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저널리스트 : 카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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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저널리스트 : 카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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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치 > 정치/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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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주간우수작 마르크스에게서 저널리스트의 진정성을 배운다. 평점8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k*****1 | 2020.01.29 리뷰제목
카를 마르크스와 [자본론]은 이미 150년도 더 전의 인물이고 저작이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에서 마르크스는 여전히 불온하다. 지난시절 독재정권 혹은 보수정권하에서 마르크스와 [자본론]은 입에 올릴 수 없는 금지어 혹은 금서였다. 지금은 구소련의 몰락과 함께 철지난 유물로 취급받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우리사회에서 마르크스와 [자본론]을 읽는다는 것은 여전히 ‘빨갱이’로 몰릴
리뷰제목

카를 마르크스와 [자본론]은 이미 150년도 더 전의 인물이고 저작이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에서 마르크스는 여전히 불온하다. 지난시절 독재정권 혹은 보수정권하에서 마르크스와 [자본론]은 입에 올릴 수 없는 금지어 혹은 금서였다. 지금은 구소련의 몰락과 함께 철지난 유물로 취급받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우리사회에서 마르크스와 [자본론]을 읽는다는 것은 여전히 빨갱이로 몰릴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날로 천박해지고 있는 가운데 소득불평등과 그로 인한 도를 넘는 양극화체제에서 마르크스와 [자본론]은 심심하면 소환되고 거론된다. 선동가가 아닌 철학자나 경제학자로서의 마르크스에게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통찰을 얻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마르크스의 경제사상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자본론]이라는 저작에 덧칠된 이념가로서의 마르크스가 아니라, 한때 기자로써 활동했던 마르크스가 쓴 기사를 통해 저널리스트로서의 마르크스를 살펴보는 책이다. 마르크스는 스무 살 초반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도 교직을 얻지 못해 취직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쾰른에서 국왕과 정부, 종교 세력에 맞서 진보적 주장을 펼치던 신생언론사 라인신문에 합류하여 정치현안과 언론의 자유에 관심을 두었다. <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 정부검열에 맞서 신랄한 비판기사를 싣기도 했지만 주주들과의 생각이 달라서 편집장자리를 내려놓았다. 이후 신라인신문을 발간했지만 국외추방을 당하고, 몇 년 후 영국에 안착한 다음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의 유럽특파원 자격으로 10여년간 기사를 송고했다. 마르크스가 쓴 기사들은 대부분 시사논평의 형태를 띠었다고 한다. 때때로 대단히 공격적이고 날선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하나하나 열거하고 분석하여 사실에 입각해 글을 쓰는 진정한 저널리스트였다는 것이다.

 

이 책의 역자는 2부로 된 이 책에서, 1부에는 1852년에서 1859년 사이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에 송고한 기사 17편을, 그리고 2부에는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소책자로 묶어 출간된 연재기사를 번역하여 실었다. 그는 사건사고에 대한 기사보다는 마르크스의 장기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을 엿볼 수 있는 기사를 선별하였다고 말한다. 노동계층과 서민의 삶에 대한 기사와 함께 영국의 해외침략에 따른 외교문제와 무역정책에 대한 기사가 그것이다. 특히 2부에 실린 [임금노동과 자본]1847년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위한 강연을 위해 준비한 것으로, 1849신라인신문에 다섯 번에 걸쳐 기사로 연재된 것이라고 한다. 기자 마르크스가 물질적 이해관계에 눈을 뜨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이 기사는 자본론의 입문서라 불리고 있다 한다.

 

