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은 무려 10년 전에 됐는데(그러나 무려 19쇄!!) 내가 <핑거스미스>에 대해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마도 작년에서야 살짝 선정적으로 보였던 영국드라마 포스터를 보았고, 어디선가 동성애 코드를 주워들었던 것 같다. 거기다 곧 영화화된다는 소식까지 들려와 호기심이 생겼다. 책 구입 전, 서점에서 펼쳐본 페이지에선 선정적인 단어가 떡하니 눈에 띄었으니 굉장히 야한 동성애가 다뤄지는 소설인가 싶어 멈칫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웃님들의 평가가 나쁘지 않아 결국 구입해 읽었다. '<핑거스미스> = 선정적'으로 지레짐작하여 어쩐지 기대하는 한편 두려워했던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 읽어가며 깨달았다. 매체의 자극적인 홍보 문구나 대중에 의해 본질이 외면당한 선정적인 한 줄짜리 축약으로는 어떤 한 작품을 정당히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문구따위에 혹하더라도 직접 읽고 끝을 봐야 평가를 해도 할 수 있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는 부모형제가 없었으나 그녀를 딸처럼 아껴주는 집에서 자랐다. 소매치기와 사기범들이 노소에 관계없이 드나드는 집이었지만 수를 돌보는 아주머니는 수전에게는 절대로 나쁜 짓을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수는 가난해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열일곱 살의 어느 겨울날, 젠틀먼이 한몫 잡자는 제의를 해오기 전까지는. 젠틀먼은 책에 파묻혀 사는 노인과 조카딸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이 조카딸과 결혼할 수 있도록 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 조카딸인 모드는 결혼을 하게 되면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젠틀먼이 그녀를 꾀어내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수는 거기서 모드의 하녀가 되어 그를 돕는 임무를 맡는다. 수는 지금껏 자신을 돌봐준 석스비 부인을 위해 한몫 잡아주고 싶은 마음에 제안을 수락하고 시골로 떠난다. 모드는 아름다우면서도 천사 같은 성품으로서 수는 젠틀먼의 계획을 도우면서도 모드를 속이는 게 영 탐탁지 않다. 수와 모드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고 열정적인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을 때부터는 더욱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계획은 그대로 진행되고, 모드와 젠틀먼은 결혼을 하게 된다. 수가 언짢은 마음을 꾹꾹 눌러담으며 계획이 끝났다고 안심했을 때에도 젠틀먼의 계획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모드의 운명을 알고 있었지만(아주 잘 알았고, 그렇게 되도록 돕고 있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나는 모드의 운명을 다소는 이야기나 연극 속 등장인물의 운명처럼 느꼈던 것 같다. 모드의 세계는 너무나 기묘하고 조용해서, 정상적인 세상이 엄청나게 거친 곳으로 느껴지게 했다. 다시 말해, 속임수가 있는 평범한 세상, 내가 돼지머리 고기와 플립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사이 석스비 부인과 존 브룸이 젠틀먼이 훔친 돈으로 내가 무엇을 할지 생각하며 키득거리는 그러한 세상을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칠어 보이게 했다. 하지만 모드의 고립된 세계에선 평범한 세계가 너무나 동떨어진 곳으로 느껴지기도 하다 보니, 그러한 거침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p. 126)
수는 젠틀먼의 음모에 가담해 자신이 하는 짓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천사 같은 모드를 보면서 더더욱 자신의 선택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자식도 아닌데 자식처럼 키워준 석스비 부인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을 지울 수 없어 양심의 메아리에 귀를 닫는다. 천방지축 말괄량이 같던 어린 모드는 세상과 동떨어진 삼촌의 괴상한 집으로 와서 삼촌이 강요하는 방식에 맞춰 재단된 외로운 소녀로 자란다. 마음 여린 소녀로서는 소름이 끼쳐 거부하고픈 일을 쳇바퀴에 갇힌 생쥐처럼 계속해서 반복해야만 하는 일상이다. 그런 그녀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고 그는 그녀가 꿈꾸던 자유를 줄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 자유를 얻기 위해 모드 역시 양심과 사랑을 저버려야만 한다. 두 소녀의 이러한 선택은 19세기라는 여러 모로 억눌린 시대였기에 있을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현대 사회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극명하긴 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는 열려 있는 편이다. 하지만 산업화가 활발히 진행 중이던 19세기의 가난한 이들은 그런 기회조차 낚기가 힘들었다. 