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사고를 당해 가족을 잃고 되는 대로 살아가던 다쿠미 앞에 거물급 지면사(地面師, 타인의 부동산을 이용하여 돈을 가로채는 사기꾼) 해리슨 야마나카가 나타난다. 각종 부동산 거래 법령은 물론 자치체 조례에도 정통하고 형사소송법 조문과 판례를 술술 암송할 정도로 박식한 해리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다쿠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면사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며 자신의 조직에 합류시킨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지난 15년간 북스피어가 의뢰한 작품 중 가장 재미있었다.”는 번역가 이규원의 호평 때문에 혹시 영화 ‘오션스 일레븐’처럼 악당들이 주인공인 유쾌한 스릴러가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남의 부동산을 이용하여 돈을 가로채는 지면사가 주인공이라는 점 때문에 100% 유쾌할 수만은 없겠다는 묘한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됐습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어본 작가라 이력을 찾아보니 사회초년생을 착취하는 부동산 블랙기업, 다단계 판매에 빠져드는 젊은이들, 사회에서 이탈하고 마약을 팔아 연명하는 청년 등 주로 어둡고 무거운 사회파 미스터리를 써온 걸 알 수 있었는데, ‘도쿄 사기꾼들’은 그중에서도 영상으로 제작될 만큼 리얼리티와 서스펜스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지면사의 사기극은 여러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이뤄집니다. 사기 계획을 총지휘하는 지면사, 정보를 수집하고 타깃을 물색하는 도면사, 원 소유주를 사칭할 배우를 고르고 교육시키는 수배사, 서류와 인감을 만드는 위조범과 돈을 세탁하는 전문가가 그들입니다. 목표물을 정하고 각종 서류를 위조한 뒤 가짜 소유주를 내세워 부동산을 팔아치우고 나면 각자 흩어져 공백기를 가지다가 다시금 모여 새로운 목표물을 물색하곤 합니다. 피해자 입장에선 가짜 소유주에게 거액을 뜯긴 치명적인 사건이지만 경찰로선 단서도 없고 용의자를 특정하기도 어렵다 보니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는데도 수사력을 대거 투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물급 지면사인 해리슨의 휘하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은 다쿠미는 주인공이긴 해도 좀 독특한 이력을 지닌 사기꾼입니다. 안정적이던 가업이 한 사기꾼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진 뒤 가족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고, 홀로 남은 다쿠미는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억지로 살아가는 고난에 빠져있었습니다. 가업을 망친 사기극이 자신에게서 비롯됐다는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지만 그렇다고 죽어야겠다는 의지가 강렬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밑바닥을 전전하던 중 우연히 만난 해리슨을 통해 지면사로 살아가게 됐지만, 그는 딱히 돈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다. 단지 지면사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기 때문에 해리슨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다만 그의 마음속엔 일부러 죄를 거듭함으로써 과거의 비극을 잊어버리고 싶다는 묘한 위악감이 자리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모든 게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과연 가짜 소유주와 가짜 서류를 내세워 타인의 부동산을 갈취하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작가는 엄청난 취재와 자료조사를 통해 지면사의 사기극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그래선지 지면사의 철두철미한 사기 행각을 읽다 보면 보이스피싱이나 스미싱 같은 건 애교처럼 보일 정도라서 ‘언제든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라는 두려움과 함께 여러 차례 섬뜩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비슷한 수법의 사기극이 한국에서도 횡행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머잖아 지면사라는 명칭이 뉴스에 등장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도쿄 사기꾼들’은 단순히 사기 행각을 상세하게 그린 사회파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돈 자체보다 사기의 쾌락과 희열을 추구하는 사이코패스부터 돈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동료들을 배신할 준비가 돼있는 야비한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캐릭터들로 구성된 조직의 행태도 흥미롭고, 과거 자신이 놓쳤던 거물 지면사를 잡기 위해 분투하는 말년 형사의 추적극도 눈길을 끕니다. 거듭 죄를 지음으로써 과거의 비극을 회피하려는 주인공 다쿠미는 독자로 하여금 미워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게 만드는 캐릭터라서 그가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무척 궁금하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도쿄 사기꾼들’은 리얼리티 충만한 범죄 서스펜스이자 사기극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갖가지 심리까지 맛볼 수 있는 다양한 서사가 담긴 작품이란 뜻입니다.
신조 고의 사회파 미스터리가 한국에 더 소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두 작품쯤은 더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가 다룬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리얼리티가 잘 살아있는 생생한 묘사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를 사기에 관대한 나라라고 말한다. 사기를 치도 형량이 생각보다 높지 않아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이겠지. 생각해 보면 나는, 감사하게도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사기꾼(?)들이 봤을 때, 나는 ‘돈’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구나 싶다. 하지만 꼭 돈이 많다고 해서 사기를 당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최대한의 돈을 빼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사기꾼이겠지. 이번에 읽은 책은 대형 판을 짜는 사기꾼들의 이야기다.
다쿠미는 불의의 사고로 자신의 가족을 잃고 죽지 못해 되는 대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다쿠미 앞에 거물급 지면사 해리슨이 나타난다. 해리슨은 각종 부동산 거래 법령부터 지자체 조례에도 능통한, 거기에 형사소송법과 판례를 암기할 정도로 해박한 사람이다. 해리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재능을 가진 다쿠미에게 지면사로서 요구되는 기술을 가르쳐주며 자신의 조직에 합류시킨다. 부동산 사기를 계획하고 지휘하는 해리슨, 정보를 수집하고 타깃을 물색하는 다케시타, 토지 소유자를 사칭할 배우를 물색하고 교육하는 레이코, 서류와 인감을 만드는 위조범, 돈을 받아 세탁하는 전문가 나가이 그리고 몰이꾼 고토까지. 이들이 노리는 이는 돈 많은 노인, 독신 여성 등 다양하다. 이들은 과연 죄 값을 치르게 될까?
타인의 부동산을 미끼로 돈을 가로채는 사람들. 어떻게 저런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냐고 의아해하겠지만,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사기 치기로 마음먹은 사람 앞에 사기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우리나라도 몇백억의 전세사기꾼이 있었다. 그들이 잡혔는지, 이후 후속 기사가 나오지 않았으니 잘 모른다. 바지사장을 내세워 자신은 쏙 빠진 사람들. 사기를 당한 사람에게 너희가 잘못해서 사기를 당한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게 내가 혹은 우리가 될 수 있는 판국에?
사기를 치고 각자 자신들의 방식으로 외국에 나가 있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들어와 사기 칠 대상을 물색한다. 사기 금액을 나누는 방식은 일정하다. 누가 많든 적든 금액이 크니, 딱히 불만은 없을 수 있지만, 해리슨이라는 인간은 정말 나쁜 사람이다. 사기에서 손을 떼려고 하는 이들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하는 사람이니까. 3자가 봤을 때, 신사적으로 나이 든, 꽤 괜찮을 수 있는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홀리고 사기의 총지휘를 하는 사람. 누군가는 관상은 과학이라고 하지만, 겉으로 보는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니. 명품을 휘감고 잰틀하고 해박한 지식과 현란한 말로 관중을 압도하니, ‘혹’할 수밖에.
부동산 전문 사기꾼. 이렇게 큰 규모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무섭다. 그 사람들에게 타깃이 되면 누구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까. 넷플릭스 드라마로 제작되었다고 하니. 넷플릭스에서 찾아봐도 좋겠다. ‘신조 고’ 작가의 책은 처음이었는데 재미있다. 이 작가의 책이 한국에 얼마나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