마르크스는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에 송고하는 기사에서 기아로 굶어죽는 사람들, 지주들이 소작농들을 강제 추방하는 모습, 노동자들의 초과노동과 산재사고, 미성년자의 불법고용 등과 같이 당시 영국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다룬다. 그러나 그러한 기사보다도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기사작성 방법이었다. 당시에도 보수주의자들은 자유무역의 혜택으로 모든 계급이 번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코노미스트와 같은 보수주의 잡지를 앞세워 데이터를 왜곡하고 빈곤은 노동자들의 과소비 혹은 게으름 때문이라는 기사를 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들이 제시하는 데이터의 맥락을 짚고 올바르고 논리적인 분석으로 그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그러한 기사들을 읽으면서 우리사회의 언론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맥락을 무시하고 어느 한 구절을 가져다 확대해석하기, 데이터의 조작 혹은 왜곡을 넘어 오용하기 등은 우리가 익히 보고 듣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반박하거나 혹은 그런 데이터를 올바르게 분석한 기사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볼 수 없지 싶다. 마르크스는 조금 장황하다 싶을 정도로 통계를 나열하기도 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는 그러한 통계 하나하나를 열거하고 분석한다. 그만큼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물론 기자라고해서 모두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비판이든 옹호든 자신의 주장이 객관적이라는 근거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저절리스트의 자격요건이고, 그렇게 볼 때 마르크스야말로 현재의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전범(典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자는 저널리스트가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진실을 바탕으로 윤리적 보도를 하려는 신념을 진정성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러한 진정성이 없는 단지 무늬만 저널리스트인 사람들로 인해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지금 온 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가짜뉴스는 분명 그러한 사람들이 만들거나, 혹은 그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진실을 파악해 충분히 분석하고 편향 없이 자기주장을 전달하려고 노력한 마르크스야말로 진정성 있는 저널리스트였다는 역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그는 헤밍웨이와 오웰, 그리고 마르크스를 통해 무엇이 정의이고, 어떤 것이 사회의 보편적 가치인지를 따져보고 싶어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제 헤밍웨이와 오웰을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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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더 저널리스트 : 카를 마르크스 평점9점 | g*******7 | 2020.02.10 리뷰제목
오늘날 자본주의의 폐해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념 편향적으로만 소비되어온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글들이 다양한 형태로 출간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마르크스의 이미지는 낯설고 또 여전히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33세 무렵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 자격을 얻어서
리뷰제목

 

 오늘날 자본주의의 폐해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념 편향적으로만 소비되어온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글들이 다양한 형태로 출간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마르크스의 이미지는 낯설고 또 여전히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33세 무렵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 자격을 얻어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그가 쓴 내용들로 구성된 [더 저널리스트 : 카를 마르크스]는 우리가 여전히 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가 기고한 글들을 통하여 그의 장기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관점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더구나 그가 이전에 이미 '공산주의 선언'을 작성하였음을 감안한다면 이 책에 수록된 코멘터리(시사 논평)들은 당시 국제 또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의 사상과 연계하여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영국에 정착하여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으로 활동할 시기 영국은 이미 산업혁명에 따른 급속한 경제 발전과 더불어 제국주의를 통하여 세계 곳곳에서 영향력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영국의 움직임은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영국의 내부와 외교에 대한 그의 논평은 확실히 그가 '공산주의 선언'을 통하여 보여준 그의 사상을 떠올리기에 충분해 보인다. 산업의 발전에 따라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 및 부의 불균형이 점점 격화되고 있었으며, 제국주의에 따른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영국의 대내외적인 상황으로 대신하여 충분히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수록된 그의 논평은 대부분 당시 고단한 노동자의 삶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점철되고 있다.

 

 당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에서의 이주 혹은 강제추방에 대한 그의 분석은 생산 인구와 생산 능력에 대한 그의 이념과 자연스레 연결지어 설명된다. 당시의 미국 또는 호주로의 이주가 골드러시로 인한 이주가 아니라 지주제도와 소작지 과밀화, 기계 도임과 같은 현대식 농업 시스템의 대대적인 변화에 기인하고 있음을 통하여 과거의 광제 이주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생산 능력이 부족해서 잉여 인구가 발생하는 게 아니라 생산 능력의 향상으로 인구 감소가 필요해짐에 따라 인구의 잉여분은 기아 또는 이주를 통해 제거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화에 따른 변화는 취약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 이어지고 있지만, 때가 되면 지주와 방적 재벌들의 차례가 올 것이라는 그의 예고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위한 그들의 각성을 고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새로운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약한 계급과 인종은 이제 물러나야 한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통탄할 변화가 자본가들, 즉 지주와 대부업자의 소유욕에 우리 사회가 적응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진심으로 믿기도 한다. 이렇게 덜 떨어지고 근시안적인 시각이 또 어디 있을까?

