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그 길이 얼마나 힘든 지 아느냐 거듭 다짐을 받은 뒤 거금 800원을 내 주었다. 독립 자금이었다. 그리고 펑텐(봉천)에서 장사를 하던 친척 정필화를 길잡이로 주선해주었다. 한나절만에 길채비를 끝내고, 그날 밤 묘희는 서울역에서 의주행 열차에 올랐다. 스무살 겁 없는 여인은 그렇게 나고 자란 조국을 떠났다. 도피도 안주도 아닌, 또다른 비바람을 맞기 위해 스스로 나선 길이었다. (p.61, 정정화)
먼저 이 책이 리뷰를 남기기 전에, 이러한 책을 읽게 해주심에 감사의 뜻을 남기고 싶다. 이런 책이 출간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그들의 얼굴을, 이야기를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물론 모르고 산다고 먹고 사는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나, 알면 다르게 보인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분명히 보이게 된다. 그래서 아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활동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나는 우리의 역사에, 또 독립운동에 관심이 있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나오는 여성혁명가들 이름은 거의 대부분 낯설었다. 그래서 오히려 새로운 마음으로 읽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김마리아, 남자현, 강주룡 같은 분들의 이야기는 알던 이야기라 마음에 세기 듯 읽었고, 잘 모르던 분들의 이야기는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었다. 이 책이 특히나 매력적인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김이경 특유의 문장력으로 살아 숨쉬듯 가깝게 느껴졌고, 윤석남의 그림은 나의 머릿속에 새로운 얼굴로, 새로운 이미지로 그들을 살아나게 만들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는 데 있는 거시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p.156, 남자현)
아마 이 말은 꽤 많은 이들이 알지도 모르겠다. 나도 알던 내용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토록 감정이 서걱서걱 묻어나는 그림을 나란히 두고 읽으니 가슴이 먹먹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도 좀 났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나를 희생해 독립운동을 했을 리라는 보장도 없고, 친일하지 않았으리란 장담도 없지만 온 마음이 이토록 둥둥거리는 건 아마 모두의 감정이리라. 우리의 나라가 어떤 아픔을 딛고 일어섰는지 아는 이들은 모두 느낄 감정일 테다.
이 책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우리 다음세대의 아이들이 배워야할 분들이 너무 많음을 인식시키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테니 말이다. 김구, 안중근 등 지금 아이들이 배우고 있는 독립운동가들도 너무나 중요하지만 이 책에서 살아 숨쉬는 이들도 결코 그들보다 덜 중요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교과서로, 책으로, 위인전으로 꺼내 주어야 한다.
이 책을 유달리 오래 읽은 까닭은, 모르는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확장독서를 했고, 인터넷을 검색했다. 제대로 알고 싶었고, 김이경과 윤석남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싶었다. 이 책의 리뷰를 쓰고자 책을 다시 만졌을 때, 나는 다시 가슴이 뛰었다. 아마 이 책에 대한 이 감정은 꽤 오래 이어질 것 같다.
역사가 되었으나, 많은 이들에게 불리지 못하는 이름. 그들의 이름이 진짜 역사로 제대로 남기를 바래 보며, 싸우는 여자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제대로 기억되기를 바래 보며 부디 올해, 이 책만큼은 누구라도 꼭 한번만 읽어 달라고 고개를 숙이고 싶어 진다.
맞다. 온 마음으로 극찬이다.
제목만으로도 책을 펼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무겁고 힘들 것 같은 느낌이 책 전체에서 안개처럼 스멀스멀 올라왔거든요. 독서 모임에서 읽고 나누어야 하니 미루고 미루다 책을 펼칩니다. 그녀들이 싸웠던 세상,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을지 약간의 기대를 품고 책을 넘겨요.
책의 주인공인 싸우는 여자들의 그림을 그린 작가는 윤석남입니다.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나 해방 전해에 귀국했고, 가정주부로 살다가 나이 마흔에 어머니를 그리면서 화가가 됐죠. 이후 40년을 한결같이 따스하고 강인한 모성과 여성의 힘을 탐구하는 작품 활동을 해왔어요. 설치와 조각, 회화를 넘나들며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작가는 몇 해 전부터는 한국화를 기반으로 한 초상화 작업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 <김승희 윤석남의 여성 이야기>등이 있어요.
글 작가 김이경은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식민지 시기 민족 통일전선운동’으로 학위 논문을 썼어요. 문학을 좋아해서 뒤늦게 방송대학교에 편입해 영문학을 공부했죠. 저서로는 <살아 있는 도서관>, <애도의 문장들>, <책 먹는 법>, <시의 문장들>과 서평집 <마녀의 독서 처방>, 그림책 <인사동 가는 길>이 있습니다.
책은 총 14명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 있어요. 그림 작가의 초상화와 인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이어지고, 14명의 싸움이, 여성으로서의 싸움이 입체적으로 실려 있습니다. 글 작가는 다양한 형식을 시도해서 인터뷰 형식, 기사 형식, 다큐멘터리 형식, 전기 형식, 편지 형식, 주위 사람들의 기억을 대화체로만 구성하는 형식이 나옵니다. 그녀들의 삶도 지루할 틈이 없이 박진감 있게 펼쳐지는데, 문체와 형식도 그녀들의 삶처럼 힘 있게 펼쳐져요. 총 14분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1부에서는 세상에 외치다는 주제로 7분을 묶었고(김마리아, 강주룡, 정정화, 박진홍, 박자혜, 김옥련, 정칠성) 2부에서는 전선에 서다는 주제로 실제로 전선에서 활약한 7분(남자현, 안경신, 김알렉사드라, 권기옥, 김명시, 박차정, 이화림)이 나옵니다. 14분 중에서 아는 이름은 거의 없어요.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김마리아를 만납니다.
