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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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리뷰 총점 9.9 (1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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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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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융합, 의미의 도덕을 추구하는 글쓰기 평점9점 | k**u | 2022.08.18 리뷰제목
“융합은 아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력이다.” -155쪽   이 사회에 차고 넘치는 말들이 정작 소통을 방해하고 사회갈등의 주 원인이 되는 까닭에 대한 규명이며, 이를 넘어서기 위한 앎에 대한 지향을 역설하는 신랄한 비평 에세이다. 그것을 저자는 ‘융합’이라 표현하며, “지식의 필요성과 쓸모와 가치에 관한 질문과 논쟁하는 일(51쪽)”, “인간
리뷰제목

 

융합은 아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력이다.” -155

 

이 사회에 차고 넘치는 말들이 정작 소통을 방해하고 사회갈등의 주 원인이 되는 까닭에 대한 규명이며, 이를 넘어서기 위한 앎에 대한 지향을 역설하는 신랄한 비평 에세이다. 그것을 저자는 융합이라 표현하며, 지식의 필요성과 쓸모와 가치에 관한 질문과 논쟁하는 일(51)”, “인간 스스로 자신을 아는 과정(110)”이며, 의미의 도덕을 추구하는 마음가짐(16)”이라 정의한다.

 

우리는 어떤 언어로 말하고 있는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인간들의 언어로 우리의 현실을 말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물음이다. 또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부분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즉 아는 것만을 보고, 모든 것을 하나의 잣대로만 평정하려는 무지의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한 판단정지의 용기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마치 하나라는 양 이 사회를 거대한 돌처럼 변화없는 단일한 조직(160)”으로 인식하는 권력화된 무지,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면서 여론을 주도하고 지도자가 된 작금의 현실만큼 우리 공동체가 위험해졌다는 인식이 근접했던 적이 없다. 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을까? 저자는 이 파국의 시대를 재촉한 요인의 하나로 한국 사회의 낮은 문해력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 둘째는 지배자, 강자, 착취자의 언어인 문화권력, 즉 보편성이라는 언어의 폭력성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책에 열거된 세계 다르기 보기를 위한 쓰기에는 자유, 표절, 이성, 이분법, 미국주의, 환원주의, 구조적 모순 등 무수한 문제적 사유의 물음들이 담겨있지만, 어쩌면 문해력과 보편성이라는 두 주제어의 범주로 설명가능 할 것이다. 물론 그 총체적 단일 언어는 융합혹은 횡단의 정치로 수렴하겠지만 말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식의 출발은 앎의 문제이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앎은 무의미하거나 대개는 사회악이다.” - 59

 

고작 편협하게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의 관념의 변죽만 울려대며,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까닭에 모든 문제 제기가 돌고 돌아 좌빨, 페미니스트, 틀딱 같은 차별과 혐오의 언어로 귀결된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현상이 하나의 출구로 빠지는 깔때기 이론을 환원주의라 한다. 이것에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하나 밖에 없다는 편협성이 놓여있으며, 마치 그것이 보편성이라는 진리의식을 갖는다고 여기는 우매한 폭력성 또한 똬리를 틀고 있다. 지금 우리의 공동체를 불안한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권력이 말하는 보편적 가치란 이 깔때기 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의 권력은 스스로 자신을 아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체 어떤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것인가? 부자 감세의 보편성? 공기업 민영화의 보편성? 사회안전망 해체의 보편성? 이처럼 보편적 가치의 대상도 문제지만 오늘의 세계는 불변하는 보편적 가치는 존재치 않는다. 기회의 평등? 이것은 불평등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보편적 가치를 적용할 수 있는 조건이 사람이 처해있는 위치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무수한 차별의 조건들이 현재하는 데, 보편적 가치란 그야말로 거짓의 언어, 무지한 대중 속이기의 잡설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자유를 부르짖기까지 하는데, 이건 정말 위험하기 그지없는 무서운 말이다.

 

자유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어이다. 경쟁사회, 소음과 먼지, 타인의 시선, 신분차별, 신자유주의...,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말이다. 자유는 결코 그냥 주어진 적이 없다. 모두 투쟁으로 쟁취해 얻어야 하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서 그냥 부자유 상태로 산다.(28)” 그런데 자유, 목적어 없는 자유를 외치는 윤정권의 자유는 개인적 차원의 자유이다. 내 뜻대로, 내 맘대로의 자유이기에 소름끼치는 것이다. 그런 자유는 혼자 있을 때 맘대로 하면 된다. 공동체에서 자신의 이런 자유를 행사하려하면 타인을 다치게 한다. 결국 이 자의 자유는 타인이라는 국민 대중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겠다는 것의 표현일 뿐이다. 조물주라도 된 듯 생각대로 자유를 행사하게되면 그 삶은 오래지 않아 멸망하게 된다.

