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쌓인 오래 묵은 내 일기장을 펼쳐 본 듯 했다.
책 첫장을 넘기자 마자 충격적인 역사의 한 장면을 시작으로
마지막에 죽음만 떨어뜨린 석호의 이야기까지
그 곳에 절망이었지만 희망을 품고 싶었던 내가 있었고
죽음만을 떨어뜨리라던 용진의 메시지를 품고 있던 내가 있었다.
마지막에 용진의 메시지에서는 결국에 왈칵 울음이 터져나왔다.
자신의 말의 무게도 모르는 그의 말이
석호에게처럼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원동력, 사람이 부데끼며 살아가는 원리가 아닐까..
그것을 지금 세대를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 조금만 알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 이야기 마다 작가의 말을 보태주어서
그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소중함이 더 전해졌고
한번 더 주인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청소년들을 비롯 나와 같이 중년에 접어드는 성인 뿐 아니라 청소년기를 거친
전 연령이 읽어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10여년 전 만난 작가의 작품보다 조금은 더 밝은 분위기가 느껴져서 한결 편하게 읽었다고 전하고 싶다
인류가 저지르는 가장 비열하고 끔찍한 일들은 대부분 명령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졌다. 명령을 내린 자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명령에 따라 움직인 자는 명령이란 방패 아래 자신의 억눌린 사악함을 드러낸다. 혹은 명령이란 이름 뒤로 뻔뻔스레 숨는다. 명령을 통해 그들은 공생 관계가 된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몰아 넣어 죽인 것도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고, 단지 명령에 의해 스위치만 누른 자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수천 명의 대한민국 국민을 때리고, 찌르고, 죽인 것도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고, 단지 명령에 의해 방망이를 내리치고, 대검을 찌르고, 총을 쏜 병사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명령이 방패가 되어줄 때 인간은 어디까지 사악해질 수 있는 걸까? (p.22-3)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그 애는 바로 나였다. 내 속의 또 하나의 나, 내가 계속 무시해 온 아이, 남들만 보느라고 한 번도 안아주지 못했던 아이,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외로웠다. 나는 배려심이 깊고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아니다, 그 모든 아이, 행복하고, 외롭지 않고, 배려심 깊고, 착한 아이도 역시 ‘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만을 챙기느라 어둠 속의 저 애는 내팽개쳐 두었다. 얼마나 무시했으면 저렇게 저 애가 어둠을 뚫고 스스로 내 앞에 나올 생각을 다 했을까. 미안해, 정말 미안해. (p.45)
저주 받은 영혼이다, 너는
그러나 잊어도 좋다, 그 사실을. 한 순간쯤은.
그까짓 말 한 마디가 무엇일까? 그런데도 나는 내 자신에게 허용한 그 작은 여유에 코끝이 시큰했다.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저주 받은 존재라는 것을. 그러나 한 순간쯤은 잊기도 할 것이다, 내가 저주 받은 존재라는 것을. (p.101)
K, 그날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나는 이미 내민 발을 후회했다. 그랬으니 죽으려던 마음은 확실히 떨어뜨린 거였다. 그리고 운 좋게 이렇게 살아났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나 보다. 떨어뜨려야 할 게 더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날 허공에서도 미처 떨어뜨리지 못한 무엇인가를 조용히 떨어뜨리는 내 모습을 본다.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것을 떨어뜨리는데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올 뿐이다. (p.128)
책을 다 읽고 한 동안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박기현군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명령>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무리 명령이라고는 하나 어떻게 아무 죄도 없는 국민들을 학살할 수 있는 것인지 지금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무장을 하고 나타난 군인들에게 학살당한 아이는 고작 열다섯.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명령이라고는 하나 타당한 이유도 없이 아이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힘없는 어린 소년을 낚아채 두개골이 부셔져 다 가루가 될 정도로 때렸어야만 했었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말이 세상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연한 핑계에 불과하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는 것인지. 명령을 거역하지 못 했다는 것은 그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과 결과적으로 다를 게 없다.
<그들이 떨어뜨린 것>은 청소년의 절망을 밀도 있게 그려낸 단편 소설집으로 현실의 무게와 들끓는 내면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살아가는 청소년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경계에서 이들은 어른이 규정한 울타리 안에서 숨 쉴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바로 그들의 답답한 현실과 생을 뒤흔드는 절망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삶과 죽음의 충격을 전하는 동시에 그러한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해 준다.