 - p. 37 中에서 -

 1853년에 쓰여진 글이지만, 이 글은 왠지 오늘날 자본주의의 폐해가 격화되는 상황에서도 꽤 공감되는 문구가 아닐까? 부의 불균형을 비롯한 온갖 사회 부조리를 단순히 개인의 능력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만 돌리는 오늘날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불만은 여전히 자본가들의 소유욕에 우리가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당시 사회를 바라보던 마르크스의 이러한 관점은 이 시대에 왜 그의 사상과 행적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영국의 노동자들이 노동자조합을 만들어서 보통 선거의 시행과 의원 자격 제한 폐지와 같은 정치, 사회에 대한 변화를 요구한 차티스트 운동에 대한 그의 논평은 장기적으로 노동자 계급이 그들의 처우의 향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오늘날 노동자 운동은 물론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권리 행사와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금의 상승과 하락, 그에 따른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끊임없는 갈등은 1800년대의 영국이나 지금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 계층의 정신을 떠받치고, 자본가의 공격에 맞서는 파업과 연대는 당장의 경제적인 이득보다는 정신적, 정치적 성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특히 오늘날 '귀족 노조'라 불리우며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더구나 보통의 시선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의 의견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중국과 인도의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예리한 통찰 역시 눈여겨 볼만한 부분들이다. 이전에 읽은 책에서도 중국의 '태평천국운동'에 대한 그의 평가를 접한 적이 있었는데, 저널리스트로서 그가 쓴 글에도 그러한 대외적인 부분에 대하여 그가 꽤 주목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1853년에 쓰여진 글에서도 그는 한창 기세를 떨치고 있던 '태평천국운동'을 일종의 혁명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이 바로 영국이 공급한 아편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부분은 그의 사상에서도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혁명의 발발을 언급한 것을 차치하더라도 꽤 흥미롭다. 즉, 아편의 유입으로 인하여 중국의 재정 상태와 도덕성, 산업과 정치 구조를 해체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요인들이 1840년 영국의 화포(아편전쟁) 앞에서 더욱 활성화 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는 중국이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하여 외부 세력과의 단절이 필수 조건이었으나, 영국에 의해 폭력적인 종말을 맞이하였고, 내부적으로는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영국이 중국과의 무역에 있어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 원인에 대한 그의 분석은 확실히 그의 인식이 날카로움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중국의 소규모 농작과 가내 수공업의 결합이 영국의 대중국 수출 무역의 확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중국의 농부가 농업과 제조업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자급자족이 가능한 상황에서 영국의 면직 또는 모직과 같은 수출품들이 그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였음을 설명한다. 더불어 중국과는 달리 인도는 내부 권력 다툼과 다양한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영국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마련하였으며, 철도 건설과 같이 겉으로는 새로운 의사소통과 교류의 필요성을 내세우면서 실상 자신들의 가공품에 쓰일 면화나 원자재를 더 싸게 가져가려는 의도였음을 언급하며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부르주아식 문명의 끝없는 위선과 타고난 야만성을 본국에서는 점잖은 허울을 쓰고 있지만, 식민지 땅에서는 노골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으로 마르크스는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과 연계하여 당시 사회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의 글은 장기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그의 관점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게 된다. 2부의 '임금노동과 자본'은 훗날 그의 [자본론]과 관련된 기초적인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 역시 기사로 연재되는 내용이기에 그의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 임금노동이 자본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노동자가 어떻게 착취되는지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노동자 입장으로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월급과 같은 실질적인 임금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보통 자본가가 일정한 노동 시간 또는 업무의 대가로 지급하는 것이 바로 임금이며,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금을 그렇게 이해하고 또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노동이 '잉여 가치'를 창출하는 '가치 창조 능력'을 포함하고 있음을 말하면서 임금의 양이나 일한 시간으로 측정되지 않는 추가 가치를 반영한 개념으로서 노동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마도 임금 명세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더 저널리스트 : 카를 마르크스]는 그의 사상이 그동안 얼마나 심각한 이념 논쟁에 시달리면서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여전히 일부에서는 그의 사상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좌익'에 대하여 '종북, 빨갱이'라고 외치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공감하고 있다. '신 자유주의'와 같이 이름을 바꾸어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결국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자본주의 사상 내부에서는 쉽게 해결될 여지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상을 통하여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은 필수라 할 수 있다. 이념적으로 여전히 마르크스를 적대시하는 우리의 상황에서 이 책은 그가 대중을 위한 글을 쓰던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통하여 그의 관점과 사상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에 한번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언론의 탈을 쓰고 분란을 조장하는 글들이 당당하게 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상가로서 또 저널리스트로서의 카를 마르크스의 글을 굳이 읽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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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평범한 것에 놀라는 눈, 자본의 본성을 배운다 평점9점 | k**u | 2020.01.31 리뷰제목
“노동력을 판 노동자는 자기 삶의 8시간, 12시간, 24시간....조금씩 떼어 판다. 누구의 소유에도 속하지 않지만 떼어낸 삶의 시간에는 자본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자본가에게 매여 있는 것이다.” - 본문 151쪽, 「임금노동과 자본」     마르크스의 주저(主著)인 『자본(Das Kapital)』과 함께 이의 원활한 이해를 위하여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시리즈’와 데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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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력을 판 노동자는 자기 삶의 8시간, 12시간, 24시간....조금씩 떼어 판다.