 

왜 이런 무지와 무능력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 되었을까? 저자는 분단(分斷)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이분법이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이분법이 한국사회의 낮은 문해력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북, 반미, 친일 ... 이러한 언설을 생명줄로 삼는 반국가적 사회에서 어떻게 문해력을 논하겠는가?(95)”라는 한 문장이면 그 설명으로 족할 것이다. 앎의 궁극적 목적이란 배제없는 온전함(108)”이다. 경계와 선입견 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유로운 가능성의 상태, 적어도 상상력이라도 갖추는 것이다.

 

 

 

문해력이 낮다는 말은 실제로 문해력이 낮다는 것과, 이해하지 않겠다는 맹목의 의미를 갖는다. 낮은 문해력은 소통에 장애를 일으킴으로써 사회갈등의 주 원인이 된다. 인터넷 검색창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은 이미 아는 것의 구체화이지 새로운 정보의 획득이 아니다. 모르는 것은 검색하지 못한다. 이 말은 자기 옹졸한 한 움큼의 지식을 굳게 하는, 즉 변화하지 않겠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지식도 품지 못한다. 더구나 긴 글이나 조금만 익숙지 않은 문장에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기 무지는 외면하기 일쑤다. 문해력은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라는 지적처럼, 나는 모른다는 겸허한 앎의 태도는 우리의 사회를 위해 중대하고도 또 중요한 출발점이다.

 

내 자신이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정말 굉장히 어려운 노력을 요구한다. 공부가 중노동인 이유이다. 사유는 고통스럽고 외로운 노동이다. 이러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편협하고 속된 믿음을 만들어낸다. 일례로 1934년 한 일간지에 연재되던 일제 강점기 식민지민의 침해된 권리를 말하던 이상의 오감도(烏瞰圖)가 무슨 말인지 모를 시의 게재를 중단하라고 항의하던 독자들로 인해 연재를 이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렇듯 독자의 수준이 만들어간다. 무지가 역사를 만들어내는 이 폭력성이 결국 자신들을 신음하게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이 낮은 문해력이 문제인 이유이다.

 

낮은 문해력은 궁극적으로 좋은 지식 생산의 토양을 파괴한다. 지식 생산을 궤멸시키는 요인에는 표절도 한 몫하고 있는데, 마치 단순한 사적 윤리의 문제처럼 치부하고 마는 만연한 도덕 불감증이다. 표절은 윤리문제가 아니라 법적 문제로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정거래를 해치는 가장 부정의한 도적질이라는 점이다.

 

표절로 받은 학위로 돈벌고 고용의 수혜를 입는 것이라면 이보다 악질적 행위가 있을 수 있는가의 물음이다. 보석 훔치는 것보다 훨씬 쉬운,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표절이라는 이 절도에 대해 이 사회는 왜 이리 무감하며, 표절자의 당당함은 어찌 가능한 것일까? 이 표절자가 버젓이 지식인 행사를 하다보니 이 사회의 지식 생산은 바닥을 해매고 천박함이 오히려 권력을 행사하며 양양거린다.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인지하는 방법은 쓰기와 과학적 실험이라는 방법 이외에는 별 개 없다. 그래서 쓰기는 앎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쓰지 않고 베끼고 복사하는 세계에 진정한 지식은 결코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사회의 여론을 온통 지배했던 세 가지 사건을 예시하고 있는데, 저마다 다른 동기와 유형을 지닌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들 모두에 동일한 결론을 내린다. 다른 사건인데 결론이 같다는 것은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곧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폭력의 다름 아니다. 사회변화, 차별받고 배제되는 약자들은 새로운 언어로, 지식의 재해석을 통해, 나아가 기존의 지식을 넘어 새로운 앎을 향한 경계넘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 방법론이 곧 새로운 지식 생산이 가능한 자기 무지의 고통스런 인식이다.

 

안다고 여기는 순간 그 어떤 지식 생산의 영역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이 생산되지 않을 경우 그 사회적 고통은 오롯이 현실에 대처할 수 없는 약자들의 몫이다.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고, 제시된 언어의 개념 내부에 도사린 차이를 드러내고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 우리는 앎을 위해 부단히 공부를 하여야 한다. 그 공부가 곧 문제의식이요, 융합이다. 역사는 공동체의 안목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 결과는 바로 그 공동체의 안목의 수준일 뿐이다.

