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오월이 왔습니다. 당신이 떠나신 오월입니다. 당신을 향한 갈망과 공허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여기 이렇게 그리움과 추억의 말들로 풀어놓았습니다.
어찌 저희만이 당신을 그리워하겠습니까? 이 부질없는 그리움이라도 풀어놓지 못하면 그냥 가슴에 맺힌 채로 응어리져 있을 것 같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꺼내놓았습니다.
시간이 나시면 읽어보시고 저희에게도 몇 말씀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는지요. --- pp.8-9, 도종환, 책 앞에_당신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중에서
분명한 건 그가 우리 사회가 무작정 덮어둬온 수많은 ‘불편한 진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 시끄럽게 토론하고, ‘다 그런 거지’라는 식의 패배주의와 '좋은 게 좋다'는 대세 순응주의, 뿌리 깊은 기회주의, 기득권이 만들어놓은 ‘사고(思考)의 함정’을 끊임없이 깨려했다는 점이다. 그것과 맞물린 화두 ‘사람 사는 세상’은 그래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p.32, 고형규, 취재원 노무현을 추억하다 중에서
‘노간지’라고도 하던가. 나는 ‘노무현 스타일’을 결코 잊지 않는다. 이제는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스타일을 갖고 있지 않다. 그와 같은 정서와 눈물을 가진 사람이, 그것이 농축된 스타일의 정치인이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스타일은 결코 재연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가난한 서정과 그 서정에서 길러진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위대한 연대와 그 연대에 의해 형성되는 진실한 마음의 울림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거의 유일하게, 그 애틋한 눈물을 진심으로 흘릴 수 있었던 사람. 그가 1년 전에 자연의 다른 한 조각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나갔다. 진실로 슬픈 것은, 그런 사람이 이제는 없다는 것이다. --- p.52, 정윤수, ‘노간지’, 그 매혹과 슬픔의 스타일 중에서
“택시 기사 직업이 좋은 이유를 평생 들어왔지만 그중에 가장 새롭네요. 한밤에 조문하기 쉽다, 기억해 둘게요.” 그렇게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사 할아버지는 매일매일 빈소에 들렀다가는 사람들을 그들의 집으로 실어다주면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살다 살다(군대도 가고 사우디에도 가보고 조기 축구회도 해보았지만) 그렇게 자발적인 사람들은 처음 봤어요.” 그리고 그렇게 자발적인 사람들을 며칠씩 보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우리도 누군가를 굉장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싶어 했던 것 아닐까…….”
대통령의 삶과 죽음, 성공과 좌절, 그리고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꾸었던 꿈을 생각하며 그가 남긴 것의 무게에 새삼 놀라게 된다. 한때 우리에게 동정심, 따뜻한 마음, 권태와 무기력을 이겨내려는 마음이 있었음에 안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뭔가 다시 시작해볼 수 있다. --- pp.56-57, 정혜윤, 더 많은 꿈을 꾸어야 하는 이유 중에서
“하루는 그가 술상을 물렸다. 등줄기에 방석을 밀어 넣고 양쪽 콧구멍엔 담배를 끼웠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흐느적거렸다. 곱사춤이 어울리는 유일한 정치인. 17년 전 민주당 대변인 노무현은 그렇게 소탈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 p.70, 하어영, 노짱의 춤을 본 적이 있는가? 중에서
“아까 YS가 무능하다고 하셨죠? ……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저도 YS가 잘했다고 보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면 그냥 YS가 무능하다고 국민들이 생각하는 게 아니구요, 민주개혁 세력, 진보 세력은 투쟁할 줄만 알았지 국정 운영능력이 없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YS의 국정 실패는 그의 무능보다는 지역주의 정치구조 때문입니다.” --- p.80, 손혁재, 내가 만난 개혁의 아이콘 중에서
그는 퇴임 후 패장처럼 시골 농사꾼으로 지내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한동안 감옥생활 같은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마저 놓아두지 못하고 수구 언론과 검찰은 그를 흔들어댔다. 마치 먹잇감을 놓고 어르는 고양이마냥 그의 아내를 불러다 놓고 자기네들끼리 웃어대며 ‘자신을 구하려고 아내를 버리느냐’고 비아냥거렸다. 아들, 비서관, 측근들도 줄줄이 끌려갔다. 목표를 세웠으면 바로 공격할 일이건만 주위를 맴돌며 애먼 사람들까지 괴롭혔다. --- pp.118-119, 송기인, 그가 우리 각자인 동시에 모두이기를 중에서
발가락 양말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아마 대통령의 유일한 사치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발가락 양말을 애용했다. 색깔 별, 재질 별로 여러 켤레가 구비된 발가락 양말 바구니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등산 양말도 발가락 양말이었다. 언젠가 무늬가 있는 발가락 양말을 사 드렸더니 무척 좋아했다. 또 대통령은 모자를 즐겨 썼다. 그것도 기념모자, 이를테면 공군 에어쇼 같은 행사에서 나눠주는 모자를 좋아해서 현관에 쌓아 두고 산책 나가며 골라 쓰곤 했다. 그래서 행사마다 기념 모자를 챙기는 일이 내 몫이 되었다. --- p.152, 박천숙, 아버지가 입을 옷이에요 중에서
대개 대통령이 식당으로 나올 때를 맞춰 운영관은 식당 문 앞에서 대통령을 맞는다. 그런데 그걸 안 대통령은 대기 시간이 10분 넘도록 나오지 않으면 인터폰으로 연락을 취하고 시간을 조정 받으라 했다. 오래 서 있으면 허리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하루는 시간이 10분이 지나 인터폰을 누를까 하고 있었다. 곧 도착한 대통령이 대뜸 왜 13분이 지났는데도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며 나무라는 것이었다.
또 대통령이 식사를 하는 동안 운영관은 뒤쪽에서 지켜보다가 반찬이 떨어지면 더 드리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대통령은 맛있던 것도 계속 먹으면 맛이 없어진다며 식사 중에는 반찬 등을 더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 직원들을 배려하는 마음이었음을 왜 몰랐겠는가. --- p.160, 신충진, 대통령의 마지막 점심
매일 한두 시간씩 수백 명의 방문객들과 일일이 사진을 찍다보니 대통령의 얼굴은 점점 그을려갔습니다. 역광이 나오면 사진이 잘 안 나온다고 해를 안고 섰기 때문입니다. 보다 못해 비서진들이 대통령에게 모자를 드렸지만, 인사 말씀하려고 벗고, 얼굴이 잘 안 보인다고 벗고 해서 기껏 모자를 드린 게 소용이 없었습니다.
--- p.233, 김정현, 봉하찍사 이야기 중에서