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에서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다. 영미 작가로는 세익스피어에 비견될만큼 위대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20세기 영어권 문학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갖는다. 그나마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쉬운 편이라고 말하는 더블린 사람들을 몇 달에 걸쳐 읽었다. 잘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읽거나 번역본을 바꿔가며 읽었고, 심지어 영문판까지 들쳐보았는데, 오래전에 정규 라디오 방송에서 다루고, 팟캐스트로도 파일이 남아있는 영미문학관에서 30여회에 걸쳐서 방송한 팟캐스트 방송과 펭귄 클래식의 해설이 도움이 되었다.
더블린사람들을 이해하려면 일단 제임스 조이스가 애증어린 마음으로 그려나간 더블린을 수도로 가진 아일랜드라는 나라가 당시 처해있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정치지도자 파넬의 죽음으로 카톨릭 민족주의자들이 품고 있던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산산조각난 현실 앞에 식민통치의 그늘과 만성적 부조리의 상징이 된 카톨릭 종교, 그리고 열뜬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환멸을 제임스 조이스는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로 담았다.
조이스는 이 작품집을 개별 작품의 연속으로 읽지 말고, 복잡한 구조를 지닌 하나의 작품으로 읽어줄 것을 바랬다. 얼핏 보면 단편집 같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제임스 조이스 스스로가 '마비'라고 명칭한 커다란 주제로 모아져, 일관된 지향점을 갖는다. 18세기 초만 해도 베네치아와 견줄 수 있을만큼 명물 도시로 자리매김했던 더블린은 연방법의 적용을 받아 그 위치가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무역과 식민적 약탈적 통치로 인해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 가족의 쇠퇴와 맞물리면서, 작품과 시대와 개인을 연결시킨다. 그가 말하고 있는 더블린의 마비란 무엇인가. 궁핍과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타락하고 무능한 사람들의 마비된 양심, 마비된 진실, 마비된 존엄성, 결국은 마비된 아일랜드 정신이기도 하다.
첫 작품인 <자매>에 이어, <어떤만남>과 <에러비>로 이어지면서 주인공이었던 유년기 소년은 <이블린> <경주가 끝난 후> <두 건달> 등을 거치며 차차 청년기의 소년 소녀로 바뀌고, 마지막 <죽은 사람들>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나이와 성별과 직업과 성격이 바뀌면서 주인공들은 더블린 사회의 여러 층에 포진된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 어떤 위치의 다른 삶을 통해서도 한결같이 더블린의 만성적인 무능과 타락을 보여준다. 만나고, 허세를 부리고, 술마시고, 그 아무 일도 일어난 것 같지 무료하고 단순한 일상의 지속은 조이스가 보여주고자했던, 닦아내고 윤내지 않은 진실 그대로의 <더블린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열린 결말이 익숙하지 않은 세대였다. 독자로서 우리는 <자매>의 죽은 신부가 왜 마비되었는지, 무엇을 괴로워했는지, 그것이 혹시 매독이라든가, 혹은 어떤 성적 타락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오로지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타락한 노인은 음흉하고 저질적인 모습으로 다시 소년들의 일탈을 그린 <어떤 만남>에서 나타나, 아이들에게 섬뜩하게 성적 희롱을 하고 위협한다. <에러비>를 짝사랑한 소년은 무관심한 어른들에 의해 소녀와 가까와질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다(아마도). 그렇게 도시의 모퉁이를 돌면 재회하게 되는 인물들의 더블린 내에서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타락한 인간 본성의 내밀한 속내를 들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작은 일상들, 동전 한 잎, 술 한잔 때문에 육체와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 이것은 200년전 더블린의 모습이지만은 않다. 선거를 앞둔 한 지역 사무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다룬 <위원실의 담쟁이 날>, 무능하기 짝이 없는 회사원이 윗사람에게 당한 수모를 시계까지 팔아 술집에서 허세를 부리며 팔다가 망신을 당한 후 집에 와서 자는 아이를 깨워 화풀이를 하는 아버지를 다룬 <짝패들>, 보잘것 없던 친구가 도시(런던)에서 성공해서 돌아오자 자괴감을 느끼는 <작은 구름>, 직업도 없이, 돈도 없이 술을 얻어 빌어먹는 다니는 건달 둘과 하녀와의 약탈적 관계를 다룬 <두 건달들>, 찬 딸을 결혼시킬 목적으로 은밀한 계략을 읽을 수 <하숙집>은 지금 우리 시대에서 배경만 바꾸어 그대로 플레이해도 다를 바가 없을, 쌍둥이 같은 자화상이다.