 

이 책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는 표제는 바로 이러한 앎, 융합의 출발을 함의한다. 이 책은 세상을 보는 열린 시각을 지니기 위한 그 지향의 제시로 가득하다. 지배이데올로기와 계급을 끊임없이 재생산하여 기득권을 항구화하려는 주류의 언어를 탈피하여 진정한 시민의 언어를 재창조하기 위한, 또한 우리네 좁아터진 앎에 훌륭한 채찍이 되어 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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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글쓰기, 나를 아는 공부의 시작 평점10점 | r*********s | 2022.11.18 리뷰제목
아끼고 좋아하는 동생은 공부하는 아이다. 처음 만나 서로를 알아가고 관계를 지속하는 동안 그녀는 항상 공부를 했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더 많이 알기 위함이고 스스로 당당해지기 위함이다. 관심을 갖는 분야는 다양해서 만나면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이쯤 되면 예상했겠지만 글도 쓴
리뷰제목

아끼고 좋아하는 동생은 공부하는 아이다. 처음 만나 서로를 알아가고 관계를 지속하는 동안 그녀는 항상 공부를 했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더 많이 알기 위함이고 스스로 당당해지기 위함이다. 관심을 갖는 분야는 다양해서 만나면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이쯤 되면 예상했겠지만 글도 쓴다. 독립출판으로 곧 자신만의 책이 나올 예정이다. 정희진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를 읽으면서 줄곧 그 동생이 생각났다. 이 책을 보면 좋아하겠구나, 어쩌면 이미 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정희진의 책을 몇 권 읽다 말았다. 그러니까 어떤 책은 끝까지 읽지 못했고 어떤 책은 읽기만 했다. 읽으면서 좋았지만 그 좋다는 걸 글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그 훌륭함을 내가 망치는 글을 쓸까 봐 두려웠다는 핑계를 대고 싶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한 리뷰 또는 감상을 쓰는 일은 한 편으로는 용기가 필요했고 한 편으로는 어떻게든 이 책이 너무 좋아서, 당신이 읽어야 한다고 추천하고 싶어서다. 아무튼 그렇다.‘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란 제목만 보며 글쓰기에 대한 안내서 같지만 이 책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공부 좀 하라는 내용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작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내 글을 읽는 독자가 적더라도 최선을 다해 다른 세계를 만들고 싶다. 자본에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많은 글 쓰는 이들의 고민일 것이다. (13~4쪽)

 

글쓰기는 결국 가치관의 문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돈이든 명예든 자기실현이든 고통의 승화든 추구하는 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글쓰기는 왜 쓰는가에 ‘따른’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다. (15쪽)

 

글을 쓴다는 건 가치관의 문제라는 것, 이 말을 오래 생각했다. 누구나 쓰고 누구나 읽고 원하는 건 뭐든지 쓰고 발표할 수 있는 세상이다. 나를 드러내는 일이라 주저하고 어렵다. 무엇을 쓰는가, 무엇 때문에 쓰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럼 결국 쓰기 위해 나를 알아야 한다. 내가 쓰고 싶은 게 뭔가를 알아야 하니까. 지금 내가 쓰는 건 이 책이 좋아서 그걸 알리고 싶은 거니까.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라는 부제가 있지만 내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쓰기와 공부다. 내가 모르는 걸 안다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모르는 데 어떻게 알겠는가. 그게 가능한가? 그러니까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나에 대한 공부. 이 책을 읽으면서 최근에 읽은 『한나 아렌트 평전』 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공부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란 말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특히 이런 문장에서 그랬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이란 결국 현재를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려있다는 말. 정확하고 뻔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인간은 현재를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존재이다. 본질적인 상태는 없다. (33쪽)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한 다음에 가능하다. 사실 대부분 인간은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다. (56쪽)

 

쓰기가 최고의 공부이자 지식 생산 방법인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138쪽)

 

 

