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 상당히 흥미롭다!
일단 1장을 통과하면 그 다음부터는 책을 덮지 못한다(그렇다고 해서 1장이 지루하다거나 어렵다는 의미는 아니고, 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 김솔 작가님의 장편을 두어 편 읽어 본 개인적 경험으로 장편이 대체로 이런듯한 느낌적인 느낌?).
소설을 1장까지 읽고나면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프롤로그는 이토록 비장하며, 도입부는 이렇게 장황할까, 싶다. 그런데 2장에 들어서면 충분히 비극적으로 읽혀지는 운명적 만남과 한 사람의 처절한 복수의 서막이 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남자가 법정에서 천 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보호시설에 왔다. 아름다운 용모, 세상 걱정 없어 보이는 표정, 고급 의복과 승용차. 그는 한눈에 봐도 유력한 집안의 자제였고, 사회봉사는 그저 시간 채우기에 불과한 형식적인 행사였다. 어느날, 겟세마네라는 방에 수용 중인 사지절단 행려병자가 그에게 접근해 마치 세에라자드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테니 대신 올 때마다 자기에게 음식을 한 가지씩만 가져다 달라는 제안, 아니 유혹을 한다. 이야기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행려병자의 말은 진짜일까, 아니면 식탐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일까.
'나'는 청년에게 그가 13년 전의 일을 기억하도록 몇 개의 단서를 제공하지만 그는 '나'와의 사랑도, 자신의 죄악도, '나'라는 사람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한다.
소설은 화자에 따라 복수의 대상이 2인칭 '너' 혹은 3인칭 '형제님(그)'으로 불리면서 서술한다. 독자는 쳥년에게 중남미 여행기를 들려주는 자가 당연히 '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읽을수록 오리무중에 빠진다.
독자가 추적해 나가는 것은 13년 전 사건의 진실, 그리고 보호시설 내부에서 과연 '나' 가 누구냐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화자를 유추할 수 있는 부분들이 사이사이 등장한다. 성별, 과거의 직업, 대화 패턴, 이어지는 크고 작은 반전들.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의 정체, 그리고 '그들'이 '그'와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진실과 거짓 여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백지상태인 '그'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들의 대화와 독백을 읽고 관찰하는 독자가 더 혼란스럽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사건의 가해자이자 복수의 대상인 '그'의 목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다. 13년 전 뿐만 아니라 최근의 사건 내막까지 가해자 당사자의 입장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건의 피해자인 '나'에 의해서만 모든 정황을 설명한다. 왜일까? 어쩌면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는 현실에 대한 일갈 또는 한풀이(?)라는 생각이... .
ㅡ
성폭력 사건, 사회적 약자 차별, 권력층의 카르텔, 존엄한 삶, 이기와 탐욕, 상실된 인간성, 현실의 문제를 외면한 종교와 신앙 그리고 신념의 옳고 그름, 증오와 사랑, 죄악과 용서. 파블로가 들려준 남미 여행기와 그의 과거사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이야기는 장소와 사람을 달리했을 뿐 13년 전의 '그'와 현재의 우리 사회를 겨냥한다.
소설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은... 우리는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면서 살아가는 중인 지금 당장의 존엄한 삶에 대해서는 왜 논하지 않을까. 서점 스터디셀러에도 존엄성에 있어서 삶보다는 죽음을 다룬 책들이 훨씬 많은 양을 차지한다. 우리는 어째서 한순간의 죽음보다 더 긴 삶의 존엄성을 간과하고 있나. 존엄한 삶을 살면 존엄한 죽음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보호시설의 원장신부를 비롯한 성직자와 의료진, 자원봉사자, 그리고 수용인들까지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민낯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자신이 괴물이라는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자들이 갖는 위험성,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 과정이야 어떻든 우리는 결과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이를 반복한다. 어쩌면 무인도에서 혼자 살지 않는 이상,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미덕이야말로 인정認定과 용서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꾼, 연출가, 암살자, 이들 중 누가 과연 '나'일까. 그들 모두일지도 아니면 그들 모두 아닐지도.
이 책 자체가 '그'에게 전하는 메세지이자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들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어서 내가 너를 파괴할 수 있도록 허락해다오. / p.8
이 책은 김솔 작가님의 장편소설이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날 수 있는 가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된 책이다. 거기에 표지가 참 인상적으로 와닿았다. 철조망으로 둘둘 말린 사람의 모습이 기억에 맴돌았다. 과연 이 사람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호기심이 드는 책이자 기대를 가지고 읽게 되었다.
소설은 요양 시설에서 사지가 없는 한 사람이 자원봉사자에게 이야기와 자원봉사자가 이 요양 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된 이야기로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전개된다. 우선, 전자에는 파블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맹인이자 서두에 언급했던 사지가 없는 사람이다. 거그는 맛없는 음식을 만드는 수녀님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요구한다. 조금 깐깐한 듯 재료의 맛이나 질감 등 하나하나 훈수를 두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떻게 사지가 없는 상황에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하나하나 전달한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는 불행한 가정사를 가진 인물인 듯하다. 가족인 아버지의 배신과 사랑에 데인 인물로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러 부랑자 시설에 자원봉사를 하는 벌을 받게 된다. 그곳에서 파블로를 만나고, 부랑자 시설에 있는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듣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수와 불행, 부정적인 감정들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물론, 이 감정들이 자원봉사자의 입으로 직접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두 가지 지점에 대해 깊이 생각이 들었다. 과연 사랑이라는 무언가의 의미이다. 자원봉사자의 구체적인 죄는 살인미수이지만 그것 또한 사랑에 배신을 받아 행했던 행동이다. 보통 아버지가 자녀에게 주는 사랑, 그리고 애정이 담긴 남녀 간의 사랑. 그게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결론적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되었고, 결과로 저지르게 됐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부정적인 행동을 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주변에서도 사랑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들이 많이 펼쳐지기는 하지만 읽는 내내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이 따라다녔다.
두 번째는 절대자 신에 대한 존재이다. 작가의 말을 읽기 전까지는 신과 작가가 같은 화자로서 읽혀졌다. 아니, 그렇게 착각했다. 중죄를 저지르는 것은 맞지만 신이라는 이름 하에 있는 절대자가 이를 용서하거나 처벌할 수 있는 자격이 될 수 있을까. 이는 피해를 받은 자에게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마지막에 책을 덮고 난 이후에는 자원봉사자에게 말하는 화자의 신이 그에게 피해를 받은 누군가로 대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전반적으로 읽으면서 조금 난해하게 느껴졌다. 짝수와 홀수 장에 따라 다른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배경 자체가 종교적인 의미를 띄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매번 음식을 제공하는 인물은 수녀이며,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랑자 시설을 독점하고자 하는 인물 역시도 원장 신부라는 인물이다. 거기에 후반부에 이르러 마치 신이 심판하듯 자원봉사자에게 전달하는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것이 신을 믿지 않는 독자인 입장으로서는 어렵게 와닿았던 작품이자 종교인의 이중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던 작품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