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삶쓰기입니다.
당신은 왜 글을 씁니까? 저는 쓰고 싶어서 씁니다. 화가 나기 때문에 씁니다. 방에서 하루 종일 앉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씁니다. ... 전 세계가 알았으면 해서 씁니다. 종이, 연필, 그리고 잉크 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에 씁니다. 문학을, 소설을 무엇보다 신뢰하기 때문에 씁니다. 저의 습관과 열정이기 때문에 씁니다. 잊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씁니다. ... 도무지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씁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씁니다. 《아버지의 여행가방》오르한 파묵
돌이켜보면 꽤 오래전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아주 어렸을
때는 겪지도 않았던 일들을 종종 지어내서 이야기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 학교에 들어가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모아서 공책에 소설을 쓰곤 했는데, 당시는 인터넷 소설이란 게 막 유행하던 시기였다. 이미 잔뜩 나와 있던 소설들처럼 나도 연애 소설을 썼던 것 같다. 그
후에는 장르 불문하고 소설에 푹 빠져서, 인터넷에 주기적으로 글(읽는
사람 몇 안 되는)을 올리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는 문학
교양 수업에 기말 레포트로 창작 소설을 내고는 전공수업에서도 받지 못했던 A+을 받기도 했다. 더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처음으로 단편 소설집(이라고 부르기
부끄럽지만)을 엮기도 했다.
나의 정체성이 세상과 연결되는 감동과 즐거움을 느껴보라는 작가의 말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부끄럽게도 글쓰기에 관심을 기울인 시간이 길지 않지만, 그 전과
후를 비교하면 나는 확실히 글이라는 매개에 고마워해야 한다. 『회사에서 글을 씁니다』는 단순히 글쓰기의
기술만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다. 조금 까칠한 인생 선배가 글쓰기를 매개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3년 전 즈음에 처음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내
삶은 글쓰기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보니, 회사생활을 하며 작성했던 보고서며 제안서가 적지 않았다. 종종 중요한
문장이라도 뽑아야 하는 날에는 더욱 들떠서 야근도 불사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활자로만 쓰는 게 아니에요.
오늘 다 썼으면 거기서 끝내지 말고, 반드시 내일 소리 내어 읽어보세요. 입술이 망설여지거나 숨이 차는 지점이 분명 생깁니다. 읽다가 버퍼링이
자꾸 생기는 그곳이 바로 고쳐야 할 문장입니다. 좋은 글은 읽기 편하고, 읽기 편한 글이 좋은 글입니다.
작가 정태일은 글쓰기를 단순한 활자의 나열로 보지 않는다. 좋은 글은
쉽게 읽히는 글이라는 말을 재차 강조하며, 그런 글을 쓰기 위해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어려운 단어를 피하고 문법을 지키며, 불필요한
내용을 가려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글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와 마음가짐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이 곧 우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마 나중에는 더욱 정보를 얻기가 쉬운 환경이
될 것이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정보를 얻는 일이 너무나 수월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시대상과는 반대로 우리가 보게 되는 세상은 매우 좁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채널(대개 인터넷)이 크게 다르지 않고, 그를 통해 우리가 접하게 되는 정보 역시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니터 밖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그 안에서 얻는 정보의 양과 비견할 정도도
아니지만 말이다.
모니터로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바라보는 것과 실제 그 소나무 사이를 걸으며,
밀려오는 저녁 공기를 마시는 일은 견줄거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볼 것인지, 어떤 방법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 또한 같을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글을 쓰면 흐릿했던 삶이 선명해지고 책을 쓰면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삶이 단단하게 뭉쳐진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물에 뛰어들어
과연 떠오르는지 가라앉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쓰기를 프로레슬링에 비유하면서 위와 같이 말했다. '계속해서
링위에 오르는 것은 자격이 없으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그 특별한 자격을 갖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선 실제로 물에 뛰어들어 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생겨 먹은 모양'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렇게 물속에 뛰어들고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고 느끼는 사람이 소설을 쓴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 정태일은 하루키의 말에 아래와 같이 이어 말한다.
링에 계속 오를 수 있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이기든 지든 링에
계속 오르고 싶다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야유를 받든
환호를 받는 체력이 되는 한 링에 다시 올라 어떻게든 계속 부대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에게만 그 자격이란 게 주어집니다.
여기서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의외의
인물이 하나 더 등장한다. 우리들의 이웃집 강아지 스누피다. 사실, 스누피가 작가 지망생이라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스누피는
갖은 실패와 사람들의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를 '강아지계의
톨스토이'라고 부른다. 스누피는 이렇다 할 책을 내지 못하면서도
항상 '어둡고 폭풍이 몰아치는 밤이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나 또한 몇 해 전 오키나와 여행에서 돌아오던 길에 떠올렸던 문장을 놓지 못하고 있다.
잠에서 눈을 뜬 진영은 생각했다. 누가 우리의 발을 묶어 정해진 장소만을
오가는 삶을 살도록 만들었는지에 대하여. 누구도 진영에게 그곳을 오가며 살라고 말하지 않았다. 누구도 진영의 발을 그곳에 묶어 둔 일이 없었다.
글쓰기는 삶쓰기라는 말이 참 옳다. 우리가 늙고 병들어 숟가락 들
힘만 겨우 남게 될 때, 할 수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일 중에 하나가 글쓰기 일 것이다. 어차피 하게 될 거 미리 당겨서 하는 셈 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