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작 중 가장 독특하고 니체를 입문하기에 쉬운 작품이라고 알려져있으며 그의 반여성주의라는 타이틀을 얻게 해준 가장 논란많은 저작이기도 하다.
이렇듯 논쟁의 중심이 되는 책의 해설서가 출판 되었는데 해설서는 책 세상 출판사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번역한 정동호 선생의 책이다. 정동호 선생님의 번역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원전에 가깝게 뛰어난 작품 해석으로 높은 수준의 번역이라 잘 알려져 있는데,
번역 만큼이나 해설서도 니체에 대한 높은 통찰력과 깊은 이해가 잘 드러나있어 기대해도 좋은 책이다.
니체. 라고 한다면 무슨 책이 떠오르고 어떤 인상이 떠오르는지 생각해보라.
어쩌면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이 떠오를 수도 있고 이성적이며 감정이 결렬되고 한치의 피눈물도 없이 상황을 정리할 인상이 떠오를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통틀어서 내게 니체는 인간적인 면모가 안 보이는 딱딱한 인간이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니체는 정말 인간에 대해서 감정을 느끼지 않았나에 대한 질문에 대답으로, 강철같은 니체의 인상이 어느새인가 사라졌다.
철학가들의 말과 행위로 그들이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청중의 입장에서는 감정이 결렬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근본적인 ‘인간에 대한 탐구’ 기저에 자신에 대한 궁금증의 갈망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애증이 깔려있음을 알아야한다.
삶과 목적,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며 철학가와 같은 의문을 던지며 읽는 것이 딱딱하게 이론만 읽는것 보다는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
또한 정동호 선생의 역사적 상황설명과 니체에 말에 대한 사상가들의 다른 해석을 쥐어주며 자신에 대한 입장도 견고하게 만들수 있게 탄탄하게 글이 짜여있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며 사유를 하기위한 첫 발걸음을 잘 뗄 수 있게 되었다.
이 해설서를 읽게 된다면 조그마한 종이 쪼가리와 연필 하나를 주머니에 끼고 생각나는 인상을 적으며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니체의 생각을 더불어 자신만의 사상을 하나씩 끄적이며 비교하며 읽기 좋은 책이다.
책을 읽기 전 단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면, 니체의 이해가 가지 않았던 저작들과 그의 사상을 알게 되는 것 하나였지만 해설서를 읽어가면서 단지 그 정도의 이해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나아가서 니체의 삶과 원초적인생각, 진정으로 생각하고 싶었던 넓은 철학을 볼 수 있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서 신의 죽음을 선언함으로써 인간을 해방하려고 했다.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선언했을까? 만일 당신이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필수 불가결의 상황이 온다면 왜 그런 말을 던졌을까?
내세 신앙과 형이상학적 망상에서 인간을 해방하려고 했다.
더불어 생을 학대해온 도덕적 가치를 포함해 지금까지 최고로 여겨온 가치들을 모두
전도시킬 것을, 그러고 나서 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한편, 삶을 비관해온 모든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를 극복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쳤다 ….
그러고는 종교와 철학과 도덕 이전의 자연으로 돌아가 순수하며 정직한 삶을 살도록 권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중
그저 인간주의 사상을 원해서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니체는 자연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신의 사상적 토대로 사용했다고 알려지는데 종교의 탄압이 과학의 진보를 막고 인간의 발전을 억누르는 수단으로도 보였을 것이다. 또한 종교의 허상으로 사회적인 인간 군상이 해야 할 일을 허물뿐인 믿음을 가지고 해결하는 모습과 극단적인 상황 끝에 해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고귀한 정신과 인간 사회를 망친다고 봤지 않을까.