책은 학살 당한 소년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스스로 죽으려다 살아난 소년의 이야기로 끝나며 그 사이에, 행복한 척 하지만 사실은 외로운 소녀, 자신의 욕망을 이해받지 못해 슬픈 소녀, 신체적 괴로움으로 절망에 빠진 소녀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명령>은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졸업을 앞 둔 제자들에게 광주민주화운동 시기에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군인들이 휘두른 진압봉에 두들겨 맞아 열여섯의 나이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친구 기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명령을 들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친구가 죽을 때 품에서 떨어뜨린 필승중학수학 때문에 수학선생님이 되었다는 주인공은 ‘역사는 결국 한 사람의 이름을 사무치게 기억하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며 마음에 깊은 의미를 새겨 준다.
<울고 있니, 너?>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고등학생 소미가 어느 날 어찌보면 사람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짐승같아 보이는 이상한 존재를 목격하며 그 애를 통해 자신이 감추어왔던 외로움과 슬픔을 발견하여 진정한 자신과 마주하는 이야기다.
<그건 사랑이라고, 사랑>은 엄마와 소통이 되지 않아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청바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민하의 마음을 통해 청소년이 받는 억압과 외로운 심정을 담아냈다.
<저주의 책>에서는 간질을 앓고 있는 고등학생 규리가 등장해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을 때마다 공책을 펼쳐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저주의 힘으로 살아가던 규리가 삶을 묵묵히 견디며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떨어뜨린 것>은 이 책의 토대가 된 작품으로 단 한번도 자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석호가 충동적으로 죽으려고 뛰어내렸다가 실패하고 돌아와 자신이 진정으로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담아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떨어뜨린다. 자신의 몸을 허공에 던지거나 마음에 품고 있던 무언가를 떨어뜨린다. <그가 떨어뜨린 것>의 석호는 죽으려던 마음을 떨어뜨려 살아났고, <명령>의 기훈은 수학 문제집을 떨어뜨려 친구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울고 있니, 너?>의 소미, <그건 사랑이라고, 사랑>의 민하, <저주의 책>의 규리도 무엇인가를 떨어뜨렸다.
그들이 떨어뜨린 것은 소중한 것도 있지만 버려야만 할 것도 있었다. 부디 여러분들이, 떨어뜨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들은 고이 간직하고, 떨어뜨려야 할 것들만 떨어뜨려 어려운 시기를 잘 버텨주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바람처럼 청소년들이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끝까지 붙들어 건강하고 멋진 어른이 되어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들이 떨어뜨린 것
이경혜 단편집. 이미 다른 책에 실렸던 단편을 한 권으로 엮어 만든 [그들이 떨어뜨린 것].
명령, 울고 있니, 너?, 그건 사랑이라고, 사랑, 저주의 책, 그가 떨어뜨린 것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광주민주항쟁 때 너무 어이없게 목숨을 잃어야 했던 중학생의 이야기 - 명령
어두운 내면의 그림자를 맞닥뜨린 이야기 - 울고 있니, 너?
너무너무 가지고 싶은 청바지에 대한 이야기 - 그건 사랑이라고, 사랑
뇌전증을 가진 소녀의 스스로에게 거는 저주 이야기 - 저주의 책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 그가 떨어뜨린 것
제대로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누군가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생명이 꺼져야 했던 명령을 읽으면서 정말 너무 화가 많이 났다. 과연 그들은 누구의 명령에 복종했을까. 그들은 정말 명령에만 따랐을 뿐인가? 그들의 감정은 1도 실리지 않았을까? 의심하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보든 분개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누군가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게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통된 바람일 것이다. 그렇게 나를 포장하다보면 정작 나의 내면은 들여다보지 못하고 쉽게 잊혀지는 것 같다. 그 힘들고 암울한 나의 내면을 마주하는 내용을 담았던 울고 있니, 너?를 보면서 표면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내면을 제대로 감싸안을 수 있어야 더 발전하는 나로 거듭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뇌전증, 흔히 말하는 간질을 앓고 있는 소녀의 이야기는 왜 이렇게까지 스스로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어야 할까.. 안쓰러운 마음이 크게 일었던 이야기다. 발작을 일으키는 동안 나도 알지 못하는 행동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에게 혐오의 감정을 심어주기도 하겠지만 내가 원해서 병을 앓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에게 저럴 필요까지 있을까, 아픈 사람을 보면서 나랑 조금 다르다고 혐오의 눈빛으로 바라볼 자격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나, 내 주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던 내용이었다. 나와 다름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해서라도 아이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참 많은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막한 내용들과 작가의 의도를 함께 읽을 수 있어 더 이해하기 쉬웠던 <그들이 떨어뜨린 것>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서 맞닥뜨리게 될 다양한 상황과 감정에 조금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를, 또 쉽게 생명의 끈을 놓아버리는 오류는 범하지 말아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