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저자의 책을 읽을 때는 출판 시기 순서로 읽는 것이 저자들의 사고 발달 과정을 일을 수 있어 좋은데 이 저자의 책은 우연히(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빌리다가 눈에 띄었다.) 읽게 되어 가장 최근 책인 '테라 인코그니타' 먼저 읽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도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우리가 '정설'로 알고 있는 고고학적 사실이 사실로 판단되기 까지 발굴의 역사, 해석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어 재미있다. 고고학적인 유물은 발굴되고 나서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무엇인지 인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릴 때 서양에서 나온 공룡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는 공룡이 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공룡의 흔적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서 중요한 것은 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자랄 때는 나라에 돈이 없어서 공룡까지 발굴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경제가 좀 여유로우니 공룡 연구도 하고 고고학 연구도 활발해 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최근에 경주의 한 무덤에서 180cm 되는 시신을 새로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 중동이나 중앙 아시아인? 조사할 수 있는 DNA가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정말 흥미롭다.
또 저자의 책들을 짧은 기간에 함께 읽으므로서 각각의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화를 기억하게 되었다. 중국의 홍산 문화는 내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약간 애매한 위치에 있기에 이걸 가지고 우리 민족과 연결 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중국의 한족과 연결 시키는 것도...... 그냥 먼저 살았던 사람들일 뿐이다.
목차
서문 고고학자의 비밀노트를 꺼내며
책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들
프롤로그. 고고학, 과거와 미래를 잇는 현재라는 다리
1. 죽은 이를 위한 사랑의 흔적
30쪽
그런 의미에서 무덤은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제2의 자궁과 은 곳이다. 무렵에 사람을 묻을 때에 우리는 죽은 사람이 완전히 라지는 것이 아니라 저승에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을 기대한다. 러 다양한 무덤 중에서 항아리에 사람을 묻는 독무덤 (옹관묘)이 는 것이 있다. 이 독무덤은 마한시대에 우리나라 전라남도 일대 서 널리 쓰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 독무덤은 전 세계적 로 어린아이가 죽으면 넣어서 묻는 풍습으로 널리 퍼져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의 관을 항아리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항아리는 곧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죽어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아가듯 몸을 구부려서 넣는 독무덤만큼 무덤의 의미를 상징적으 잘 표현하는 유물도 없다.
무덤은 매장과 제사라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 그 의미를 체화시키는 상징이었다. 무덤이라는 거대한 제단에 정 적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세계로 나아 가는 과정이 되었다. 즉, 무덤은 죽음이라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죽음이 다시 태어나는 황홀한 경험의 장eroricizing deat으로 만들었다. 사람의 죽음이라는 가장 꺼리는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 로 무덤을 만들고, 그들을 기억하는 제사를 마치 축제처럼 지냈으 로써 고대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할수있었다.
보통 대학의 박물관에 가면 옹관묘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볼 때 마다 궁금했었다. 왜 저렇게 만들었는지....
2. 불에 깃든 황홀과 허무
3. 술, 신이 허락한 음료
4. 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77쪽
시베리아의 버섯 중에는 유독 빨갛고 예쁘게 생긴 것이 있다 대버섯으로, 환각작용도 크고 치명적인 독도 가진 위험한 버섯 다. 그런데 과거 사제들은 의식을 행할 때 이 독버섯의 약효를 하기도 했다. 시베리아의 시민들은 하늘과 맞닿는 엑스타시( 초월상태)를 일으켰는데, 이러한 정황은 유라시아 초원 일대의 입주 남아 있다.