종교에 대한 비판적 생각을 하고 있던 그가 왜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자신의 대변인으로 세워서 글을 썼을까? 역사 속 차라투스트라와 상반된 그를 왜 대변인으로 세웠을까 궁금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답은 해설서의 머리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잠시 말을 인용해보자면,
“‘역사 속 차라투스트라’라면 어떤가? …그의 가르침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만큼 신비에 싸여있는 존재였다. 거기에다 그에게는니체 사상과 만날 접점까지 있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중
종교의 순리에 대해서 니체가 발언한 단 한 문장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다만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언이 종교에 대한 반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라는 철학가에 대해서 그가 무엇을 추구하였고 결국에 그토록 많은 저작을 통하여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에 대하여 니체가 말하는’ 인간’에 대해서 깊게 들어가기 전 그들을 감싸는 부유물을 없앴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했다. 니체는 ‘종교와 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하던 철학가였기 때문이다.
“나는 차디찬 영혼, 노새, 눈먼 자 , 술 취한 자를 두고 담대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려움을 아는자, 그러면서도 그 두려움을 제어하는 자, 긍지를 갖고 심연을 바라보는 자가 담대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차라투스트라>를 처음 본다면 고전문학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서 니체의 철학서 중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쉽다고 읽기 시작하다가 금방 포기하고 만다. 아마 난해한 글과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 의도를 모르는 이야기 등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이유 중 의미를 몰라 지루한 것이 책을 도중에 포기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사상과 모든 생각들을 온 힘을 다 받쳐 꾹꾹 넣어 글로 쓴 책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니체 자신의 저서 중 가장 주저이자 독보적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인 만큼, ‘니체’에 대하여 잘모르거나 입문하려고 가볍게 폈다면 그가 내뱉는 의미와 말들 앞에 책을 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저서 중 가장 읽기 편하고 문학의 가치도 상당히 높아서 니체 사상 입문서라고 말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바로 그의 저서를 읽기보다는 해설서를 보면서 자신의 사상과 니체의사상, 그리고 역대 철학가들이 니체를 분석하며 해석한 말들을 비교하며 보는 것이 니체가 통찰하였던 세상의 의미를 자신만의 언어로 이해할 기회가 될 것이다.(니체의 저서 중 <아침놀>과 <즐거운 학문>도 입문하기에 손색없는 저서라고 일컬어진다)
놀랍게도 이 책을 읽으며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니체의 작품 중 <비극의 탄생>, <선악의 저편>을 읽고 이해되지 않았던 의미들이 하나씩 떠오르며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정리되었다. 선과 악, 염세주의와 인간성을 재정립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책이다. 니체의 사상을 ‘거느린’ 책이란 것이 어느새 와닿을 수밖에 없는 놀라운 생각과 깨달음으로 편견이랄 것을 하나씩 부서트리게 되었다.
아마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았거나 알고 있다면 니체의 반여성주의 사상이라는 말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1부의 늙은 여인네들과 젊은 여인네들에 대하여 에서 늙은 여성의 대사 중에 ‘여인에게 가려면 채찍을 잊지 말아라’라는 당부에 대한 논란이다. 해설서를 읽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를 읽었을 때 의미 파악을 제쳐두고서라도 이 문장에 대해 거북함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해설서에 어떤 식으로 문장을 해석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궁금증이 있었는데, 몇 가지의 사례와 해석을 통해서 가부장적 편견을 상쇄시키고새롭게 보려고 노력했다. 여전히 거북했지만, 이 문단이 차별을 논하기 전에 --필자 생각으로는 차별적이라면 그것만의 이유로라도 더 깊이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손가락질만 하고 넘어가면, 더 나아질 생각과 통찰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니체의 사상만 두고 해설서와 차라투스트라 1부를 보며 생각을 정립하려 애썼다.
