 의 고대 돌무덤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각 무덤에서는 10~30센티 미터 크기의 돌침과 뼈침이 수십 개씩 통에 넣어진 채로 발견되었고, 후지다는 그 유물들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놓았는데, 해방이 되면서 서울대 박물관으로 그 유물들이 고스란히 옮겨졌던 것이다. 후지다가 가지고 있던 자료들은 다행히도 1990년대 중반 최몽, 교수님이 되찾았다.

소영자 마을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11/2018011100165.html

 

11. 파괴와 복원, 고고학 발굴의 패러독스
12. 고고학을 꽃피우게 한 제국주의
13. 전쟁 속의 고고학

224쪽
미국 버지니아 출신 하워드 맥코드 대령은 직업군인이 된 이후 은퇴할 때까지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 등에서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그 지역의 유적을 조사하던 열성적인 고고학자였다. 한국전쟁 참전 당시 그의 부대는 경기도 가평의 북한강 지류에 위치한 마장리와 이곡리 근처에 캠프를 설치했고, 개인참호를 파다가 땅속에서 고대 집자리의 흔적과 유물들을 발견했다. 당시 맥코드는 참호 벽에 무문토기가 박혀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적어도 5개 이상의 집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예상 외로 대규모의 취락지임을 알아차린 그는 조사를 시작했다. 아쉽게도 전체 유적 발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참호로 파놓은 구덩이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유물들을 수거했다. 또한 지층을 파악해서 이 지역의 마을이 두 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다는 것도 밝혔다.

 

14. 문명은 짧고 인생은 길다

238쪽

기원 전 3500년경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달한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현재 파키스탄에 위치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유명한 하라파와 모헨조다로가 있다. 일찍이 이 지역은 영국의 고고학자들에 의 해 20세기 초반부터 널리 알려졌다. 인더스 문명이 전성기에 달한 중기 하라 시기인 기원전 2500년경에는 약 1000개 이상의 도시가 인더스강을 따라서 형성되었다. 이 강의 지류를 통해서 멀리 메 소포타미아와도 교역을 했다. 그리고 강물을 끌어들이는 관개를 해 서 농사도 발달했다. 성 안의 주거지에는 상하수도가 발달하여 목 욕탕과 화장실이 있을 정도로 고도의 문명을 만들었다. 인더스 문 명의 주변에는 삼림이 풍부하게 발달해 있었고, 강수자원도 풍부했 다. 금속 귀금속의 매장량도 풍부했으며 바닷가에 인접한 덕에 해산물이나 소금 같은 자원을 얻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교역은 자연스럽게 발달되었다.

그런데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에 갑자기 사라졌다. 도시는 발달했지만, 궁전이나 무덤 같은 유적은 없었다. 발견된 무덤은 대부분 너무 소박해서 계급의 차이를 알아내는 것도 힘들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유적지에는 사원이나 군대의 흔적도 없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다른 이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서서히 멸망했다는 이론이다. 인더스 문명은 물길을 따라서 교역을 하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다. 때문에 엄청난 토사를 매년 토해내는 인더스강에 기후 변화가 닥쳐서 갑자기 물결 이 바뀌면 그들이 쌓아놓은 거대한 문명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물길이 바뀌어서 교역을 하던 배가 들어올 수 없고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면 사람들은 재빠르게 각자도생을 구하면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자 료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인더스 문명에서는 서로 전쟁을 했던 혼 적이 없고 강력한 왕도 없었다. 그들의 집이나 무덤의 크기도 일정 해서 사람들 사이에 계급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그러니 강력한 왕 의 지시나 전쟁으로 이 도시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홍산 문명은 터키의 괴베클리 테베 문명과 비슷한 것 같다.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거대한 신전을 남겼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4%B4%EB%B2%A0%ED%81%B4%EB%A6%AC_%ED%85%8C%ED%8E%98

터키의 괴베클리 테베 문명은 사냥과 채집을 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신전을 만들었었다. 조상 숭배가 아닌, 말 그대로 신을 위한 신전이다. 홍산문화는 거대한 조상의 위한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현실적이지 않은 것을 추모하는 행위이지만 대상이 다른 것이다. 

또 인더스 문명은 아예 신전이나 거대 무덤이 없었다. 

다른 문화는 달리 동아시아는 꽤 오래 전부터 조상에 대한 숭배가 발달했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제사를 보아 온 한국인으로서 제사는 당연한 가족행사라고 믿어왔으나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행위가 아닌 동아시아의 독특한 행태라는 것을 성장해서야 알게되었다. 따라서 현대에도 한국의 며느리들을 괴롭히는 제사가 꽤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이게 홍산문화 때문?