누구의 소유에도 속하지 않지만 떼어낸 삶의 시간에는 자본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 자본가에게 매여 있는 것이다.” - 본문 151, 임금노동과 자본

 

 

마르크스의 주저(主著)자본(Das Kapital)과 함께 이의 원활한 이해를 위하여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시리즈와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를 참고하며 더딘 속도로 내 본질적 사유체계를 확인하기 위한 읽기를 하던 중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무엇보다 편역(編譯)자의 소개말처럼 마르크스가 어떤 과정을 통해 사상을 구체화했는지, 그 맥락 이해에 좋은 역할을 해주리라는 기대에서였다고 해야겠다.

 

자본1편 제2교환과정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상품은 스스로 시장에 갈수도 없고 스스로 자신을 교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품의 보호자 즉 소유자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은 물건이므로 인간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출처: 김수행 자본론』Ⅰ[], 2008420일 비봉출판사, 2개역판 9P108

 

굳이 이 문장을 인용하는 이유는 너무도 당연한 것, 지극히 평범하고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 마르크스의 시선은 그 행위에 내재된 의미의 밑바닥까지 들이밀고, 바로 그 심연에서 실질적 작동의 원천을 기어이 퍼 올려, 보이지 않았던 아니 보지 못했던 진실을 우리들에게 펼쳐놓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 전제적 소유권을 행사하는 구매자인 자본에 끌려가는 자본의 내재적 폭력성을 함유하는 글이다.

 

마르크스를 오늘 읽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처럼 평범한 것에 놀라는 눈, 맹목을 맹목으로 보지 않으려는 관심의 눈을 배우기 위함이다. 그리고 덤처럼 지금 이 세계의 체제인 자본주의가 지닌 한계와 그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혜의 틀을 구축하고 내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이를테면 왜 자본가와 노동자의 부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기만 하는 것일까?’, 또는 최저임금은 진정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와 같은 물음에 대한 근원적인 답을 사유하는 지혜의 바다로서의 역할을 해 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를 읽는 것이 곧 체제전복 모의인 것으로 몰아대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에도 여전히 이를 기득권 유지의 도구로 이용하는 세력이 있긴 하지만 이젠 무시할 정도로 시민의 지적 소양이 높아졌다고 나는 믿는다. 오늘 민주화된 우리의 사회가 있기까지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이래 무려 반세기에 걸친 부패와 독재, 유신, 폭력시대를 거쳐 왔다. 이에 대한 생생한 육성처럼 여겨지는 최근에 발표된 장혜령의 소설 진주에는 편집된 민주화 투쟁을 외치는 시국선언문의 문장들이 있다. 그리고 불법 연행, 감금되어 고문자가 읊어주는 나는 공산주의자입니다. 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나는 불법조직에 가담하여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다.”(소설 진주128쪽에서 인용)를 울면서 받아쓰게 하곤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어요. ...곧 돌아가게 될 겁니다.”라고 거짓 위로를 뇌까리던 소설 속 문장이 떠오른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이식되는, 자본을 축적하느라 노동력, 인간의 노동이 오직 착취대상으로만 취급되던 시기였다. 우리에게도 자본과 결탁한 권력, 권력과 자본이 유착하여 노동력의 축적가치를 독식하던 압축된 시기가 있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하면 사용하던 수법이 바로 공산주의자 몰이, ‘빨갱이낙인찍기다. 이 파렴치한 말이 지금도 정치배들로부터 흘러나올 때면 그 추악한 저의에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곤 한다.

 

케케묵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자본의 성장과 축적의 집중이 진행되고 있다. 분업의 가속화, 자동화와 노동의 단순화라는 노동 경쟁의 극렬화로 인한 압박이 높은 실업율을 정상화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대대적인 설비와 기술개발 경쟁으로 생산비용 감소를 통한 자본경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과열된 동요(본문 180)가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자본의 생존을 위해서 끝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모순으로 가득한 체제의 불협화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옆의 약자와 고통 받는 이웃들이 알지 못하고 겪는 자본의 내재적 폐해에 대해서.

 

1. 저널리스트 마르크스의 기사들

 

책은 17편의 기사와 노동임금과 자본이라는 노동자를 위한 자본주의 설명서랄 수 있는 1847년 출간된 팸플릿으로 구성되어 있다. <The people's paper: 人民報에 실린 노동자 의회의 창립을 축하하는 편지를 제외하면 16편의 기사가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기고한 글로서 게재된 1850년대의 영국중심의 경제, 사회적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대부분 부르주아의 대변지 기능을 수행했던 선데이 타임스를 비롯한 자본가들과 정치권력 계층의 곡해된 논리를 반박하는 형식의 글로 씌어진듯하다. 자본가들의 자기 계급적 이익을 위한 맹렬하고 저열하며 추악한 탐욕이 아마 가장 강렬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번 달에도 런던에서는 기아 사망 사건이 또 여러 건이 발생했다....