문제가 된 문장은
“여인에게 가려면 채찍을 잊지 말아라”
해설서에 언급이 되어있듯이 이에 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분분하지만, 필자의 해석은 ‘신은 없다’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적으로 우생학의 논란과 더불어 니체가 성 역할 이분법을 강조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크리스천을 비판했던 니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성’ 역할에 대해서 사상에 따라 이분법적 진리를 내려야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성경을 떠올렸는데 창세기 구절에 에덴동산에서 지상으로 쫓겨나는 이야기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성경 창세기 13장
신은 남성에게 노동을 지시하고, 여성에게 출산을 지시함으로 남성의 노동과 출산을 대등한 것으로도 해석을 할 수 있는데, 종교는 죽었지만, 인간의 탄생과 주어진 권리를 차라투스트라 입으로 설명하려면 우생학적이거나 과학적인 설명을 더불어 하는 것보다는 신의 소멸이라는 공간 안에서 성 역할이라는 존재가 존재하려면 근본적이고 원초적이며 원시적인 성의 고정적인 역할을 대변할 수 있는 새롭게 주어져야 할 의미와 유지해야 할 인간 사상을 위하여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책에서는 채찍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응징이 아니라 다스리는데 쓰이는 것이 채찍이라는 점이다. 그 점이 회초리와 다른 점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1부의 내용을 읽었다면 이 채찍이라는 것이 여성학대의 정당화를 요구하려는 문장이 아니었음은 알 수 있다. 그 저변에 남성 권력이라는 가부장적 요소가 가득할 수 있더라도, 채찍으로 여성을 때려야한다. 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진리’라는 입장으로 보면 진리는 불변한다는 가정하에-소멸은 없다- 남성의 힘과 권력을 채찍으로 상징하여 그 채찍을 여성에게 쥐여줌으로써 오로지 진리의 탄생은 여성의 출산으로 인하여 이뤄질 수 있으며탄생한 진리를 채찍을 쥔 여성이 갓 세상에 나와 버릇없이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 대는 진리를 교육하고 진리가 온전함을 유지했을 때 진리의 모든 시간을 남성이 이끈다는 것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Happy birthday, Friedrich Nietzsche (15 October 1844 ? 25 August 1900) ? pictured above with Lou Andreas-Salome (left) and Paul Ree (center)
https://yaleuniversity.tumblr.com/post/64134997133/happy-birthday-friedrich-nietzsche-15-october )
여인과 채찍은 여전히 쟁점이 되고 있지만, 니체가 글을 쓰기 열 달 전쯤 친구와 짝사랑하는 살로메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가 연출한 것으로서, 그와 친구가 앞에서 수레를 끌 준비를 하고 여인이 뒤 모서리에 몸을 굽힌 채 꽃으로 장식한 채찍을 들고 있는 사진이다. 다양한 해석이 오가는 도중에 어느 정도의 길잡이를한 사진인 셈이다.
성 이분법적 생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의미를 고려하려고 애썼지만, 고작 며칠을 보고 큰 의미의 파악은 어려웠다. 또한 그가 가부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그의 말 한마디가 가부장적인 인물이었음을 인정하지만, 다만 이 모든 기저에 차라투스트라의 말속에는 인간이 종교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해야할 일들을 강조하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회의 순리를 종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일구어내야 하는’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허상이 아닌 인간 실재에 대하여 집중하려고 노력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방대한 분량 중에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을 꼽아서 이야기를 한 이유는 고전서인만큼 학문적 성취가 높은 작품이며 대중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작품이라 읽을 사람은 읽었을 것이며, 말이 많이 오가는 작품인 만큼 편견과 거북함 때문에 읽지 않은 사람들과 입문자들을 위해 마음에 닿았던 문장들을 대체로 인용하지 않고 니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방면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니체의 사상이 담긴 철학서인만큼 한 문장을 써내리면 그 문장에 대한 글을 몇 백자는 뛰어넘게 써야하기 때문에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의 글을 꼬집어서 적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문장이 있더라도 논란이 되는 말 한마디에 책의 가치성이 좌지우지 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에 대한 화두를 던져두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며 편견 때문에 못 읽었다면 그것을 거둬두고 해설서를 보며 가볍게 다시 책을 펴시기를 추천 드리고 싶다. 니체의 사색에는 담겨있는 뛰어난 통찰이 담겨있어서 받아들이고 비판하며 사유하기에 좋았던 책이다. 삶에 대한 고민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있어서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가볍게 펴보는 건 어떨까.
