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4장은 좋은 문장들을 옮기면서 필요한 경우 < >로 강조하고 사견을 살짝 곁들여 보겠다. 밑줄긋기 많으면 싫어하는 작가도 있고 실례일 것 같은데 도무지 줄일 수가 없다 요. (^-^)
지식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모든 앎은 인간-자연-사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상호 작용이 학문의 발전사이다... 지식은 지역, 문화, 사람 사이의 번역이며, 혼종, 혼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견이나 ‘틀린 말’도 언제나 의미가 있다. <재해석하기 나름>. (189-190)
==> 어느 부분에서 오해가 생기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지는 발언을 듣는 게 아무래도 유리할 듯.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은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약자에게 필요한 ‘자기만의 방과 자기만의 언어다.’ (190)
==> 강산이 변할 시간동안 싸이월드에서 실컷 놀았다. 그때 방 이름이 The Enormous Room이었다. 가상공간에서만큼은 거대한 방을 갖고 싶어 e.e. 커밍스의 시 제목을 땄었다. 팬데믹 시기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읽기 바람이 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큰조카가 독립서점에서 기념엽서를 사와 주기도 했었다. 글쓰기(프리랜서 작업) 공간과 일정 수입이 지금 주목을 끄는 이유는 독립된 분리 공간과 기본소득의 필요성이 함의하는 바가 클 거다. 여담] 결혼할 당시 한 약속 두 가지를 남편이 지켰는데도.. 우울병을 이기지 못했다.
<당파성과 가치관>이 필수적인 이유는, 모든 앎은 현실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즉 어떤 집단을 위한 융합인지가 핵심이다... 융합은 개별 학문을 넘어서는 가치관의 문제다. 융합의 전제는 <지식이 누구에게 봉사하는지>에 관한 문제의식이다. 융합은 그 과정도 결과도 지극히 정치적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191)
==> 정치적 언어 전성시대 함 가즈아 ~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고 인지, 지식, 돌봄, 감정 노동 같은 ‘보이지 않는 마음invisible heart’이라고 주장해 왔다. (193)
==> 아담 스미스를 시작으로 한 자본주의를 재해석하는 움직임으로, 얀 물리에 부탕 같은 여성주의 경제학자가 주창한 대안적인 글로벌 경제를 귀띔한다.
모든 지식은 다른 지식과의 <비교나 대비>(반대말, 동의어)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절대로 홀로 성립하는 개념은 없다. 모든 개념은 연결의 법칙이 다를 뿐 연결된다... 개념들의 접목이 융합이 되려면, 무관한 개념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융합은 충돌하고 같이 도약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알려면 <새로 공부>해야 한다. (198-199; 202)
어떤 언어도 한 가지 요소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얘기다. 말은 <계속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 중 ‘오염’은 필연적이고, ‘외래어’ 비난 자체가 외설적(벗어난 개념^^)이다. (207)
==> 저자는 ‘한글 전용론’의 한계를 말하며 한국어는 한문과 영어 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한글도 우리말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는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언어와 중국과 일본의 침략을 겪었던 사정상 여러 언어 흔적이 있는 중역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대학생의 한문과 상식 용어에 대한 이해력이 교육개편과 인터넷 문화의 영향인지 점점 떨어진다.
이것(언어)은 <권력의 임의적 결정>, 즉 사회적 산물이지 하늘의 이치가 아니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스스로 창조주가 되려는 것이다. 조물주 콤플렉스가 한글만 사용해야 한다는 사고라면, 메시아 콤플렉스는 그것을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피해의식은 새로움에 대한 수용성, 호기심, 이를 받아들이는 용기라는 융합적 사고방식을 방해한다. (208)
==> 콤플렉스 부분에서 ㅋㅋㅋ 비약과 프로파간다는 내 전문인데. 저자는 “정체불명은 모든 언어(문화)의 속성”이라고 파격적으로 언명한다.
<관점>에 따라 데이터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점은 당파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본래는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기>다. (211)
이제까지 공간 개념은 시간적 진보를 증명하는 도구--‘그 시대 위대한 건축물’--였다. 오랜 세월 동안 공간은 시간 개념에 비해 인식론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문학사에서 거의 모든 비유는 젠더, 몸, 자연, 공간과 관련되는데, 이는 남성의 사유가 투사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공간적 주체>다. 어느 공간에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 코로나 시대 최대 아이러니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반드시 실천해야 하지만 ‘사회’의 대안으로서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다... 코로나 스트레스는 곧 공간 스트레스다. (212-214; 215)
==> 내 경우 학업 과정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지만, 특히 공간에 대한 사고 전환이 신선했었다. 데카르트의 몸/정신 이분구도 뒤집기에 버금가게 공간적spatial 접근이 고정 관념을 흔들었다. 이동이 자유롭고 워라밸을 장착한 요즘 세대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말이다. 코로나19 초기만 해도 건축학자 유현준의 책들을 탐독했었는데 지금은 멀어졌으..