메리 앤 산드리는 얄팍한 짚더미 위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 발견됐다...”

(본문 30, <기아라는 형벌에서)

 

공장주는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의 목숨이나 팔다리를 지켜주려고 하기는커녕....

움직이는 기계들의 마모비용을 어떻게 남에게 떠넘길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본문 119, <공장노동 현안 보고에서)


이처럼 기사들의 내용은 온통 기아와 빈곤, 부상과 죽음의 위협에 놓인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을 일회용 소모품 정도로 취급하는 자본가들의 거침없는 축적의 열망, 욕망의 질주로 채워져 있다.

 

그 중 깊은 인상을 주는 몇 몇 기사가 시선을 잡는다. 그 첫째는 임금에 대한 당대 주류 경제학의 논리이다. 임금이란 공장주의 실질이익이나 추정이익에 대한 일종의 공동지분을 챙기는 것이라고 부르주아지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은 무식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임금이란 자본가가 일정량의 노동력을 사기위해 기존에 축적한 상품, 즉 축적된 노동력의 일부분이다.” 노동력을 통해 축적된 가치자본이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는 불합리하게 착취당한 노동력의 생산 가치를 돌려달라는 의미이다. 게다가 임금인상을 요구하려면 공손한 태도로 요청해야 수용될 수 있다고 말하는 공장주의 말은 헛웃음까지 터져나오게 한다.

 

둘째는 세계 경제, 아니 경제 식민화와 관련한 영국의 대외 수탈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렬한 비판의 시선이다. 2차 아편전쟁으로도 불리는 애로우 호사건에 숨은 영국 자본가의 비열함과 탐욕이 혼합되어 만들어낸 상품시장의 강제 개방을 위한 침탈 행위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자본주의 민낯인 노동력과 생산비용, 상품 시장에 이르는 자본 축적의 순환에 내재한 폭력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즉 노동력을 쥐어짜 생산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을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서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 내야하며, 이렇게 초과 생산된 상품의 교환가치를 늘리기 위해서 대외 통상을 통해 판로를 확장하려는 자본가들의 세력이 벌인 야만적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 기록으로서의 기사를 통해 이론의 살아있는 사례를 접하는 횡재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2. 임금노동과 자본에 대해서

 

사실 내겐 노동자들을 위해 준비된 강의 자료였던, 이후 1849신 라인신문5회에 걸쳐 게재되었던 노동임금과 자본을 마침 읽는 기회가 되었다는 반가움이 더욱 컸다고 해야겠다. 이후 집필된 자본(Das Kapital)의 주요한 내용이 압축되어, 그것도 누구라도 쉽고 이해 가능한 글이 되도록 하려는 마르크스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기회일뿐더러, 상호 틈새를 메워줄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동력을 말하기 위해서는 상품을 설명해야 하고, 또한 인간관계와 그 역사성에 대한 선행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아무려니 이 모든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의욕 탓에 상품, 교환가치, 노동력, 임금, 거래, 화폐, 이윤, 사회적 관계, 생산비용, 축적된 노동, 생활유지수단가격, 실질임금, 상대임금, 자본, 이자수익 등 각 용어마다 수십 쪽에 이르는 설명으로도 부족한 것들이 불과 30여 쪽에 집중되어 있어 읽는 수고가 만만찮다.

 

임금 노동자들인 당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자기 계급적 인식과 부르주아지와 그들이 축적하려는 자본의 성격을 명료하게 인식시키는데 총력이 기울여진 저술이다. 노동력이 왜 상품인지, 상품이기에 여느 상품처럼 가격 결정하는 방법도 같다는 것, 상품 가격의 상승과 하락은 무엇을 뜻하는지, 즉 노동력의 가치가 왜 상승 혹은 하락하는지를 설명한다. 결국 상품가격은 생산비용으로 수렴하며, 이 말은 상품의 가격은 생산비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임을 확인시킨다. 그리고 생산비용에 따른 가격 결정은 상품 생산에 들어가는 노동시간에 따라 가격을 결정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라고 다시금 부연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인지, 예컨대, 면방직 공장 노동자는 면제품만 생산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리곤 그는 자본을 생산한다!” 고 알려준다. 그가 만들어내는 가치는 다시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자본은 축적된 노동력이다. 노동자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생산물의 교환가치 중 생활유지수단 만큼만 지급되고 나머지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축적한다. 그러니 자본을 축적된 노동력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축적된 노동력에 의해 노동자는 고용되고 또 생활유지수단을 의존하게 되는 것이니 노동자의 노동은 자기 자신을 얽어매는 기이한 형국이랄 수 있다. 자본의 본질이란 이처럼 노동력 착취를 근간으로 한 인간 역사 이래 아주 특수한 사회체제임을 설명한다.

