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르소,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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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 살인 사건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리뷰 총점 9.1 (18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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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프랑스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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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23-39]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 본 [이방인] 평점7점 | YES마니아 : 로얄 w******f | 2023.09.14 리뷰제목
<이방인> 다르게 읽어보기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의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1)   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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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다르게 읽어보기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의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1)

 

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 <이방인>은 프랑스령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인 ‘뫼르소’라는 남자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일상을 살아가던 중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이게 되기까지의 상황을 그린 1부와 ‘뫼르소’를 재판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부조리함,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고 변화하는 주인공의 의식을 통해 묘사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방인>이 가해자 ‘뫼르소’만 조명하고 있기에 우리가 무심코 넘어가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피해자인 아랍인 ‘무싸’와 그 가족의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가 가해자의 인권은 보호되고 피해자의 인권은 보호되지 못하는 사례들을 보는 것처럼, 아랍인 '무싸'는 시신조차 보호받지 못했다.

 

<뫼로소, 살인 사건>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이방인>의 이야기를 피해자 아랍인 ‘무싸’ 가족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이 작품이 잘 알려진 원작의 전복(顚覆)을 꾀하는 유일한 작품은 아니다. <춘향전>의 전복을 꾀한 영화 <방자전>(2010)도 있고, <제인 에어>의 전복이랄 수 있는 진 리스(Jean Rhys, 1890~1979)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1966)도 있다.

 

 

하룬, 또 다른 뫼르소

 

이 소설 <뫼르소, 살인 사건>의 화자(話者)는 <이방인>에서 ‘뫼르소’에게 살해당한 아랍인의 동생 ‘하룬’이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한 형태로 쓰여진 작품이지만, 읽다 보면 <뫼르소, 살인사건>의 ‘하룬’에게서 <이방인>의 ‘뫼르소’가 떠오른다.

 

뫼르소에 대한 증오에서 출발하여 그를 집요하게 분석하던 하룬은, 결국 자신이 뫼르소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뫼르소가 조국이 아닌 땅에서 고아처럼 떠도는 삶을 살았다면, 하룬은 죽은 형이 살아오기만을 바라는 엄마 곁에서 죽은 듯 지내야만 했다. 뫼르소가 대낮에 햇빛 아래에서 저지른 살인을 하룬 역시 한밤중에 달빛 아래에서 저지른다. 또한 뫼르소가 살인 자체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죄인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하룬은 프랑스인을 죽였지만 죽인 시기가 알제리 독립 이전이 아니라 이후라는 점에서 비난 받는다. 이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두 사람은 똑같이 종교를 맹렬히 부정하며 자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확고한 태도를 보인다. [pp. 202~203]

 

다시 말해, <이방인>이나 <뫼르소, 살인사건>에서는 일반적인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처럼 살인의 구성요건을 가지고 다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인 행위 그 자체와 관련 없는 요소 때문에 가해자가 비난 받고 판결이 선고된다. 뭔가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한 느낌이 든다.

 

프랑스인 뫼르소가 눈부신 햇빛이 따가운 오후 2시에 알제리인을 살해했듯이, 알제리인 하룬은 달빛이 서늘한 새벽 2시에 프랑스인을 살해한다. 다음에는 그 프랑스인의 유족이 알제리인을 살해할까? 뭔가 이상한 ‘뫼비우스의 띠’를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왠지 저자가 지나치게 <이방인>을 의식한 나머지 재해석 혹은 안티-테제가 돼버린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피해자 ‘무싸’의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 들면서 ‘뫼르소’ 이야기를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맴돌았다.

 

1) 알베르 카뮈, <이방인>, (책세상, 2012), p. 21

17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7 댓글 4
종이책 뫼르소, 살인 사건 - 카멜 다우드 평점9점 | g*******7 | 2017.02.27 리뷰제목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이라는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리려는 노력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보통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다소 괴팍한 인물로 묘사되는 뫼르소를 통하여 인간 스스로 만든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실존을 통하여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큰 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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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이라는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리려는 노력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보통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다소 괴팍한 인물로 묘사되는 뫼르소를 통하여 인간 스스로 만든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실존을 통하여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큰 호평을 받았던 <이방인>. 그렇지만, 이러한 평가와는 달리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뫼르소에 의하여 아무런 이유없이 죽음을 맞이하였던 한 아랍인의 존재로 말이다. 단지 강렬한 햇볕으로 인하여 해안가에서 살해된 그의 존재는 그저 뫼르소의 행위가 사회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저항하는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부각되고 있기에 일말의 동정심마저 불러일으킨다. 


