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 1인 가구, 혼밥, 혼술,....
혼자 뭘 한다는게 익숙하듯 이런 단어들이 일상 용어처럼 자리잡은 듯 하다.
그래도 늘 공동체 안에서 함께 무엇을 해왔던터라 '혼자'는 여전히 낯설고 어설프다.
함께 먹는 밥에 적응되었는데, 홀로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난감할 것도 같고.
비단 밥 먹는 것만 그럴까.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직장인 뿐 아니라 집 안에 있는 사람도 혼자 밥을 먹는다.
만 3년의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해 혼밥하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을지도 모른다.
시간에 학습이 되어 같이 먹는 밥보다 혼자 먹는 밥이 익숙하고 편하다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책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이다.
10명의 작가들이 먹은 점심 메뉴를 소개하거나 점심에 대한 짧은 생각과 경험한 이야기다.
점심과는 별개로 그냥 가볍게 읽기에 좋았다.
작가들은 어떻게 점심을 먹을까?
바빠서 시간(때)를 넘겼기에 점심을 못 먹는 작가, 점심 보다 산책을 즐겨하는 작가,
점심 약속이 있는 작가, 늦은 밤 글쓰기로 인해 그냥 아점 먹는 작가,.....
다 나름대로 점심에 대한 생각이 있다.
그 생각들을 듣다보면 나의 점심은 어떤가?
점심에 대해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침밥을 챙겨먹지 않으니 점심은 잘 먹어야 된다는 생각이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어야 저녁은 가볍게 먹을 수 있고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확실히 점심을 2% 부족하게 먹으면 저녁을 많이 먹게 된다.
늦은 밤 동안 소화도 잘 안 되고.
점심은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다.
급식 메뉴는 다양하지만, 중요한 것은 음식은 간이 잘 맞아야 된다.
우리 학교는 대체로 음식의 간이 잘 맞다.
반면에 아비토끼네 회사의 점심은 맛 없다고 한다. 간이 안 맞으니까.
사람의 속뜻을 살며시 헤아려 보는 '간-보다'란 용어가 있다.
다른 뜻, 마뜩잖은 표현으로 사용되지만 이래저래 간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질 좋은 식재료를 간도 안 맞고, 맛 없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밥상 앞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먹는 것의 즐거움이란게 얼마나 큰데....
아침 안 먹는 사람들의 하루 첫 끼인데.
그래서 날마다 다르게 나오는 어쩌다 마음에 안 드는 점심 메뉴일지라도 다 먹는다.
남은 오후 시간을 위해서^^
일상화되어가는 혼자 점심 먹기와 남은 점심 시간은 공허하지 않기를!
점심을 챙겨먹는다는게 기쁘거나 기대가 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억지로 챙겨먹고 한 끼 때워야 될 만큼의 무게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전과 오후의 딱 절반인 점심 시간,
내 마음과 생각이 건강하도록 잘 챙기는 시간이 되기를!
모든 무기력함으로부터 힘을 내는 시간이 되었으면 차암 좋겠다.
한동안의 점심은 이랬다. 반찬집에서 사 온 3,000원짜리 반찬 서너 개. 월급 받거나 기분 좋은 날에는 5,000원짜리 반찬도 샀다. 집에서 왕창 해온 밥. 물 한 컵. 묵언수행하는 사람들처럼 밥을 먹었다. 신속하게 먹었다. 10분 이내로. 정말 정말 끔찍했다. 처음엔 무슨 말이라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마저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의 에너지를 여기에 쓰면 안 되겠구나, 깊은 현타가 찾아왔다.
물건을 챙겨 나오면서 잊지 않고 밥통도 챙겼다. 반찬은 놔두고 왔다. 알아서 하라지. 지금은 이야기를 나눈다. 반찬은 사지 않는다. 반찬을 사려면 그 동네로 가야 한다. 트라우마. 한동안 그쪽으로는 가지 못할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숨이 가빠 오고 심장이 두근댄다. 대신 제일 잘하는 김치볶음밥을 싸 간다. 파리바게뜨에서 샐러드를 사가기도 한다. 같이 먹으려고 맥모닝을 사 오기도 해서 고맙다고 여러 번 말했다.
이야기를 한다. 점심을 먹으면서. 듣기와 말하기의 비율을 적당히 조절해가면서. 어디를 가도 똑같다고 말한 그 입을 때리고 싶을 정도로 여기는 괜찮다. 똑같지 않고 더 좋을 수 있다는 걸 지금 괴롭고 힘든 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참지 말고 버티지 말고 아닌 건 아니라고 나를 설득하면서 나오기를. 처음이라 일을 많이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게 느껴진다. 시간이 지나면 업무량은 많아지겠지만 일단 해보는 거다. 이야기가 있는 점심을 위해서.
산문집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은 작가들의 점심 단상을 모아놓았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먹는 점심. 회사 업무를 하다가 먹는 점심. 급하게 먹어야 하는 점심. 산책을 하기 위한 워밍업으로의 점심. 누군가들의 점심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한 시간의 점심시간. 급하게 밥을 먹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어깨가 무지 아팠다. 등도. 벌칙의 시간인 것처럼 느껴지던 점심시간이었다. 여유도 온기도 없는 점심시간을 가졌었다.
