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
"아마도 나 아닌 누군가와 서로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 그걸 가리켜 산다는 것이라고 하는 거야." -p222
소설은 남자 주인공 '시가 하루키(나)'가 '그녀'와의 추억을 간직한 지난 4개월 동안을 회상하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첫 장, 첫 줄부터 이 소설을 이끌어 갈 여자 주인공 '야마우치 사쿠라(그녀)'는 죽었다는 결론부터 내린다. '나'는 '그녀'가 죽기 전에 보낸 송신 메시지를 확인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그리고 추억 건너편의 그녀를 기억하는 첫 장 역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로 시작한다. 옛 사람들은 어딘가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다른 동물의 그 부분을 먹었다면서, 췌장에 병이 난 그녀는 그의 췌장을 먹고 싶다고 당돌하게 고백한다. 또한, 누군가 나를 먹어주면 영혼이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산다는 외국 신앙이 있다면서 도리어 '나'에게 자신의 췌장을 먹어 달라고 권하기도 한다. 병원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녀의 비밀일기 <공병(共病)문고>를 발견한 직후 '나'는 그녀의 가족을 제외하곤 유일하게 그녀의 병을 알고 있는 비밀 친구가 되어버렸다. 학급 최고의 인기스타인 그녀에게선 병이 들었음에도 마냥 해맑고 매사 긍정적이며 항상 에너지가 넘실 거렸다. 이에 반해 '나'는 낯가림도 심하고 타인과는 거리를 둬서 자의적인 외톨이로 지내왔다. 그 시간은 오롯이 책만이 벗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으로 시시때때로 연인처럼 데이트를 즐기고, 심지어 1박2일 여행까지 다녀오면서 알 수 없는 오묘한 기류까지 퍼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죽음이 '나'와 그녀를 이어주는 끈이 되었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 어느 날, 예기치 않게 한 남학생의 질투는 그들을 '화해'로 이끄는 초석이 된다.
항상 혼자였던 '나'는 그녀를 만나면서 전에 없던 웃음과 행복감에 젖는다. 혼자였던 그는 종국엔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타인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은 순간, 어느 누구에게나 내일이라는 선물이 보장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아직 시간이 있는 나의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이미 시간이 없는 그녀의 내일은 약속되어 있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평등하게 공격의 고삐를 풀지 않는 것이 불확실한 내일이었음을 고통스럽게 자각한다. 빈소에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나'는 그녀가 일기처럼 써왔던 <공병문고>를 읽기 위해 영정 속의 그녀를 방문한다. 연인을 흔해빠진 이름으로 생각했던 '그녀',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던 '나', 둘은 표면적으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관계임을 풍부하게 드러난다. 통속적인 로맨스를 지향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로맨스 소설의 허울을 뒤집어 쓴 추리소설인가 싶었다. 책을 열어 보니 아주 풋풋한 사랑이야기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비약인가. 시한부 인생을 산 소녀와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운 한 소년의 애틋한 마음을 담은 내용이다. 사실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지 않는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니. 살인마가 장기를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언뜻 본 스토리에서 로맨틱함을 엿보고는 구입했던 책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이름이 나오는 '나'란 소년이 있다. 도서실에서 책을 정리하거나 문학 책을 즐겨읽으며 자신의 생각에 빠져사는 소년. 어느 날 병원에서 어떤 이의 노트를 발견했다. 공병(共病)문고라고 쓰여있는 일기장이었다. 노트 속에는 췌장의 기능이 좋지 않아 일 년 안에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의 내밀한 일기였다. 얼른 덮었지만 노트를 찾으러 온 소녀는 같은 반의 활달했던 아이 야마우치 사쿠라는 여자애였다. 그 때부터 사쿠라는 그에게 함께 어딘가를 가자고 하거나 함께하는 시간을 갖자고 한다.
부모님 빼고 가까운 친구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이 곧 죽는다고 말하지 못했던 사쿠라는 우연히 노트의 내용을 본 그에게는 부담없이 자신의 병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자신의 병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학교에서 '나'는 누구와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도 없었다. 그의 17년 삶에서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학교와 집 밖에 몰랐던 그가 사쿠라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시험이 끝났을 때 사쿠라와 함께 무제한으로 주는 고깃집에서 함께 고기를 먹는가 하면, 여자애들만 우글거리는 디저트 카페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 소문은 아이들한테 금방 퍼졌으며, 반 아이들은 둘이 사귀냐고 물었고, 사쿠라와 '나'는 그저 클래스메이트 일 뿐이라고만 말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사귀는 걸로 보이는데 말이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일. 사쿠라가 싫지 않았고, 사쿠라의 병을 알기에 그 아이가 부를 때마다 약속 장소로 나갔다. 집안에서 책만 읽던 그에게 사쿠라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를 세상밖으로 부른 것이다. 이름이 없던 소년이 내일이 없을 소녀와 함께 한 시간이었다. 알고 있던 사람이 죽을 거라고 하면 믿지 못할 것 같다. 곧 죽을 거라고 아무리 말해도 거짓말처럼 여겨질 터. 소년이 진짜 죽는거냐고 물을때 이해할만 했다.