 카멜 다우드는 미셸 트루니에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라는 작품을 통하여 원작인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완전히 뒤바뀐 관점에서 새롭게 들여다보았던 것처럼 그 역시 <뫼르소, 살인 사건>을 통하여 카뮈의 <이방인>을 새롭게 들여다보기로 결심을 한 것 같다. 트루니에는 로빈슨 크루소에 초점을 두었던 원작과는 달리 정반대로 방드르디(프랑스어로 금요일, 즉 프라이데이를 의미한다.)의 초점으로 이야기를 서술한다. 이는 주연과 조연의 뒤바꿈을 통하여 새로운 시선으로 이야기를 완전히 다르게 전개하는 효과를 가져오는데, 카멜 다우드 역시 그러한 방법을 통하여 또다른 <이방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도, 이 나라가 독립한 이후로 흔히 볼 수 있었던 짓을 한 번 저질러 볼까 하네. 내 동포들이 프랑스인이 살던 옛집의 돌들을 하나하나 가져다 자기만의 집을 새로 지었듯이, 나도 살인자가 썼던 단어들과 표현들을 가져다 내 언어를 만들어보려는 거지.

 - p. 8 -

 책의 초반부에 다우드는 화자인 하룬을 통하여 <뫼르소, 살인 사건>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담담하게 밝히고 있다. 이 내용만 들여다봐도 이 작품은 뫼르소가 쓴 <타인>, 즉 카뮈의 <이방인>을 통하여 아무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아랍인을 둘러싼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죽은 아랍인을 무싸라고 부르면서 그가 자신의 형이라고 주장하는 하룬을 통하여 죽은 자로 인하여 그 고통을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의 흐름은 아마도 <이방인>을 읽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일본의 지배를 받은 우리 입장에서 뫼르소의 국적을 일본으로, 아랍인의 국적을 조선으로만 바꿔도 다우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너무나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형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정작 그의 시체를 찾을 수가 없었고 심지어 하룬과 그의 어머니는 죽은 무싸와의 관계를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이러한 고통은 온전히 어머니와 하룬이 감당을 해야 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애초에 그들이 감당할만한 것이 아니기에 그들의 삶은 불안과 강박관념에 시달릴 수 밖에 없게 된다. 특히 하룬은 자신이 어렸을 때, 죽음을 당한 형에 대한 약간의 기억만이 있었을 뿐인데도 아직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형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망상에 빠진 어머니로 인하여 평범한 삶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증오와 두려움은 어쩌면 뫼르소가 그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방인의 표현, 즉, 무덤덤하게 대하는 듯한 모습과도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우드가 밝힌 것처럼 이야기는 점점 <이방인>의 모습을 띄게 된다. 알제리가 독립하던 날, 프랑스인을 살해한 하론의 모습은 바로 뫼르소가 저지른 그의 형에 대한 살인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어머니는 그 시점에서 마음의 안정을 갖게 되지만, 하론은 그 사건을 기점으로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아닌 뫼르소가 겪어야 했던 것들을 고스란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무심함과 같은 이방인의 모습으로 인하여 지탄을 받았던 뫼르소가 그랬던 것처럼 하론 역시 프랑스인을 살해했다는 것보다는 알제리의 독립 투쟁 시기가 아닌 독립된 상황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시간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부조리한 상황을 맞게 된다. 

그가 저질렀던 살인은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는 땅에 상심한 연인의 살인과도 같은 것이었겠지.