알타이 칼바다시 암각화를 비롯해 다양한 입각화에 나타난 시민들의 모습은 공통적으로 머리가 버섯 모양이었다. 기독교나 불교교 할 것 없이 신격화된 모습은 머리 뒤로 아우라 같은 광채가 비치는 것으로 표현된다. 시베리아의 샤먼들은 광채 대신에 머리에서 버섯이 자라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 버섯 머리의 샤먼은 알래스카와 이어지는 북극해 추코트카 반도의 페그티멜 암각화에서도 발견되었다. 페그티멜 암각화는 한국에서도 제법 알려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와 마찬가지로 고래잡이를 하는 장 면이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암각화에서도 이런 버섯머리의 샤먼이 발견된다. 이는 1만 5000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버섯을 이용한 샤먼 들이 유라시아 곳곳에 있었고, 이들의 일파가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는 증거일 것이다.
몽골 울란바토르 근처에 약 2000년 전에 만들어진 흉노 선우(왕) 고분에서도 버섯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로 2007년에 발굴된 노 인-울라 20호 고분이다.
페그티멜 암각화 https://en.wikipedia.org/wiki/Petroglyph
5. 마음을 울리는 소리 없는 음악
93쪽
샤먼은 나무 근처에 마치 병풍처럼 그들의 세계관을 묘사한 신화를 표현한 가죽그림을 걸었다. 이로써 샤먼 의식의 준비는 마친 셈이다. 분위기가 고조된 순간 치장을 마친 샤먼이 다시 등장했다. 황금빛의 청동 방울과 거울을 몸에 주렁주렁 걸친 샤먼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영롱한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샤먼의 가슴에 건 거울 은 햇빛을 반사해 마치 가슴에 태양을 품고 있는 듯했다. 샤먼은 천 천히 북을 치면서 낮은 목소리로 구절을 읊었다. 옆에서 악사들은 과정을 치면서 샤먼의 의식을 도와주고 있었다. 특히 심벌즈 같이 생긴 집에서 울려 퍼지는 그 영롱한 울림은 나를 홀렸다. 샤먼의 의식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제 의식을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세형동검 문화 시기인 2400년 전에 등장하는 동검과 청동방울, 거울도 바로 샤먼의 도구였다. 우리나라 세형동검문화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유사하게 생긴 청동방울과 거울은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의 샤먼들이 지금도 여전히 쓰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국보로 지정된 팔주령(여덟 개의 방울이 달린 도구)과 장대에 다는 방울 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북처럼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 도 있었다. 둥근 거울처럼 생긴 청동기로, 이름은 원개형동기(둥근 모양의 청동기)라고 한다.
시베리아 샤먼 https://en.wikipedia.org/wiki/Shamanism_in_Siberia
부리야트 공화국 https://en.wikipedia.org/wiki/Buryats
101쪽
약 3000년 전을 전후하여 전차로 전쟁을 하던 시대가 끝나게 되면서 전차는 전쟁무기가 아닌 하늘의 전령사나 지혜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전차를 타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나 고대 인도에서 지혜로 세계를 통치하는 전륜성왕이 전차의 바퀴 로 표현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렇게 전차가 하늘과 땅을 잇는 소통의 도구로 바뀌면서 전차에 달린 방울도 한반도를 포함한 유라시아 일대에서는 샤먼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샤먼의 도구로서 청동방울을 본격적인 악기로 발달시킨 나라는 중국이었다.
103쪽
바르간의 원리는 악기를 이빨 사이에 끼우고 철판을 튕기는 것 이다. 입은 공명통 역할을 하니 입 모양을 다양하게 해서 그 소리의 울림을 조절한다. 한국에서는 이 악기를 본 사람은 물론이고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유목민들에게서만 널리 유행했기 때 문이다. 유럽으로는 13세기가 되어서야 전래가 되었지만, 동아시아 에서는 이미 3500년 전의 무덤에서 구금이 출토되었다.
2014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고고민족학연구소에 자료 를 조사하러 갔다. 친한 고고학자 니나 레센코(그녀는 나와 몇 해 동 안 크라스키노의 발해 유적을 발굴했다)가 보여줄 것이 있다며 나를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머리핀처럼 생긴 손가락 크기의 철기 유물을 보여주었다.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바로 바르간이에요. 발해유적에서는 처음 나왔답니다."