그렇다, <위원실의 담쟁이달>에서처럼 선거철이 되면 얼마 안되는 푼돈을 벌기 위해 표를 모으러 다니고, 무용하고 무의미한 정치적 대화를 하는 사람들, 자기보다는 더 나은 배우자를 만나 팔자를 조금 고쳐보려고 악을 쓰고 다니는 부모들, 출세한 친구와 출세하지 못한 친구와의 재회 속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갭,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처럼 서로 등처먹고 사기치는 세상, 바로 어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던가.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왜곡된 거울에 비쳐 미화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더블린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의 음산하고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쳐보는 거울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궁핍하고 초라한 행색을 한 사람들이 한푼의 동전과 한 잔의 술에 팔아버리고 마비시켜버리는 모든 것들을 얘기하고 싶어했다.
실은 조이스 자신이 도피자이고, 더블린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더블린 사람들이여야만 했다. 그 스스로가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마비의 중심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더블린을 배경으로 선택했다'고 밝힌 것은 다른 의미 없이 문자 그대로이다. 『더블린 사람들』을 관통하는 것은 종교적이며 비종교적이고, 허무적이되 허무만을 좇지 않았으며, 도시를 보여주고 있지만 도시의 세련됨은 찾아볼 수 없는 마비라는 안개에 둘러싸인 은밀한 상징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더블린 사람들』의 주인공은 사람들이 아니라 더블린 그 자체일 것이다 ㅡ 더군다나 이는 「위원회 사무실의 담쟁이 날」에서 하인스가 암송하는 <파넬의 죽음>만 보더라도 쉽게 알아챌 수가 있다. 조이스가 고독과 허무에 익숙했던가? 그가 발광한 적이 있었나? 아니면 두 다리가 결박되어 정신적으로 더블린을 벗어날 수 없었을까? 무엇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이든 간에 그는 일단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초로 시행되어야만 할 병의 자각을 충실히 한 셈이다. 적어도 환상에 매달려 욕망이나 환멸 자체를 무너뜨리지는 않았으니.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더블린의 한 독자가 초판 부수를 모두 사들여 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는데, 그것은 아마도 조이스가 자신의 조국을 떠나 망명했다거나 가톨릭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은 것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시도한 은밀한 것들을 들춰내는 방식은 썩은 환부를 도려내지는 못할지언정 각성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외려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때로 『더블린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공격은 으레 결말의 증발이라는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어차피 모든 단편의 귀착점이 특정한 하나의 점(그것을 지향했더라도)을 향해 있지는 않겠다는 견지를 취했으므로 그것이 아무리 모호하든 비난의 대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우리가 『더블린 사람들』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묘사 외에 (거의)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늘 따라다니는 '에피퍼니'라는 수식어의 의미 또한 명백하지 않다. 나는 우스꽝스럽게도 『더블린 사람들』이 갖는 의미를, 『율리시스』 읽기를 두려워하기에 앞서 도전할 만한 과제라고 여기고 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단편 「죽은 사람들」이야말로 조이스의 멋진 시작점이 아닐까.
많은 문학작품들에는 작가가 의도하여 사회를 반영하여 메시지를 던지는 경우와,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회의 모습이 그려지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더블린 사람들>은 전자에 속하는 작품이다. 몇백 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가 20세기 초 독립되고 난 후, 아일랜드 사회에서는 강한 민족주의 정신이 팽배하게 되고 그것은 문예부흥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민족주의의 최정점에서, 더블린 출신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점점 마비되고 세속적이 돼가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올바른 가치를 깨우쳐주고자 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반들반들하게 닦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볼 기회를 주기 위해 썼다고 그는 이 작품을 썼다고 말했다.
짧은 단편들 여럿이 담겨있는 <더블린 사람들>에는 이처럼 아일랜드 사람들과 역사를 비추는 장면들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 <애러비> 속에서 주인공에게 꿈같은 공간이었던 '애러비'는 알고 보니 천박하고 공허한 공간이었고, 그는 결국 분노와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작은 구름>에서는 아일랜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유럽에 대한 동경만으로 살아가는 '더블리너'의 모습이 그려진다. <짝패들>에 나오는 한 아버지의 초상을 통해서 많은 시간 동안 지배당해왔던 아일랜드의 모습과 그 사회 속에서 권력에 굴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가족 안에서는 그러한 권력과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그린다. 또한 탐욕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던 작품인 <어떤 어머니>와 행복을 꿈꾸며 도피하려 하지만 결국 그 도피처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블린> 속에서 종속적인 여자들의 모습도 드러낸다.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이러한 '더블린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대놓고 비판하지 않는다. 과장되지 않은, 현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글속의 주제를 독자들이 해석하게끔 한다. 이렇듯 정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텍스트들의 특성상, 작가가 비판하는 공간에 대한 어떠한 지식 없이 메시지를 해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언급한 단편들 이외에도 많은 글속에서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힘썼던 인물과 '문예부흥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정보들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므로 그냥 작품만 읽고 넘어간다면 약간은 심심할 지도 모른다.