 - p. 10 -

내 혈육이 권태와 일사병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살해된 순간부터 전쟁은 이미 우리가 이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 p. 21 -

 이와 같은 표현으로 자신의 형을 죽인 뫼르소에 대한 분노는 복수를 달성했다고 생각하던 시점에서 오히려 뫼르소에 대한 동질감으로 변모되는 듯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애초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알제리라는 조국의 비극적인 식민지 시대를 담아내고자 했던 그의 의도는 후반부로 갈수록 또 하나의 뫼르소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이방인>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여 자신의 종교인 이슬람교의 신에게 일갈하는 하론의 모습은 뫼르소가 감옥에서 기독교를 맹렬히 비판하는 모습과 그대로 겹치고 있기에 하론이 그토록 증오하던 뫼르소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 초반부의 흐름을 떠올려보면 아이러니로 다가오게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모호한 역할들을 포진시키려 한 작가의 뒤틀린 정신을 엿보게 되지.

 - p. 193 -

이와 같은 표현으로 작품 곳곳에 카뮈와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보여주고 있지만, 정작 다우드의 하론 역시 카뮈의 뫼르소에 동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론이 시간적 흐름을 무시하고 두서없이 말해서 미안하다고 밝히는 부분은 애초에 생각했던 이 작품에 대한 전개의 변화에 대한 변명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방인>을 통하여 살아남은 자를 통하여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죽은 자의 이야기로의 재구성이 돋보이지만, <이방인>의 프레임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기에 하론의 심경 변화가 뫼르소의 그것과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뫼르소, 살인 사건>은 왠지 나에게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방인>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의 해석을 기대하면서 읽었지만, 그 끝은 <이방인>의 후속작의 느낌이 아닌 <이방인>의 시작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너무나 오래 전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덮었던 <이방인>을 함께 떠올릴 수 있었고, <이방인>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이 리뷰는 문예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8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8 댓글 12
종이책 구매 [뫼르소, 살인 사건] 평점10점 | c******m | 2020.08.06 리뷰제목
이 책을 읽는데 많이 더디었다. 이렇게 서술되는 글을 좋아하지도 않아, 마치 로맹가리의 글을 보는 것처럼  겉돌았다. 200페이지 남짓의 중편소설인데, 안되겠다 싶어 100페이 정도에서 이 책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을 찾아보고,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더니, 처음보다 집중이 더 잘 되었다. 이 책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준다. 일단, 프랑스의 문학과 예술에대한 관용,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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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데 많이 더디었다. 

이렇게 서술되는 글을 좋아하지도 않아, 마치 로맹가리의 글을 보는 것처럼  겉돌았다. 200페이지 남짓의 중편소설인데, 안되겠다 싶어 100페이 정도에서 이 책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을 찾아보고,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더니, 처음보다 집중이 더 잘 되었다. 


이 책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준다. 


일단, 프랑스의 문학과 예술에대한 관용, 허용, 너그러움 같은 것을 새삼 느꼈다.

워낙 많은 훌륭한 작가들을 많이 배출 하였지만, 알베르 까뮈도 그 중의 한 명인데, 그 대가의 대작을  뒤집어 버리는 이 작가의 당돌함이, 그리고 이런 것을 허용하는 환경이 많이 부러웠다. 

만약에 한국에서 '토지'나 '태백산맥'같은 글에 대해 딴지를 거는 행위를 한다면 아마 그바닥의 기득권들에게 난도질을 당할 것이다. 


그런만큼 내용도 훌륭하였다. 역사적 지식이 부족하여 프랑스와 알제리의 관계에 대해서 구글링을 하고, 참조 자료를 찾아보았는데...뒤늦게서라도 이런 작품이 나와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쩌면 꼭 풀어야할 숙제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글 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특별한 이유없이 아랍인을 쏴 죽인 뫼르소가 잊혀지지는 않을게다. '이방인'이 던져놓았던 그 많은 그물들이 내게 준 임팩트는 생각보다 컸기 때문이다. 


나 역시 누군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려받지 못한 들러리로 살았던 순간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내인생에 등장한 인물들을 조연이나 단역 취급을 하면서 배려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을테지.  

