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83년 2월 19일 결혼했는데 그날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면 그 시절에도 신혼여행을 갔거든요. 당시 변호사님 차가 현대 스텔라였고 출고한 지 한 달 정도 됐습니다. 아끼시던 차입니다. 그 차를 노 변호사님이 손수 몰고 와 우리 부부를 태우자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지요. “나는 구혼이니까 신혼인 니들은 뒤에 타라. 내 오늘 경주까지 드라이브시켜줄게” 하시는데, 결혼도 기뻤지만 노 변호사님 부부와 함께한 그때가 인생 최고로 행복했습니다.
제 월급이 빤한 상황이라 여관에서 첫날밤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사모님이 제 아내를 한쪽으로 데려가더니 봉투를 주셨어요. 얼떨결에 고개를 잠깐 돌렸다가 아내가 봉투를 받는 걸 보았지만 선물인가 싶어 가만히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제가 호텔이라는 곳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경주 조선호텔에 방을 예약하고 계산까지 하고 가셨어요. 제 월급이 25만 원이던 그 시절에 호텔비가 10만 원 정도였을 겁니다.
---「‘노무현의 인간미’, 변호사 시절 운전기사 노수현 인터뷰」중에서
사실 우리 자신이 형편없이 깨져 있었고 너무 보잘것없는 처지라 재판 과정에서 노 변호사님이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우리와 함께 운동하실 때도 빈털터리인 우리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죠. 아파트도 있고 벌어둔 돈도 있으니 괜찮겠지 했는데……. 그때 경찰서와 세무서에서 밀려든 온갖 회유와 협박이 엄청났다는 것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어요. 인간 노무현이 얼마나 힘든 선택을 한 건지 나중에야 깨달은 거지요.
인간적으로 그분께 조금만 더 잘할 걸, 돈으로는 못해도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할 걸 하는 후회가 밀려듭니다. 제가 많이 까칠한 편이거든요. 변호사님이 제게 따뜻하게 다가오셨을 때 제가 슬그머니 한 발 물러선 적이 몇 번 있어요. 그런 게 몹시 아쉽습니다. 퇴임하고 내려오셨을 때 우리가 좀 더 어른스럽게,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의 10분의 1이라도 제대로 해드렸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크죠.
---「‘노무현의 인간미’, 부림사건 피해자 고호석 인터뷰」중에서
한창 얘기를 나누던 중에 노 변호사가 광주민주항쟁 문제를 자연스럽게 끄집어냈지요. 제가 말없이 듣다가 “노 변호사님, 사실 제가 광주 일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얘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무슨 소리야. 정보기관에서 제일 잘 아는 기 그긴데” 하고 반문하시더군요. 그때 제가 왜 모르는지 설명해드렸어요.
“당시 저는 국제정보국 소속이라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었고 내부적으로 그런 문제를 서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알아봐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또 아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노 변호사님이 책과 비디오테이프를 하나씩 주며 “집에 가서 꼭 보세요” 하더라고요. 책은 황석영 작가가 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였고, 비디오테이프는 당시 광주 상황을 외신 기자들이 촬영한 것을 모아 만든 거였어요. 단속 대상에 속하는 책과 테이프였죠. 제가 “아, 노 변호사님. 저한테 이걸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러면 제가 노 변호사님을 잡아가야 합니다” 했더니 잡아갈 때 잡아가더라도 일단 가서 한번 보고 잡아가라는 거예요.
---「‘노무현의 진정성’, 국정원 직원 이화춘의 인터뷰」중에서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시위의 주도권이 달라졌습니다. 경찰뿐 아니라 안기부 직원과 보안대 요원이 시위대에게 잡혀갔지요. 저도 한 번 잡혀갔습니다. 법조 쪽에서 일어난 시위였는데 제가 근처에서 구경하다 묘하게 잡혀갔어요. 잡혀가면 일단 사정없이 두드려 패고 짓밟습니다. 주머니도 다 털려서 신분증이고 지갑이고 다 뺏기고, 순식간에 당했지요. 그때 노 변호사가 그걸 보고 달려와 시위대를 제지하더니 저를 빼주라고 설득하더군요. “이 사람, 내 감시 담당이니까 이러지 마라!” 그때 시위대가 당신 담당이라고 빼주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대드니까 노 변호사가 “아, 그 담당이지만 말이야. 내 친구야. 내 친구한테 그럴 수 있어?” 했습니다.