인권은 무시되고 사람들은 남아도는 나사처럼 여겨졌다. 그런 세상에서 가장 밑바닥 계층에 속한 인물의 호의로 성장했던 소녀 수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무언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나쁜 짓에 끼어들어 한몫을 챙길 계산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한편 모드는 삼촌의 부유한 저택에서 살고 있었고 본인도 결혼한 이후에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되어 있었지만, 삼촌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떤 자유도 맛볼 기회가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할 기회도 없고 삼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묶여 있어야 할 기나긴 시간을 견디기도 힘들었다. 결국 모드 역시 수가 나쁜 선택을 하게 된 것처럼 나쁜 선택에 손을 뻗게 된다. 따지고 보면 수와 모드 둘 다 자유롭지 못한 19세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갇힌 인물들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얼마나 오래 누워 있었는지 모르겠다. 수가 내 옆에서 내 머리털에 얼굴을 대고 드러누워 있다. 수가 천천히 손가락을 뺀다. 나의 허벅지는 수가 기대어 움직인 곳에서부터 젖어 있다. 매트리스의 깃털들이 우리 아래에서 꺼져 있고 침대는 후덥지근하고 아직까지 열기와 흥분이 서려 있다. 수는 담요를 걷어 내린다. 아직 밤이 깊어 방은 어둡다. 우리는 아직도 숨이 차고 심장이 크게 고동친다. 짙어 가는 침묵 속에 고동 소리가 더 빠르게, 더 크게 느껴진다. 이 침대, 이 방, 그리고 이 집! 모든 곳이 우리의 목소리와 속삭임과 비명의 울림으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진다. (p. 371)
두 소녀는 서로에게 빠져든다. 그러나 둘 모두 자기들의 음모에 얽혀 있어 마음을 쉽사리 꺼내놓을 수 없다. 거기다 동성과의 사랑이라는 시대적 금기를 넘을 수도 없다. 결국 그들이 느낀 열정은 거기서 절정을 찍고 난 이후 하룻밤의 꿈으로 끝나게 되는데 이후 이들 각자의 음모는 서둘러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사랑조차도 19세기가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어떤 세기를 사는 사람들이건 간에 그 시대의 그물에서는 벗어날 수 없겠지만) 비록 나쁜 생각을 하고 음모의 그물코를 조율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러한 그물이 조직되도록 만드는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공간이 아닐까 싶다.
19세기라는 지나간 시간의 답답한 사회상은 어쨌거나, 저자는 마치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처럼 당시의 분위기를 선명하게 재현해내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이 펼쳐져서 이질감 없이 <핑거스미스>의 세계 속에 녹아들 수 있었다. <핑거스미스>라는 제목은 빅토리아 시대의 `도둑'이라는 뜻의 은어였다고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수와 모드, 젠틀먼과 석스비 부인, 호트리 씨와 간호사들, 모두가 진실을 감추고 상대방을 속이려들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모두가 핑거스미스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토록 독자들을 감쪽 같이 속인 저자 세라 워터스도 또 한 명의 핑거스미스가 아닐까? (하핫~)
1부에서는 수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2부에서는 젠틀먼과 수의 목표로 지목되었던 모드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1부 마지막에 수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의문은 모드의 관점이 시작되면서 풀리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의 반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거듭한다. 다시 수의 관점으로 돌아오는 3부에서야 모든 이야기가 해결의 실마리를 따라가고 완결지어진다. 1부 마지막에 놀라고, 2부에서 여러 번 놀라고, 3부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 놀라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솔직히 이제는 단 한 번뿐인 반전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지루하다. 한 번 정도의 반전쯤이야 대부분의 독자들이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저자의 재치 넘치는 반전들은, 적어도 나는 예상하지 못했고, 그래서 700여 페이지라는 얇지 않은 내용에도 꽤 빠르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레즈비언 코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고, 두꺼운 두께가 순식간에 넘어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