내가 고분고분하지 않고 평범하게 생각하지 않아 주목받았던 많은 날들도 떠올랐다. 

프랑스-알제리의 역사적 관계도 흥미진진했지만, 잠시 잊고 지냈던 빠리의 생제르만데프레의 서점도 떠올랐다. 뜬금없이 마르끄리뜨 뒤라스가 떠오르기도 하였고. 


책 한 권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많은 생각들을 해보았다. 

요즘은 비가 많이 와서 눅눅하고 짜증나기 때문에, 계절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것이 흠이였다. 

3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3 댓글 0
종이책 우리시대에 꼭 필요한 카뮈의 '이방인' 다시 쓰기 평점10점 | l****1 | 2017.03.07 리뷰제목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어서 보지 못하고 놓치고 마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작가가 가진 능력의 한계 탓이기도 하고 시대가 가진 한계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같은 여성이었으면서도 자유 분방한 여성에게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정도밖에 말 할 수 없었던 '제인 에어'의 샬롯 브론테도 그렇고, 서양 문명이 가진 좋은 점을 설파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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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어서 보지 못하고 놓치고 마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작가가 가진 능력의 한계 탓이기도 하고 시대가 가진 한계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같은 여성이었으면서도 자유 분방한 여성에게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정도밖에 말 할 수 없었던 '제인 에어'의 샬롯 브론테도 그렇고, 서양 문명이 가진 좋은 점을 설파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제국주의에 대한 찬양으로 기울어, 그 서양문명에겐 타자인 식민지와 흑인들이 마땅하게 누려야 할 이해와 존중에 대해선 눈감아 버렸던 '로빈슨 크루소'의 대니얼 대포도 그러하다.

 시대는 변하고 그러는 와중에 가지게 된 수 많은 역사의 교훈을 통하여 인류가 조금씩 철들어가면서 시야의 한계를 차츰 넓혀 그 전엔 보지 못했던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인식의 확장을 빛의 도래로 비유한 계몽주의자들의 비유는 정녕 옳았던 것이다. 그렇게 확장된 시야 안에서 오래도록 고전으로 군림 했던 작품들 또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고 진전된 시야만큼 그 고전 역시 다시 쓰여져야 한다는 생각 역시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인 에어'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고유하고 독립적인 여성성의 존재로 그리는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갓소 바다'가 쓰여지고, '로빈슨 크루소'에서 아무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주인공 백인을 따라다니기만 했던 흑인  '프라이데이'를 더없이 독립적이며 능동적이고 백인 주인공마저 구원하는 존재로 그리는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쓰여졌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또 한 권의 그런 책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이다.


 뫼르소는 알베르 카뮈의 유명한 소설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는 한 아랍인을 태양 빛 때문에 살해 한다. 그는 체포되지만 당시 알제리를 지배하고 있는 프랑스인의 법정에서 아랍인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엄마가 죽었는데도 눈물을 흘리지 않아 사형을 언도 받는다. 소설의 그 누구도 죽은 아랍인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죽었고 이름도, 주검도 없이 사라졌다.

 '뫼르소, 살인 사건'은 원작에서 너무나 손쉽게 죽고 사라져 버린 그 존재에게 이름을 주고 삶을 준다. 소설은 죽은 아랍인의 동생이 '이방인'을 연구하고 있는 한 대학생에게 말을 하는 목소리로만 채워져 있는데, 그래서 소설 자체를 '지워진 자의 목소리'라 할 만하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랍인에 대한 '이방인'의 냉혹한 처우를 비난하며 원작과 대결하면서 원작자에 의해 깔끔하게 지워져 버린 희생자의 삶을 복원해 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공격이며 서양 문명 중심의 식민지화에 저항하며 그들에 의해 지워진 존재를, 서양 문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자원으로 구축하는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하겠다.

