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기, 나의 예민함
나는 예민하다. 신체의 감각은 물론이거니와 외부적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이러한 나의 성향은 그동안 나의 삶에서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해다. 걱정에 압도된다든지, 자극에 흔들리며 집중을 하지 못한다든지, 후회에 빠져 반복적으로 과거의 아쉬움을 떠올린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반복적 패턴은 나를 사람과 경험을 향해 뛰어들기보다는 주저하고 망설이도록 만들었다. 실패와 좌절의 가능성은 줄어들었지만 동시에 성장과 행복의 기회 또한 멀어졌다. 행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감수해야만 하는 과정에서 지각될 고통의 예민한 자각에 대한 두려움. 나와 행복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동시에 '예민함'이라는 기질은 나에게 있어서 극복하고 해결해야만 할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고착화된 신념에 변화를 가져다준 책이 있다. 바로 '롤프 젤린'의 <예민함이라는 무기>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예민함은 결점이 아닌 강점이라고 강조한다.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보고, 더 다채로운 체험을 하고, 더 민감하게 자극들을 연관 짓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 그럼으로써 내면을 풍요롭게 가꿀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민한 이들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성향을 향한 다른 믿음의 시작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기 위한 긴 여정에서 소중한 경험의 자산으로 내게 남았다.
회피에서 직면으로, 불안에서 자유로
한편 나는 '회피'형 성향을 갖고 있기도 했다. 어려운 문제나 두려운 상황이 닥치면 인내하고 도전하기보다는 회피하고 도망쳤다. 이는 가시적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내면의 부정적 정서, 이로 인한 신체적 자각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도피했다. 당장에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결핍, 마주치고 싶지 않은 불안을 회피한다는 것은 지금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마음의 다락방에 꾸역꾸역 쳐박아둔 덩어리는 잊을만 하면 그 존재감을 뿜뿜 드러냈다. 불안으로, 두려움으로, 같은 패턴을 담은 다른 현상으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검열하지 않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실체를 알 수 없던 불안은 강력한 언어의 힘으로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막연함의 안개 넘어로 명료함의 실체가 드러난 순간, 사건과 해석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미 일어난 사건은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는 나의 자유다. 거기에 나의 성장과 행복이 달려있다.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그러니 나는 나의 상처에 의미를 부여할 자유가 있으며, 지금 여기에서부터 나의 삶을 올바르게 이끌어갈 책임이 있다.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된 이후로 나의 삶은 '회피' 보다는 '직면'과 '도전'에 한 걸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예민함이라는 무기> 저자가 말하는 '마음의 상처' 새롭게 보기
흔히 부정적으로 일컬어지던 '예민함'에 '무기'라는 강력한 의미를 부여했던 '롤프 젤린'이 새로운 의미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바로 '마음의 상처'에 덧붙여줄 의미다. 책 <마음의 상처와 마주한 나에게>은 상처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마음의 고통을 삶의 필연적 요소로 규정하고, 이를 정면에서 마주봄으로써 삶의 풍요와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저자가 <예민함이라는 무기>에서 보여줬던 직관적 해석과 구체적 방법론은 이 책에서도 강점을 드러낸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다가올 상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삶을 온전하게 경험하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상처에 건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을 얻기를 권해본다.
고통, 자연이 선물한 반가운 신호
43 우리가 생존에 유리하게 행동하면 자연은 이러한 단순하고 오래된 법칙에 따라 언제나 우리의 생존을 보장해준다. 반면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서 피해야 할 것이 있을 때에는 고통과 불안으로 신호를 준다.
52 우리는 고통스러운 상처를 받은 후 무방비하게 열어놓은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을 폐쇄시킨다. 그러면 결국 자신도 상처를 받는다. 마음의 문을 닫음과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으로부터도 자신을 차단시키기 때문에 더 이상 아름다운 경험도 할 수 없다. 이 세상과 차단되고, 나아가 삶이 에너지와도 단절되게 된다.
이고득락. 우리의 삶은 기쁨을 쫓고 고통을 피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싫어하는 것을 피하는 것,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알고리즘 중 하나일 것이다. 여기에 고통의 근본적 존재 이유가 있다. 고통의 시작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상으로부터 도망치도록 각성시키는 '신호'였다. 그러니 고통 자체는 절대로 우리가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의 선물로서 존재 자체에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을 주는 존재로부터 무조건 도망쳐야 하는것이 옳을까? 그렇지 않다. 고통이 주는 신호의 의미가 늘 '생존'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소중함'이다. 좌절감은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왜 일까? 우리가 맞닥뜨렸던, 그러나 실현하지 못했던 그 일이 우리에게 그만큼 소중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상실감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이유는 상대방이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당연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여기에서 선택의 갈림길이 발생한다. 먼저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당장의 아픔과 다가올 아픔의 가능성은 회피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또 다른 행복의 가능성으로부터도, 아름다운 경험의 가능성으로부터도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이 있다. 고통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는 것이다. 가령 책의 234페이지에 소개되었듯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배려심이 더 깊은 사람으로,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 삶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고 일상을 더욱 풍성하게 확장할 수 있다. 우리에게 벌어진 사건은 우리의 자유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염세와 냉소와 자책과 회피를 고를 것인가, 발견과 이해와 성숙과 성장을 선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 영역에 속해있다.
신념, 고통을 뛰어넘는 힘
247 그렇다면 굴하지 않고 곤경을 이겨내는 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언제나 한결같이 말한다. 어떤 가치나 사상과 자신을 합일시키면 이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회복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인류애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적 신념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자유로운 미래에 대한 사상과 이를 위한 임무를 자신과 하나로 결합시킨다. 이러한 사상을 실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대항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가해자는 적이 아니라, 그저 상대방일 뿐이다. 또한 그는 상대를 능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는 상대에게서 인간적인 측면을 볼 수 있게 된다.
책에 담간 각종 강력한 무기들 중 나에게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신념'에 관한 부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 앞에 좌절하고 절망한다. 세상과 사람을 혐오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한편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도 결코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저자는 여기서 '신념'의 차이를 짚어본다. '그래서' 포기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기도 한다. 반드시 지켜내야 할, 마땅히 감수해야 할 무언가가 존재할 경우다. 이것이 바로 '신념'이다. 이러한 자신만의 신념을 분명하게 정립하고 또렷하게 자각할 때, 당면한 장애물을 인내와 용기로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묻는다. "그래서 너의 신념은 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지켜내야 할 무언가가 있어?" 아쉽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구도의 여정을 멈추지 않고 싶다는 것, 이것을 신념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확신에 가득 차 분명하게 선언하고 실현해 나가기엔 아직 자신감과 강단이 부족한걸까?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이 또한 나의 무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판단하려 들기에 앞서서 발견의 감각을 바짝 세우기를, 상처와 불안을 감내하고 성장과 용기를 선택하기를, 열린 마음과 호기심으로 나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며 수용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그렇게 인간다움과 고유성을 모두 갖춘 내가 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