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달리기
중년의 철학자가 달리면서 깨달은 인생의 지혜와 성찰
중년의 위기를 맞닥뜨린 때에
마라톤이라는 것에 도전하겠다고 마음 먹게 된 저자.
그는 중년의 위기를 위기로 치부하지 않고
달리기를 성취와 연결지어 생각지 않고 오히려 성취의 허무함을 배우게 된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책들과는 다른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노년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이며,
우리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격해 오는 삶의 자유인 빠른 젊음의 자유를 재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필요에 맞게 행동하는 스피노자의 자유이다.
p53
육체와 정신의 경계를 허무는 스피노자의 자유.
결국 하나라고 설명하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달리기의 자유는 그 경계에서더 분명하게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육체와 정신의 분리가 증명된다는 테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을 살펴보면
장거리 달리기는 이와도 결합되어 설명되어진다.
거리를 늘려 가는 것은 육체이나
이를 설득하는 것은 정신의 능력이다.
달리는 그 순간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생각이 멈추고 사유가 시작되는 시점이 온다면 어떨까.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는 인식하는 힘이 약해지므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생각의 자리에 사유가 들어올 수 있는 정신의 빈터,
즉 일종의 공백이 생긴다는데
과연 이렇게 될지는 뛰어봐야 할테지만
굉장히 강렬한 매력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해 보인다.
슐리크는 '삶의 의미는 젊음'이라고 썼다.
그러나 여기에서 젊은은 시간적인 문제, 즉 생물학적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고 해서 젊음의 정원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다.
젋음은 행동이 놀이가 되는 곳마다 존재한다.
환희는 본질적 삶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기에 이런 열정과 함께 환희가 온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석호로 되돌아가는 삶이다.
그리고 현세를 구언하는 것은 방법만 안다면 보일, 그 속에 있는 본질적 가치이다.
p262
노화는 운 나쁜 달리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가심, 통증, 약함이 누적되어
오래 쉬어도 자뀌지 않으며 다시 이전 상태로 복귀하고 마는 소멸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달리기는 겨울 폭풍에 물이 넘어오지 않도록 쌓는 제방이라 표현한다.
이또한 막을 수는 있지만 언젠가 석호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 삶의 과정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결과가 아닌
활동에 행동 자체에 존재한다.
환희는 본질적 가치를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의 삶을 따스하게 만드는 그러한 순간들이 말이다.
자유롭게 달린다는 것은 이유와 행동의 간극의 자유 속에서 달린다는 것이며,
이것은 세상에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러한 자유 속에서 달린다는 것은 환희 속에서 달리는 것과 같다.
p270
오로지 뛰는 것은 걷기와는 좀 더 강도가 높은 운동이라
달리기는 여태까지 도전해보지 못하고 있다.
42.195 킬로미터.
과연 뛸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그 묘미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저 달리는 것이 목적과 가치였고,
'살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달리는 것이었다.
삶의 본질적 가치의 경험이자 인식이 되는 환희는
달리기의 심장박동에서 찾을 수 있다.
앎의 경험적 형태를 가치의 경험으로 이끌 수 있는
달리기의 매력에 빠져들어
나도 모르게 반려운동으로 어떨까를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뛰는 심장 속에서 삶의 더 강하게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강한 충동을 느낀다.
달려야겠구나!
결국 달려야만 했구나!
이같은 자유의 경험은 내가 첫발을 내딛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