바르간 https://en.wikipedia.org/wiki/Jew%27s_harp
바르간이 서양에서는 유태인 하프로 알려져 있나보다.
106쪽가야금 이전에도 또 다른 현악기가 있었다. 서양에서 발달해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과 한국으로 전래된 하프의 일종인 후이다. 이 공후는 동쪽으로는 알타이까지 이어졌다. 고조선 가요인 <공무도하가>는 공후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가요를 채록한 사람은 고조선의 하급관리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당대 또는 고조선 멸망 직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 지은이에 대해서는 뱃사공, 곽리자고,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 등 다 양한 설이 있는데, 아마 많은 노래가 그러하듯 채록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 <공무도하가>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고대가요가 되었다. <공무도하가>는 1세기 때 채옹의 '금조',에, 1세기 초에 쓰여진 최표의 '고금주'에 이미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 동아시아 일대에서도 널리 사랑받았다.
<공무도하가>가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건 역설적이게도 고조선 을 멸망시킨 한무제의 역할이 컸다. 한무제는 음악을 관장하는 악 부를 설치해 사방의 노래를 체계적으로 수집했다. 당시 악부의 노 래 채록은 다양한 노래를 통해 군가를 제정하여 각지로 파견되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공무도하가>는 서글픈 사랑의 노래로, 가족들을 고향에 두고 떠난 군인들의 심금을 울렸 을 것이다.
114쪽
여기서 주목되는 유목민들이 바로 앞서 언급한 중국 만리장성 지대에서 널리 흥했던 흉노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고조선을 흉노의 왼쪽 어깨라고 할 정도로 흉노와 고조선은 서로 통했다. 또한 기원전 4세기경에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번성했던 유목민족들은 실크로드를 따라서 만리장성을 따라 동아시아로 진출했고, 고조선과 맞닿았다. 이러한 고조선과 초원 지역과의 연관성은 황금, 철제 무 기와 마구에 잘 남아 있다. 중원을 거치지 않고 고조선이 직접 중 앙아시아 초원 지역의 유목문화로부터 공후를 수입했을 가능성이 더 큰 건 이 때문이다. 초원 지역과 많은 교류를 했던 발해 정효공주의 무덤 벽화에도 휴대용 공휴가 그려져 있다. 이렇듯 고조선 이 후에도 우리의 고대사에서 공후로 대표되는 초원의 음악은 계속 연 주되었던 것 같다. <공무도하가>는 이처럼 서역의 음악과 이어졌던 2000년 전의 교류를 반증해주는 귀한 자료이다.
고고학책을 읽다보면 한반도는 최소한 삼국시대 이전에는 중국의 영향 만큼이나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나의 역사적 사고가 너무 중국 중심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 빛바랜 유물에 숨어 있는 화려함
124쪽
2000년 전 유라시아의 최대 군사강국이었던 흉노를 무너뜨린 것은 강대한 군사력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간파하고 흔들던 중국의 화려한 사치품들이었던 것이다. 단조로운 초원의 빛깔에 싫증을 내 어 아름다운 빛깔을 탐한 결과가 나라의 멸망이라니. 진정한 경국 지색은 이런 것이 아닐까.
7. 지난 세월의 향기
137쪽
마늘은 한나라 때에 실크로드를 따라서 아시아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쪽마늘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히브리 노예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이라고 구약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모세가 이 집트를 탈출한 엑소더스 이후에 히브리인들이 마늘이 없다는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적혀 있다. 실제로 투탕카멘의 무덤과 같은 고대 이집트의 여러 유적에서 건조된 마늘의 흔적이 발굴에서 발견된다.
