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 사이언스
홍성욱
21세기북스/2019.1.23.
sanbaram
과학자들은 우리의 이웃이자 친구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과학자는 일반인과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극단적으로는 어떤 한 가지에 미쳤거나 괴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잘못된 생각이라고 <크로스 사이언스>에서 말하는 저자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 <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령> 등이 있다.
<크로스 사이언스>는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한 ‘과학기술과 대중문화’ 수업에 근거한 것이다. 이공계열 학생들과 인문사회계열 학생들이 함께 듣는 수업이었는데, 이 수업을 통해 과학기술을 문화와 사회적 맥락 속에 생각할 수 있었고 과학이 우리의 삶과 더 가까운 것이 되어 좋았다는 학생들의 평가가 있었다고 한다. 내용은 1부 대중문화와 과학의 크로스, 2부 세상과 과학의 크로스, 3부 인간과 과학의 크로스, 4부 인문학과 과학의 크로스 등, 4부로 되어 있다. 주로 과학현상이나 과학이 야기할 수 있는 주제를 갖고 고전이 된 소설이나 영화, 또는 연극의 내용을 다룬다. 작품의 내용을 과학적 원리로 설명하면서 그 작품이 탄생한 사회의 의식을 추론하고 사람들의 집단적 관심사를 짚어보는 내용이다. 나아가 앞으로 우리는 과학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까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과학과 대중문화의 혼종적인 결합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과학이 사실만을 다루지 않고, 인문학이 가치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과학자를 시민들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문학작품 속의 과학자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갖고 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 속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처럼 자기의 행동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다. 또한 박사의 주변 사람들도 해를 입는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기존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영역을 넘어 금기에 도전함으로써 괴로움을 당했는데, 이는 프로메테우스 이미지와 매우 흡사했다고 볼 수 있다.(p.25)” 그는 새로운 지식을 발견한 대가로 고통을 당하는 프로메테우스와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는 이후 과학자의 전형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프랑켄스타인> 소설 속에서 과학자가 괴물을 만든 동기는 생명의 비밀을 파헤쳐서 직접 창조해보고 싶다는 데 있었지만, 희곡 <R.U.R>에서 로봇 제작은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존재, 즉 노예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 비롯된 것이다. <R.U.R>은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로봇은 체코어로 ‘고된 노동’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예상 밖의 일로 그것을 만든 과학자들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까지도 괴롭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이들 작품의 내용이다.
“우리는 마리 퀴리에 대한 최근의 역사적 연구들을 통해 에브 퀴리가 묘사한 <퀴리부인>에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그녀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를 조금 더 일반화하자면, 위인의 전기를 읽는 데는 여러 가지 독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p.81)” 마리 퀴리가 마치 슈퍼우먼처럼 기술된 <퀴리부인>이라는 자서전은 그녀의 딸이 지었기 때문에 미화된 부분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춰진 사실을 연구 결과를 가지고 언급한다. 또한 과학자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머리(영혼, 이성)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 과학자 또한 주변의 여러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는데, 이 중에는 자신의 연구를 돕고 촉진하는 사람도, 연구를 방해하는 사람도 있다. 과학자는 이를 이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를 헤쳐 나가면서 연구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 일반인들과 같다고 강조한다.
“<멋진 신세계>가 묘사하는 멋진 신세계는 풍요롭고 근심 없는 사회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사회와는 거리가 먼 비인간적인 사회일 뿐이다. 과학기술의 진보만으로는 인간을 구원해주는 유토피아가 만들어지지 않을뿐더러 특히 과학기술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에는 비인간화, 인간성 상실, 진정한 자아로부터의 일탈 같은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p.182)” <1984>나 <멋진 신세계>의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세상이다. 따라서 이런 작품들을 통해 지금 우리가 더 고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간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가치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그것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공유해보면 좋겠다고 한다. 우리나라 고교생 중에 10억을 벌 수 있다면 감옥행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답을 한 학생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고 한다. 이렇게 쾌락과 같이 감각적인 것을 우선시 하는 사회가 수백 년 동안 계속 발전한다면, 그 논리적 귀결은 결국 헉슬리가 묘사한 역설적으로 ‘멋진 신세계’가 되지 않을까 저자는 우려한다.
“유전자가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게 아니듯, 우리 사회의 미래 역시 유전자 결정론이 지배하는 미래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p.218)”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실천을 하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사상가 잠바티스타 비코는 인간사회에서 사람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삶의 목적을 가지고,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고 보았다. 서로 다른 삶의 목적이 세상에서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가치를 조정하는 데 지혜가 필요하고, 따라서 이를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학교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사이보그의 입을 빌려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좁은 이기심을 넘어선 세상에 대한 애정과 자비심이라는 사실을 성찰하게 하는 것이다.
“대중문화에 나타난 과학이 얼마나 옳은가, 그것만을 지적하는 것은 문화를 마치 과학에 존속된 것인 양 생각하는 잘못된 태도이다. 괴물이라는 새 생명을 만들어내는 일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같은 작품은 과학적으로 틀렸고 따라서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실로 오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p.349)” 그보다는 과학의 일부가 녹아든 대중문화가 대체 세상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작가는 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했는지, 이것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통찰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한다. 더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때, 과학은 우리의 문화에 더 튼튼하게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학은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과학기술의 역사적, 철학적, 사회적으로 분석하는 학문 전반을 의미한다.(p.350)”고 한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다룬 과학과 문화의 교차점들에 대한 이야기가 인간답고 민주적인 과학기술의 모습을 상상하고 이를 구현하는 우리 모두의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꿈꿔본다고 저자는 말한다. 과학적 내용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 연극 등을 통해 과학에 흥미를 느끼고 인간의 삶과 연계하여 생각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책이다. 과학의 발달에 따른 인류의 미래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