 

241쪽
만주에서 고도로 발달했던 홍산문화도 인더스 문명과 비슷하다. 인더스 문명과 비슷한 기원전 4000~3500년에 홍산문화는 번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문명의 차이는 크다. 인더스 문명은 물길을 통한 원거리 교역을 기반으로 상수도가 완비된 성과 도시들이 발달 했다. 반면에 홍산문화의 주민들은 움집으로 마을을 이루며 살았는 데, 마을의 규모는 작았고 성벽을 쌓지도 않았다. 대신에 제사가 고도로 발달해 거대한 무덤과 제단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니우량 에서는 피라미드형 돌무덤과 직경 수백 미터에 이르는 제단과 무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진흙으로 빚은 여신상 을 모신 여신묘 신전 등 대형 제사유적지 16곳이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에 모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정작 이상한 건 유적의 100킬로미터 이내에서 사람들이 살 만한 성터나 마을이 아직까지 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니우허량 일대는 제사만 을 지내는 성스러운 지역이었던 것이다. 제사신전이 거의 없는 인 더스 문명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멸망의 과정만은 인더스 문명과 흡사하다. 홍산문화는 기원전 2700년 이후에 갑자기 사라졌고, 거대한 니우허량의 제사터는 그냥 버려졌다. 니우허량의 제사터들은 지금도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는데, 홍산문화 이후 다른 사람들이 제사를 지냈던 흔적은 전혀 없다. 홍산문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이 제사터를 완전히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244쪽

홍산문화의 다음에는 거대한 제단이 사라지고 작은 마을과 무덤만 나오는 샤오옌문화 기원전 2700~2200년)가 이어졌다. 샤오옌문화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고,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며 살았다. 당시 기후가 극도로 추워 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구는 급격히 줄었고, 마을도 작아졌다. 이 렇게 바뀐 환경에서 사람들은 거대한 제단을 공동으로 건설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신에 직경이 3미터밖에 안 되는 조그만 움집 안에 다양한 부적, 신상들을 모셨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샤오옌문화의 제사 관련 유물과 토기는 홍산문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잇고 있었다. 홍산문화에서 제사를 지내 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작은 마을 단위로 그 전통을 지켜나 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샤오옌문화는 기후와 환경의 변화로 인해 홍산문화가 쇠퇴한 결과로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샤오옌문화는 단순한 쇠퇴가 아니라 홍산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며 문화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도기였다. 샤오옌문화는 중앙집중화 된 제사 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대 신에 작은 마을로 쪼개져서 각 마을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제사장 중심의 사회에서 탈피하여 지역 공동체 간 네트워크가 강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에 기후 가 다시 온난해지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도시를 만들었던 사자덴하층문화의 사람들은 오기 대신에 청동기를 사용했고 강을 따라서 거대한 성을 수백 개나 건설했다. 계급도 뚜렷하게 나뉘었고, 평균 수명도 40세 전후에 이를 정도로 연장되었다. 중국 학계에서는 사자덴하층문화를 중국의 하나라에 비견하는 국가의 등장으로 본다.

요서지역에서 홍산문화로 시작되어서 비파형동검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은 만주 일대에서도 아주 독특하여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중국과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 서 매년 이 유적을 조사하는 것도 이 지역에서 독특한 문명이 발생 했던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홍산문화

 https://ko.wikipedia.org/wiki/%ED%9B%99%EC%82%B0_%EB%AC%B8%ED%99%94

이 저자의 책들을 통해 홍산문화를 처음 알게 되었다.

15. 그들은 왜 유물을 위조했는가
16. 고고학자의 시행착오와 해프닝
17. 황금 유물을 둘러싼 운명들

284쪽
그런데 소련이 망하고 러시아가 들어선 후, 엉뚱하게도 트로이의 황금 유물은 러시아 푸시킨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 졌다. 히틀러의 패망이 가시화될 무렵 소련은 전쟁 중에 독일이 소련 영토 내에서 자행한 파괴를 보상받겠다는 명분으로 전리품 연 대Russian Alsos를 창설했다. 이 전리품 연대는 독일군의 핵무기, 첨단 무기뿐만 아니라 문화재 등 소련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

어릴 때 책을 읽으면서 트로이의 유물이 전쟁 통에 사라졌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유물들이 사실은 소련이 전쟁 통에 훔쳐가서 숨겼단다. ㅋ ㅋ 남의 유물을 서로 뺏고 훔치고 있다.

 

18. 고고학이 밝히는 미래
에필로그. 어디에도 없는 혹은 어디에나 있는

 

책에 등장하는 유적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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