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계를 만들고 상상하는 일에 대하여
<아무튼, SF 게임>을 플레이하고
몇 해 전까지 나에게 SF 장르물은 곧 SF 영화와 동의어로 여겨졌다. 과학적 사실이나 가설에 기반하여 창조된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SF에 대한 정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영화를 즐겨왔다. 그러다가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책 제목부터 SF의 기운이 물씬 느껴지면서 실제로 본문에서 과학기술에 관한 부분을 상당히 다루기도 하지만, '장애'를 핵심 주제로 한 책임을 밝혀둔다)』를 공저한 김초엽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고, 뒤늦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역주행 도서로 만난 후부터 SF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와 저자를 비롯한 한국의 SF 작가들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영화만 가득했던 나의 SF 장바구니에 소설이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건너편의 세계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자의 인사말에 "저는 아직 SF 소설의 세계로 갈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어떡하죠?"라며 저자의 손 대신 책을 덥석 집어 드니 책 표지에는 '아무튼 SF 소설'이 아니라 <아무튼, SF 게임>이라고 쓰여 있다. 아무튼 시리즈에서 '게임'을 주제로 한 책이 『아무튼, 보드게임』에 이어 한 권이 더 추가됨으로써 오프라인 게임과 온라인 게임(혹은 비전자 게임과 전자 게임)이라는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고, 아무튼 시리즈의 애독자로서 자평해본다. 소설과 달리 작가의 개인사를 엿볼 수 있는 에세이답게 이 책을 통해 저자와 독자 사이에 내적 친밀감이 +2만큼 상승하는 경험을 했다. 경험치 내역을 잠시 살펴보니 그 역시 나처럼 울산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에서 +1,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 게임을 무척 좋아했다는 점에서 +1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저자가 책을 쓰게 된 이유를 구태여 과학(물리학) 용어 중 하나인 '힘(力)'에 빗대어 말하자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게임마니아로 살아오면서 계속 생각해오던 것들, 이를테면 비디오게임 가운데서도 SF 게임 자체가 지닌 ‘매력’, 게임 속 세계들이 가진 저마다의 ‘흡인력’, 플레이어와 게임 사이에 수시로 발생하는 ‘인력’과 ‘척력’, 그것들이 저자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력’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무엇보다 소설과 게임 모두 '어떤 세계를 상상하고 만드는 일(18쪽)'의 결과물이기에 게임을 바라보는 소설가로서의 시선이 빛을 발하는 글로 읽혀진다. 내게는 게임명부터 생소한 「폴아웃 뉴 베가스」, 「호라이즌 제로 던」, 「보더랜드」, 「바이오쇼크」, 「사이버펑크 2077」, 「엑스컴」 등 여러 SF 게임의 서사와 플레이 방식에 대한 저자의 소개를 읽으면서 마치 새로운 SF 소설을 한 권씩 알아가는 묘미를 느낄 수 있다. 게임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든 반대로 이미 경험한 플레이어든 누구나 진입 장벽 없이 책장을 넘기게 될 것이기에 궁금한 독자(플레이어) 책으로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이제 HP(체력)가 바닥나서 휴식을 취해도 회복력이 떨어져 감을 절실히 느끼는 나이인지라, 플레이어보다 독자의 편이 되어 NPC(비플레이 캐릭터)의 퀘스트(플레이어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를 대하듯 저자가 제시한 문제들과 그 해결의 실마리를 곱씹어보려 한다. SF 영화, 소설, 게임은 서로 닮은 듯 다른 스토리텔링 방식을 보인다. 영화는 보고, 소설은 읽고, 게임은 '플레이'하지만 셋 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저자에 따르면 영화와 소설을 볼 때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우리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인데 반해, 게임은 적극적으로 플레이를 이어가야만 이야기를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설령 게임이 짜놓은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해도 게임을 어떻게든 진행시켜 엔딩을 볼 수 있다는 건 퍽 흥미로운데, 게임은 영화와 소설과 다르게 서사보다 재미를 추구하는 경험을 최우선시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파인딩 파라다이스」에서 닐 와츠 박사가 말했듯 "가끔은 우리의 기억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허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68쪽)"더라도, '이야기'의 중요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현실이 더 비현실처럼 여겨질 때가 많은 현대사회에서 과연 게임 속 세계관을 허구와 거짓으로 세워진 것으로 치부하며 거기에 공공연히 숨겨진 조언이나 경고 메시지를 흘려버려도 괜찮은 것일까. 일례로 범죄와 전쟁이 널리 퍼져 있는 세계에서 그것들을 소재로 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며 현실과 선을 긋는 사람들과, 자극적인 게임을 즐겨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대립을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어린 시절 게임 속 세계가 모니터 안에 있다고 여겼던 저자를 보면서 나도 그랬었지, 라며 피식 웃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쓴웃음을 짓고 만다. 머지않아 게임 속 세계가 모니터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아니면 우리가 게임 속 등장인물과 같은 삶을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아무튼, SF 게임>을 종료하고 난 뒤, 게임이라는 비현실과 삶이라는 현실의 경계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삶을 게임처럼 살 수는 없다. (···) 게임에서 실패해도 되는 건 리플레이가 있고, 실패와 미숙함이 나를 성장하게 한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현실의 실패와 미숙함에 대해서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래도 만약, 정말 쉽지는 않겠지만… 그 믿음을 아주 조금 빌려온다면, 무언가 달라질까.(152쪽)"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답가를 띄워 보낸다.
게임이 끝나고 난 뒤
가만히 의자에 앉아
전원이 꺼진 모니터를 본 적이 있나요
효과음도 분주히 펼쳐지던 세계도
이젠 다 멈춘 채 모니터 너머엔
엔딩 이후의 세계가 남아있죠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죠
(샤프 노래, 「연극이 끝난 후」 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