책에서는 다양한 점심시간의 이야기가 나온다. 구내식당을 사랑하고 집에서 정성 들여 먹기도 한다. 여러 형태의 점심시간의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 시간에서 쓸쓸함을 느꼈다. 일을 하기 위해 먹는 밥인데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먹는 밥인데 점심시간은 노동 시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어떤 곳은 중식비가 나오지 않기도 한다. 분명 둘이 먹는 점심인데 내내 혼자 먹는 지독한 외로움의 시간이었다.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을 읽으며 힘이 나길 바랐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했다. 솔직함에 대해 생각한다. 요즘 나는 산문집을 주로 읽는다.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솔직함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쉽게 드러낼 수 없었던 과거의 어떤 기억을 꺼내 놓는 걸 보면서 나의 과거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눈가가 촉촉해지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기대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비비고 전복죽을 용기 내어 끓였다. 다행히 상하지 않았다. 조금 짜서 밥을 더 부었다. 3분의 2는 먹고 나머지는 반찬통에 옮겨 담았다. 다음 주 어느 하루의 점심을 위해서.
밥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찾아온다면. 점심시간인데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시간을 겪고 있다면. 과감히도 아니고 그냥 담담한 마음이 되어 나왔으면 한다. 그곳이 최선이 아니라는 신호를 수신해야 한다. 힘이 나지 않을 땐 힘을 내려고 하지 말고. 영화 《벌새》의 영지쌤 말대로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보기를. 손에 잡히는 리모컨이나 휴대전화에 깔려 있는 배달 앱을 눌러 보기를. 이상하게도 힘이 난다.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은 스트레스를 풀고자 짠 과자와 초콜릿을 달고 살던 시기에 눈에 들어온 책이다. 뒷날개를 보니 H출판사의 유명 에세이 시리즈에 속한다. 한 명의 작가가 다섯 꼭지씩 쓴 글 모음집이다.
강지희 평론가와는 나만의 연緣이 있다. 그는 최연소 등단 평론가답게 지적이고 세련되게 글을 잘 쓴다. 그 믿음에서 동료를 꼬셔 유명 소설가와의 만남을 진행하는 그를 보러 갔었다. 시간에 예민한 직업병이 발동하여 자신 없는 눌변이 영 못마땅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경복궁 주변의 어느 평론가와의 만남 장소를 찾지 못해 헤매는 중이었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내게 깜깜할 때 위치 찾기란 난관이다. 그때 지나가던 강 평론가를 따라 무사히 합석할 수 있었다. 나는 일개 독자이고 그는 선배 평론가를 보러 온 거였지만. 그리고 이제 그도 말을 꽤 잘한다. All’s well that ends well.
‘미나리 할머니와 고사리 할아버지’는 영화 ‘미나리’ 속 할머니를 작가의 외할아버지의 “크고 따뜻한 품”과 (제주산) 고사리를 연결지으며 아름다운 향미를 피운다.
‘무수히 많은 이별과 산책’에서 그가 연극과 연극 이론에 심취해 소설 평론가가 된 사연을 알게 됐다. 픽션과 “연애”하며 혼자 하는 이별 의식, 즉 긴 산책과 음악 듣기의 리듬타기가 낯설지 않다. “그 글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과정은 마치 누군가를 속속들이 알아가는 연애와 유사한 바가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 위에 그 사람이 알고 이해하는 세상을 겹쳐놓고 ‘두 동그라미가 교차’되면서 만드는 궤적을 바라보는 일(19)”에 매혹되는 자들의 마음은 같다. 뜻밖에 아래 인용에서 내가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
픽션을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버리지 못하는 욕망 중에는 모든 것을 ‘완결된 상태로 감각’하고 싶다는 열망도 있었다... 무언가가 진행되는 중에 수반되는 열정과 기대와 불안이 아니라, 어떤 기다림도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손에 쥐는 ‘안정과 관조와 초연함’을 갈망했다. (18-19: 본인 강조임)
‘점심이 없던 날들’은 대학강사 시절을 호출한다. 나는 대학 진학 전까지는 집밖과 학교가 넘나 좋은 사람이었다. 외부의 변화에 떠밀리는 것을 꺼리는 유형이라, 수능1세대 부적응과 입학과 동시 CC 경험은 나를 책의 “고립과 고요함” 속으로 숨게 했다. 사진 찍히는 것도 시선 응시Eyes로 불편해하는 터라, 강의도 박사학위를 받고 반년 쉬고 겨우 시작했다. 강의 전 긴장하고, 시끄러운 식당에선 멘탈이 털리고, 얘기를 하면 밥을 못 먹는 스타일이라 대부분 김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나중에는 식당파가 아닌 군것질 그룹이 생겼지만.