죽음을 마주하면서 좋았던 점이라면 매일매일 살아있다고 실감하면서 살게 된거야. (68페이지)
누군가를 인정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 누군가를 싫어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짜증난다,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 누군가를 껴안는다, 누군가와 스쳐 지나간다....., 그게 산다는 거야, 나 혼자서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누군가를 싫어하는 나, 누군가와 함께하면 즐거운데 누군가와 함께하면 짜증난다고 생각하는 나, 그런 사람들과 나의 관계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산다는 것이라고 생각해. 내 마음이 있는 것은 다른 모두가 있기 때문이고, 내 몸이 있는 것은 다른 모두가 잡아주기 때문이야,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는 지금 살아있어. 아직 이곳에 살아있어. (222페이지)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처럼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도.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죽기전에 하고 싶은 것 또한 결국 아주 소박한 것들이다. 클래스메이트라고 우겨보지만 그들은 누가 봐도 소울메이트였던 것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말은 '너를 좋아한다' 라는 말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말은 결국 '살고 싶다'라는 말이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말이다. 오늘을 산다는 것, 함께 할 친구가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풋풋하면서도 애틋한 이야기였다.
평소 추리소설을 좋아하기에 자주 신간을 검색하곤 한다. 이번에는 어떤 사회파 추리 소설이 나의 뇌를 회전시켜줄 것인지 기대를 하면서. 아마 그랬기 때문에 이 제목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엽기적인 살인 사건을 다룬 사회파 추리 소설은 아닐까 기대하며 책을 검색했는데 제목과는 다른 예쁘면서도 슬픈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스토리와 제목이 어떻게 어울려? 이게 가당키나 한 거야?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랬기에 읽기를 주저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려고. 그러다 만난 리뷰들이 좋아서 책을 곁에 두었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에게 첫사랑은 어떤 시점에서 이뤄졌고, 앞으로 내 아이들은 어떤 첫사랑에 가슴 아파할지. 첫눈에 반해 불꽃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 채 티격태격하지는 않을까?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스미는 사랑. 어떤 사랑이 더 애절하고 아름다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사랑을 하는 당사자만이 그 사실을 알 수 있으니까. 사랑은 행복과 함께 아픔도 따르지만 그 아픔이 있기에 우리는 성숙하고 어른이 되어간다. 그런 아픈 사랑의 추억하나쯤은 간직하며 사는 것. 그게 삶의 원동력은 아닐까
주인공인 ‘나’는 맹장수술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갔다가 대기실 의자에서 동급생 사쿠라의 일기 ‘공병문고’를 발견한다. 이 일기 글에는 사쿠라가 췌장의 병으로 시한부를 선고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병으로 인해 평범한 일상이 깨지는 걸 원치 않았던 사쿠라는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학교에서 누구보다 밝고 적극적이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사쿠라에게 이런 비밀이 있다니. 주인공인 ‘나’는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고 친구를 만들기 보다는 오로지 소설의 세계에 빠져 사는 자발적 왕따처럼 고립된 채 살아가는 남학생이다. 이런 내가 사쿠라와 우연히 비밀을 공유하면서 친구가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조금씩 사쿠라에 대해 묘한 감정이 쌓여 가는데....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름이라는 게 나보다는 타인의 입에서 더 많이 불러지기에 내 것 같지만 내 것 같지 않은 대표적인 것 아닐까? 내 이름이 싫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내 이름을 사랑한다. 예전보다 누구의 엄마로 불러지는 경우가 많기에 내 정체성의 또 하나인 이름이 좋아지는 것 같다. 친구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나’. 어쩜 ‘나’는 사쿠라의 말처럼 이름에 의미를 붙이는 게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사쿠라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혼자서 아파할 아픔의 무게가 너무 클까봐? 내 안의 누군가로 만드는 것. 사실 굉장히 판타스틱한 일이지만 관계가 두려운 사람에게는 내 안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게 무섭기도 할 것이다. 특히나 사쿠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친구니까.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도 있고, 너를 기다리는 동안 행복할 것 같다는 어린왕자도 있다. 점점 관계를 맺는 게 어렵고 두렵고 귀찮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이익에 따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눈에 보일 때는 무시하고 싶다가도 그러려니 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혹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니까.