정체성을 찾는 사춘기도 아닌데 우리는 여전히 나는 누군인지 사는 게 뭔지 알지 못해 힘들다. 그런데 정작 ‘나는 어디에 있는가?’에는 집중했던 적이 없다. 내가 있는 동네를 시작으로 점차 확장하면 지역사회, 국가, 세계까지 이어질 수 있다. 내가 있는 이 작은 사회는 누가 살고 있는가, 나를 포함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가 돌아볼 수 있다. 말하기와 듣기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나가 크게 정치 참여나 학교나 공공기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무슨 주의, 사상, 페미니즘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 모든 개개인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사회를 이루고 구성하니까. 개별성의 존중도 그만큼 필요하다. 그러니 융합이라는 것도 저자의 설명처럼 먼저 내 몸에서 일어나야 한다. 내가 경험하고 그것이 퍼져 공동체나 함께 공부하는 도반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당파성의 지속적인 생산이라고 하는데 가치관의 충돌과 재생산이 없다면 공동체나 도반의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건 이런 문장과도 통한다고 생각한다. 융합에서 중요한 건 갈등과 공명인 것이다. 새로운 것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필수과정이니까.

 

나는 내 몸의 역사다. 개인의 몸은 그 개별성 때문에 앎의 내용과 가치관에 따라 현실과 합쳐지는 범위가 다르며 만들어지는 지식도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101쪽)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는 누구나 지녀야 할 가치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또 경우에 따라 갈등하거나 공명한다. (117쪽)

 

물론 지나친 갈등은 문제를 불러온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세대 간 간극은 어떻게 봐야 할까. 각자 경험한 시간이, 앞서 말한 것처럼 역사이므로 서로가 살아온 시대가 비교의 대상과 기준이 되는 건 당연하다. 하나의 일자리를 두고도 중년이나 노년이 청년의 그것을 빼앗는다고 말하는 분노하는 시대. 선거철이 되면 더욱 커지는 목소리들. 어떤 세대를 살든 그 세대에 한정된 삶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이 역시 공부일 것이다. 돈이 되고 취업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앎이라는 공부. 현재의 나이를 감당하기 위한, 인생을 살아가는 공부 말이다.

 

우리는 각자 나이를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가난하고 나이 든 이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간주되는 이들을 존중하자. 이것이 공정이다. (177쪽)

 

강자의 주관성은 객관성처럼 여겨져서 투쟁해서 쟁취할 필요가 없는 반면 약자의 삶은 그렇지 않아 고달프다. 약자에게 객관성은 쟁취해서 확보해야만 가능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 사회 운동이다. (221쪽)

 

굳이 정치적인 이슈를 들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 정말로 필요한 건 제대로 된 융합이다. 서로의 이익에 따라 절충하는 게 편협한 태도의 융합이 아니라. 어떤 위치에 있든 공부는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고위 계층에 있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현재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달라질 것이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우리 사회는 어려움에 처했다. 그러니 공부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이 책을 읽는 일은 공부의 방법 가운데 하나이고 자신만의 언어, 새로운 언어를 찾아가는 일이다. 이 책으로 정희진의 글쓰기를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책으로 시작하는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마침내 쓰는 일은 중요하다. 나를 알고 나에 대해 쓰는 일, 모르는 나를 천천히 아는 나로 바꾸어 가는 과정, 그게 융합은 아닐는지. 진짜 글쓰기가 폭발하는 순간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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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4장 고정된 프레임을 넘어서 평점10점 | s********d | 2023.03.28 리뷰제목
마지막 4장은 좋은 문장들을 옮기면서 필요한 경우 < >로 강조하고 사견을 살짝 곁들여 보겠다. 밑줄긋기 많으면 싫어하는 작가도 있고 실례일 것 같은데 도무지 줄일 수가 없다 요. (^-^)    지식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모든 앎은 인간-자연-사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상호 작용이 학문의 발전사이다... 지식은 지역, 문화, 사람 사이의 번역이며, 혼종, 혼합의 산물
리뷰제목

 마지막 4장은 좋은 문장들을 옮기면서 필요한 경우 < > 강조하고 사견을 살짝 곁들여 보겠다. 밑줄긋기 많으면 싫어하는 작가도 있고 실례일 것 같은데 도무지 줄일 수가 없다 요. (^-^)

 

 지식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모든 앎은 인간-자연-사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상호 작용이 학문의 발전사이다... 지식은 지역, 문화, 사람 사이의 번역이며, 혼종, 혼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견이나 틀린 말도 언제나 의미가 있다. <재해석하기 나름>. (189-190)

==> 어느 부분에서 오해가 생기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지는 발언을 듣는 게 아무래도 유리할 듯.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은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약자에게 필요한 자기만의 방과 자기만의 언어다.’ (190)

==> 강산이 변할 시간동안 싸이월드에서 실컷 놀았다. 그때 방 이름이 The Enormous Room이었다. 가상공간에서만큼은 거대한 방을 갖고 싶어 e.e. 커밍스의 시 제목을 땄었다. 팬데믹 시기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읽기 바람이 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큰조카가 독립서점에서 기념엽서를 사와 주기도 했었다. 글쓰기(프리랜서 작업) 공간과 일정 수입이 지금 주목을 끄는 이유는 독립된 분리 공간과 기본소득의 필요성이 함의하는 바가 클 거다. 여담] 결혼할 당시 한 약속 두 가지를 남편이 지켰는데도.. 우울병을 이기지 못했다.

