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 한마디
국민 정서와 괴리된 판결이 나올 때마다 AI 판결 도입이 시급하다는 댓글을 볼 수 있다. 10년간 판사로 재직해온 손호영 저자가 쓴 이 책은 그럼에도 인간 판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웅변한다. 판결문에 담긴 언어를 분석하면서 인간과 법의 관계를 사색했다. - 손민규 사회정치 PD
책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내가 중학생 때부터 다니던 학원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종합학원이 유행이라 국, 수, 사, 과, 영어에 특이하게 한 과목을 추가해 가르쳤다. 그것은 바로 '형법' 수업이었다. 굉장히 험악한 인상을 지니셨던 나이는 중년으로 보이셨던 형법 선생님은 두꺼운 형법책과 미니 당구채를 지니며 수업을 하셨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두꺼운 형법책은 짧은 만화와 판결문 그리고 해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수업 내용이 나에게 신기했는지 수년이 지나도 그 책을 버리지 않고 때때로 펼쳐봤다.
아마 법을 배운다는 것이 그당시 나에게 다른 과목보다 신비로운 곳을 탐색한다고 느껴졌다. 너무 신비로웠을까, 수업 내용은 이해가 하나도 안되는데 흥미진진하게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려워 이해가 되지 않았던 법이 나이를 먹으면서 수많은 사건을 뉴스로 접하게 되면서 이해를 하고 점차 익숙해진 것 같다.
자주 접해도 아직까지 이해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판사의 판결이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끔찍하거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죄로 법정에 서게 된 이들이 받는 판결과 형량은 때때로 내가 지닌 상식을 벗어날 때가 많다. 내가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아니기에 내가 가진 상식으로 재판의 과정을 평가할 순 없지만, 가끔 물음표를 띄게 만드는 판결엔 그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런 판결을 내린 걸까, 물론 법이 기준이겠지만 말이다.
궁금하지만 묻기는 어려운 판결의 내용과 판사라는 직업을 책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챕터의 시작이 판결로 시작해, 이런 판결이 나온 과정과 이에 대한 판사의 입장을 무겁지 않고 이해하기 쉽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판사에게 쉬운 재판은 없다는 걸, 재판마다 적용하는 법이 다 다르고 상황과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과정이 축약된 판결로 정리되는 재판 과정을 판사인 저자가 전달하면서 그 안에 숨어있는 개인의 심정을 슬며시 보여준다. 판사의 입장 더불어 개인의 생각까지 들어가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술술 잘 읽혀서 두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판사의 판결이 어떻게 나오고 어떻게 해석되는지 궁금하시면 가볍게 읽어볼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기억에 남는 문장
1부 시시포스의 돌
진실을 위하여
이런저런 토로와 공감 뒤에 누군가가 물었다.
"그러면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맡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소신껏 유죄로 선고할 거예요?"
잠깐의 정적과 얕은 한숨 뒤, 이어진 대답에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겠어. '양심적 판결거부'를 할 수도 없고, 대법원에서 무죄라고 했는데."
나는 이 말과 우리의 끄덕임이야말로 새로운 질서(비록 그것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에 안정을 부여하고자 하는 판사의 직업적 태도와 양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_진실: 어렵고도 마땅한 다짐, 58p
이 글 첫머리에 적은 판결 문장처럼 법에서는 판사들의 합의를 공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합의 과정이 공개될 경우 그때부터 외부의 시선과 의견이 개입되어 재판의 독립성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판결 문장에 매우 동의한다. 합의는 허심탄회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판사들이 서로 마음을 내놓고 의견을 맞부딪쳐야 한다. 고상하고 점잖은 합의보다는 오히려 신랄하고 투쟁적이어서 뜨거운 합의가 바람직하다. 그래야 꼼꼼하고 정돈된, 차가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_조율: 최선을 향한 뜨거운 과정, 70p
2부 우리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
설득을 위하여
판사 자신의 삶을 통해 축적된 습관, 경험, 선입견, 편견 등은 알게 모르게 그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 신념대로만 판단하다가는 자칫 다수의 생각과 동떨어질 수 있다. 나는 그때 사회 평균인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판단이 '합리적인 판단'에서 너무 멀어질 때 경고음을 올려 줄 수 있는 것. 판사가 사회 평균인의 관점을 새삼 들여다보면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_평균: 판단의 기준, 118p
경험과 관찰은 직관적이고 감각적이다. 그래서 때로는 압도적인 무게를 가진다. '그'만이 할 수 있는 경험, '그'만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관찰은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다. 범죄 피해자나 목격자의 진술이 재판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이유이다.
_진술: 영원한 숙제, 123p
판사는 법을 다루고 이를 통해 판단하는 일을 한다. 더 엄밀히 말하면 갈등 해결 전문가라고 볼 수도 있다. 정확한 법리, 치밀한 논증 등은 결국 수단일 뿐이다. 판사의 진정한 목적은 갈등을 풀어내고 분쟁을 해소하는 것일 테다.
사건에 얽힌 당사자들의 마음을 알아보고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이다. 법에 판결만이 아니라 조정과 화해 제도를 둔 데에는 이와 같은 연우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_마음: 법, 존재의 이유 149p
3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해를 위하여
판결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설득'에 있다. 누군가는 물을지 모른다. "판결은 판사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내보이는 것 아닌가?"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판사의 판단이 정당성, 나아가 생명력을 얻기 위해서는 이를 당사자와 이해관계인이, 나아가 사회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요켠대 좋은 판결이란 결국 판사의 판단이 그 대상에게 설득력 있는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_감정: 함께 겪음, 같은 마음 159p
판사는 자신이 신중하게 세운 논리와 체계가 정당하다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을 때까지 사건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판사가 세운 논리와 체계는 그가 보기에 관철되어야 '옳은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상대를 설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판사에게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_자존심: 책임감의 다른 말, 219p
손호영 (지음)/ 동아시아(펴냄)
기사 하나가 생각난다.
AI 대세 시대에 인공지능으로 교체되기를 바라는 직업 중 하나 법관!! 인공지능이 우리를 판결해 주기를 바라는 일반인들의 마음보다는 법관에 대한 신뢰가 낮음을 반증하는 기사다. 사람들은 어떤 판결에 주로 불만일까? 성범죄자에 대한 판결, 정치인이나 재벌기업에 대한 판결에 주로 불만이 많다.
판결도 하나의 콘탄츠라는 10년차 판사님.
어려운 판결문이 아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판결문, AI의 시대 인공지능에게 결코 밀려서는 안 될 영역임을 언급해 준다. 판결문은 지식인들의 혹은 법조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난 10년간 판결문은 조금씩이라도 변해왔음을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과거의 판결문, 그리고 요즘 판결문을 비교하기도 하고 조목조목 자신의 생각을 서술했다. 판결문도 이렇게 감각적일 수 있구나! 또한 판결문의 고쳐져야 할 점에 대한 언급이 솔직하게 다가왔다. 숫자와 어려운 한자로 점철된 판결, 판사의 적절한 소화 없이 서술된 판결문을 지양하는 저자의 가치관이 뚜렷이 드러나는 문장이 많았다.
요즘 법조인들의 에세이가 많이 보인다.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판결문의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유머러스하고 진솔한 글이었다. 무엇보다 사법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지는 책이다. 판결문이 한결 더 가볍게 가깝게 느껴진다. 작가는 문학으로 말하고 기자는 기사로 교사는 수업안으로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 법은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 하는지 그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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