사춘기 소년 소녀에게 의미는 지금의 우리와는 좀 다를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과 중학교 2학년인 아이들. 그 아이들도 첫사랑에 실패를 하고 아파하고 그 아픔 안에 새로운 살들이 생겨날 것임을 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극단적이거나 한길로 향한 집착 어린 사랑은 함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이란 그런 것 같다. 내려놓아야 할 때는 용기 있게 내려놓을 줄도 아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인생이란 그렇다. 어떤 것도 타이밍에 맞지 않으면 허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지막엔 눈이 아프도록 눈물이 난다. 혼자인 세상에서 주인공인 ‘내가’ 밖으로 나오는 용기를 발휘하니까. 때론 슬픔 앞에 당당히 눈물을 보이면 좋겠다. 소리 내어 울어도 좋다. 그래야 추억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내일을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사춘기 아이들과 읽어보면 좋을 듯.
2017년이다. 담임을 맡았던 반의 남자애 하나가 이 책을 몇 달째 품고 다니는 걸 본 건. 남다른 가정사 속에 살면서도 구김살 적고 경우 잘 챙기면서도 자기 인생이 분명 자기 것이면서 본인 책임 아래 있다는 걸 잘 아는 훌륭한 녀석이었다. 그만큼 또래 남자애들보다 정신연령이 좀 높아서 철딱서니들의 몰이해를 받았지만 그따위 것들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문학 시간에 근대의 작품들을 배우더니 문득 이상이 좋아졌다며 그의 시를 필사하던 괴짜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기에 무슨 책을 읽는지도 관심이 갔는데 하필, 이런 무슨 네크로필리아같은 제목이냐.
표지의 벚꽃. 등을 돌린 남학생과 여학생. 흐드러지는 벚꽃. 내용이야 아련한 첫사랑을 다룬 청춘물로 추정이 된다면 그것과 어디 매치가 되는 제목인가. 그당시 나는 방탄소년단은 이름 땜에 더 크지 못할 거란 꼰대같은 선입견을 마구 휘두르던 시절을 보내고 있었기에, 역시 이 소설도 방구석에 숨어 킥킥거리는 덕후같은 녀석이 쓴 매니악한 소설이 아닐까 하고 경계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4년이 지났다. 올초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너무 재미나게 읽고 나니 일본 소설을 몇 권 골라 읽어볼까 했다. 학교 도서관 서가 사이를 눈으로 훑으며 지나는데 문학 서가에서 도통 발견하기 힘든 이 어휘가 눈에 걸리지 않을리가. 방구석 워리어든 친구 사이를 주름잡는 핵인싸든 인생에 한 번쯤은 반드시 거치고 지나갈 사랑의 열병처럼.
췌장암으로 곧 죽을 텐데도 밝고 명랑한 모습을 유지하는 사쿠라.(이름도 벚꽃이다. 사쿠라가 가짜, 사기꾼 같은 뜻의 은어로도 쓰이는데, 역시 소설에나 등장할 만한 설정이다. 췌장암 말기 환자가 이렇게 겉으로 멀쩡하게, 게다가 '밝고 명랑하고 '예쁘'다'니.) 친구고 뭐고 그냥 '나'로만 살아가는 '나'와 엮이면서 빚어내는 생의 마지막 찬란한 순간. 사랑을 통한 인간의 극적인 변화-물론 마지막 순간에야 그것이 그것이었음을 깨닫지만 인생이란 늘 그런 것 아닌가-를 오래간만에 이렇게 진지하고 풋풋하게 만났다. 뭐 매일매일 풋풋한 젊음들과 함께 지내지만 여고니까 이런 로맨스를 본 건 4년 전이 마지막이니까. 요즘 코로나 때문에 친구 관계의 폭도 깊이도 무척 좁아지고 얕아진 것들이 보인다. 인간 관계라는 게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만 서로 갈등을 겪으면서 인간이란 게 좀 더 성숙해지고 단단해지게 마련인데 그런 기회들을 얼마나 갖고들 사는지 모르겠다. 특히나 무뚝뚝하고 친구들이랑 만나봐야 PC방이나 스마트폰 게임 속에 갇혀 사는 남자녀석들은 더욱. 게임하는 게 좀 질리거든 이 책을 읽고 혹시나 주변에 '공병문고'를 쓰고 있는 예쁜 여학생이 없는지 좀 찾아다녀라도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 덮어쓰고 있는 껍질을 깨 보라고. 그러면 그 전의 너와 그 후의 너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