목요일까지만 강의 스케줄을 짜던 내가, 퇴근길에 하도 기뻐해 따라 금요일에 강의를 잡지 않는다는 동료 선생님까지 생겼다. 키우던 반려견도 목요일 밤에는 거실에서 나를 기다렸다. 티브이 보면서 교촌 레드윙 뜯는 시간인 걸 알고(미미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후 피하는 음식이 되었..). 그리고 수업 전후 준비와 정리 시간을 조용히 따로 갖는 내가 신기해, 또 항상 읽을거리를 말해 친해지기로 했다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나는 지인들에게 늘 말했다. 강의실을 나오는 순간 나는 그냥 000이고 “내 공부가 더 중요해. 그거면 된다.” 수업 중 농담도 없고 소화할 분량에 집착하는 팍팍한 선생이었던 탓에 ‘내가 편해야 상대도 편해’라는 주문으로, 다음 문구를 여러 번 되뇐다. “어쩌다 아프더라도 괜찮다고, 조금 느리거나 완벽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서로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회에서 살 수 있기를(27).”
‘베이징과 불발된 연애’도 추억을 되감는다. 영어를 전공한 학생들은 대체로 외국인과의 교제에 열려 있는 편인데, 나는 모국어로도 안 통할 때가 많은데 할 말을 못해 속병이 걸릴 것 같아 싫었다. 짧은 어학연수를 다녀왔을 때 누군가 그랬다. “다녀 와서 가장 달라진 게 너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으나 나는 지독한 정박 욕구와 귀소 본능에 시달린다. 귀국 했을 때 외국에서 날아와 있던 엽서들과 바이크 타고 바다 보러 가자던 녀석이 생각나, 젊은 날에는 삶을 망가뜨리지만 않는 선에서 썸을 타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데에 생각이 이른다. 라잇 어 플라워웍~ㅎ
‘엄마, 스시, 눈물’은 심경을 복잡하게 비튼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산 적이 없는데 미혼인 게 맞을까. 내 주장이지만 가족과 반백년 같이 살면 부부와 마찬가지로 쳐줘야 한다(졸혼과 이혼도 인정되어야^^). “엄마의 가지치기”, 그 희생과 헌신이 어느 순간 “사랑하는 자의 독선”이 되기도 한다. 내 꿈의 시작을 더듬다보면 스무 살 리바트 회색 사무용 책상과 책장을 선물했던 엄마가 있지만, 삼년 전 배신감에 힘들어 멍 때리는 내 방을 뒤집은 건 배려도, 사랑도 아니다. 미니멀리스트인데 굳이 산더미 문서와 책들을 건드려 억지로 정리한 후 몸이 고장 났으니까(세 번의 수술). 살 곳을 자유롭게 바꾸는 큰조카에게 “넌 참 쉽다!”고 했던가….
나는 오늘도 점심을 먹었고 내일도 먹을 것이며 모레도 먹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먹어야만 하는 밥은 싫다. 진정으로마음이 동해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바삐 놀리고 싶다. 식사가 즐거워지고 음식을 감사히 여겼으면 좋겠다. 끼니를 때우는게 아니라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포만감을 진심으로 만끽했으면 좋겠다. 내가, 우리 모두가. (원도, 마음이 동하는 한 숟갈 p.191-192)
10명의 작가가 점심시간에 쓴 글을 엮은 산문집이다.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에 비해 작품을 읽어 본 작가와이름을 아는 작가가 있어서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매달 말 ‘점심 산문’ 한 편씩 마감해야 했다는 걸 엄지혜 작가의 글에서알 수 있었다.
점심시간에 일어난 에피소드와 점심에 대한 여러 작가의 다양한 글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회사로 출근하는 작가는 점심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매번 비슷한 메뉴 중에서 뭘 먹을지 고민하고, 어딘가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작가는 어떤 요리를할지 글 쓸 시간을 어떻게 확보할지 고민한다. 어떤 작가는 점심에 밥을 먹으면 오후에 졸려서 간단하게 해결하고, 또 어떤 작가는 오후에 쓸 에너지를 위해 든든한 점심을 선호한다.
점심은 읽기의 시간이 돼주었다. 가장 귀중한 시간이 된 거다. 점심에 주어지는 한 시간을 쪼개 10분에서 15분 정도 낮잠을 자고 남은 40분은 점심을 먹으며 읽고 싶은 글을 읽었다. 달콤했다. (이훤, 어느 개인의 점심 변천사 p.203-204)
누군가는 식사를 챙기고 몸 관리를 하는 것 역시 사소하지만 성실한 자기관리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점심시간에 식사 메뉴만을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강지희, 점심이 없던 날들 p.26)
점심 산문을 읽다가 문득 저녁 시간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밥 짓는 냄새가 부러웠던 날들이 생각났다. 바쁘면 저녁을먹지 못한 채 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아침식사는 자주 건너뛰었고 그래서 점심 식사는 소중한 한 끼였다. 출근길에 점심메뉴를 미리 골라보고 애써 고른 메뉴가 맛이 없을 때 울적했다.
작가들의 점심시간은 글을 쓴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대략 1시간을 정말 다양하게 보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