---「‘노무현의 진정성’, 국정원 직원 이화춘 인터뷰」중에서
간혹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정보기관 사람은 10미터, 100미터 앞에 있어도 냄새가 나. 근데 당신은 요 앞에 있어도 냄새가 안 나.”
뭐랄까, 너는 내 반대편에 있지만 너와의 만남이 내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진심을 그런 식으로 전했어요. 그런 다음 자기 이야기를 툭 던집니다. 아내와 다툰 얘기나 뭐 그런 거죠. 집에 돈도 갖다 주지 않으면서 운동권 학생들을 집에 데려와 밤새 술을 마시니 그 대접을 하고 밥도 해주느라 사모님 입장에서는 참 힘들었을 거예요. 실은 노 변호사도 무척 고민스러웠을 겁니다.
“시골 형님, 형수님한테도 돈을 보내드려야 하는데 못 보내서 진짜 내가 얼굴을 못 들겠어.”
이런 이야기를 지나가듯 툭툭 던지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어요. 흔히 ‘노무현’ 하면 굉장히 이념적이고 남자답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는 인간적인 고려를 많이 하는 사람이에요. 조금만 가까이에서 보면 그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노무현의 진정성’, 국정원 직원 이화춘 인터뷰」중에서
그 특유의 걸음걸이로 어깨를 흔들면서 법원으로 올라가는데 거기엔 승강기가 없어요. 1층부터 5층까지 막 뛰어올라가요. 저도 가방을 들고 같이 뛰어올라갈 수밖에 없죠. 점잖게 가지 않고 파바박~ 뛰어올라갑니다. 저도 따라 올라가고. 처음엔 법원 직원들이 장난하나 했는데 시일이 흐르고 보니 아, 정말 멋있거든요. 참, 멋있어요.
법원에 들어가면 아주 썰렁합니다. 그곳 자체가 속된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곳이잖아요. 또 민사는 돈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니 사람들 표정이 죄다 침울하고 긴장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노 변호사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휘파람을 휘익 불며 만나는 사람마다 “안녕하세요, 노무현입니다”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노무현의 정의’,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장원덕 인터뷰」중에서
실은 토론 전에 해당 방송사로부터 대략적인 질문 내용을 미리 전달받습니다. 그건 부정한 행위가 아니고 관행상 상대 후보와 우리 쪽에 기본적인 질문의 개요를 알려주는 수준입니다. 그 보고를 드렸더니 굉장히 역정을 내시며 “이거 반칙 아이가. 나한테 알려주지 마라” 하셔서 당황했지요. 그것이 방송에서는 관행일지 몰라도 당신 생각에는 일종의 커닝으로 여겨져 수치스러움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만큼 도덕적인 면, 원칙적인 면에서 결벽증 같은 게 있었죠.
---「‘노무현의 정의’, 노무현 대선 당시 언론보좌관 양정철 인터뷰」중에서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이 말은 이념 공세를 깔끔하게 날려버린 노무현 후보의 진솔한 외침이었다. 노 후보가 가슴 절절하게 진실을 외칠 때 손을 입가에 올리고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이인제 후보는 속이 탔는지 앞에 놓인 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인제는 ‘누가 이념적으로 안전한 대통령인가’를 내세우며 인천 경선을 그 심판대로 삼고자 했으나 노무현은 이 한마디로 선거 이슈 패러다임을 ‘누가 더 인간적인가’, ‘연좌제가 과연 정당한가’로 바꿔놓았다. 그야말로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막힌 정면돌파였다.
---「‘노무현의 용기’ 본문」중에서
대뜸 제게 “노무현의 시대가 올까요” 하고 묻더군요. 제가 “아, 오죠. 오지 않을 수 없죠. 반드시 옵니다” 했더니, “근데 노무현의 시대가 오면 내는 그기 없을 것 같소” 하시더라고요. 제가 피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죠”라고 대답했어요. 저와 노 대통령님의 대화는 늘 그런 식이었어요.
“아,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어때요? 그 시대가 오기만 하면 되지요. 후보님은 새로운 변화의 첫 파도에 올라타신 거예요. 이제 첫 파도가 밀려와 가야 할 곳까지 갈 수도 있지만 못 가고 주저앉을 수도 있죠. 그러면 그다음 파도가 또 오겠지요. 계속 파도가 와서 어느 시점엔가 지금 후보님이 생각하는 대통령이 되려는 그 이유, 대통령이 되어 만들고자 하는 사회, 이루고자 하는 변화가 이뤄질 거예요. 그런데 첫 파도를 타고 계시기 때문에 거기까지 못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게 오기는 와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제가 좀 섭섭하게 대접했죠. 약간 서운하셨을 것 같아요. ‘아, 후보님. 끝까지 가실 수 있습니다’ 하고 이야기해야 맞는데 제가 냉정하게 말한 거지요. 실제로 그럴 수도 있으니까요. 그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허, 그렇죠. 그런 세상이 오기만 한다면야 내 없으면 어때.”