 

 <당파성과 가치관이 필수적인 이유는, 모든 앎은 현실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즉 어떤 집단을 위한 융합인지가 핵심이다... 융합은 개별 학문을 넘어서는 가치관의 문제다. 융합의 전제는 지식이 누구에게 봉사하는지에 관한 문제의식이다. 융합은 그 과정도 결과도 지극히 정치적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191)

==> 정치적 언어 전성시대 함 가즈아 ~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고 인지, 지식, 돌봄, 감정 노동 같은 보이지 않는 마음invisible heart’이라고 주장해 왔다. (193)

==> 아담 스미스를 시작으로 한 자본주의를 재해석하는 움직임으로, 얀 물리에 부탕 같은 여성주의 경제학자가 주창한 대안적인 글로벌 경제를 귀띔한다.

 

 모든 지식은 다른 지식과의 비교나 대비>(반대말, 동의어)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절대로 홀로 성립하는 개념은 없다. 모든 개념은 연결의 법칙이 다를 뿐 연결된다... 개념들의 접목이 융합이 되려면, 무관한 개념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융합은 충돌하고 같이 도약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알려면 새로 공부해야 한다. (198-199; 202)

 

 어떤 언어도 한 가지 요소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얘기다. 말은 계속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 중 오염은 필연적이고, ‘외래어비난 자체가 외설적(벗어난 개념^^)이다. (207)

==> 저자는 한글 전용론의 한계를 말하며 한국어는 한문과 영어 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한글도 우리말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는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언어와 중국과 일본의 침략을 겪었던 사정상 여러 언어 흔적이 있는 중역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대학생의 한문과 상식 용어에 대한 이해력이 교육개편과 인터넷 문화의 영향인지 점점 떨어진다.

 

 이것(언어)권력의 임의적 결정>, 즉 사회적 산물이지 하늘의 이치가 아니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스스로 창조주가 되려는 것이다. 조물주 콤플렉스가 한글만 사용해야 한다는 사고라면, 메시아 콤플렉스는 그것을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피해의식은 새로움에 대한 수용성, 호기심, 이를 받아들이는 용기라는 융합적 사고방식을 방해한다. (208)

==> 콤플렉스 부분에서 ㅋㅋㅋ 비약과 프로파간다는 내 전문인데. 저자는 정체불명은 모든 언어(문화)의 속성이라고 파격적으로 언명한다.

 

 <관점에 따라 데이터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점은 당파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본래는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기. (211)

 

 이제까지 공간 개념은 시간적 진보를 증명하는 도구--‘그 시대 위대한 건축물’--였다. 오랜 세월 동안 공간은 시간 개념에 비해 인식론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문학사에서 거의 모든 비유는 젠더, , 자연, 공간과 관련되는데, 이는 남성의 사유가 투사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공간적 주체. 어느 공간에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 코로나 시대 최대 아이러니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반드시 실천해야 하지만 사회의 대안으로서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다... 코로나 스트레스는 곧 공간 스트레스다. (212-214; 215)

==> 내 경우 학업 과정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지만, 특히 공간에 대한 사고 전환이 신선했었다. 데카르트의 몸/정신 이분구도 뒤집기에 버금가게 공간적spatial 접근이 고정 관념을 흔들었다. 이동이 자유롭고 워라밸을 장착한 요즘 세대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말이다. 코로나19 초기만 해도 건축학자 유현준의 책들을 탐독했었는데 지금은 멀어졌으..

 

 한마디로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객관적은 없다. 어떤 객관도 결국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산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객관성은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오염된 개념이다. 객관성은 사회와 맺는 관계에서만 논할 수 있는 문제다...