한마디로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객관적은 없다. 어떤 객관도 결국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산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객관성은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오염된 개념이다. 객관성은 사회와 맺는 관계에서만 논할 수 있는 문제다...
‘객관성은 없다’의 의미는 진짜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객관이 특정 맥락에서만 작동하는 <유동적 특성>을 지닌다는 의미다... 강자의 주관성은 객관성처럼 여겨져서 투쟁해서 쟁취할 필요가 없는 반면 약자의 삶은 그렇지 않아 고달프다. 약자에게 객관성은 쟁취해서 확보해야만 가능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 사회 운동이다. (217; 219; 221)
==> 국가권력에 의한 언어의 오염을 가장 현장감 있고 무게 있게 포착한 르포 작가가 조지 오웰일 것이다. 이런 객관성의 철옹성을 깨려면 읽고 역사의 반복과 흐름을 공부해야한다. 마지막 인용에서처럼,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운동에 몸담고 목소리 내는 민주시민들의 실천, 멋지다!
시대와 장소, 말하는 사람의 위치, 정치적 상황 등 수많은 요소에 따라 객관성의 내용은 다르게 구성된다. 그래서 융합적 사고에서는 객관성보다 ‘상황적 지식’을 주장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은 자신의 <입장을 경유한 부분적인 것>이다. 진실을 전제하면 부분성, 상황성, 맥락성은 드러날 수 있다. (222-223)
대개 언어는 <위계의 만남>이다. 이분법은 A와 B가 아니라 기준으로 삼은 A와 그 외 것들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비교>하려면 연구 주제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특정해야 한다. 앎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정하는 것이 비교의 기본이다... 기존의 앎을 의심하지 않는 비교는 무의미를 넘어 유해하다... 오히려 인문사회과학 연구는 변수, 즉 새로운 배경, 상황, 맥락을 드러내기 위한 공부다. (225; 230; 227-228)
==> 정희진 작가가 말하는 ‘생각의 지도’와 자기 이해, 그리고 사회 기여의 연동성이 역동적이라 좋다. 대학원 시절, 동기와 나는 비교의 평가에 시달렸다. 둘이 반반 섞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훈수를 들어야 했다. 융합이나 협업 개념이 희미하던 시절이니까 그러려니. 나만 하는 투덜거림인 줄 알았는데 정 작가도 한다. ‘당신이 뭔데!’ 오래 전 지도교수님과 합의를 봤다. 복잡할 거 없이 70% 내키는 사람은 좋은 사람 하자고.
안목은 그 사회의 수준과 개인적 노력, 환경의 총체다... <자기 프레임>을 모르는 사람이 오피니언 리더, 고위 관료, 통치자가 되면 역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민생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233-234)
==> 뼈 때리는 문장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우중의 덫에 걸려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사회의 안목’을 겸비해야 한다. ★ 현실 정치와 선거는 ‘프레임 전쟁’이다 ★. 내년 총선에서 의제를 잘 선점해서 화끈하게 이기자.
각종 자원 배분과 해결책 결정자를 비롯해 인력풀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 한국은 진통을 앓고 있다. 저자는 2021년 ‘스폰서 검사와 비리’와 70년 해묵은/해먹은 검찰의 일제 잔재를 끊어낼 수 있었는데, 김건희 씨의 논문이 불거져 검찰개혁이 산으로 갔다고 비판한다. 아래 인용처럼 윤 씨 문제는 삭제되고 여론전 속에 문제의 본질이 엉뚱하게 물타기 당하고 말았다. 지난 리뷰와 마찬가지로 에바의 거리에서의 삶과 거니의 삶은 비교가 안되자나 요.
판결이 법대로 내려지는 게 아니라 어떤 판검사를 만나느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직 있어요, 쩝/ 내가 궁금한 점은 윤 씨 부부의 탄생이 <검찰제도의 산물>인가 여부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는 우중 농단. 에휴/ 가치관, 당파성이 문제를 인식하는 범위와 초점을 정한다... 검사 한 명이 의제를 장악해 전 국민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현재진행형 휴우/ (235-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