 

더구나 이 순환 고리는 노동자의 임금 노동이 자기 자신 위에 군림할 별개의 부(), 그러니까 자신의 적대세력인 자본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뜻임을 알려준다. 이 결과를 통해 노동자는 생활유지수단이 주어지는 체제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기반으로 자본이 어떻게 성장해왔으며, 그 축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한다. 새로 창출되는 가치에서 살아있는 노동이 차지하는 몫과 축적된 노동, 즉 자본이 차지하는 몫과의 관계인 상대 임금(relative wage)'을 이해하게 되면 임금과 이윤의 일반법칙의 절반은 안 것이 될 것이다. 이는 21세기 세계화된 상품시장에서 경쟁하는 오늘날의 거대 자본가들 간의 경쟁, 실업율의 지속적인 증가 현상, 소득 간극의 극단적인 확대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앎의 과정이 된다.

 

상대임금은 실질임금이 오르는 비율이 이윤의 증가비율에 미치지 않을 때 떨어지게 된다.

... 따라서 자본이 급속히 증가하면 노동자의 수입도 늘어나겠지만

동시에 노동자와 자본가를 가르는 사회적 간극은 더 벌어지고,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는 권력도 커지며....” (본문 174쪽에서)

 

이쯤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자본주의라는 생산방식은 역사발달 속에서 아주 특이한 관계에 속하는 사회체제임을 이해하는 것, 자본은 노동력의 축적가치임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수고는 충분히 보상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정성과 불편부당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가 높다. 알아야 요구할 수 있으며, 왜곡과 그릇됨을 분별할 수 있다. 당연한 것이라고 관심을 지니지 않거나 혹은 몰랐던 것으로부터 그 원천과 본질을 통찰해내는 마르크스의 눈으로부터 더 한층 배우게 되는 시간이 된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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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나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는다 평점10점 | y*****2 | 2020.01.18 리뷰제목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에 이은 ‘더 저널리스트’ 시리스의 완결편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기사를 정리했다고 합니다. 시리즈를 이어온 김영진님은 이 책을 통하여 1. 이념 편향적으로만 소비되어 온 마르크스의 이미지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소개하고, 2. 좀 더 읽기 쉽고 명확한 번역을 제공하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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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에 이은 ‘더 저널리스트’ 시리스의 완결편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기사를 정리했다고 합니다. 시리즈를 이어온 김영진님은 이 책을 통하여 1. 이념 편향적으로만 소비되어 온 마르크스의 이미지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소개하고, 2. 좀 더 읽기 쉽고 명확한 번역을 제공하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마르크스가 <뉴욕 데일리 트리뷴> 등의 매체에서 쓴 17편의 기사를 뽑아 엮은 1부와 1847년 브뤼셀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강연한 내용을 1849년에 <신라인신문>에 독일어로 발표한 ‘임금노동과 자본’을 2부에 배치하였습니다. 마르크스가 작성한 기사 역시 워낙이 방대하기 때문에 가급적 사건사고에 대한 논평 기사는 피하고 마르크스의 장기적, 보편적 관점을 엿볼 수 있는 기사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주로 노동계층과 서민의 삶을 다루는 기사와 당시 해외 식민지 경영에 주력하던 영국의 해외침략정책을 비판하고 무역정책에 대한 기사를 포함했다고 합니다. 해외문제는 주로 중국과 인도, 그리고 아일랜드 등이 주요 관심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임금노동과 자본’의 경우 훗날 엥겔스의 감수를 받은 수정본을 독일어로 먼저 출간(1892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02년에 영문 완역본을 출간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의 초고는 사실 선전을 목적으로 쓴 것을 엥겔스가 손을 본 것이라고 합니다. 훗날 <자본론>을 쓰기 위한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제 경우는 마르크스가 쓴 글을 처음 읽어보는 기회였습니다. 기자로서의 마르크스는 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하여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셰익스피어 등 유명작가의 작품을 인용하는 등 인문학적 글쓰기의 전형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통계자료를 인용함에 있어서도 다양한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겠지만 비교적 단순한 통계적 기법을 적용한 것은 당시 수준이 그랬는지는 분명치 않은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기아라는 형벌’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유럽 대륙에서는 교수형, 총살형, 추방형 등이 유행인 듯하다. 하지만 사형집행인도 실제 살아있는 존재라 언제든 사형당할 수 있는 존재인 데다가, 그들의 행위는 문명 세계 전체의 양심에도 기록되는 중이다(30쪽)’라고 시작되는 대목을 읽으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등이 자본주의 체계를 비판하던 당시의 사회환경은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장원제도가 산업혁명과 함께 붕괴되면서 쏟아져 나온 노동자들이 자본시장으로 쏠리면서 형편없는 대우를 감수해야 했던 점을 고려했어야 하지 싶습니다. 실제로 마르크스가 제안한 공산주의가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폐해가 극심했던 사회가 아니라 여전히 1차 산업 중심이던 러시아에서 뿌리를 내린 것 역시 역설적인 현상이었다 할 것입니다.