예쁘게 포장된 그림이 아닌, 마비되고 우울한 한 시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단편집이지만, 누구보다도 그 나라를 사랑하고 그 나라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전해주려 했던 작가의 상황이 연상된다. Dubliner의 이야기지만, 사회 속에서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는 작품인 듯 하다. 짧지만 강한 임팩트가 있는 소설들이, 마찬가지로 기억 속에 강하게 남는다.
더 있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 여자의 물건들에 좀 더 관심이 있는 듯 보이려고 잠시 더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바자 중심부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들고 있던 1페니짜리 동전 두 개를 주머니 속 6펜스 동전 위에 떨어뜨렸다. 전시장 끝에서 누군가 불이 나갔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홀의 윗부분은 이제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둠 속을 바라보면서 나는 허영심에 속고 놀림당한 어리석은 내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내 눈은 괴로움과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43p, 애러비)
늦가을 붉게 타는 석양이 풀밭과 산책로를 비추고 있었다. 석양빛은 흐트러진 옷차림의 보모들, 벤치에서 졸고 있는 늙은 남자들 위로 친절하게 황금빛 먼지를 뿌리고는 움직이는 모든 것들 - 소리를 지르며 자갈길을 달려가는 어린이들과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 - 위에서 어른거렸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인생을 생각했고 (인생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그랬듯이) 그러자 슬퍼졌다. 미묘한 우울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운명에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느꼈다. 이것이 수많은 세대들이 그에게 물려주었던 지혜의 핵심이었다. (91p, 작은 구름)
차가운 어둠 속에서 붉은 불빛들이 아늑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언덕 아래를 쳐다보았다. 아래쪽 공원 벽의 그림자 아래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타락한 은밀한 사랑에 그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자기 인생의 청렴함을 곱씹어 보았다. 그는 자신이 삶의 축제에서 추방되었음을 느꼈다. 한 인간이 그를 사랑했었던 것 같았지만 그는 그녀의 삶과 행복을 거부했다. 그녀에게 불명예, 부끄러운 죽음을 선고했던 것이다. 그는 벽 아래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 그가 빨리 가버리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다. (153p, 가슴 아픈 사건)
게이브리얼의 눈에 관용의 눈물이 고였다. 그 자신은 어떤 여자에게도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런 감정이 사랑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눈물이 더 많이 고였고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다른 모습들도 가까이 있었다. 그의 영혼은 수많은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그 지역에 접근 했었다. 그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깜빡이는 그들의 존재를 의식할 수는 있었지만 인식할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의 정체성도 회색빛의 알 수 없는 세계로 사라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죽은 자들이 한때 지어내고 살았던 확고한 세상 그 자체도 점점 줄어들어 사라지고 있었다. (303p, 죽은 사람들)
보통 우리가 영국이라고 부를 때는 단일 국가다. 영어로 잉글랜드로 할 때와 United Kingdom는 다르다. 잘 모르는 사람은 영국으로 생각하지만 각기 다른 국가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를 합쳐 유나이티드 킹덤이라고 한다. 이들은 같은 영어권 국가일 뿐 각자 다른 국가로 전쟁을 최근까지 했었다. 지금은 과거를 잊고 각자 살아가는 듯하지만 여전히 서로 축구 경기 할 때보면 으르릉거린다. 월드컵할 때도 서로 각자 국가팀으로 출전한다.
그 중에서도 아일랜드는 상당히 많은 작가를 배출했다.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를 비롯해서 제임스 조이스도 아일랜드 작가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스>로 유명한데 읽는게 극악무도하게 힘들어 쉽게 책을 선택하기 힘들다. 제임스 조이스의 책을 그나마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더블린 사람들>이다. 제목만 볼 때 몰랐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니 단편소설을 엮었다. 총 15편의 단편소설이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서로 연관이 1도 없다.
공통덤을 찾자만 전부 아일랜드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그곳에서 태어나 그런지 소설의 배경을 더블린으로 한 경우가 많다. 책에 나온 15편의 배경이 더블린이다. 보통 단편을 엮을 때 그 중에서 하나를 대표 제목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제임스 조이스가 의도한 것은 아닐진대 너무 자연스럽게 단편소설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다. 모든 내용을 소개하기는 힘드니 그 중에서 '가슴 아픈 사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깔끔할 듯하다.
제임스 더피가 주인공이다. 그는 주로 집에만 머물러 살아간다. 무엇보다 제임스 더피는 무질서한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자신의 통제하에 놓인 걸 선호한다. 너무 익숙한 듯 직업이 은행원이다. 은행원은 정해진 틀에서 시간을 칼처럼 맞춰 일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숫자를 세는 직업일수록 정확함이 생명이다. 하루 일상이 칼처럼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저절로 간다. 이는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의 성격을 직업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게 한 장치다.