 카뮈의 '이방인'은 대표적인 실존주의 소설로 꼽힌다. 카뮈가 뫼르소로 하여금 보통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을 살해하게 만든 것은 개인의 고유성과 독립성을 억누르고 언제든 대체 가능한 보편적 존재로 만드는 '당위'에서 벗어나 개인만이 가지는 고유한 실존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감정에 충실하는 게 중요했다. 이념은 개인을 그 자체로 드러낼 수 없지만, 감정은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카뮈의 그런 의도가 정작 카멜 라우드로 하여금 '뫼르소, 살인 사건'을 통해 그를 고발하는 이유가 된다. 그런 동기였다면 아랍인을 그렇게 죽여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그렇게 죽이고도 실제 세계에서 아무 비판이 없었던 것은 모두들 서양 문명이 타자인 식민지와 아랍인에게 가지고 있던 시선을 은연 중에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랍인이 아니라 프랑스인이 살해 되었다면 원작처럼 이유 없이 죽고 이름과 주검 없이 처리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게 쉽게 풀렸던 이유는 오직 하나 죽은 자가 아랍인이었기 때문이다. 보편을 강요하고 동일하게 만드는 것에 반발하여 뫼르소에게 그런 살인 동기를 줘 놓고도 카뮈는 아랍인의 살해를 그렇게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저항하려 했던 서양 문명의 시각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말았다. 카멜 라우드의 소설은 바로 그 카뮈의 이율 배반, 자기 모순을 꼬집고 공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의 형식 또한 오로지 개인 하나의 목소리만 있는 형태가 되었다. 이것은 카뮈의 '전락'과 동일한 방식인데, 거기서 카뮈는 '이방인'과 다르게 개인의 감정에 충실하느라 당위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하려 한다. '전락'은 그렇게 당위의 부름이 더없이 커지는 소설인데, 정작 그 형식은 또 한 개인의 내면만이 온전히 드러나는 고백이라 '자기 모순'이 된다. 알고 보면 카뮈는 자신의 작품 속에 '자기 모순'을 끊임 없이 누비던 작가였다. 그가 인간이 가지는 삶의 원형으로 보았던 시시포스 자체도 사실 자기 모순의 존재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카뮈에게 정말 중요했던 이런 모순이었을지 모른는 생각이 든다. 많은 이들이 모순에서 대부분 삶의 한계를 본다. 그러나 카뮈는 오히려 거기서 긍정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모순이야 말로 개인을 개인답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순은 당위에 균열을 일으킨다. 모순 때문에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면 정답처럼 군림했을 당위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의 정당성을 헤아린다. 당위로 길들여지는 내가 아니라, 내 쪽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가지고 노는 당위가 된다. 송곳처럼 당위를 뚫고 나와 개인으로 존립할 수 있는 숨통을 열어주는 것. 그게 모순이다. 바로 모순의 이런 점 때문에 카뮈는 모순을 반복적으로 작품에 기워 놓았던 것이다. 이것은 카멜 다우드의 소설을 읽고서 비로소 갖게 된 생각이다.