조선에서 어떻게 하면 투사가 안되고 살 수 있습니까? 친일 부호라면 몰라도 우리 같은 노동자는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하는 게 현실이지요. 따지고 보면 기자 선생도 지금 붓으로 싸우고 있는 거 아닙니까? (P39- 강주룡)
평양의 고무 공장 파업을 이끌었고, 을밀대에 올라가서 시위한 강주룡의 말입니다. 시대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나 아니라 누구라도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라고 말해요. 강주룡뿐만 아니라 이 책에 나온 거의 모든 사람들이요. 하지만 싸워야 하는 게 현실이라도 싸움을 마음먹고 실제로 행동까지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책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싸움이 대단하지 않다고 말해요. 누구라도 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압니다. 사소한 싸움도 쉽지 않다는 것을요. 매일 밤 잠들기 전 알람을 맞추며 다짐합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겠다고. 아침이 되면 울리는 알람을 순식간에 끄고 다시 잠을 잡니다. 그러다가 또 알람이 울려도 다시 끄고 잠들죠. 그렇게 3번쯤 하고 일어나는 아침은 씁쓸합니다. 그렇게 다짐하고 알람까지 맞췄지만 어제랑 다르지 않아서요. 일상의 사소한 싸움에서도 늘 지기만 하는데, 그녀들은 삶을 걸고, 자식들을 뒷전으로 두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싸웁니다. 그것이 당연했다고 말하면서요. 일상의 사소한 싸움을 작은 승리로 만들어야겠다고 조금은 비장하게 다짐해요. 당연하지 않은 그녀들의 싸움을 보면서.
조선 여자는 일본 놈한테서도 해방되어야 하고 봉건적인 남자들한테서도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경제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고 하대요. 그 말을 들으니 눈앞이 아주 환해지더라고요. (P150- 정칠성)
조선 최고의 기생에서 사회운동가로 변신해 ‘사상 기생’이라 불린 독립운동가 정칠성의 말입니다. 책도 많이 읽었고, 뛰어난 필력을 자랑했던 정칠성은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수예 강습소에서 수예를 배워 여성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죠. 그때 만난 친구의 증언의 일부죠. 정칠성으로부터 들은 말이 자신의 삶의 바꿨다고 합니다. 조선 여자들은 일본과 봉건적 남자들에게서 모두 해방되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렸죠. 심지어 함께 독립운동을 한 동지들도 남자들보다 더 열심히 싸우는 여자 동지들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아요. 결정적일 때는 독립운동보다는 결혼해서 남편 뒷바라지하고 자녀들을 낳아 기르는 것이 더 낫지 않냐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 싸워야 할 것들이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이나 오빠, 아버지가 된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도 기꺼이 독립운동에 자신을 던졌던 여성들. 고문의 고통을 견디며 옥중에서 출산을 하고, 갓난아기를 품 안에서 영양실조로 잃어야 하는 아픔은 짐작조차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들이 싸웠던 힘과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구의 삶도 가볍거나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녀들의 담백한 초상화와 함께 실려 있죠. 옷차림도 비슷하고(한복이거나 중국식 복장이거나) 얼굴도 비슷해 보입니다. 다만 초상화로도 가려지지 않는 빛나는 눈이 인상적이죠. 자신의 의지를 모두 담아내는 빛나는 눈으로 책을 읽는 저를 봐요. 그 눈빛이 뜨겁고 빛나서, 혹은 부끄러워서 오래 쳐다보지 못합니다. 지금 거기, 당신의 삶은 어떠하냐고 묻는 것 같아서요. 겨우 하루를 견디듯 살아내는 일상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워집니다. 알람을 몇 개씩은 맞춰야 일어날 수 있는 나약함을 들킨 것 같아서 무안하고요. 부끄러운 채로 살지 않기 위해 그녀들의 삶을 찬찬히 복기하듯 마음에 새깁니다. 그녀들이 치열한 싸움이었던 조국의 독립을 그녀들로 인해 누리고 사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요. 같이 독립운동을 했더라도(더 치열하고 뜨겁게) 제대로 전해지지도 못하고 무명의 한 여인으로 살았던 그녀들을 이제라도 온전히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부끄럽고, 더 많이 자신의 싸움을 싸워서 그녀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지금 내 삶으로요. 아직도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살아내며 책임을 다하는 우리 여성들이 각자의 삶에서 진정한 독립이 있기를 소망해 봐요. 독립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 치열하고 아프게 싸워야겠지요? 남자, 여자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온전한 독립을 위해, 아내 말고, 어머니나 딸, 며느리 말고 나 자신으로 온전히 홀로 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습니다. 그녀들의 싸움을 거울삼아 조금은 비장하게 내 삶에서도 독립을 위해 싸움을 준비합니다. 일단은 알람을 끄지 않는 것부터!
일제강점기 시대에 싸워주신 많은 독립 운동가분들이 있었기에 지금 대한민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했습니다. 그림이 실제 인물을 보고 그려진 것인지 아니면 추정 모습인지 굳세고 강인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이 그릇되지 않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정말로 바랍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끊이지 않는 노력을 한 모습이 안타깝고 대단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