게다가 제임스 더피는 동료도, 친구도, 교회도 나가질 않는다. 혼자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과의 만남은 아주 최소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접촉할 뿐이다. 크리스마스와 같은 행사나 경조사에만 참석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어 하는 행동일 뿐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평탄한 하루 하루를 보낸다. 그에게 익사이팅한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런 일이 생길 일도 없고 하루 종일 루틴도 뻔하니 부딪칠 일도 없다. 그런 그에게 특별한 일이 생겼다.
남자에게는 역시나 여자를 만나는 것만큼 흥미진지하고 익사이팅한 일은 없을 듯하다. 제임스는 극장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다소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보이는 시니코였다. 텅빈 극장에 사람이 너무 없다고 말한 시니코가 한 말을 대화로 받아들였다. 그 후로도 여러 연주회에서 다시 만난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한 시니코 부인이었다. 서로 몇 번의 만남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할 수 있을까.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제임스는 자신의 천성을 버릴 생각이 없던 인물이다. 또는 그가 만나 시니코는 제임스를 변화시킬 정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제임스에 비해서 시니코가 좀 더 적극적인 만남이었다. 어쩌면 그 점이 제임스에게 맞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생각이 확고한 제임스 입장에서는 누군가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서서히 스며들듯이 제임스 원 안으로 들어가 어느 순간 시니코가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제임스는 시니코가 자신에게 한 행동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과 생활에 함부로 침입한 사람으로 여긴 듯했다. 사람은 세월이 흘러가며 변한다. 천성은 변하지 않을 수 있어도 다양한 면에서 나이에 맞게 변한다. 남들 눈에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제임스는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온 삶을 더 중시한 듯했다. 시니코에 대해 그는 거절한다. 더 가까이 오려는 시니코를 의식적으로 밀어내며 관계를 끝내버리며 헤어진다.
시니코 입장에서는 좀 친해졌다고 생각한 제임스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을 듯도 하다. 자신에게 한 행동에 모멸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제임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시니코를 삭제했다. 원래대로 루틴대로 제임스는 살아가며 아주 평범하게 지내고 있었다. 우연히 부고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어느 여인이 기차역에서 사망했다. 플랫폼에 기차가 움직이는데도 철로를 걷다 사망했다. 그녀가 바로 시니코였다. 부고기사에는 2년 전부터 술에 취해 폭음하며 살았다고 한다.
제임스가 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한 것일까. 자신은 그 이후 아무 일도 없이 평안하고 평온하며 일상을 살고 있었다. 기억조차 못하고 있던 시니코는 전혀 딴판으로 고통스럽게 살았다. 둘 사이에 생긴 일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지금까지 아주 평범하게 살던 제임스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까. 그건 전적으로 제임스에게 달려있다. 소설에서는 제임스가 흔들리는 걸로 나온다. 해당 역사를 찾아갈 정도로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친다.
<더블린 사람들>에 나온 단편소설은 전부 끝이 뚝 끊긴다. '소설이 이제 끝났구나'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게 한다. 우리 일상은 소설처럼 마무리가 확실히 되지 않는다. 매일같이 어떤 이벤트가 끝나도 삶은 이어진다. 그처럼 소설은 전부 읽다가 순간 끝이 난다. 그는 행복하다, 슬프다. 이런 식으로 종결은 없다. 그는 밥을 먹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다. 단편소설이라 집중하며 읽을만하면 내용이 끝나 연속성이 없다는 점이 힘들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집중하는 게 조금 어렵다.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여러 단편을 통해 인간을 만난다.
아일랜드의 역사적 배경은 다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영국의 지배를 받았었고 그런 점이 우리의 문학과 유사성을 갖고있다. 챕터별로 읽자면 딱히 커다란 에피소드가 기승전결로 펼쳐지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마음이저리고 공감된다. 개인적으로 늘 마음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eveline은 이런저런 도전앞에서 흔들릴때마다 떠오른다. 사랑하는 연인이 타고 있는 배에 한쪽발을 걸쳐두고 망설이는 그녀는 결국 어머니의 외침과도 같은 종소리에 연인도, 자신을 옭아매는 삶의 굴레를 탈피할 수 있는 기회도 놓쳐버린다.
20대 때는 그게 계속 못마땅했다. 그치만 지금 읽었을때는 그때와는 달랐다. 결국 어쩔수없는 운명이 아닌 선택이었던 것이다. 종소리가 엄마의 외침처럼 들렸던 것은 누군가 자신을 말려주기 바랐던 마음이었던게 아닐까하는 열린 사고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또 모르겠다. 마흔의 내가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는 우유부단하다고 느낄런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