---「‘노무현의 용기’, 노무현 대선 당시 자원봉사자 유시민 인터뷰」중에서
특별히 생각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 후배가 있어요. 노대통령 친구 동생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속된 말로 대통령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룸살롱 밴드 마스터거든요. 그런데 툭하면 전화를 걸어 “형님 계시나?” 하는 거예요. 당연히 잘해드렸죠.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그러니까 제가 “지금 밖에 계신데 바쁘십니다” 하면서 몇 번 전화를 바꿔드리지 않고 면담도 막았어요. 뭐, 완전히 그렇게 한 것은 아니고요.
하루는 대통령께서 누구한테 전화가 왔는데 자네가 나한테 연결도 해주지 않고 면담도 못하게 했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했더니 “면담이야 그렇지만 전화가 올 땐 내가 있으면 꼭 바꿔주라. 갸는 그럼 안 된다. 내가 생각나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그리 야박하게 하지 마라. 자네들이야 다 이유가 있고 귀찮을 수 있지만 내가 괜찮다” 그러세요. 그런 모습을 보면 제가 참 부끄럽죠. 대기업 임원이나 잘나가는 회사를 경영하는 후배한테 전화가 왔어도 제가 그렇게 야박하게 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반성하게 되죠. 이게 노무현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잠깐 눈속임을 할 수 있겠지만 일상적인 일까지 같이하는 참모들까지 그럴 순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 모습을 보며 어떻게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노무현의 리더십’, 노무현 캠프 참모 서갑원 인터뷰」중에서
예를 들어 누구와 논쟁을 해서 본인이 이겼어요. 대통령이니까 항상 이기죠. “대통령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왜 안 되냐. 이러이러해서 이건 되는 거다’라고 해서 이기면 꼭 다른 분이 올라오세요. 가령 외교안보 수석이 지고 내려가면 통일부 장관이나 외교부 장관이 급거 청와대에 들어옵니다. 그분들이 또 안 된다고 얘기하거든요. 그럴 때 한 번도 고집을 피우는 것을 못 봤어요. 여기에 대해 그러셨어요.
“저렇게 두 번씩이나 와서 이야기하는 건 정말 안 되니 그러는 거 아니겠는가. 내 거기에도 고집을 또 피우면 참모들이 뭐가 필요하냐. 그냥 내 맘대로 하면 되지. 또 한 가지는 그 사람들이 그다음에는 얘기를 안 할 거다. 해봤자 소용없으니까. 해봤자 자기가 찍히기만 하고 결국 자기 맘대로 다 할 테니 굳이 안 된다고 하지 않을 거 아니냐. 그러면 내가 조언을 못 들을 테고. 그래서 두 번 이야기하면 나는 무조건 듣는다.”
물론 두 번 얘기해도 고집 피우시는 걸 보기도 했어요(웃음). 진짜 고집 피우실 때는 두 번 이야기하면 “알았다” 하고 현장에 가서 원래 본인이 하고픈 말을 그냥 해버리세요(웃음).
---「‘노무현의 리더십’,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 연설비서관 강원국 인터뷰」중에서
어느 날 밤 비서동 지하에서 운동을 하고 나왔는데 제 앞에 누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어요. 수석실 누구겠지 했는데 제 몇 미터 앞에도 누가 걸어가고 있더군요. 걸음걸이가 꼭 대통령님 같았어요. 사실 대통령께서 비서동 근처에 오실 일은 전혀 없거든요. 그런데 앞에 걸어오던 사람이 갑자기 복도에서 대통령과 딱 마주치니까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은 거예요. 그때 대통령께서 막 웃으시며 “야, 니 뭐하노? 내 대통령이다, 대통령. 인사 안 하나?” 하셨어요. 그 부처 직원이 멍하니 있다가 화들짝 놀라 “안녕하십니까?” 했더니 “안녕은 하지~” 이러면서 가시더라고요. 얼마나 개구쟁이에요. 그다음 날 이 일이 굉장히 회자됐어요. “야, 밤에 비서동 다니다가 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까 다들 준비해” 하고요(웃음).
---「‘노무현의 리더십’,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 인사비서관 김진향 인터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