대신에 유라시아 전역에서는 '야생마늘' 또는 '마늘'이라고 도 불리는 명이나물이 널리 애용되었다. 야생마늘은 학명으로도 'Allium ursinum L.'. 곰의 마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단군신화에 쑥과 마늘이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마 늘은 아마 곰마늘의 일종일 가능성이 더 크다. 최근 연구에서는 유럽의 24개 언어를 조사해본 결과 공통적으로 명이나물은 '곰마 늘' 또는 '파'로 부른다고 한다.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공통적으로 봄에 알싸한 곰마늘을 즐겨 먹었다. 마늘은 유라시아 전역에 분포해서 극동의 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니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마늘은 유라시아 전역에 서 자생하던 야생마늘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139쪽
이제까지 많은 연구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쑥과 마늘의 의미를 통과의례, 빛과 하늘의 신화. 글과 호랑이의 모텔 등 다양하게 해석 해왔다. 그런데 단군신화의 진짜 의의는 바로 유라시아의 보편성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핀란드에서 태평양 연안의 감사카까지 곰과 관련된 신화가 없는 부족은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지역에서 는 기나긴 겨울을 지나 등장하는 알싸한 곰마늘의 힘을 느낄 수 있 다. 어쩌면 곰마늘의 맛과 향에서 단군신화에서 잊혀진 또 다른 이 야기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 마늘이 우리가 지금 먹는 마늘이 아니었어?
곰신화를 가진 민족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터키에도 곰전설이 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다.
8. 발해인들도 돼지고기를 좋아했을까
9. 중국 황제도 반한 고조선의 젓갈
10. 몸에 새겨진 시간의 기억
175쪽
대학원 시절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뼈로 만든 수백 개의 바늘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였기에 무덤 안에 바늘귀도 없는 바늘 수백 개를 넣었을까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그 바늘들이 침의 일종이라는 걸 밝혀낸 건 그로부터 20년이 훨씬 지난 2016년이었다.
서울대학교에는 과거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한반도는 물론 만 주 일대에서 모아둔 다양한 유물들이 있다. 다양한 컬렉션 중에서 도 특히 두만강 일대의 선사시대 유물과 발해의 유물이 많다. 그 이유는 1930년대 이후 일본이 만주 침략을 본격화 할 때 경성제국대 학의 사학과 교수들이 함께 만주 일대를 조사했기 때문이다. 이 뼈 바늘들은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지다 료사쿠가 1938년에 두 강 부근의 연길 소영자 유적을 조사할 때 발견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만주 일대를 군사기지화 하면서 소련과 접경한 연 변시 외곽에 비행기 격납고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약 3000년 전 의 고대 돌무덤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각 무덤에서는 10~30센티 미터 크기의 돌침과 뼈침이 수십 개씩 통에 넣어진 채로 발견되었고, 후지다는 그 유물들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놓았는데, 해방이 되면서 서울대 박물관으로 그 유물들이 고스란히 옮겨졌던 것이다. 후지다가 가지고 있던 자료들은 다행히도 1990년대 중반 최몽, 교수님이 되찾았다.
소영자 마을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11/2018011100165.html
11. 파괴와 복원, 고고학 발굴의 패러독스
12. 고고학을 꽃피우게 한 제국주의
13. 전쟁 속의 고고학
224쪽
미국 버지니아 출신 하워드 맥코드 대령은 직업군인이 된 이후 은퇴할 때까지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 등에서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그 지역의 유적을 조사하던 열성적인 고고학자였다. 한국전쟁 참전 당시 그의 부대는 경기도 가평의 북한강 지류에 위치한 마장리와 이곡리 근처에 캠프를 설치했고, 개인참호를 파다가 땅속에서 고대 집자리의 흔적과 유물들을 발견했다. 당시 맥코드는 참호 벽에 무문토기가 박혀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적어도 5개 이상의 집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예상 외로 대규모의 취락지임을 알아차린 그는 조사를 시작했다. 아쉽게도 전체 유적 발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참호로 파놓은 구덩이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유물들을 수거했다. 또한 지층을 파악해서 이 지역의 마을이 두 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다는 것도 밝혔다.