 ‘객관성은 없다의 의미는 진짜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객관이 특정 맥락에서만 작동하는 유동적 특성을 지닌다는 의미다... 강자의 주관성은 객관성처럼 여겨져서 투쟁해서 쟁취할 필요가 없는 반면 약자의 삶은 그렇지 않아 고달프다. 약자에게 객관성은 쟁취해서 확보해야만 가능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 사회 운동이다. (217; 219; 221)

==> 국가권력에 의한 언어의 오염을 가장 현장감 있고 무게 있게 포착한 르포 작가가 조지 오웰일 것이다. 이런 객관성의 철옹성을 깨려면 읽고 역사의 반복과 흐름을 공부해야한다. 마지막 인용에서처럼,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운동에 몸담고 목소리 내는 민주시민들의 실천, 멋지다!

 

 시대와 장소, 말하는 사람의 위치, 정치적 상황 등 수많은 요소에 따라 객관성의 내용은 다르게 구성된다. 그래서 융합적 사고에서는 객관성보다 상황적 지식을 주장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은 자신의 입장을 경유한 부분적인 것이다. 진실을 전제하면 부분성, 상황성, 맥락성은 드러날 수 있다. (222-223)

 

 대개 언어는 위계의 만남이다. 이분법은 AB가 아니라 기준으로 삼은 A와 그 외 것들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비교하려면 연구 주제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특정해야 한다. 앎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정하는 것이 비교의 기본이다... 기존의 앎을 의심하지 않는 비교는 무의미를 넘어 유해하다... 오히려 인문사회과학 연구는 변수, 새로운 배경, 상황, 맥락을 드러내기 위한 공부다. (225; 230; 227-228)

==> 정희진 작가가 말하는 생각의 지도와 자기 이해, 그리고 사회 기여의 연동성이 역동적이라 좋다. 대학원 시절, 동기와 나는 비교의 평가에 시달렸다. 둘이 반반 섞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훈수를 들어야 했다. 융합이나 협업 개념이 희미하던 시절이니까 그러려니. 나만 하는 투덜거림인 줄 알았는데 정 작가도 한다. ‘당신이 뭔데!’ 오래 전 지도교수님과 합의를 봤다. 복잡할 거 없이 70% 내키는 사람은 좋은 사람 하자고.

 

 안목은 그 사회의 수준과 개인적 노력, 환경의 총체다... <자기 프레임을 모르는 사람이 오피니언 리더, 고위 관료, 통치자가 되면 역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민생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233-234)

==> 뼈 때리는 문장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우중의 덫에 걸려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사회의 안목을 겸비해야 한다.  현실 정치와 선거는 프레임 전쟁이다 . 내년 총선에서 의제를 잘 선점해서 화끈하게 이기자.

 각종 자원 배분과 해결책 결정자를 비롯해 인력풀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 한국은 진통을 앓고 있다. 저자는 2021스폰서 검사와 비리70년 해묵은/해먹은 검찰의 일제 잔재를 끊어낼 수 있었는데, 김건희 씨의 논문이 불거져 검찰개혁이 산으로 갔다고 비판한다. 아래 인용처럼 윤 씨 문제는 삭제되고 여론전 속에 문제의 본질이 엉뚱하게 물타기 당하고 말았다. 지난 리뷰와 마찬가지로 에바의 거리에서의 삶과 거니의 삶은 비교가 안되자나 요.

 

 판결이 법대로 내려지는 게 아니라 어떤 판검사를 만나느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직 있어요, /    내가 궁금한 점은 윤 씨 부부의 탄생이 검찰제도의 산물인가 여부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는 우중 농단. 에휴/    가치관, 당파성이 문제를 인식하는 범위와 초점을 정한다... 검사 한 명이 의제를 장악해 전 국민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현재진행형 휴우/ (23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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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평점10점 | j******3 | 2024.05.06 리뷰제목
정희진 선생님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밑줄을 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에 후루룩 읽지 못하는 저의 무지함을 탓하면서 이어캡을 끼고 조용한 곳에서 정말 공부하듯이 읽었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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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님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밑줄을 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에 후루룩 읽지 못하는 저의 무지함을 탓하면서 이어캡을 끼고 조용한 곳에서 정말 공부하듯이 읽었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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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평점10점 | j******3 | 2024.05.06 리뷰제목
정희진 선생님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밑줄을 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에 후루룩 읽지 못하는 저의 무지함을 탓하면서 이어캡을 끼고 조용한 곳에서 정말 공부하듯이 읽었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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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님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밑줄을 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에 후루룩 읽지 못하는 저의 무지함을 탓하면서 이어캡을 끼고 조용한 곳에서 정말 공부하듯이 읽었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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