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처벌, 응분의 대가’를 논의의 중심으로 하는 두 철학 거장의 논쟁이다. 한 사람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자유의지 회의론자인 ‘그레그 카루소(이하 카루소라 함)’이며, 인지 심리학자로 국내에 잘 알려진 ‘대니얼 데닛(이하 데닛이라 함)’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자유의지 양립가능론자이다. 사실 이렇게 단순 명쾌하게 논쟁자들의 신념을 범주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 논쟁의 첫 번째 주제인 자유의지조차도 하나의 의미로 정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특히 관념적 언어의 경우 어쩌면 십인십색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는 이 두 논쟁자의 경우에는 언어의 해석과 정의의 문제에서부터 논증 내용의 작은 모순이나 흠결(欠缺)조차도 그저 넘길 수 없는 첨예한 논의의 대상이 되곤 한다. 3부로 구성되어 각 주제별 논의를 심화하고 있는데, 그 격렬함으로 인해 각자의 논증 중에 비웃음과 경멸, 모욕이 점잖음 속에 예리한 칼날처럼 상대의 심중을 헤집는다. 상대의 주장에 대한 빈정거림과 자기주장을 강변하는, 이를테면 “내 견해는 뼛속까지 결과주의적”이라는 식으로 혐오의 반론을 전개하기까지 한다.
사실 실질적 논쟁에서 두 토론자가 어떤 합치된 견해로 수렴하는 일은 결코 발생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책을 읽기 전부터 예견되었던 것이다. 자유의지의 존재를 굳건히 믿는 자가 자유의지가 없다고 설득되거나 그 반대의 상황이 발생하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 게다. 책의 전체적 논지를 단순화하여 정리한다면 인간 개인의 도덕적 책임의 소유 여부에 따라 제도적 규범, 즉 법에 의한 단죄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격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판단도 분명 양분될 것이며, 이로부터 그 감상의 글도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일 터이다.
데닛의 주장은 “과거의 사실과 자연법칙이 하나의 미래를 가져온다”는 ‘결정론’과 “자연, 사회, 환경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합리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으로서 자유의지가 양립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카루소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지니지 않거나 적어도 그 존재를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으며, 행위자가 통제할 수 없는 인과적 결정인 결정론은 절대 양립 불가능하다”는 강한 양립 불가능론을 주장한다. 이 논쟁의 초석적인 두 입장에서부터 자유의지에 대한 정의는 서로 다르다. 데닛은 대개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자극에 대한 합리적 반응의 주체로서 사람을 보는 것이며, 카루소는 기본적인 응분에 따른 칭찬과 비난, 보상과 처벌을 받기위해 갖춰야하는 행동 통제력을 자유의지로 보고 있다. 사실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관련하여서는 카루소의 정의가 내겐 더 합리적으로 다가온다.
카루소의 정의를 지지하는 까닭은 이후 도덕책임의 발생과 관련한 결과주의와 계획주의 논의는 물론 사법제도와 형벌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기본적 응분’과 ‘행동 통제력’이 중대한 철학적, 윤리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데닛은 이 정의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응분과 통제력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목적으로 타당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겐 데닛이 도덕적 책임 부과에 대한 가장 악질적 이념인 ‘응보주의’라는 낙인을 사전에 회피하려는 것으로 의심을 갖게 했다. 응보주의란 “오직 범죄자가 저지른 행동에만 관심을 지니는 응분의 책임이라는 처벌 정당화” 이론이다. 이것은 미래의 좋은 결과를 극대화하거나 사회 안전 강화, 도덕적 교화를 통한 선(善)의 확대는 무시하고 응분에 따른 처벌만을 주장한다. 이러한 의심은 카루소도 데닛으로부터 거듭 발견하게 되는데, 완화하여 준(準)응보주의자가 아니냐고 확인하지만 데닛은 이에대해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표시한다.
데닛은 모든 인간은 자신의 판단과 분별력이 침해되거나 조작되지 않도록 주의할 책임을 져야하며, 이것은 성장 과정에서 충분히 자질을 배양하여 마땅한 도덕적 책임을 지는 인간이 되어야 하며, 또한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신의 한 행위에 대해서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며, 사회적 합의라는 계약주의에 의해 성립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응보주의에 근접한 논리로 보이지만 데닛은 이를 부정한다. 이것은 결과주의라는 회고적 비난과 처벌의 개념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지 응보주의에 의한 주장이 아니며, 더구나 긍정적 부가 효과 없이 처벌하는 응보주의와 달리 자신은 범죄자의 긍정적 개정을 상정하고 있으므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
“운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39쪽