중국에 관한 세편을 기사를 보면 당시의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상대국을 주권국가로서 대우했던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밀어붙이기 식으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한 것을 비판한 점이 특이하였습니다. 사실 영국이 아일랜드 등을 힘으로 지배한 것이 당시의 국제적 정세로 보면 타당한 일이었다고 강변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의 보편적 가치로 보면 적절치 않은 바가 많았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마르크스의 기사를 보면 영국이라는 나라의 횡포를 실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력이 있는 기사를 써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적어도 그런 점에서 이 책을 기획하신 김영진님의 기획한 바가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보입니다. ‘임금노동과 자본’에 관한 2부의 글 내용은 그 이후로 노동과 자본 등에 관한 개념 등에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새겨 읽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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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Think 1. 마르크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이 아쉽다 평점7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z******8 | 2020.02.09 리뷰제목
카를 마르크스를 잘 아는 분들이 얼마나 계실까? 우리 나라에서는 '전후부터 1982년까지'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제대로 배울 기회를 박탈 당했기 때문이다. 82년 이후에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금지처분을 풀어주긴 했지만 그후로도 오랫동안 마르크스 사상은 알아서는 안 되는 취급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마르크스 저작물'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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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 마르크스를 잘 아는 분들이 얼마나 계실까? 우리 나라에서는 '전후부터 1982년까지'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제대로 배울 기회를 박탈 당했기 때문이다. 82년 이후에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금지처분을 풀어주긴 했지만 그후로도 오랫동안 마르크스 사상은 알아서는 안 되는 취급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마르크스 저작물'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실형'을 살던 분들이 꽤나 많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마르크스'에 대한 저작물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는 지금이 참으로 신기할 지경이다.

 

  마침맞게 '자본주의'가 삐그덕거리는 시점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자본주의'가 삐걱거릴 때마다 전세계는 '마르크스'를 주목하곤 했던 사실을 보았을 땐 당연한 일이다. 허나 우리 나라에서는 그간 '마르크스'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던 탓에 근래의 현상이 신기하게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 사상'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일단 '마르크스'는 철학을 전공한 철학자다. 그리고 철학자 가운데는 드물게 '실천'을 강조하고 '몸소' 실천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특히 가난한 노동자들 편에 서서 '자본가 계급'에 맞서 싸운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한 분들도 참 많다. 이 정도만 소개해도 깜놀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안다. 그러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마르크스 사상'에 열광을 하며 '사회주의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 심취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많은 젊은이들이 '마르크스 사상'을 신봉하고 따랐다는 사실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시절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한 뒤에 꿈꿨던 세상도 바로 '사회주의 국가'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요즘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 여운형, 박헌영, 그리고 김원봉 등이다. 이 분들이 어지러운 '해방정국'에서 어처구니 없게 희생당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 다른 대한민국'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친일적폐들'이 발도 붙이지 못하는 '당당한 대한민국' 말이다.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과는 다른 세상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말이다.

 

  암튼, 마르크스가 꿈꾸던 세상은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 노동자가 제공하는 '노동력'이 제값을 받는 공정한 세상이었다.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횡포'에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 당하며 '정부'는 '자본가'와 결탁해 수많은 부정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자본주의의 헛점'을 지적한 사람이 바로 카를 마르크스였다. 그리고 그가 쓴 <자본론>과 <공산당선언> 같은 책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낱낱이 적혀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부르주아(자본가) 세력에 맞섰던 것이다.