14. 문명은 짧고 인생은 길다
238쪽
기원 전 3500년경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달한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현재 파키스탄에 위치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유명한 하라파와 모헨조다로가 있다. 일찍이 이 지역은 영국의 고고학자들에 의 해 20세기 초반부터 널리 알려졌다. 인더스 문명이 전성기에 달한 중기 하라 시기인 기원전 2500년경에는 약 1000개 이상의 도시가 인더스강을 따라서 형성되었다. 이 강의 지류를 통해서 멀리 메 소포타미아와도 교역을 했다. 그리고 강물을 끌어들이는 관개를 해 서 농사도 발달했다. 성 안의 주거지에는 상하수도가 발달하여 목 욕탕과 화장실이 있을 정도로 고도의 문명을 만들었다. 인더스 문 명의 주변에는 삼림이 풍부하게 발달해 있었고, 강수자원도 풍부했 다. 금속 귀금속의 매장량도 풍부했으며 바닷가에 인접한 덕에 해산물이나 소금 같은 자원을 얻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교역은 자연스럽게 발달되었다.
그런데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에 갑자기 사라졌다. 도시는 발달했지만, 궁전이나 무덤 같은 유적은 없었다. 발견된 무덤은 대부분 너무 소박해서 계급의 차이를 알아내는 것도 힘들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유적지에는 사원이나 군대의 흔적도 없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다른 이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서서히 멸망했다는 이론이다. 인더스 문명은 물길을 따라서 교역을 하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다. 때문에 엄청난 토사를 매년 토해내는 인더스강에 기후 변화가 닥쳐서 갑자기 물결 이 바뀌면 그들이 쌓아놓은 거대한 문명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물길이 바뀌어서 교역을 하던 배가 들어올 수 없고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면 사람들은 재빠르게 각자도생을 구하면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자 료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인더스 문명에서는 서로 전쟁을 했던 혼 적이 없고 강력한 왕도 없었다. 그들의 집이나 무덤의 크기도 일정 해서 사람들 사이에 계급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그러니 강력한 왕 의 지시나 전쟁으로 이 도시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홍산 문명은 터키의 괴베클리 테베 문명과 비슷한 것 같다.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거대한 신전을 남겼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4%B4%EB%B2%A0%ED%81%B4%EB%A6%AC_%ED%85%8C%ED%8E%98
터키의 괴베클리 테베 문명은 사냥과 채집을 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신전을 만들었었다. 조상 숭배가 아닌, 말 그대로 신을 위한 신전이다. 홍산문화는 거대한 조상의 위한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현실적이지 않은 것을 추모하는 행위이지만 대상이 다른 것이다.
또 인더스 문명은 아예 신전이나 거대 무덤이 없었다.
다른 문화는 달리 동아시아는 꽤 오래 전부터 조상에 대한 숭배가 발달했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제사를 보아 온 한국인으로서 제사는 당연한 가족행사라고 믿어왔으나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행위가 아닌 동아시아의 독특한 행태라는 것을 성장해서야 알게되었다. 따라서 현대에도 한국의 며느리들을 괴롭히는 제사가 꽤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이게 홍산문화 때문?
