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이 으레 그러하듯,
현장 연구지를 찾는 것 또한 진득하게,
오랜 시간에 걸쳐 한 겹 한 겹 쌓아올려야 하는 과정이다. (p.66)
나는 박물관을 좋아한다. 생물도 싫고 과학도 싫은데 박물관은 좋아했다.
어쩌면 내게는 그것이 생물학적인 무엇이라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역사와 문학의 “표출된 무엇인가”지 않았을까 생각도 든다.
아무튼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엄마가 된 지금도 좋아한다.
아이가 채 걷기도 전에 박물관을 데려갔는데,
소리라도 내면 데리고 나오겠다던 다짐이 무색할 만큼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고 그 후로 외출만 하면
그 인근의 박물관이나 민속관 등에 데려갔다.
최근 말귀를 좀 더 알아듣고 책을 한층 좋아하기 시작하기에,
이제는 팸플릿도 같이 꺼내어 읽고, 동그라미를 치며 관람을 하고 있다.
아이의 4살 평생에 키즈카페는 단 2번,
지역에서 운영하는 각종 교육관들은 100군데 가량 방문했으니,
우리아이의 취향도 결코 평범하게 자라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내게 이 책은 다소 운명처럼 느껴졌다.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한 도서잡지에서 발견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정모관장님이 감수했다는 말에 “반드시 읽을 책”으로 분류해버렸다.
그리고 너무 좋은 기회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크기도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이라 가지고 다니며 읽지 못해 읽는 시간이 꽤 걸렸으나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내 책친구들에게 한말은 “벽돌책인데 장난 아니게 재밌다.”였다.
해설 및 주석 제외 394페이지, 일반 책보다 3센치 가량 더 큰 책인데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조금 지겨워질만하면 다양한 화석사진(그것도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한),
발굴현장의 사진 등이 큼직하게 들어있었고 문장도 너무나 수려했다.
꾸미지 않은 소박한 말투인데 뭔가 매력적인 사람처럼,
꾸미지 않은 단순한 문장인데
그래서 더 전문지식이 드러나고, 어렵지 않게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수’는 성장기 때 하루 약 2.3킬로그램씩 몸무게가 증가하는 무시무시한 성장속도를 보였다.
그러려면 아주 많은 공룡을 잡아먹었을 텐데,
이는 정말 백악기에 공포의 존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체구가 급속히 커지면 민첩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p.169)
나는 ‘수’가 세상에 공개되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하고 있었다.
거의 20년 전, 내가 중학생쯤이었던 내 어느 생일날에 그가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족은 텔레비전 앞에서 치킨을 먹으며 수를 봤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특정시간에만 켜졌는데, 이런 날은 예외였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저 과거의 어느 날이 되고 말았을 기억이,
갑자기 불이라도 켠 듯 환하게 떠올랐으니, 이 책은 내게 얼마나 큰 의미인가.
정확히 2000년에 수는 세상에 공개되었다고 한다. 날짜도 내 생일이 맞았다.
그저 기억 한 켠의 티렉스였던 수는,
이제 어떻게 발견되고 어떻게 소유권을 이전하였으며,
어떻게 세상을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까지 아는 티렉스가 되었다.
나는 책의 가장 큰 매력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방에 앉아 세상을 만나고, 아무 관계없던 어느 것이 내게 큰 의미가 되는.
오늘의 이 순간도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어떤 책을 통해 회색빛 기억은 다시 불이 켜진 듯 환한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나의 오늘은 훗날 어떤 책으로 빛나게 될지 문득 궁금해진다.
필은 강의에서 곧잘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우주의 먼지이다.” (p.197)
어떤 책에서 그런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엄청난 고민이 생겨 힘들 때에는
그 고민이 우주에서 얼마나 작은 분자인지를 생각하라는.
물론 고민을 하는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말이겠지만
지나고 보면 그 말조차 말이 된다.
하물며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티렉스들도 지나고 보면
그저 과거의 생물체에 불과한 게 세상 아니던가.
반대로 때때로 우리가 매우 하찮게 생각하는 것들이 알고 보면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많다.
그 어느 곳에서건 만나는 생물 중의 하나인 개미. 우리는 그들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공룡만큼이나 오래 살아온 종이다.
저자에 의하면 1억 년 전 말벌을 닮은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
개미는 모든 생명체의 75%를 멸종시킨 백악기 말의 대멸종 사건에서 살아남았고(...)
오늘날 개미는 약 5만종이나 된다(p.201)고 한다.
이 부분을 읽고 난 후부터는 공원에서 만나는 개미들이 결코 하찮은 생명체로 보이지 않았다.
무려 1억 년 전에서부터 내려온 전통 있는 가문의 누군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지구상에 살고 있는 32경 1,000조 마리의 개미 중
겨우 100마리 정도를 만났다고 생각하니 내가 얼마나 좁은 세상에 살고 있나 싶기도 했다.
동굴 속 공기는 곰팡내가 나며 퀴퀴했고, 전기 조명이 미치지 않는 곳은 완전히 깜깜했다.
또한 동굴 안에는 기괴한 침묵이 흘렀다.
광산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채광 도구들이 내는 소리는 들렸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둘러싸는 교통 소음,
새소리, 바람소리, 비행기 소음 등과 같은 배경 소음은
30미터 높이의 바위와 흙에 완전히 차단되었다. (p.271)
최근 우리가족은 이와 비슷한 감각을 만났다.
우리가 사는 곳과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는 석탄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로,
날씨가 매우 기이했던 터라 아무도 탄광굴에는 들어가지 않아 딱 우리만 들어갔다.
사실 남편이 없었더라면 나는 무서워 들어가지 못했을지도 모를 곳에,
아이의 유모차를 이끌고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요철이 그대로 엉덩이로 전해졌는지 아이는 걷고 싶다고 말했고,
굴 안에는 유모차의 흔들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설상가상 군데군데 빗물이 세어 들어와 무서운 소리를 만들었다. 뚜욱, 뚜욱.
그 순간 아이가 말했다. “엄마, 여기서 숨을 쉬는 건 우리 뿐인가봐요.”
아이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했을지도 모를 말이지만 나는 문득 그 모든 것이 감사해졌다.
이렇게 숨 쉬고 있음이,
이런 탄광굴 안에서 희생되고, 노동했을 많은 생명의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에너지를 사용해왔다는 것이(오염은 배제해두고),
우리가 관람하러 다니는 그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미안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이러한 감정은 더욱 짙어졌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바라보는 그 모든 것들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은 모든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그 모든 일들이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또 반대로 우리가 대단한 무엇인가로 여기는 것들도,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먼지와 다름없음도.
이 책은 평생 내가 직접 눈으로 볼지 못 볼지 확신할 수 없는
물고기의, 나뭇잎의 화석들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고,
우리가 관람하는 박물관의 숨은 공신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 잊고 살던 내 추억까지 하나의 손상 없이 복원해주기까지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 권의 철학책이라도 되는 듯 내게 많은 이야기를 건네기도 했던 큐레이터.
문득, 표지에 적힌 “자연의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너무 공감이 되어 표지를 한번 쓸어본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순간은 언젠가 역사가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은 우리의 뼈에, 나뭇잎에- 그대로 다 남는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우리도 누군가에게 탐구의 대상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에게서 좋았던 것들을 많이 꺼낼 수 있도록
아픈 것은 먼지처럼 훌훌 날려버리고, 행복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해 기뻐하며 사는 삶이길.
내 스스로를 읽게 한 이 책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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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