 

  흔한 오해를 하는 부분이 있다. 그건 마르크스가 '선동가'이면서 '투쟁'을 즐겼다는 헛소문 말이다. 수많은 증언을 보면, 마르크스는 살아생전에 결코 '폭력'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모두 '보수언론의 폄훼와 왜곡'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국가 상황에 따라 폭력적인 혁명이 벌어질 수는 있지만, 폭력을 선호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었다. 그런데도 왜곡을 일삼는 언론들은 [카를 마르크스, 피가 흐를 것...왜냐면 "그 어느 변혁도 유혈 사태로 시작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낚시 제목'을 적어가며 여론몰이를 해댄 탓이다. 마치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 누가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도 내밀어라"라고 발언한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 마조키즘적 성향 밝혀져...누구라도 때리면 더 때려 달라고 발언함]이라고 왜곡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이렇게 마르크스가 기득권 세력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는 딱 하나다. 다른 사상가들처럼 기득권 세력을 편들지 않고 가난한 노동자들 편을 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본가들의 아픈 부분만 골라서 때리는 마르크스를 결코 예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세계적인 미움을 받은 만큼 전세계가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왜 노동자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기만 하는가? 그건 '자본주의 체제'가 무한경쟁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가들끼리도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자본가들도 공장을 차리고 제품을 생산해서 판매하기까지는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품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간단히 말하면 [원재료값+생산기계값+홍보비+노동자 임금]으로 이루어진다. 이 모든 '비용'을 생산된 물건을 팔아서 얻은 '이윤'으로 상쇄하고 남은 '이득'이 자본가의 손에 쥐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가도 한 명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자본가와 '경쟁'을 하기 때문에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제품보다 더 높은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그 '경쟁력'은 제품의 가격을 낮추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자면 '비용'에서 최대한 아껴야만 한다. 그런데 '원재료값'에서는 낮추는데 한계가 있다. '생산기계값'과 '홍보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가장 만만한 것이 바로 '노동자의 임금'이다. 왜냐면 '일할 사람'은 많기 때문이다. 너무 낮은 임금이라서 일을 못하겠다고 파업을 하면 해고하고, 다른 노동자를 고용하면 된다. 더 값싸게 '노동'을 제공할 사람으로 말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면 '소비의 주체'가 사라져버린다.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제품을 누가 사겠느냔 말이다. 바로 '노동자'들이다. 그런데 노동자가 하루 아침에 내쫓기고 실업자가 되며, 또 다른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헐값으로 팔아버린다면...자본주의가 어떻게 유지되겠느냔 말이다. 초기 자본주의 시절에는 '제국주의'가 식민지 쟁탈전을 벌여서 어떻게든 메꿀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만에 하나 '경제의 악순환'이 벌어지는 순간 '경제공황'이 찾아와 한 순간에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건 기정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편을 들면서 지키고자 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폭력적인 선동가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수많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고 끝내 해체된 까닭은 '마르크스 사상' 때문이 아니라 그들 국가의 '독재정권' 등 내부적인 혼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 사상'을 제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특히 '자본주의의 모순'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는 세계의 석학들이 늘 <자본론>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도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좀 다른 관점에서 살펴본 책이다. 바로 '저술가'로서의 마르크스다. 마르크스가 자본가들의 횡포에 맞서서 노동자의 편을 들기 시작한 순간부터 정부관료나 기득권 세력으로 엄청난 '감시'를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을 통해 정부비판과 기득권 타파에 대한 '저널'을 끝없이 써갔다. 그래서 <라인신문>도 페간을 당했고, 뒤이어 <신라인신문>도 같은 이유로 폐간 당했으며 여기저기 쫓겨다니다가 영국으로까지 추방 당한 것이다. 이 시절의 마르크스가 더욱 실망한 것은 '언론'이 먹고 살기 위해 '입 바른 소리'를 내지 않고 적절히 타협하려고 한 언론현실이었다. 마르크스는 언론이 그러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더 저널리스트]에 당당히 올라간 것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르크스의 저널을 모두 볼 수는 없었다. 대부분은 영국에 정착하던 시절의 <뉴욕 데일리 트리븐>에 기고한 기사들을 모아놓았다. 그래서 당시 '자본주의의 심장'이었던 영국 정부에 대한 비판이 대다수지만, 아쉽게도 페간까지 당할 정도로 신랄한 비판을 일삼았던 <라인신문>과 <신라인신문>의 저널은 거의 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책의 일부 지면을 통해 마르크스의 연재기사 모음집인 <임금노동과 자본>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실려 있긴 한데, 짧은 내용에 비해서 이해하기 어렵기 그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론>을 읽기 어려워 한다. 마르크스가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절한 주석과 해석이 필요한데 아쉽게도 이 책에는 그것이 없다. 그래서 많이 아쉽다. 이 책이 좀 더 '마르크스'를 이해하는데 초석이 되는 책이 되었으면 싶은데, 솔직히 이 책만 읽고서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매력을 느끼기에는 많이 부족한 듯 하기 때문이다. 특히 초보자들에게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마르크스 사상' 주석서를 먼저 읽은 다음에 이 책을 다시 읽기를 권한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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