241쪽
만주에서 고도로 발달했던 홍산문화도 인더스 문명과 비슷하다. 인더스 문명과 비슷한 기원전 4000~3500년에 홍산문화는 번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문명의 차이는 크다. 인더스 문명은 물길을 통한 원거리 교역을 기반으로 상수도가 완비된 성과 도시들이 발달 했다. 반면에 홍산문화의 주민들은 움집으로 마을을 이루며 살았는 데, 마을의 규모는 작았고 성벽을 쌓지도 않았다. 대신에 제사가 고도로 발달해 거대한 무덤과 제단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니우량 에서는 피라미드형 돌무덤과 직경 수백 미터에 이르는 제단과 무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진흙으로 빚은 여신상 을 모신 여신묘 신전 등 대형 제사유적지 16곳이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에 모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정작 이상한 건 유적의 100킬로미터 이내에서 사람들이 살 만한 성터나 마을이 아직까지 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니우허량 일대는 제사만 을 지내는 성스러운 지역이었던 것이다. 제사신전이 거의 없는 인 더스 문명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멸망의 과정만은 인더스 문명과 흡사하다. 홍산문화는 기원전 2700년 이후에 갑자기 사라졌고, 거대한 니우허량의 제사터는 그냥 버려졌다. 니우허량의 제사터들은 지금도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는데, 홍산문화 이후 다른 사람들이 제사를 지냈던 흔적은 전혀 없다. 홍산문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이 제사터를 완전히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244쪽
홍산문화의 다음에는 거대한 제단이 사라지고 작은 마을과 무덤만 나오는 샤오옌문화 기원전 2700~2200년)가 이어졌다. 샤오옌문화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고,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며 살았다. 당시 기후가 극도로 추워 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구는 급격히 줄었고, 마을도 작아졌다. 이 렇게 바뀐 환경에서 사람들은 거대한 제단을 공동으로 건설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신에 직경이 3미터밖에 안 되는 조그만 움집 안에 다양한 부적, 신상들을 모셨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샤오옌문화의 제사 관련 유물과 토기는 홍산문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잇고 있었다. 홍산문화에서 제사를 지내 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작은 마을 단위로 그 전통을 지켜나 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샤오옌문화는 기후와 환경의 변화로 인해 홍산문화가 쇠퇴한 결과로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샤오옌문화는 단순한 쇠퇴가 아니라 홍산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며 문화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도기였다. 샤오옌문화는 중앙집중화 된 제사 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대 신에 작은 마을로 쪼개져서 각 마을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제사장 중심의 사회에서 탈피하여 지역 공동체 간 네트워크가 강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에 기후 가 다시 온난해지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도시를 만들었던 사자덴하층문화의 사람들은 오기 대신에 청동기를 사용했고 강을 따라서 거대한 성을 수백 개나 건설했다. 계급도 뚜렷하게 나뉘었고, 평균 수명도 40세 전후에 이를 정도로 연장되었다. 중국 학계에서는 사자덴하층문화를 중국의 하나라에 비견하는 국가의 등장으로 본다.
요서지역에서 홍산문화로 시작되어서 비파형동검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은 만주 일대에서도 아주 독특하여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중국과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 서 매년 이 유적을 조사하는 것도 이 지역에서 독특한 문명이 발생 했던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홍산문화
https://ko.wikipedia.org/wiki/%ED%9B%99%EC%82%B0_%EB%AC%B8%ED%99%94
이 저자의 책들을 통해 홍산문화를 처음 알게 되었다.
15. 그들은 왜 유물을 위조했는가
16. 고고학자의 시행착오와 해프닝
17. 황금 유물을 둘러싼 운명들
284쪽
그런데 소련이 망하고 러시아가 들어선 후, 엉뚱하게도 트로이의 황금 유물은 러시아 푸시킨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 졌다. 히틀러의 패망이 가시화될 무렵 소련은 전쟁 중에 독일이 소련 영토 내에서 자행한 파괴를 보상받겠다는 명분으로 전리품 연 대Russian Alsos를 창설했다. 이 전리품 연대는 독일군의 핵무기, 첨단 무기뿐만 아니라 문화재 등 소련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
어릴 때 책을 읽으면서 트로이의 유물이 전쟁 통에 사라졌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유물들이 사실은 소련이 전쟁 통에 훔쳐가서 숨겼단다. ㅋ ㅋ 남의 유물을 서로 뺏고 훔치고 있다.
18. 고고학이 밝히는 미래
에필로그. 어디에도 없는 혹은 어디에나 있는
책에 등장하는 유적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