카루소는 데닛의 이러한 주장, 즉 주체적인 사람은 자신이 한 일에 마땅히 책임을 져야한다는 논리를 거부한다. 모든 인간은 ‘구성적 운’과 ‘현재적 운’에 지배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구성적 운이란 어떤 가정에 태어날지, 어떤 장점과 재능, 성향, 신체적 특성을 타고날지 알 수 없는 운을 의미하며, 현재적 운이란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간주되는 행동이나 결정을 할 때 행위자의 기분, 우연히 든 생각, 주변 환경의 상황적 특성 등에 영향을 받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행위를 선택 결정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개체마다의 불평등성에 기초하여 인간 개체에게 도덕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부당하며, 따라서 이는 도덕적 책임이 들어설 자리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카루소 주장의 배경에는 운에 의해 조성된 인간 개체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기초하여 응분이라는 도덕적 책임을 씌워 징벌을 정당화하는 것과, 인간을 가혹하게 모욕하는 방식으로 다루고 그 불평등을 항구화하는 일을 합리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반박의 논리가 있다. 이에 더해 카루소는 “당신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당신은 혼자 힘으로 그 자리까지 오른 게 아닙니다.”고 하는데, 데닛은 이 발언이 위협적이라고 비난한다(60쪽). 여기서 두 논쟁자의 신념의 커다란 차이를 목격하게 된다. 공정성을 주제로 담론계를 달궜던 능력주의에 대한 불평등성의 문제에서 데닛은 능력주의가 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를 대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논쟁점을 모두 거론하는 것은 감상문의 목적도 아니기에 가장 치열한 논쟁 부분인 처벌과 도덕, 응분의 대가와 관련한 논의에 대한 소감으로 맺어야 할 것 같다. 아마 이것을 이렇게 정리해도 될 것 같다. 동일한 인간의 동일 범죄에 대한 처분, 격리와 감금의 좁혀지지 않는 차이의 논쟁이라고. 카루소는 기본적 응분이라는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의지회의론에 기초한 ‘공중보건격리모형’을 제시하며, 자유의지 없이도 사회의 도덕적 질서 유지와 안전, 나아가 선의 지향이 가능함을 역설한다. 이 모형의 주요 내용은 기본적 응분에 따른 도덕적 책임부과는 있을 수 없으며, 전염병 보균자가 병에 걸린 것이 걸린 자의 책임으로 물을 수 없듯 범죄자 또한 기본적 응분에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위에 피해 예방 차원으로 범죄자를 무력화하는 일과 격리는 정당한 것이며, 이를 시행할 때 사회 안전을 지키기 위한 침해원칙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갱생과 사회복귀에 초점을 맞춘 격리 등과 같은 무력화 방법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응분이라는 관념이 형사사법제도의 과도한 징벌성을 정당화하여 불평등에 기초하여 인간을 고통에 빠뜨리는 오늘의 처벌 체계에 대한 전면적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데닛은 이러한 카루소의 근본적 열망은 적극 지지하지만, 인도적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처벌이 필요하다고 현실의 실제성을 들어 반대한다.
특히 범죄 행위가 없음에도 사회일원에게 일종의 도덕적 엄벌의 경고를 위해 강력한 징벌을 가해도 된다는 결과주의적 이론을 데닛은 강력하게 주장하며,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한들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효용을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여 범죄를 억제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며, 여기에는 도덕이란 사회적 활동의 산물이며, 인류의 오랜 문명적 진화에 의한 위대한 발명의 설득의 장이라는 제도적 수호를 위한 당위성이라는 배경이 있다.
데닛은 사회의 안정적 질서의 존속을 위해 점진적인 형사 사법제도, 즉 처벌의 형식에 대한 개선을 주장한다. 또한 처벌이 없는 공중보건격리모형에 의한 격리와 무력화 제도에 반대하며 공상적인 유토피아에 불과한 헛소리라고 경멸한다. 반면 카루소의 주장에는 인간 존재에 내재된 불평등성을 불식시키기 위한 집요한 노력이 있다. 그는 개인적 요인보다는 사회 구조적 요인을 중시하며, 인간에 대한 도덕적 신뢰가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데닛은 이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인류의 모든 도덕적 규범이나 정치 제도는 끊임없이 변화되어 온 것이다. 19세기에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고 노예 해방을 주장하는 사람은 급진적 이상주의자로 내몰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도덕적 질서일 뿐이다. 무엇이든 기존 질서에 변화를 요구하면 그 낯섦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항과 부정, 혐오의 시선을 보내곤 한다. 18세기까지 도심의 한복판에서 죄수의 목을 공개적으로 자르는 것이 하등 도덕적 문제가 아니었지만 오늘날 국가가 이러한 행위를 한다면 그 야만적 퇴행행위에 대한 비난을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
도덕적 이상주의라거나 현실적 실현 가능성이 없다거나, 사람들이 강제 없이도 국가의 지시만으로 자율적으로 격리를 지킬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의 경우 대다수의 시민은 스스로 자가 격리에 임했으며, 불응자의 경우 적절한 전향적 무력화의 행사를 한 사례가 있듯이 극한적 개인주의화된 서구사회의 모델에 경도되어 수구적인 가치에 구태여 집착할 이유는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물론 두 논쟁자 어느 한 쪽의 견해가 모두 옳지 않거나 옳은 것은 아니다. 반드시 자유의지의 존재 유무를 판단치 않아도 도덕적 책임과 그에 대한 처리는 결정론이나 비결정론적 회의주의든 모순 없이 수행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데닛의 제도 수호론적 주장의 일부를 참조하여 카루소의 이상적 신념을 위한 개혁이 우리 인류의 바람직한 도덕 상(像)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논쟁이 격화될수록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니, '그게아니라述(rathering)'의 기만이라는 둥 논증을 벗어나는 비난과 상대 의견을 격하시키려는 수사법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러한 생동감있는 논쟁의 현실성이 독자를 그 격전장으로 몰입케 하여 어느 한 쪽의 입장에 서게 하지만, 논쟁자들의 사유와 논거로부터 발견하게 되는 도덕적, 정치적, 윤리적 지식들은 실로 많은 삶의 유익을 제공한다. 단지 철학적 논쟁을 담아낸 책으로 대하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어떻게 모든 구성원이 함께 행복을 증진시키고 차별없는 평평한 세계를 만들어 낼지를 생각하는 모처럼의 흐뭇한 자기 충전의 기회가 되어 주는 간결 명쾌하면서도 전문성을 지닌 윤리학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가히 진짜배기 논쟁의 정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