고전에 철학서인 만큼 그 의미와 해석에 관해 논란이 다양하지만, 니체의 사유를 논하며 토론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다는 점에서 어떤 철학서든, 무슨 대단한 사상가이든 그 말에 어폐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고전은 고전서로 보는 것이 옳다. 주장하는 바가 시대와 다를 수 있고 거북할 수도 있다. --필자도 읽으면서 바탕에 깔린 가부장적 배경에 움찔 할 때도 있었지만 깨닫고 비판적으로 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여성들만이 쉽게 느낄 수 있는 조금씩 띄는 모순들을 사회안에 차별을 깨닫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온전히 시대와 맞지 않은 사상이라고 단순하게 인정할 수 있는 선택을 하며 그저 책을 덮는 것보다는 사상을 하나씩 빗대어 보듯 비판적으로 니체를 바라보며 책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한 시대를 영위했던 사상가의 말 한마디를 가지고 기분이 나쁘다며 책을 덮는 것보다는 그를 보고 시대를 이해하며 왜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관하여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다면 그들이 가졌던 편견도 다시 가질 일은 없을 것이며 오만을 이해하고 더 넓은 폭의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대단함에 경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한 시대를 영위했던 사상가임과 천재적 능력을 강조하며 그의 말이 모두 옳다고 대답하는 것도 책을 안 읽는 이만 못하다 그거야 말로 반지성주의가 아닐까?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모든 말이 옳을 수는 없다. 니체가 말했듯 모든 것이 옳은 신은 죽지 않았는가? 불안하고 안정된 인간의 발언을 그의 명성으로 판단하며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 그의 잘못된 발언을 남에게 사상으로 입적시키려는 것은 니체가 비판하였던 종교적 억압과 다를 것 없다. 오로지 자신만의 생각과 비판적인 사고로 철학자들의 말을 읽고 토론하며 의견을 나누는 것이 새 시대를 열어가는 중요한 사상의 틀임은 분명하다.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아인슈타인도 ‘칸트’가 쓴 철학서들을 깊게 생각하고 사유했다고 한다. 칸트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칸트의 지성을 생각하고 왜 그런 사상을 떠올렸는지에 대하여 끝없이 토론했다고 전해지는데 한 발짝 물러서서 그의 사상이 무엇을 의미하려고 했는지 왜 그런 식으로 생각했는지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한 아인슈타인처럼, 옳고 그름에 집착하여 1800년대 후반에 지어진 책의 문장하나에 집착하며 그 사상을 고착화 시키려고 혹은 모든 생각이 틀렸다며 말하는 것 보다는, 시대적 상황과 배경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어떤 철학적 사상을 필요로 했는지를보며 자신만의 철학을 하기를 바란다.
필자도 아직 철학에 관해서 무엇이 철학이고 어떤 것이 사유인지 적확하게 정의를 내리며 글을 읽는 것도 아니고 철학 전공자들처럼 책들을 많이 본 것이 아니기에 옳고 그름을 논하기에는 아직 견문이 짧은 것을 인정한다. 또한 거론되는 논란의 문장들이 거북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찝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그저 거북함과 지루하다는 편견이 있어서 읽지 못했던 분들에게는 이 책을 읽어본 뒤에 생각하고 비판해도 늦지 않다는 점을 전하고 싶다. 한 문장만 알고 비판하는 것과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비판해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견문도 더욱 넓어질 것 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해설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무엇보다 편견을 만들 거면 왜 싫은지에 관하여 읽고 난 뒤에 생각을 견고하게 만들어 그 후에 니체에 관한 인상을 만드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또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며, 니체를 알고 싶고 니체를 배우고 싶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결국에는 한 번 읽고 집 책장에 꽂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던 니체의 저작을 다시 꺼내게 만든 감사한 책이다.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쓴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