 이렇게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은 그동안 놓치고 보지 못했던 것을 직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카뮈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선마저 갖도록 만든다. 지금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이방인'의 다시 쓰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꽤나 신선한 자극이 되어 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문학은 어쨌든 하나의 시선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 자체가 선택과 배제의 중첩이 아니던가? 필연적으로 묻혀지거나 버려지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끌려 다니는 독서 보다는 나 스스로 의미를 헤아리고 만들어 나가는 독서가 필요할 것 같다. 작가는 포기했지만 우리가 발굴한 작품 속 미물로 인해 어쩌면 작품마저 작가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더 깊고 풍부한 의미를 가질지 모른다. 작가의 의도 따위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작가의 죽음이 선포된 지도 벌써 몇 십년이 흘렀지 않았는가. 그런 독서가 더욱 생산적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 카멜 다우드의 이 소설이 입증한다. 뫼르소처럼 타자를 자기 중심적으로 재단하는 시선에 포획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이런 독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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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왜 그 아랍인은 이름도 없이 죽어야했을까?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n*****m | 2017.02.17 리뷰제목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건 고등학교 때였다. 그때로부터 흐른 수십 년의 시간이나 뒤죽박죽 계통 없는 경험들로 책의 스토리마저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몇 가지 기억만큼은 아직도 분명하다. 우선은 햇빛. 그게 문제였다는 것. 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주인공의 시선이 아니라 주인공에 의해, 햇빛 때문에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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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건 고등학교 때였다. 그때로부터 흐른 수십 년의 시간이나 뒤죽박죽 계통 없는 경험들로 책의 스토리마저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몇 가지 기억만큼은 아직도 분명하다. 우선은 햇빛. 그게 문제였다는 것. 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주인공의 시선이 아니라 주인공에 의해, 햇빛 때문에 죽임을 당한 그 아랍인의 시선으로 글을 써보겠다고 생각했던 것. 치기 넘치던 시절이었으니 몇 장쯤 쓰기도 했던 것 같다.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은 수십 년 전의 내 기억 속의 시도를 넘는다. 단순히 죽임을 당한 그 아랍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동생의 증언이다. 생각해보면, 이 시도가 나의 시도(그야말로 시도)와는 전혀 비교도 되지 않게 뛰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그 아랍인의 이야기라면, 이야기는 1942년 그때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도 살아남아 알제리의 역사를 겪은 동생의 증언은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가 있다. 바로 이름도 주어지지 않고, 그저 아랍인이라는 존재로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아랍인이라는 말이 스물 다섯 번 등장한단다), 그 부당성에 대해 항의하면서도, 그 살인자가 겪었던 부조리를 여전히 반복해서 겪어야 했던 하룬의 증언이 이 소설의 전부다.

 

1942, 뫼르소는 대낮의 햇빛 아래에서 한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다섯 발!) 죽인다. 오후 2. 그 아랍인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뫼르소는 재판을 받는다. 그에 대한 비난은 죄 없는 아랍인을 죽였다는 것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데 주어진다. 징역을 살고 나온 뫼르소는 자신의 범죄에 대해 쓴 『타인』이라는 글로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 『이방인』인 속 주인공 뫼르소가 카뮈가 되어 역사 속에 살아나온 셈이다.

 

그 아랍인의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형을 찾아 헤맨다. 시체는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빈 무덤만을 만들었을 뿐이다. 좌절한 어머니는 형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었고, 어쩌면은 거의 정신을 잃은 채 살아갔다. 그리고 알제리의 독립(1962). 그 해에 하룬은 한 프랑스인을 죽인다. 그를 죽인 이유는 그가 그들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새벽 2. 총알 2! 뫼르소에 대해서와 비슷하게 프랑스인을 총으로 죽인 하룬에게 들이밀어진 비난은 살인 자체가 아니라 죽인 시점이 독립 이전이 아니라 독립 이후라는 점이었다.

 

그 이후 하룬은 『타인』 속 아랍인의 흔적을 찾아 온 대학생 미리엄을 통해 『타인』이라는 책을 알게 된다. 그제서야 자신의 형이 어떤 이름도 갖지 못한 존재였으며, 어떤 국적도 갖지 못하고 그저 아랍인으로만 존재하는 인물로 그려졌음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은 그 하룬이 그 후 수십 년간 품고 있었던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토로이며, 증언이며, 고발인 셈이다. 왜 이런 증언이 좀더 빨리 이뤄지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카뮈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서 속으로만 되뇌지 않았을까? 알제리인들은, 아랍인들은 계속 외쳐왔으나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일흔도 넘은 노인의 넋두리로 밖에 존재할 수 없는 그 탄식과 고발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여전히 부조리한 세계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알제리의 역사를 잘 모른다. 전후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프랑스의 수치라고 했던 것은 알고 있다. 드골의 위대함도 알제리라는 존재 앞에서는 단지 식민주의라고밖에 할 수 없었던 것 정도. 좀더 지금의 시점으로 다가와서 얘기하면 축구 프랑스 국가대표 선수들의 알제리 이민자(대표적으로 지네딘 지단)라는 것 정도? 카뮈가 실존주의 소설 『이방인』을 통해 그려내고자 했던 인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그리도 반응을 하면서도, 왜 『이방인』 속 뫼르소가 죽인 한 아랍인에 대해서는 무심할 수 밖에 없었던 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수 밖에 없다. 당연하다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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